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채민은 자기의 앞에 서 있는, 자기와 똑같이 생긴 소녀를 노려봤다.
저번에 길에서 본 적이 있는 그 소녀였다.
소녀는 그 때와 마찬가지로 살기를 띤 미소를 입가에 묻힌 채,
채민의 맞은편에 서서 채민을 응시하고 있었다.
거울을 보고 있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그녀는 채민과 똑같았다.
언젠가 아버지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자세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아버지의 집안에서 태어난 여자들은
사는 내내 불행을 안고 살았고, 17살이 되면 이유 없이 죽었다고…
"채민이 너는 그런 일이 없어야 할 텐데…"
채민의 위로 떨어지는 화분으로부터 채민을 구해준 아버지는
약간의 공포가 담긴 눈으로 채민을 보며 중얼거렸다.
'지금 내 나이는 17살. 내 앞에 서 있는 이것에게 죽임을 당하는 건가?'
그다지 두렵지는 않았다.
아버지의 말을 들었을 때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죽음은 예상해왔다.
채민의 주위에서 계속 일어나는 위험한 사고들은 채민에게서 죽음의 공포를 없애버렸다.
단지 조금 기분이 나빴다.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정해진 대로 죽어야만 한다는 것이…
게다가 왜 17살이 되면 죽어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도 모르지 않는가.
"넌… 뭐지?"
채민이 입을 열었다.
아무도 없는 어두운 생물실 안에 서늘한 냉기와 섞여 울리는 목소리는 참으로 기괴했다.
소녀는 아무 말도 없었다.
미동조차 없는 소녀의 모습을 보며 채민은 짐작했다.
'기회를 노리고 있나 보네.'
생물실에 갇히게 된 건, 언제나 그렇듯 우연이었다.
생물 실험을 끝내고 정리할 것이 있어서 혼자 남아 정리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문이 잠겼다.
밖에 누가 있는 건가 싶어서, 문을 열어달라고 큰소리로 외쳤지만 밖에 인기척은 없었다.
핸드폰으로 도움을 청하려고 했지만 핸드폰 역시 불통이었다.
'하루 정도 갇혀 있어야겠네. 이번에는 어떤 위험이 있으려나?
표본들이 들어있는 병이라도 내 머리에 떨어지려나?'
자신과 꼭 닮은 소녀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저 하루 정도 갇혀 있고, 조금 다치는 정도로 끝날 일인 줄 알았다.
하지만 소녀를 보는 순간,
채민은 자신이 살아온 17년 동안 겪은 일 중,
가장 위험한 일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한참 서로를 노려보고 있노라니 눈이 아팠다.
소녀가 언제 덤빌지 몰라 제대로 눈을 깜빡이지도 못했다.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생물실 안의 공기가 칼날처럼 팔과 목을 스쳤다.
차가운 듯 하면서도 더운 기운이 느껴져서 견디기 힘들었다.
모르는 상황에서 위험이 닥치는 것보다 훨씬 안 좋은 상황이었다.
온몸의 근육과 신경이 긴장해서 사라져버린 줄 알았던 두려움을 점점 끌어내고 있었다.
민감해진 청각은 작은 소리에도 예민하게 반응했다.
어디서 들려오는지 알 수 없는 부스럭거리는 소음조차도 채민에게는 공포였다.
주먹을 꽉 쥐고 있던 채민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날 죽이려고 온 거 알아."
"……"
"어차피 17살이 되면 죽으리라는 거 예상하고 있었어."
"……"
"죽여도 상관없는데… 너무 아프지는 않게 죽여줘."
"……"
"이렇게 긴장하고 있는 게 괴로워. 그러니까 얼른……"
콰앙!
학교가 무너지는 듯한 폭발음이 들린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채민은 화들짝 놀라서 자기도 모르게,
"으앗!"
하고 소리를 지르며 휘청거렸고,
소녀는 예기치 못한 소리에 당황한 듯 생물실의 벽으로 붙었다.
폭발음인 줄 알았던 소리는 그저 생물실의 문이 부서지는 소리였던 모양이다.
