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햇빛 한 바구니, 고양이 두 스푼-5화 (5/91)

-5-

눈을 떴을 때, 채민은 우준의 품에 안겨 있었다.

남자의 품에 안겨본 적이 한 번도 없던 채민은 화들짝 놀라서 몸을 일으켰다.

"으…"

우준이 낮게 신음을 흘리며 인상을 찡그렸다.

"아, 미안…"

"아니."

채민은 자신이 바닥에 떨어지려는 찰나에 우준이 자신을 끌어당겨서 보호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우준이 자신을 보호해주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크게 다쳤을 것이다.

채민은 언제나 위험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가장 위험한 상황에 빠지니까.

우준은 자신의 손에 펜던트가 들려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펜던트를 목에 걸었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봤다.

강전과 비인, 가인은 무사했다.

"이야. 진짜 눈이 멀 정도로 밝은 빛이었어."

강전이 중얼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괜찮아?"

비인이 우준의 곁으로 다가와서 물었다.

"응, 뭐…"

우준은 아무렇지도 않게 어깨를 으쓱했지만 비인은 우준이

팔에 통증을 느끼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채민을 감싸느라 다친 우준이 채민의 기분을 생각해서 고통을 참고 있다는 걸 깨달은 비인은

모르는 채 넘어갔다.

우준은 다른 쪽 팔로 다친 팔을 한 번 쓱 문지르고는 주위를 둘러봤다.

처음 보는 커다란 나무가 빽빽이 들어찬 그곳은

더운데다가 습기까지 많아서 답답함을 느끼게 했다.

나무도 보기 좋은 녹빛이 아닌,

칙칙한 녹갈색의 커다란 나뭇잎이 불쾌하게 늘어져 있어서

건드리면 독이라도 오를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딱히 벌레들은 보이지 않았지만 이상할 정도로 소음이 없는 곳이었다.

최소한 새가 지저귀는 소리라도 들릴 법 한데,

새소리는커녕, 물이 흐르는 소리라던가, 나뭇잎이 바람에 부딪히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시간의 흐름과 동떨어진 듯한 그곳에서

그들은 몸이 으슬으슬 추워지는 것을 느끼며 멀거니 서 있었다.

그들에게는 나침반도 없었고, 지도도 없었기 때문에

어느 곳으로 가야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모두 우준의 결단을 기다리듯이 우준을 쳐다봤지만

우준은 멍한 표정으로 서서 펜던트를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펜던트에 비춰지는 건 없어?"

비인의 질문에 우준이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없어."

"우린 어디로 가야하는 거냐? 일단 이 기분 나쁜 곳에서 벗어나야 하지 않아?"

강전이 짜증스레 머리를 뒤로 넘기며 말했다.

채민은 강전이 참 신경질적이라고 생각하며 아까부터 말이 없는 가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가인은 보기에 안쓰러울 정도로 몸을 떨고 있었다.

얼굴에 핏기가 하나도 없어서, 안 그래도 하얀 얼굴이 파랗게 보일 정도로 질려,

경계의 빛을 띄고 쉴 새 없이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그대로 놔뒀다가는 가인이 쓰러질 것 같아서 걱정이 된 채민이

조심스레 가인에게 다가가 어깨에 손을 얹자,

가인은 심장이 배 밖으로 튀어나올 정도로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으앗!"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놀라는 가인의 모습에 채민이 더 놀랐다.

기우뚱하며 넘어질 뻔한 것을 우준이 겨우 잡았다.

우준은 뒤로 쓰러질 뻔한 채민의 뒤에 서서 채민의 몸을 자신에게 기대게 한 채로

가인에게 물었다.

"괜찮은 거냐, 너?"

"이곳엔…"

가인이 불안한 눈동자로 주위를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죽은 자의 영이 너무 많아."

가인의 입술이 가냘프게 떨렸다.

"죽은 자의 영이라…"

우준은 귀신을 본 적이 한 번도 없기에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가인의 표정으로는 아마도 죽을 정도로 무서운 일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우준은 채민을 바로 세워주고 가인에게 다가가

가인의 어깨에 손을 얹고 자기의 가까이로 끌어당겼다.

가인의 몸이 자신의 몸에 바짝 밀착될 정도로 끌어당긴 우준이 낮게 말했다.

"괜찮아. 그들이 널 해치려 든다면, 날 먼저 죽여야 할거야."

사실 우준에게는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 따위는 없었기에

어떻게 해볼 방도가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 한 마디로 가인은 크게 위안이 되었다.

"으응…"

하지만 눈에 보이는 끔찍한 형상의 영혼들은 가인을 두렵게 만들었다.

영혼들이 자신을 덮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적어도 그들에게서는 살의가 느껴지지 않았다.

단지 두려운 것은, 그들이 이곳으로 와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에게

저렇게 끔찍한 꼴을 당했다는 점이다.

이 불길한 숲에는 무언가가 있다.

그것은 굉장히 강하고, 잔혹하다.

가인은 영혼들의 모습에서 그것을 짐작할 수 있었지만

다른 일행에게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그들이 불안해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일단… 어디로든 가보자. 뭐든 나오겠지."

우준이 말했고, 그들은 가야할 방향을 잡지 못한 채로 앞으로 나아갔다.

한참을 걸었지만 길은 보이지 않았고, 사람이 사는 흔적 또한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나무가 많아져서 햇빛을 가려 어두워지고 있었다.

"완전히 해가 지기 전에 뭐든 찾아내야 할 텐데…"

비인이 걱정스레 중얼거렸다.

