< -- 16. 새로운 감염 -- > * 267화 *
바츠는 테라치가 아르크를 향해 걸어가는 모습을 전진기지 밖으로 나와서 끝까지 지켜보았다. 그가 왠지 쓸쓸하게 느껴졌다. 단단한 신체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두려움을 느끼게 만들 수 있는 그의 진짜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더불어 문득 떠오르는 아네트의 편지 내용은 그의 뒷모습을 더욱더 외롭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심심치 않게 불어오는 지상의 시린 바람이 오늘따라 유독 더 차가운 것 같았다. 함께 나와 있던 이롤로와 셀레나가 바로 옆에 서 있는데도 혼자 선 기분이 들었다.
아네트의 편지는 테라치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했었다.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그의 출생에 대한 비밀을 언급하면서 우려를 표현하고 있었고, 절절한 마음으로 그리움도 담겨져 있었다. 끝자락에는 그가 좋다는 수줍은 고백까지 있었다. 마치 벨리타가 보내오던 장문의 메시지들을 절로 떠올리게 만드는 애정이었다.
벨리타. 바츠는 곧 그녀를 만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살짝 마음이 설렜다. 그녀를 본 것이 언제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만큼 긴 시간이 흘러 있었다. 뚜렷하지는 않았지만 마지막을 섭섭함으로 이별했던 것 같았으나, 이미 그때의 감정은 전부다 잊은 지 오래였다. 오히려 그 사이 아무런 메시지도 보내오지 않은 사실에 서운함을 느꼈다. 물론 이 서운함도 다시 만나게 되면 비를 맞은 눈처럼 모두 사라지게 될 것이 틀림없었다. 벌써부터 그녀와의 재회가 기대됐다. 그런데 그때였다. 테라치가 떠나고 꽤 시간이 흐르고 난 뒤였다. 진원지를 알 수 없는 무겁고 꽉 막힌 듯한 굉음과 함께 지축이 흔들리는 것 같은 큰 충격파가 느껴졌다. 발밑의 땅이 흐느낀다고 생각될 만큼 거대한 진동이었다. 진원지 가까이 머물렀다면 제대로 서있지도 못했을 것만 같았다. 이롤로가 셀레나에게 건넨 한마디가 아니었더라면 놀라 마음을 진정시키기 어려웠다.
“지금이야.”
이롤로의 지시를 받은 셀레나가 허공 위로 왼쪽 팔을 힘차게 뻗어 올리며 저쪽 어딘가를 향해 신호를 주었다. 그러자 멀리 일리트시 근처에 있던 칼리에를 포함한 아이기스의 군대가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수가 대략 100여명에 가까웠다. 그들은 각자의 무기를 손에 들고는 아르크로 거침없이 전진했다. 기다리고 있던 정복에 두려움이나 긴장감보다는 강한 투지와 사명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바츠는 그들을 이롤로 그리고 셀레나와 함께 따로 뒤를 쫓았다. 땅을 흔들던 진동이 거의 사라졌을 쯤 아르크로 향하는 언덕을 볼 수 있었고, 그들이 언덕을 통해 땅 밑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적당히 떨어진 곳 서서 지켜보았다. 이롤로가 가까이 접근하지 말고 거리를 두고 기다리자는 제안을 해왔기 때문이었다. 바츠는 이유를 묻지 않고 순순히 따랐다. 따로 의문이 들지 않았다. 그저 아이기스의 군대가 완전히 안으로 사라진 모습을 보며 잘 마무리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더불어 스톡홀름 시티에서 기다리고 있을 아델리나를 생각하느라 바빴다. 벨리타를 그곳으로 데려갈 작정이었다. 그 다음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닥터나 마땅한 자격을 갖춘 그 누군가의 허락을 받고 스톡홀름 시티에 머물 것인지 아니면 자유 도시라고 불리는 그곳을 찾아가야 할지 무척 고민스러웠다. 어쩌면 완전히 다른 제3의 장소로 갈 수도 있었다. 생각만으로도 떨리고 불안했으며 속이 다 울렁거렸다. 끝이 없는 꿈속을 막연히 헤매는 것처럼 초조했다. 그리고 이 모든 감정의 원인이 이제 곧 얻게 될 자유라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자유. 상징적인 의미가 아니었다. 말 그대로 진짜 자유였다. 어딘가의 구성원으로서 무리나 단체에 의무적으로 희생이나 봉사를 할 필요가 없었다. 어떤 구속이나 제한 없이 온 세상을 누빌 수 있었다. 그곳이 끔찍한 악몽으로 가득한 곳이든, 믿기지 않을 만큼 풍요로운 곳이든 장소는 중요하지 않았다. 최소한의 양심과 정직만 있다면 행복과 만족을 무한히 느낄 수 있었다. 그럴 것 같았다.