자세를 바로잡는 채민의 눈에 떨어져나간 생물실 문과
생물실 안으로 들어오는 네 개의 그림자가 보였다.
'저것들도… 날 죽이러 온 건가?'
채민은 인상을 찌푸리며 뒤로 물러섰다.
갑작스러운 소음에 풀렸던 온몸의 근육이 다시 긴장하기 시작했다.
"죽여도 상관없다니… 그런 말은 별로 바람직하지 않아."
하지만 들려오는 목소리는 예상했던 것과 달리 부드럽고 친근했다.
게다가 어디선가 들어본 기억이 있는 목소리.
채민은 목소리의 주인공의 얼굴을 보려고 눈에 힘을 줬다.
그 때였다.
생물실 벽에 붙어있던 소녀가 싸늘하게 미소를 지으며
허리춤에 감춰놓았던 칼을 꺼내 채민에게 달려들었다.
날카로운 칼이 창문으로 들어오는 달빛에 번쩍하고 빛을 발했다.
"앗!"
소녀는 빠르게 채민을 덮쳐 왔지만 채민이 좀 더 빨랐다.
재빨리 몸을 틀어 칼로부터 몸을 떼었고,
칼은 채민의 교복 상의만 찢어놓고 지나갔다.
하지만 채민의 발이 옆에 있던 의자에 걸려 채민의 몸이 균형을 잃었고,
소녀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몸을 돌려 다시 채민에게 달려들었다.
"아앗!"
죽음 따위는 무섭지 않다고 생각했다.
매일 사고의 위험 때문에 불안하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죽음이 닥치니 살고 싶었다.
'살고 싶어!'
채민은 눈을 질끈 감으며 생각했다.
'살아서… 한 번쯤은 행복하고 싶어!'
이제 곧 온몸에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 느껴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았다.
서늘한 칼날이 스치는 느낌조차 없었다.
이상하게 생각되어 조심스레 눈을 뜨는 채민의 앞에는 우준이 있었다.
흐르는 달빛이 잘 어울리는 표정 없는 우준이
칼을 든 소녀의 팔을 잡고 있었다.
예기치 못한 우준의 방어에 소녀는 악에 바친 표정으로 이를 드러내며
우준에게 달려들려고 했지만,
이번에는 다른 소년들이 가만히 있지 않았다.
소녀의 날카로운 손톱이 우준에게 닿기 전,
강전이 먼저 두 손으로 소녀의 옆구리를 잡았고,
흥분한 강전의 몸에서 나오는 강한 전기에
소녀는 몸을 부르르 떨다가 추욱 늘어지고 말았다.
우준은 강전이 소녀의 옆구리를 잡는 순간 손을 놓았기 때문에
전기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강전은 정신을 잃은 소녀를 옆에 내려놓고 채민의 옆으로 다가왔다.
"괜찮아?"
채민은 아직 지금 일어난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소년들은 누구고, 어떻게 자신이 위험에 빠져 있다는 것을 알고 찾아온 건지,
자신과 똑같은 소녀의 얼굴을 보고도 놀라지 않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너는…?"
"난 너 기억나네. 전학생. 맞지? 운동장 한가운데서 넘어졌었잖아."
"아…"
전학 오던 날, 교문 앞에서 보았던, 눈매가 사나운 노란 머리의 소년을 기억했다.
사나운 눈매와는 달리 꽤나 친절했었다.
"이제 기억나?"
"으응… 하지만 다른 애들은…"
"모르겠어? 널 도와주러 온 애들이야. 우리들 모두 말이야."
채민은 강전에게서 눈을 떼고 그 뒤에 서 있는 아이들에게로 눈을 돌렸다.
짧은 스포츠 머리의 비인과 목덜미를 덮는 옅은 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예쁘장하게 생긴 가인과 그리고…
채민의 눈이 우준에게서 멈췄다.
우준은 멍한 눈으로 채민을 보고 있었다.
