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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 한 바구니, 고양이 두 스푼-2화 (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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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기 전에는 부모님끼리 친구였다.

같은 해에 태어난 두 사람은 기억도 안 나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였고,

같이 목욕을 하고, 같은 학교에 가는 것이 당연하게 되어버렸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였던 비가 자신의 곁에 있는 것이 너무 당연해서

언젠가는 비의 곁에 특별한 남자가 생길 거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었다.

여자이면서도 호탕한 성격에 잘 웃고,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이 강한 비가 너무 좋아서

다른 여자 따위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사실 멍한 성격이 아니면서도 멍한 척을 했던 것은

아주 오래 전 언젠가 비가 했던 말 때문이었다.

"너네 아빠는 멍한 게 너무 멋있어. 너네 아빠 같은 사람이랑 결혼하고 싶다."

아버지가 어릴 적에 어머니와 사랑을 할 적, 무슨무슨 일이 있었다고 했던가?

차가운 성격이었던 아버지는 어머니와 사랑을 하는 과정에서

큰 사건이 있었고, 그것 때문에 완전히 멍해졌다고 했다.

뭘 생각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멍한 아버지를 멋있다고 하는 비 때문에

자신도 멍해지기로 했다.

그래서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고 멍하게 살다보니,

그게 버릇이 되어버려서 어느샌가 정말 멍하게 되어버렸다.

하지만 비는 이제 다른 남자를 보고 있었다.

그 눈빛이 비에게서 나오는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애틋하고

애정이 흘러 넘쳐서, 우준은 질투를 하래야 할 수도 없었다.

사실 비가 누군가를 저토록 사랑하는 모습이 보기 좋기도 했다.

'여행이나 갈까?'

그래도 오랫동안 키워온 사랑이 고백도 못해보고 끝나버린다는 것은

생각보다 더 쓰라리고, 더 괴로운 기분이라서

멍한 표정을 유지할 수 없었다.

어디로든 도망치고 싶은데, 마땅히 도망칠 곳도 없었다.

우준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은 다른 곳이 아닌 바로 이곳이었다.

하지만 역시 도망치고 싶다고 진지하게 생각하며 잠시 산책을 할 때,

인적이 드문 골목에서 그것을 발견했다.

이렇다할 생각도 하지 않고 멍하니 걷고 있는데, 뭔가가 발에 채였다.

살짝 인상을 찌푸리고 살펴보니 구릿빛의 반짝이는 펜던트가 떨어져 있었다.

손바닥 반정도 되는 크기의 펜던트는 어느 시대의 것인지 알 수 없는,

기묘하고도 화려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고,

조각된 부분이 검게 부식된 것으로 보아 오래 전의 물건인 듯 했다.

평소 같으면 신경 안 쓰고 그냥 지나갈 텐데,

그 펜던트는 사람을 끄는 묘한 힘이 있어서

정신을 차리고 보니 펜던트가 손에 잡혀 있었다.

꽤 묵직한 것이 구리는 아닌 것 같아서 옷에 슥슥 문질러보니 밝은 금빛이 새어나왔다.

"비싼 것 같네."

우준은 중얼거리며 잠시 펜던트를 응시했다.

펜던트 중앙에 있는 작은 물결 무늬가 소용돌이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아니, 이건 착각이 아니야."

우준이 퍼뜩 정신을 차리며 펜던트에서 눈을 뗐다.

앞뒤로 펜던트의 모양을 살펴보았지만 특별한 장치는 없는 것 같았다.

옆부분에 작은 고리가 있어서 살짝 눌렀더니, 탁-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반으로 갈라졌다.

열어보니 한 쪽 면에는 맑고 깨끗해 보이는 거울이 있었고,

다른 한 쪽에는 사진을 끼워둘 만한 공간이 있었다.

"가지고 가서 비 사진이나 끼워놓을까?"

생각하며 문득 거울을 봤는데, 이게 어쩐 일인지 거울에 아무 것도 비치지 않았다.

분명 깨끗하고 맑은 거울인데 아무 것도 비치지 않았다.

아니, 아무 것도 비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거울이 당연히 비추고 있어야 할

우준 자신의 모습과 뒷배경들이 비치지 않고 있었다.

거울에 담겨져 있는 곳은 만들어지다가 만 듯한 어느 폐건물.

철근이 비쭉비쭉 나와있는 건물은 공포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으스스함을 보이고 있었다.

"뭐야… 영화 같은 건가?"

우준은 펜던트를 귓가에 가져가서 흔들어 보았지만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상했다.

"정말 이상하다."