바츠는 그 기대감에 한참동안 눈을 뜬 채 기분 좋은 꿈을 꾸었다. 이것이 바로 아이기스가 그토록 말하던 자유, 이롤로가 원하던 자유라는 생각에 너무나 기뻤다. 그 때문인지 세 사람은 꽤 긴 시간을 함께 자리에 머물면서도 단 한마디의 대화도 주고받지 않았다. 이롤로와 셀레나도 각자의 생각으로 정신이 없어보였다. 아이기스의 군대 일부에 의해서 아르크 주민들이 언덕을 올라올 때에야 비로소 서로의 얼굴을 찾아보며 시선을 교환했다. 아르크의 주민들이 아이기스 군인들의 감시 하에 줄을 맞춰 밖으로 빠져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 한 사람이 무리를 이탈해서 이쪽을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는데, 아르크 군인의 복장을 한 사내였다. 그가 다른 아르크 주민들이 아이기스의 군인들에 의해 인도되어 한쪽에 정렬하는 것과 다르게, 혼자 바츠와 일행에게로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는 근처에 서서는 관심어린 눈으로 바츠를 훑어보았는데, 방독면 렌즈로 빠져나오는 시선에 반가움이 묻어나고 있었다.
“네가 일리트시의 집사? 날 기억하지 못하는 모양이군.”
바츠는 그런 그를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가 혼자서 기분 나쁜 웃음소리를 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말했다.
“이거 서운한데? 네가 처음으로 아르크 밖으로 나와서 소독액에 정신을 차리지 못할 때 누가 등을 두드려 주었잖아. 그게 나라고. 기억 안 나?”
바츠는 그때를 전혀 기억하지 못했지만, 조롱 섞인 그의 목소리를 듣고 나자 왠지 생각이 날 것도 같았다. 조금 시간이 필요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기회를 가질 수는 없었다. 이롤로였다. 이롤로가 둘 사이로 끼어들며 말했다.
“생각보다 늦어지는 군.”
“아, 죄송합니다. 예상했던 보다 저항이 심해서 애를 먹고 있습니다.”
그가 이롤로의 말에 얼른 답했다.
“저항이라고? 레벨6이 봉쇄되지 않았나?”
“레벨6은 계획대로 제대로 봉쇄가 되었습니다. 폐기물 처리장도 완전히 작살났죠. 레벨6은 이제 완전히 고립된 상태입니다. 하지만 다른 층에도 은퇴한 헌터들이 남아있지 뭡니까. 미처 계산하지 못했던 부분입니다. 그 미사훈련소의 선생들 말입니다. 한 놈이 끝까지 저항하고 있어요. 놈이 애매한 장소에 자리를 잡아서 효율적으로 싸우고 있다고요. 벌써 칼리에가 넷이나 사망했고 군인들도 셋이나 죽었어요. 나머지 선생들은 다 처리했습니다. 그 중에 한 놈은 목을 매달아 자살했더군요. 늙은이었는데, 변태 같은 늙은이었죠. 그것 말고는 문제가 없어요. 아르크 군인들은 여기저기서 폭발이 일어나자 처음에는 당황하더니, 우리 군대를 보고는 완전히 포기해 버렸습니다. 저항한 녀석은 한 놈도 없었죠.”
“그래? 그 남은 선생이 누구지?”
이롤로가 묻자, 그가 자신의 한쪽 팔을 안쪽으로 잡아당겨 소매를 길게 늘어뜨리며 대답했다.
“있어요. 한쪽 팔이 없는 검둥이인데 아주 악질로 유명합니다.”
대답을 들은 이롤로가 바츠를 돌아보며 물었다.
“바츠, 누군지 알겠어? 난 알 것 같은데. 네가 한 번 가볼래?”
바츠는 이롤로의 갑작스런 제안에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어리둥절했다. 달려와서 소식을 전하는 그의 정체를 떠올려 보기 위해 노력하려던 찰나였기 때문에 미처 짐작해볼 겨를이 없었다. 하지만 곧바로 마음을 추스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별다른 의도가 있었던 대답은 아니었다. 그저 저도 모르게 얼떨결에 이뤄진 일이었다. 이롤로와 셀레나 그리고 그를 뒤로하고 홀로 아르크를 향해 천천히 움직였다. 이전에도 몇 번씩 다녀갔었지만, 묘한 기분이 들게 만드는 일이었다. 꼭 처음으로 방문하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언덕을 내려가기 전에 한쪽에 모여 있는 아르크 주민들을 살피는 것을 잊지는 않았다. 비록 지나치며 스쳐 본 것이었지만 벨리타를 찾아보기 위해 나름 애를 썼다. 단 번에 그녀를 발견할 수는 없었으나 기회는 충분하기 때문에 굳이 서두르지 않았다. 나중에 찾아봐도 늦지 않는 일이었다. 그때는 지훈을 비롯한 친구들도 여유를 가지고 찾아볼 수 있었다. 우선 지금은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먼저였다.