역시 달빛이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게 실례라는 것도 잊고 계속 우준을 보고 있는데,
우준이 채민에게 다가왔다.
그 때야 채민은 자기가 초면에 실례되는 행동을 했다는 걸 깨닫고는
얼른 눈을 돌렸지만,
채민의 눈앞으로 큼지막한 손이 불쑥 내밀어졌다.
"일어나."
우준의 목소리는 낮고 침착했다.
무심한 듯 하면서도 다정하게 느껴졌기 때문에 채민은 다시 한 번 고개를 들어
우준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넌 누구야?"
의미 없는 질문이라는 것은 채민도 알고 있었다.
이 애는 자신을 구해준 사람.
그거면 충분한 건데, 대체 뭘 알려고 하는 건지 모르겠다.
"강우준."
우준이 대답하는 순간, 채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난 이 애의 이름을 알고 싶었던 거야.'
머뭇거리며 우준의 손 위에 손을 올려놓자, 우준이 그 손을 꽉 쥐었다.
전해져오는 따뜻함이 기분 좋았다.
방금 전에 무서운 일을 당했다는 것이 꿈처럼 느껴졌다.
"난 이제부터 네가 행복해지도록 도와줄 거야.
그러니까 앞으로는 죽어도 상관없다는 말 하지 마."
"아…"
믿음직스러운 목소리를 들으며 채민은 얼굴을 붉혔다.
어쩌면 이 애는 이다지도 자신에 넘치는 걸까?
"난…"
무슨 말이든 해야할 것 같아서 입을 열었다.
"충분히 행복해. 내게 닥친 위험으로부터 날 구해주는 사람이 있다니…"
채민의 말에 우준이 잠시 미간을 좁혔다가 곧 채민을 보며 빙긋 웃었다.
그 싱그러운 미소에 채민은 침을 꿀꺽 삼켰다.
비단 채민뿐만이 아니었다.
두 사람을 모습을 보고 있던 다른 소년들도 그 미소에는 침을 삼키는 수밖에 없었다.
흘러 들어오는 달빛에 부딪히는 우준의 모습은 그만큼 섹시했다.
다른 아이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든, 우준은 채민만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앞으로 넌 더 행복해질 거야. 반드시…"
"더 이상 이쪽에서는 찾을 사람이 없는 게 분명해."
그들은 우준과 가인이 처음 만났던 폐건물에 모였다.
귀신이 많이 몰려든다는 점을 빼면 인적이 드물어
뭔가를 진행하기에 더없이 좋은 장소였기 때문이다.
펜던트를 가운데에 놔두고 심각한 얼굴로 둘러앉아 있는 네 명의 소년과
한 명의 소녀의 모습은 마치 죽은 자를 부르는 의식을 치르려는 것처럼 보였다.
귀신의 울음소리인지, 바람의 발자국 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귀에 거슬리는 웅웅소리조차도 그들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
그들의 눈은 펜던트에 고정되어 있었다.
펜던트는 연두색의 기묘한 빛을 은은하게 발하고 있었는데,
달빛에 들풀을 섞어놓은 듯한 색깔이 불안한 그들의 마음을 달래주었다.
한동안 펜던트를 응시하던 그들은 우준을 돌아봤다.
그들은 말은 하지 않았지만 우준을 자신들의 리더로 인정하고 있었다.
그들을 찾아낸 것은 우준이었고, 우준은 그들이 겪는 아픔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우준이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지만 그들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한다는 것을
그들도 알고 있었다.
신뢰를 담은 그들의 시선을 무심히 받아내며 우준이 입을 열었다.
"이제 펜던트는 더 이상 아무 것도 보여주지 않아."
펜던트의 거울에는 아무 것도 비치지 않고 있었다.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어. 오늘은 만월의 밤이야.
펜던트 주인의 말로는 만월의 밤에만 거울 속의 세계로 갈 수 있다고 했어.
오늘을 놓치면 더 이상 기회는 없겠지."