우준은 잠시 미간을 좁혔다가 펜던트를 처음과 같은 모양으로 되돌려 놓았고,

허리를 굽혀 원래 있던 자리에 펜던트를 내려놓았다.

"난 이상한 거랑 엮이는 건 질색이라서 말이야. 바이바이."

웅얼거리듯이 말한 우준은 천천히 골목길을 빠져나와 큰길에 접어들었고,

사람들 틈에 섞여서 잠시 돌아다니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책상 위에서 다시 한 번 그 펜던트와 조우하게 되었다.

"어차피 전학해도 달라질 건 없는데…"

커다란 학교 안으로 들어가기 전, 채민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둥글고 큰 눈과 동글동글하게 생긴 코, 우유 같이 뽀얀 피부와 발그레한 볼 덕분에

귀염성 있는 외모를 가진 채민은 누구에게나 좋은 첫인상을 주었다.

전학을 간 첫 날은 여자건, 남자건 할 것 없이 채민에게 모여들어 따뜻한 환대를 해주었다.

늘 그렇듯, 어디서 전학을 왔는지, 어디로 이사를 왔는지, 전 학교에서 성적은 어땠는지,

남자친구가 있는지, 좋아하는 게 뭔지에 대해서 한참 물어보고,

핸드폰 번호를 저장시키는 둥 시끌벅적하게 하루가 지난다.

전학생이라는 존재에 대한 신선함 때문에 채민의 주위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불행 따위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하지만 하루가 지나고, 또 하루가 지나면 다들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다.

처음에는 다들 이렇게 말한다.

"요새 들어서 유독 우리 반 창문이 자주 깨지는 것 같지 않아?"

그렇게 며칠이 지나면 말이 바뀐다.

"채민이가 전학 온 후로 우리 반, 뭔가 이상하지 않니?"

첫 날, 채민에게 호기심을 가지고 다가왔던 학생들은 채 한 달이 지나기도 전에

채민을 멀리하게 되고, 두려운 눈으로 채민을 쳐다보게 된다.

좋은 감정을 가지고 다가왔던 사람들이 두려움을 느끼며 피하는 모습을 보는 건,

아무리 자주 겪는 일이어도 익숙해지질 않는다.

"이대로 도망쳐 버릴까?"

중얼거리며 안으로 걸음을 옮기던 채민은 뒤에서 뛰어오던 누군가와 살짝 부딪혔다.

단지 채민의 팔꿈치와 그의 손등이 부딪히는 정도로 살짝 스쳤을 뿐인데,

무척 강한 충격이 팔꿈치로부터 전해졌다.

이건, 부딪혀서 오는 통증과는 조금 다른 통증이다.

뭐랄까.

'강한 전기가 통한 듯한 느낌…'

이라고 생각하며 돌아본 채민의 눈에 보이는 인물은 눈꼬리가 치켜 올라간,

사나워 보이는 눈매를 가진 노란 머리의 남학생이었다.

"아, 미안."

서둘러서 달려오다가 미처 채민을 피하지 못하고 부딪힌 강전이 한 손을 들어보이며 씩 웃었다.

사나워 보이는 첫인상과는 다르게 웃는 모습은 꽤나 싱그럽다.

"지각이걸랑. 너도 얼른 들어가 봐야 하는 거 아니냐?"

목소리는 약간 날이 선 듯 칼칼하지만 듣기에 나쁘지는 않다.

"아, 난… 전학생이라서…"

"헤… 그래? 교무실 어디인 줄 알아? 데려다 줄까?"

강전의 친절에 채민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내 옆에 있으면 너도 위험할 거야.'

서글픈 미소였기 때문에 강전은 당황해서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어? 왜 그래? 난 널 어떻게 해보려는 생각 없어. 내가 뭐 기분 나쁜 말이라도 했어?"

"아니야, 그런 거. 나 교무실 어디인 줄 알아. 그럼 들어가 볼게."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고 천천히 안으로 걸음을 옮기는 채민의 모습을

강전은 넋을 잃고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이미 수업이 시작한 학교의 황량한 모래밭 한가운데를 천천히 걸어가는 채민의 모습은

깊은 바다 위에 놓인 손바닥만한 조각배 위에 몸을 의지하고 있는 사람처럼 위태로워서

숨을 멈추고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아무 것도 없는 편평한 운동장에서 뭐에 걸렸는지 모르겠지만 앞으로 콰당 넘어지는 채민의 모습에

강전은 인상을 찌푸리며 생각했다.

'정말 덜 떨어진 애네.'

분명 잠이 들 때만 해도 혼자였다.