아르크는 활짝 열려 있었다. 빅애스는 허공에 매달려 있었고, 전에 보았던 방어시스템은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아이기스의 군인들과 칼리에 일부가 플랫폼 여기저기를 점령하고 있는 모습이 보일 뿐이었다. 정말 낯선 풍경이었다. 플랫폼에 헤러티커가 침입하는 상상은 해본 적이 있었어도, 이들이 이곳을 점령하고 있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샤워장을 통과해서 안으로 들어섰을 때에는 더욱더 새로운 느낌을 받아야 했다. 아르크의 복장을 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찾아볼 수 없었고, 아이기스의 군인과 칼리에만 눈에 띄었기 때문이었다. 그마저도 매우 드물었다. 아르크가 지금처럼 허전함을 느끼게 했던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였다. 다행이라면 아직 길을 잊고 있지는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입구에서부터 미사 훈련소로 향하는 길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조금도 헤매지 않고 바로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근처에서 칼리에의 도움을 받아, 마지막으로 저항을 하고 있는 미사 훈련소의 선생을 만나러 갔다. 훈련소 깊숙한 곳에 위치한 방이었다. 그 앞 복도에는 이미 쓰러진 아이기스 군인과 칼리에의 시신이 보였고, 20여명의 사람들이 우왕좌왕하며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그들의 손에 들린 각종 예기 류와 화기가 민망할 정도였다.
바츠는 그들을 가로질러 방으로 향했다. 사람들은 좌우로 나뉘어 길을 비켜주었고, 방안에는 남아있는 유일한 손에, 붉은색 카니지를 쥐고 있는 검은 얼굴의 사내가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떠올리지 못한 것이 의아할 만큼 너무나도 친숙한 모습의 사내였다. 검은 얼굴, 잘려나간 오른팔 그리고 험상궂은 얼굴까지 모든 것이 익숙했다. 바츠는 방독면을 벗으며 그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마티프...”
“오, 너로구나.”
마티프는 바츠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아주 오래전 잃어버린 한쪽 팔을 제외하고는 매우 건강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를 습격하기 위해 달려든 아이기스의 군인들과 칼리에가 조금의 생채기도 내지 못한 모양이었다. 한두 사람이 겨우 지날 수 있는 폭의 문을 이용해서 쉽게 여럿을 상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였다. 바닥에 복도에서 미처 끌어내진 못한 서너 명의 시신과 붉은 혈흔이 가득했다. 곳곳에 탄흔과 탄피들도 수십 개가 보였다. 하지만 그의 몸 다친 곳 하나도 없이 멀쩡했다. 기껏해야 여기저기 조금 잘려나간 옷자락이 전부였다.
“그만 포기하세요. 우리는 아르크를 해치려고 온 게 아니라고요. 모두가 행복한, 똑같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한 것이에요.”
바츠는 그런 그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가 비록 과거 자신에게 서운할 만큼 모질게 굴었었지만, 실제는 좋은 사람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도 그에게는 선생으로서의 충분한 자질이 있었다. 친구들과 함께 부사령관을 만나기 위해, 멋대로 돌아다녔을 때에만 떠올려 봐도 분명했다. 허가 없이 다른 레벨로의 이동은 큰 처벌을 받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군인들에게 체포되었을 때에는 그 가능성이 거의 확정적인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어쩌면 미사훈련소에 머무는 것을 박탈당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실제로 벌어지지 않았다. 모두 그의 덕분이었다. 그가 거칠고 사나운 행동과 말투였지만, 직접 바츠와 친구들을 찾아 다시 미사훈련소로 데리고 왔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그는 당시 바츠와 친구들에게 자신이 했던 충고를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까지 주었다. 별 것 아닌 것으로 허비된 시간일지도 모르지만, 바츠를 비롯해서 그때의 친구들에게 좋은 쪽으로 영향력을 미쳤을 것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바츠는 그런 그가 다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그는 생각이 조금 다른 듯 보였다. 검고 험악한 얼굴로 기분 좋게 웃더니, 따끔하게 혼을 내는 듯한 어조로 대꾸했다.
“행복한 삶? 어디로 가야만 그런 삶을 살 수 있느냐? 그런 곳을 직접 눈으로 본 적이 있었느냐?”
바츠는 그의 물음에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정말 그랬던 곳이 있었는가 하는 고민이 먼저였다. 그러자 그가 호쾌한 웃음소리와 함께 말을 이었다.
“집사가 되어서 몇 년을 지상에서 보내고도 아직까지도 이렇게 철이 없구나. 이 녀석아, 잘 듣거라. 사람은 말이다, 자신이 선 자리에서 해야 할 일과 할 수 있는 일을 하기 위해 노력할 때 비로소 행복한 것이란다. 행복이 대체 무어냐? 행복은 노력에 대한 합당한 보상. 그것을 얻을 수 있을 때가 바로 행복인 것이다. 나는 아르크의 선생이기 전에 아르크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있는 사람이다. 그건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지. 바보 같은 소리는 집어치우고, 넌 네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 하거라. 그 결과가 만족스럽다면 그게 바로 네게 행복일 것이다. 그럼 바로 그곳이 행복한 곳이다.”
바츠는 마티프의 호된 목소리를 듣고 나자, 그를 설득할 수 없음을 느꼈다. 오히려 냉정하게 행동하는 것이 그를 위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이 그에 대한 존경이었다. 스타드가 유언처럼 남긴 그 존경. 그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다. 어릴 때였다면 모르겠지만 지금은 전혀 아니었다. 그의 카니지는 붉은색이었고, 자신의 카니지는 그보다 훨씬 검은빛을 띄는 붉은색이었다. 그를 겁낼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그 자신감은 곧장 현실로 나타났다.