우준이 자기를 보고 있는 소년, 소녀들을 하나하나 천천히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그녀가 말하기를… 위험할지도 모른다고 했어. 어쩌면 죽을 수도 있다고…
그쪽이 어떤 세상인지는 나도 몰라.
난 사람끼리 하는 싸움은 잘 하는 편이지만 그쪽에서 어떤 존재를 만나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내 싸움 실력으로 그들을 이기리라고는 확신할 수 없어. 하지만…"
우준의 시선이 채민에게 머물렀다.
"약속할게. 너희를 돕는 데에 내 목숨을 아끼지 않을 거야."
우준의 시선이 채민을 떠나 비인에게 닿았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너희를 믿을 거야."
그 눈빛에 비인은 처음으로 마음을 놓았다.
아무도 자신이 보고 온 것을 믿어주지 않았지만
한 사람 정도는 자신의 말을 믿어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너희들도 나를 믿어줬으면 좋겠어.
믿음이 없이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어.
우리는 같은 목표를 향하고 있으니까 서로에 대한 신뢰가 중요해."
"응, 맞아."
가인이 선망의 눈빛으로 우준을 쳐다봤다.
가인의 앞에 앉아 있는 저 당당하고 자신에 찬 소년은
자신이 동경해오던 강한 사람이었다.
우준은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았다.
"지금 당장, 같이 갈 수 있겠어?"
우준의 질문에 강전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난 함께 갈 거야. 이 빌어먹을 체질 좀 바꿔보고 싶어."
아프지 않을 정도로 약한 전기가 우준의 팔에 통했지만
우준은 눈썹 하나 움직이지 않고 가인을 쳐다봤다.
"나도… 갈 거야."
가인이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비인도 대답했다.
"나도. 난 분명히… 봤거든. 너를… 그리고 그 때의 난 즐거워 보였거든."
뒤에 이어지는 말은 혼잣말에 가까웠다.
우준은 마지막으로 채민을 쳐다봤다.
"아까… 그 도플갱어라는 건… 죽은 걸까?"
채민은 이제껏 궁금했던 것을 먼저 묻기로 했다.
강전은 채민이 빨리 대답하지 않자 짜증이 나는 듯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하지만 우준은 침착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마도 그냥 사라진 것뿐일 거야."
그들이 생물실에 눕혀 놓았던 도플갱어는 그들이 잠시 시선을 뗀 사이에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다.
아마도 걸어서 나간 것은 아닐 것이다.
분명 보이지 않는 존재의 힘이 미친 것일 거라고 우준은 생각했다.
"그래…"
"지금 그건 중요한 게 아니잖아!"
채민이 또 다른 것을 물을 것 같자 강전이 얼른 끼어 들었다.
강전의 검지는 건물 밖에 보이는 둥근 달을 가리키고 있었다.
다른 때보다 크고 둥근 달이 은은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저 달이 지면 우린 15일을 기다려야 한다구.
그 때가 되면 다 늦을지도 몰라. 빨리 결정해."
강전의 재촉에 채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갈래. 갈 거야."
"다들… 집에 말하지 않아도 되는 거야?"
우준의 질문에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조금 어두운 표정으로 서로의 눈치를 살폈을 뿐이다.
우준은 그들이 이야기하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는 펜던트에 손을 댔다.
…만월이 하늘을 채웠을 때, 펜던트에 손가락을 대세요.
같이 가고 싶은 사람들이 모두 손가락을 댔을 때, 이렇게 말하면 되요.
모두가 펜던트에 손가락을 댔다는 걸 확인한 우준이
하늘을 한 번 올려다봤다가 다시 펜던트를 응시하며 낮게 중얼거렸다.
"우리는 이 안의 세계를 경험해보고 싶다.
우리를 그곳으로 데려가 줘.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는 그곳으로…"
그리고 그들은 눈이 아프도록 밝은 빛에 휩싸였다.
그것은 분명 달빛이었지만,
무너질 듯한 폐건물에 집중되어 내리쬐는 달빛을 신경 쓰는 사람은
그들 이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그들은 그들의 운명을 바꾸기 위하여 한 걸음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