그리고 분명 지금 이 상태는 꿈이라던가, 현실 같은 꿈이라던가 하는 게 아닌,

진짜 현실이다.

잠이 들어있지 않은 것이 확실하다.

우준은 침대에 바로 누운 채로 자기의 발치를 응시했다.

뭘까?

대체 침대 구석에 알몸으로 앉아 있는 저 은발의 소녀는 누구인 걸까?

어디로 어떻게 들어온 걸까?

창문으로 들어오는 달빛에 그녀의 흰 몸이 매끄럽게 빛났다.

마치 보석이라도 뿌린 듯이 빛을 발하는 그녀의 아름다운 육체는

발끝까지 내려올 만큼 길 것이 분명한 은빛 머리카락으로 살짝 가려져 있었다.

물결치듯 내려온 은빛 머리카락 사이로 살며시 보이는 봉긋한 가슴이나

잘록한 허리, 미끈한 다리는 그녀가 아직은 소녀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우준은 잠깐 미간을 좁혔다.

'에이, 모르겠다. 다시 자자.'

고민한다고 답이 나올 것 같지도 않아서 옆으로 돌아누우려고 하는데,

소녀의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우준…"

소녀의 목소리는 청량하고 아름다운 것이 별빛의 노랫소리 마냥 고왔지만,

우준에게는 또 다른 고민이 생겼다.

'쟤가 내 이름을 어떻게 아는 거지?'

우준은 돌아누우려던 것을 관두고 몸을 일으켰다.

푹신한 침대라서 그런 건지, 아니면 저 알몸 소녀의 몸이 무게가 안 나가서 그런 건지,

우준이 움직이는데도 소녀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누구냐, 넌?"

막 잠에서 깬 터라 목소리가 심하게 갈라졌다.

다른 친구들이 들었더라면

"강우준도 목소리가 갈라질 때가 다 있네."

라며 깔깔 웃었을 테지만, 소녀는 물끄러미 우준을 응시할 뿐이었다.

소녀의 눈동자는 옅은 하늘빛.

분명 인간의 것과 같은 크기의 눈동자인데, 마치 진짜 하늘을 담고 있는 듯 크게 넓게 느껴졌다.

계속 들여다봤다가는 헤어 나오지 못할 정도로 빠져버릴 것 같았는데,

우준은 분명 어디선가 받아본 느낌이라고 생각했다.

'언제였더라?'

잠깐 고개를 돌린 우준의 눈에, 책상 위에 놓인 펜던트가 들어왔고

우준은 쉽게 답을 찾을 수 있었다.

'맞아. 펜던트의 문양을 볼 때도 지금과 같은 기분이었어.'

소녀는 우준의 눈동자가 펜던트로 향해 있는 것을 알아챘는지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나 책상에 놓인 펜던트를 집어 들었다.

소녀의 손 위에 놓인 펜던트는 오래 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화사한 금빛을 자랑하며 반짝였는데,

그것은 마치 진짜 달빛을 보는 듯 밝았다.

"전… 이 펜던트의 주인입니다."

"아아."

우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주인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 가지고 가."

우준의 대답에 소녀는 예의 그 하늘을 닮은 눈동자로 물끄러미 우준을 응시했다.

우준도 질 수 없다고 생각하고 특유의 멍한 눈빛으로 소녀의 눈빛을 받아냈다.

한동안 우준을 응시하던 소녀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당신은… 조금 이상한 분이시군요."

"아, 옷이 필요한가?"

"네?"

"벗고 있는데 그냥 가라고 해서 그러는 거라면… 옷 정도는 하나 줄 수 있어."

"아, 아니요. 그게 아니라…"

인형 같이 표정이 없던 소녀의 얼굴에 당황스러운 빛이 가득 떠올랐다.

황금 비율을 적용시켜 만들어놓은 듯 아름답고 고운 몸은

남자들 뿐 아니라 여자들의 시선까지도 붙잡을 수 있을 정도였지만,

우준은 소녀의 몸에 눈길조차 주지 않고 있었다.

멍한 눈으로 창 밖을 보는 우준의 눈에 늦은 시간까지 떠있는 달이 담겼다.

달빛이 손에 잡힐 듯 흘러나오고 있었다.

"우준님."

우준이 다른 곳을 보고 있자, 소녀는 조심스럽게 우준의 주의를 끌었다.

"응, 듣고 있어. 얘기해."

우준은 눈동자 가득 달빛을 담은 채로 대답했다.

관심이 없는 우준의 태도에 당황하던 소녀는 우준에게로 한 걸음 다가오며

단조로운, 그러나 어딘가 다급함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우준님께…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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