바츠는 마티프를 향해 있는 힘껏 검을 휘둘렀다. 익숙하지 않은 손으로 견뎌내는 그는 시종 방어적인 자세만 취하는데 급급했고, 계속해서 뒤로 밀려나는 것만 반복해야 했다. 싸움이 시작되기도 전부터 예견된 일이었다. 그나마 그가 좁은 방안을 최대한 활용하며 지능적인 움직임을 보이는 바람에 시간이 길어지고 있는 것뿐이었다. 그가 끊임없이 방안을 휘저으며 3회 이상의 합을 이어가지 않았다. 그 스스로도 현재 둘의 격차를 정확히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전세를 뒤집으려면 그의 오른손이 무사해야 하는 방법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의 오른손은 다시 자라날 수 없었고, 갑자기 스톡홀름의 닥터가 나타나 의체를 선물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결국 그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바츠의 칼날을 피해낼 수 없었다.
바츠의 카니지가 그의 카니지를 막아내고는, 빠르게 휘어들어가 그의 오른쪽 가슴을 찔렀다. 시간이 지나며 체력이 떨어진 그의 움직임이 둔해진 탓이었다. 미처 몸을 빼내지 못한 그가 칼날이 몸 안으로 파고들자, 굵은 신음소리를 내며 왼손에 쥐고 있던 카니지를 떨어뜨렸다. 얼굴은 밀려드는 고통으로 일그러지기보다는, 엄습해오는 통증으로 창백하게 굳어졌다. 하지만 곧장 쓰러지지는 않았다. 그의 체격은 아직까지도 더 싸울 수 있을 만큼 다부졌다. 이미 힘이 풀린 다리가 반쯤 굽어지고 있는데도 용케 버티고 섰다. 심지어 마지막 힘을 쥐어짜내, 바츠의 목덜미를 붙들기까지 했다.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대단한 악력이었다. 바츠는 목이 부러질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느껴야만 했다. 얼른 그의 손을 뿌리치고 다시 한 번 일격을 가해야 한다는 생각에 조급함이 밀려들었다. 하지만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조금 숨이 차기는 했지만, 이상하게도 몸이 따라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의 창백하게 굳어졌던 얼굴에 환한 미소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눈앞이 어질할 만큼 죄책감이 느껴져 차마 움직일 수 없었던 것이다. 그의 미소가 잠시만 기다리라고 대신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도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잘했다, 이 게으른 녀석아...”
마티프는 그 한마디를 끝으로 바닥을 향해 무너져 내렸다. 두 무릎이 먼저 땅에 닿았고, 허리가 구부러졌으며 고개가 꺾였다. 바츠는 그런 그의 모습을 검을 뽑아내지도 못한 채로 내려다보았다. 무슨 의미였을까? 무섭게 밀려드는 의문에 자리를 떠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의 대답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그의 숨은 이미 끊어졌다. 지금이라도 그가 몇 년 전 그때처럼 당당하고 강인한 모습으로 일어설 것 같았지만, 그런 일이 벌어질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아이기스의 군인들과 칼리에가 몇 차례나 부르며 끝났다고 알려오는 목소리에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만족감보다는 우울하고 찝찝한 기분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하지만 그 불편함을 오랫동안 생각해볼 겨를도 없었다. 그보다도 훨씬 불편한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가까스로 몸을 돌려 복도로 나왔을 때였다.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 이외에, 뒤늦게 때마침 합류하는 다른 한 사람 때문이었다. 그는 복장과 무장으로 보았을 때 칼리에였는데, 이곳에 있던 사람들 중 사이가 가까워 보이는 한 사람과 가볍게 대화를 주고받았다. 문제는 바로 그 대화 내용이었다.
“레벨4도 다 정리했어. 이제 블러드 케찰에게 보고하자고.”
바츠는 그 대화를 쉽게 넘길 수가 없었다. 그를 불러 세워 물었다.
“무슨 소리지? 레벨4를 정리했다니? 아르크 주민들은 이미 모두 밖으로 내보내진 것 아니었어?”
“네? 아, 블러드 케찰이 연구원들은 모두 살해하라고...”
바츠의 물음에 대답하던 그는 끝까지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무섭게 노려보는 바츠의 두 눈에 겁을 집어 먹은 탓에 입술이 마비되었기 때문이었다. 바츠는 급격히 차오르기 시작하는 호흡을 다잡는 동안 그를 노려보았고, 심장이 터질 듯이 뛰기 시작할 쯤에는 달리기 시작했다. 목적지는 레벨4였다. 연구실들이 있는 층이었다. 그리고 그곳에 도착했을 때에는 믿을 수 없는 현실을 직면해야 했다. 누군가가 악몽을 현실로 그려냈기 때문이었다. 레벨4가 온통 빨간 피로 흥건했다. 복도는 물론이고 연구실 곳곳에 수십 여구의 시체가 너부러져 있었고, 그들이 흘린 피가 레벨4 전체를 수놓고 있었다.
바츠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믿고 싶지 않았다. 반쯤 넋이 나간 채로, 쓰러진 시체들을 하나하나 살폈다. 그리고 절반쯤 되는 시체를 확인했을 무렵 그토록 찾아 헤매던 그녀를 만날 수 있었다. 벨리타. 그녀가 작은 연구실 한 구석에서, 같은 연구실의 동료들로 보이는 대여섯 명의 사람들과 함께 버려져 있었다. 너무도 충격적이어서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대체 뭐가 잘못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건 원하던 결과가 아니었다. 그녀는 지금쯤 다른 사람들과 함께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어야 했다. 그리고 각자가 원하는 방향으로 처분을 선택받아야만 했다.
바츠는 그녀의 시신을 살피기도 전에 밖을 항해 달렸다. 블러드 케찰! 분명 그의 지시라고 했다. 그는 이롤로의 지시라고 말하고 있었다. 이롤로에게 물어야만 했다. 뭔가 잘못되었다고 알려야만 했다. 하지만 입구를 얼마 남겨두지 않았을 때, 달리던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정면을 향한 시선에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는데, 단 한 사람 그의 얼굴만큼은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바츠는 그의 이름도 똑똑히 기억했다.
“빌리언.”
장로 로리나의 사위, 로리나의 남편, 애니의 아버지 그리고 케일리를 살해한 범인! 바츠는 자신의 카니지를 뽑아들고 그에게로 다가갔다. 살해당해야 할 사람은 벨리타가 아니라 바로 그였다. 빌리언 바로 그와 같은 사람들이 죽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는 너무나도 건강하게 살아 있었다. 근처를 칼리에는 물론이고 아이기스의 군인들이 숱하게 종종 지나치고 있었지만 관심을 갖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의 손에 둘린 두 개의 머리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는 양손에 두 사람의 머리를 들고 있었다. 한 손에는 그의 부인인 로리나였고, 다른 한 손에는 아직 어린 사내아이의 머리였다. 그는 그 두 사람의 머리를 자랑스럽게 들고 있었다. 그가 자신을 발견하고 다가오는 바츠를 뒤늦게 알아보고는 황급히 외쳤다.
“잠시만! 잠시만 기다리라고! 난 그저! 난 그저 시키는 대로 했던 것뿐이야! 네 누이를 살해하는 건 내 생각이 아니었다고! 모두 시켜서 그런 거야!”
“대체 당신 뭐야?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 거냐고! 케일리를 살해한 것으로도 모자라 어떻게! 어떻게 당신의 가족들까지 그렇게! 당신은 정말 용서 받을 수 없을 거야! 결코 편안한 죽음을 선사하지 않겠어!”
“아니야! 아니라고! 내 말을 들어봐! 정말 내가 한 게 아니라고! 아니야!”
그가 손에 들고 있던 머리를 거의 놓치듯 바닥에 흘리고는, 자신의 양손을 쫙 펴서 바츠를 향해 마구 흔들었다. 바츠가 한 걸음 다가오는 동안 최소 열 번씩은 흔드는 것 같았다. 그는 그만큼 당황했고, 다급해 하고 있었다.
“말해! 어떻게 된 일인지 전부다 말하라고!”
바츠는 칼날을 그의 목에 바짝 가져다대며 소리쳤다. 그러자 그가 몇 번이나 더듬으며 말했다.
“좋아, 대신 먼저 약속해. 날 살려주겠다는 약속을 하라고. 집사로서 맹세해!”
바츠는 짧게 생각한 뒤 대답했다. 이미 벨리타로 인해서 이성을 잃은 바츠로서는 크게 인내심을 발휘하기 어려웠다. 마지막 이성을 정말 어렵게 붙들어야만 했다.
“...좋아. 맹세하지. 그러니 사실대로 전부 털어놔. 그렇지 않으면 그 약속은 전부 무효가 될 테니까 말이야. 손가락부터 눈과 귀, 코까지 하나씩 자르며 당신이 죽어가는 걸 지켜보고 말 거야.”
“블러드 케찰이야! 그가 시켰어. 난 그냥 그의 지시를 따랐을 뿐이라고.”
그는 바츠의 으름장에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비록 성급해보이기까지 한 가벼운 목소리였지만, 겁에 질린 눈과 더불어 그 안에는 진심이 담겨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난 그저 칼리에가 되고 싶었던 것뿐이야! 난 남들에게 전혀 뒤지지 않는데, 떠돌이 출신이라는 사실만으로 칼리에 자격이 매번 고사되고는 했어! 난 그저 인정받고 싶었던 것뿐이라고! 이 여자와 결혼을 한 이유도 그것 때문이야! 난 그냥, 난 그냥 다른 사람들과 똑같다는 것을 인정받고 싶었다고! 그래서 그런 거야! 그래서 그랬던 거라고!”
“무슨 멍청한 소리야! 고작 그런 이유로 이런 짓을 벌였다고? 그게 당신 가족을 살해할 만큼 중요한 문제야?”
바츠는 너무도 터무니없는 소리에 조금도 납득할 수 없었다. 그가 거짓을 말하고 있다고 느꼈다. 그래서 그의 목에 댄 카니지를 더욱더 바짝 들이댔다. 그가 살며시 베이는 상처에 앓는 소리로 비명을 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바츠는 더욱더 손목에 힘을 줄 수가 없었다. 이미 그가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직 그에게 더 들어야 할 것들이 남아있었다. 그러자 그가 용케 눈치를 채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한결 차분해진 목소리였다.
“가족? 그딴 게 뭔데? 그딴 건 이 세상에 없어. 너도 세상을 돌아다녀보았을 것 아니야. 세상에 뭐가 있지? 세상은 온통 서로를 범하고 차지하려는 탐욕으로만 가득하다고. 힘이 있는 자가 가지고, 힘이 없는 자는 죽는 것뿐이야. 내 아버지는 그렇게 가족들을 차지했지. 그리고 난 똑같이 가족들을 차지했고 말이야. 그러고 나면 남는 게 뭔지 알아? 아무것도 없어. 세상이 지금처럼 황량한 건 틀림없이 그 때문일 거야. 하지만 아이기스의 서울은 다르다고 하더군. 서로를 존중하고 서로를 지켜주는 사람들이 있다고 했지. 가족이라는 건 그런 거잖아? 서로를 감싸 안는 그런 거 말이야. 하지만 그런 개 같은 소리는 집어치우라고 해. 가족? 서울도 똑같아. 전부다 똑같은 새끼들만 가득하지. 그저 방식이 다른 것뿐이야. 난 그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이렇게 하고 있는 거라고. 블러드 케찰이 약속했어. 그 늙은 여자를 배신하고 뜻에 따라준다면 자신의 일원으로 받아주겠다고 했지. 난 그 말을 믿었을 뿐이야. 그 늙은 년은 나를 더러운 쓰레기를 쳐다보는 듯 했으니까 말이야. 내가 이 개 같은 짓거리를 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지. 그 늙은 년이 나를 존중해주길 바랐던 거라고. 하지만 어느 순간 절대 그런 날은 오지 않을 것 같다는 걸 느꼈지. 맞아, 그때였을 거야. 나도 이곳에 들어와서 일을 돕겠다고 했던 그때 말이야. 난 그러면 조금은 다르게 봐줄 줄 알았어. 최소한 존중해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하지만 그 늙은 년은 아니었지. 날 끝까지 혐오스럽게 쳐다봤어. 이건 전부 그년 탓이라고. 그년이 제정신으로 보여? 자신의 손녀딸에게 크루엘라를 퍼뜨리고 자살하라고 말하는 게 제정신으로 보이냐고! 그 말에 공감하고 따르는 이 미친 년놈들도 마찬가지고! 이 병신 같은 생각에 공감을 할 수 있다는 게 믿어지느냐 말이야!”
바츠는 천천히 카니지를 거뒀다. 급격치 치솟았던 흥분이 어느 새인가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만큼 전부다 사라져 있었다. 너무도 침착하다 못해 무기력하게 느껴질 만큼 가슴이 진정되었다. 덩달아 고개와 시선도 바닥으로 추락했다. 그러자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너도 알고 있을 것 아니야. 이 새끼들은 전부다 제정신이 아니라고. 모두가 미쳤다고. 어차피 네 가족들도 똑같았을 거 아니야. 너도 네 누이를 범하고 네 아버지도 네 누이를 범했을 거라고. 그게 좋아? 그딴 건 이런 쓰레기들에게나 하라고 하자고. 난 싫으니까 말이야. 어차피 죽어 마땅한 것들이라고.”
바츠는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전에는 자신보다 훨씬 키도 크고 덩치도 있었던 것 같았는데, 지금은 그 차이가 거의 없었다. 고작해야 전체적인 몸집에서 조금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그가 그런 바츠의 한쪽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나랑 가자. 나랑 같이 제대로 된 도시를 찾자. 분명 미친놈들이 없는 세상이 있을 거야. 우리 같이 그곳으로 가자.”
“그래, 당신 먼저 가서 기다려.”
바츠는 짧게 대답했다. 그리고는 자신의 카니지를 있는 힘껏 위에서 아래로 휘둘렀다. 검붉은 카니지가 그의 머리통을 반으로 쪼개는 것을 시작으로 복부까지 정확하게 일직선으로 내리꽂혔고, 바츠는 단칼에 사망한 그의 몸통을 발로 걷어차는 것으로 검을 빼냈다. 그의 시신은 그가 들고 있던 두 사람의 머리 옆으로 쓰러졌고, 바츠는 그 모습을 눈으로 확인하지 않고 바로 몸을 돌려 세웠다. 한시라도 빨리 이롤로를 만나야만 했다. 분명 좋지 않은 문제가 일어나고 있었다. 이롤로는 처음 그 자리 그대로 서 있었다. 곁에는 셀레나만 남아 있었다.
“이롤로, 어떻게 된 거야? 우리가 원했던 것과 조금 다른 것 같은데?”
바츠는 최대한 침착하게 물었다. 괜히 분위기를 긴장시켜 어려움을 겪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롤로는 조금 조롱하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턱을 한차례 까딱여 반대편 저쪽을 가리키는 모습이 매우 불량했다.
“그래?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처음부터 계획은 이랬어. 계획은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다고.”
바츠는 이롤로가 가리킨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아르크의 주민들이 아이기스 군대의 감시 하에 어디론 가 이동하고 있었다. 그 목적지가 어디인지는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바츠는 이롤로를 차가운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심한 배신감과 충격을 도저히 감추기 어려웠다. 하지만 이롤로는 여전히 태평스러웠다.
“바츠, 지금 내게 왜 연구원들을 살해했느냐고 묻고 싶은 거지? 그리고 아르크 주민들을 왜 서울로 데려가느냐고 묻고 싶은 거고, 그렇지? 잘 들어. 처음부터 나의 계획은 아르크를 점령하고 아르크에 있는 과거의 유산들을 가져가는 것이었어. 서울에 그 오래전 과거의 문명을 다시 피우려면 반드시 필요한 것들이지. 이건 인류를 위한 대단한 계획이라고. 생각해 봐. 세상이 다시 그때로 돌아가는 거야. 모든 것이 풍요롭던 그때! 너무도 풍요로워서 낭비가 허용되던 그때 말이야. 아르크의 주민들은 당연히 그 위대한 계획을 위해 봉사를 해야 하지. 그들은 충분한 사치를 누렸어. 이제는 그 대가를 치를 차례야.”
“그게 네 생각이야? 정말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정말 그래서 이러는 거야?”
“바츠, 네가 눈이 있으면 직접 보라고. 설마 정말로 다들 웃으며 행복한 결말이 올 거라고 생각했어? 정말 그걸 믿은 거야? 혹시 너 바보야? 아르크가 오늘 우리들 손에 의해서 또 개방되었어. 그들이 가만히 있을 것 같아? 그들은 이제 우리를 제거하기 위해서 대대적인 군대를 운영하게 될 거라고. 무슨 말인지 알아들어? 이제 이런 얄팍한 술수는 통하지 않을뿐더러, 우리는 전쟁을 대비해야 한다는 거야. 전쟁이 뭔지나 알아? 수백, 수천 명이 처참하게 죽어가는 허락된 살인이라고! 그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우리도 강한 힘이 필요해. 그 강한 힘은 사람에게서 나오고, 사람을 모으려면 거대한 도시가 있어야만 하지. 고작 이곳에 있는 아르크를 점령하고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면 모든 것이 끝날 거라고 생각했어? 천만해! 아르크가 전부 불타 없어지거나, 나와 아이기스가 전부 살해되지 않는 이상, 이 반목의 끝은 절대 없어! 우리가 풀어준 사람들은 또 다시 어딘가에 있는 아르크로 가게 되겠지! 연구원들의 존재도 그래! 그들은 이 반목의 끔찍함을 극대화 시키는 자들이야! 아르크에서 배운 역사를 기억해 보라고! 이런 연구원들이 만들어낸 수많은 발명들은 모조리 사람을 얼마나 더 효과적으로 죽이는 데에 사용되었다고! 그들은 차라리 없어지는 게 나아!”
“이롤로!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우린 처음 계획했던 대로 해야만 해! 우리가 나눴던 대화들 말이야!”
바츠는 답답한 마음에 결국 목소리를 높일 수밖에 없었다. 끓어오르는 감정을 도무지 주체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건 이롤로도 마찬가지였다. 이롤로는 바츠가 크게 반발하자, 덩달아 흥분하며 소리쳤다. 바츠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꼭 변했다고 생각하는 듯 했다.
“우리가 나눴던 대화가 뭔데? 우린 복수에 대한 이야기를 했어!”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었지! 분명 우리는 사람들에게 기회를 제공하기로 했어!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기회 말이야! 너는 물론이고 우리는 아르크의 주민들에게 똑같은 권리를 누릴 수 있는 기회를 줘야 해! 우리가 처음 생각했던 대로 말이야!”
이롤로가 순간적으로 입을 닫으며 분위기를 어색하게 바꾸더니,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우리? 왜 자꾸 우리라는 말을 쓰는 거지? 너 혼자 생각했던 것은 아니고? 저들에게 우리와 동등한 자격을 주면 모두가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정말 그런 거야? 내가 장담하는데, 절대 그럴 리 없을 걸? 저들은 기뻐할지 몰라도 우리들 사이에는 반드시 불만이 터져 나오고 말거야. 너라면 받아드릴 수 있겠어? 케일리가 만약 살아있고 아르크도 무사하다면, 케일리는 분명 네 덕택에 언젠가는 레벨2나 레벨4로 가게 되었을 거야. 그런데 케일리의 남편이 케일리와 똑같은 자격을 갖게 된다면 받아드릴 수 있느냐고 묻는 거라고. 케일리를 학대하던 그 미치광이 녀석 말이야.”
바츠는 대답하지 못했다. 대답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연이은 충격에 너무도 정신이 없어서 말문이 쉽게 열리지 않았다. 고작해야 억지를 부리듯 애원하는 것이 전부였다.
“이롤로, 이건 틀려. 우린 우리가 처음 생각했던, 장로 로리나가 생각했던 그대로 실현해야 한다고. 저들은 우리의 골칫거리가 아니야. 저들은 우리와...!”
바츠는 말을 하던 중 갑자기 바닥이 밑으로 쑥 꺼지는 기분을 느끼는 바람에, 말을 끝까지 할 수가 없었다. 뭔가가 밑으로 거세게 잡아끄는 기분이 온몸을 휘감았다. 이롤로가 그런 바츠에게 냉정하게 느껴질 만큼 매우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존재 하지 않는 걸 두려워 할 필요는 없어. 하지만 그것이 존재하는 데도 부정하는 것이라면 그것만큼 위험한 것도 없지. 사람은 쉽게 감염되고, 쉽게 병드니까 말이야.”
바츠는 이롤로의 말을 듣고 나서 고개를 밑으로 숙였다. 그러자 붉은색 칼날 하나가 자신의 복부를 관통한 것을 볼 수 있었다. 이롤로의 손에서부터 뻗어 나온 붉은 검이었다. 그 검을 타고 선홍빛 혈흔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바츠는 자꾸만 앞으로 구부러지려는 몸의 충동을 이겨내며, 가까스로 고개를 들었다.
“이롤로?”
이롤로는 바츠의 부름에 자신의 카니지를 빠르게 뽑아내는 것으로 답했고, 바츠는 그대로 선혈을 쏟아내며 무릎으로 주저앉아야만 했다. 이롤로가 그런 바츠를 내려다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바츠, 너도 감염되었다.”
바츠는 그렇게 마지막 한마디를 건네며 스쳐지나가는 이롤로의 모습을 흔들리는 눈동자로 지켜보았다. 그의 거리낌 없이 당당한 발걸음이, 이제는 주민이 한 명도 남아있지 않은 아르크를 향해 옮겨지고 있었다. 힘을 잃고 바닥으로 쓰러지는 바츠와는 정반대의 모습이었다. 그는 마치 홀로 남겨진 바츠를 벌써 잊은 것만 같았다. 아무런 미련도 남기지 않고 앞만 보고 걸었다. 바로 뒤를 쫓는 셀레나만 바츠의 초라한 모습을 한 차례 돌아보았을 뿐이었다.
바츠는 외롭게 눈을 감아야만 했다. 밀려드는 무기력함을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곁에 남은 것은 휘몰아치는 지상의 찬바람이 전부였다. 머리칼을 훔치고 옷깃을 흔들며 저항하지 못하는 바츠를 자꾸만 성가시게 괴롭혔다. 그 서러움에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그러자 하늘에서는 비가 내렸다. 회색빛 하늘에서 내리는 투명한 비였다. 그 비가 드문드문 한 방울씩 떨어지며, 메마르고 거친 흙만 남은 땅을 얼룩덜룩하게 서서히 적셨다. 스치는 바람이 못 다한 위로를 대신 전해주려는 검은 비. 그 비가 세상을 검게 물들이며 스산하게 내려앉았다.
============================ 작품 후기 ============================
여기까지가 이야기의 끝입니다. 후기를 바로 준비하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양이 많아서 다음 편에 따로 준비했습니다. 연재를 처음 시작할 때 작성된 후기를 수정 첨가한 글이라서 조금 어색한 부분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충분히 고려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결말이 마음에 들지 않으신 분들이나 그간의 이야기를 듣고 싶으신 분들이라면 후기를 통해서 약간은 보상받으실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큰 기대는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네요. 그리고 진짜 후기에 앞서서 짧은 글 하나 남기고 싶습니다. 연재를 하는 동안 코멘트에 대한 제 반응에 대한 것입니다.
그동안 제가 코멘트에 아무런 반응이 없었죠? 대부분 공지 식의 일방적인 통보만 제가 페이지 후기에 남겼었는데요, 그 점 사과드리겠습니다. 소중한 관심에 무감각했던 것은 절대 아닙니다. 코멘트가 남겨질 때마다 제가 혼자서 얼마나 환호성을 질렀는지 모르실 겁니다. 지적이든 반박이든 그 어떤 코멘트든 말이죠. 이 자리를 빌러 감사하다는 말 전하고 싶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건 의도적인 제 선택이었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정확히는 이해해주셨으면 합니다. 순전히 작품을 위한 선택이었기 때문입니다. 전 저보다 작품 자체가 더 주목받길 원하거든요. 입맛에 맞지 않는 작품이라도 연재라는 특성상 작가들의 커뮤니케이션으로 독자들이 이끌어 지기도 한다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제 작품이 아니라 저와 주고받는 멘트가 좋아서 제 작품을 따라온다면, 제게는 그보다 더 큰 좌절은 없을 겁니다. 그 순간 전 실패했다는 상실감을 느끼고 말 겁니다. 게다가 작품의 묵직한 분위기도 한몫 했습니다. 제가 본래는 말이 많은 편인데, 저로 인해서 작품의 분위기가 저해될 까 우려되어서 더욱 조심하게 되었습니다. 부디 이해를 해주셨으면 좋겠네요. 어쨌든! 본 후기는 다음 편 통째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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