다들 우준을 쳐다봤지만 우준은 뭘 생각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걷고만 있었다.

"야, 강우준. 뭔가 방법을 찾아야하지 않겠냐?"

성급한 강전의 질문에 우준이 앞을 똑바로 보고 계속 걸으며 대답했다.

"아직 우리는 가야할 길을 모르고, 아무 것도 찾을 수가 없어.

그러면 지금 우리가 해야할 게 뭘까?"

"그러니까 지금 그걸 너한테 묻고 있는 거잖냐."

"걷자."

우준이 간단하게 대답했다.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건 걷는 거야.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

뭔가 떠오르기 전까지는 걷는 것에 집중하자."

강전은 불만인 듯 인상을 찌푸렸지만

다른 아이들이 동의하는 듯한 표정이었기에 잠자코 우준의 뒤를 따랐다.

이곳은 시계조차 말을 듣지 않아서 몇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서서히 해가 지는지, 안 그래도 나무들 때문에 어두운 숲이

점점 더 어둠 속에 잠기고 있었다.

그들이 나아가야 할 방향은 끝도 보이지 않는 듯한 어둠으로 덮여서

초행길인 그들에게 두려움을 안겨주었다.

다들 차츰차츰 걸음을 늦췄지만 우준은 두렵지도 않은지

앞을 똑바로 보면서 그대로 자기 페이스를 유지했다.

"배고프다."

강전이 중얼거렸다.

"나도…"

"나도 배고파."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우준의 단호하고도 확신에 찬 태도에 이끌려

말하지 못하고 있다가, 강전이 말하자 너도나도 투덜대듯이 말했다.

우준이 걸음을 멈췄다.

"응, 배고프네."

우준도 고개를 끄덕였다.

"뭐든 먹어야 할 것 같지 않냐?"

강전이 주위를 둘러봤다.

"아, 우리가 너무 성급하게 생각했나 봐. 적어도 먹을 거랑 나침반 정도는 챙겨왔어야 했는데…

갈아입을 옷도 없네."

비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이 주위엔…"

채민이 천천히 주위를 둘러봤다.

짙은 갈색 이끼에 뒤덮인, 손대고 싶지 않은 모양의 나무 줄기와

만지면 끈적일 것 같은 모양새의 나뭇잎들,

바닥에 떨어진 나뭇잎 사이로 비집고 올라온, 걸죽한 모양의 버섯 비스무리한 것들만 보였다.

"먹어도 될 것 같은 게 없는데…"

"아, 젠장. 배고파 미치겠구만… 저거라도 뜯어먹고 싶다."

강전은 정말 미칠 것 같은지 무심코 옆에 있는 나무에 기댔다가

기겁을 하고 몸을 바로 했다.

"으아아아! 이게 뭐야? 진짜 기분 나쁘잖아, 이 나무."

강전은 손에 묻은 끈적이는 나무 점액을 옷에 슥슥 문질러 닦으며 욕설을 내뱉었다.

채민은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뭔가가 튀어나와도 전혀 이상할 것 같지 않은 괴상한 숲.

지금까지는 그럭저럭 아무 일도 당하지 않고 걸어왔지만

채민이 있는 이상 위험이 그냥 지나칠 리가 없었다.

나무가 쓰러지든, 벌레들이 들이닥치든, 괴수가 튀어나오든,

뭔가 일이 일어날 게 분명했다.

"으아아아!"

갑자기 가인이 귀를 틀어막으며 바닥에 주저 앉았다.

"왜, 왜 그래?"

"영혼들이… 영혼들이 울부짖고 있어!"

"뭐?"

"으아아! 영혼들이 울부짖고 있어! 귀가 찢어질 것 같아!"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그들의 앞으로 검은 그림자가 튀어나온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처음에 그들은 그것이 그들의 세계에서도 흔히 볼 수 있었던,

평범한 호랑이라고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것이 점점 다가올수록 그 생각은 무참히 짓밟혔다.

그것은 평범한 호랑이보다 3배는 더 컸고,

그것의 머리에는 날카로워 보이는, 팔뚝만한 크기의 뿔이 달려있었다.

원래의 색깔은 하얀 색이었을 테지만,

그것으로 얼마나 많은 생물을 찔러 죽였는지

군데군데 검붉은 피가 들러붙어 있었다.

"각호(角虎)라고 이름짓자."

그 짐승의 거대한 몸집과 날카로운 뿔에 질려 있는 그들의 귀에

우준의 멍한 목소리가 들렸다.

"에에?"

다들 그것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되물었더니 우준이 말했다.

"뿔 각에 범 호자를 써서 각호라고 이름을 짓는 게 좋을 것 같아."

"야, 인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강전이 버럭했지만 우준은 침착했다.

'저 녀석… 뭔가 이길 수 있는 방법이라도 있는 걸까?'

다들 그런 생각을 하며,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우준을 쳐다봤다.

"저… 저거… 그러니까 각호를 이길 방법이 있는 거야?"

조심스러운 가인의 질문에 우준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없어."

"뭐, 뭐얏!"

강전이 또 버럭했다.

"인마. 그런데 그 넘치는 자신감은 뭐냐?"

"난 지금 충분히 무서워하고 있는데… 저런 생물이 살다니… 정말 무섭다. 무기도 없는데…"

말과는 달리, 우준의 목소리는 굉장히 단조로웠고 무심했다.

장난을 치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크르르릉…"

각호가 이를 드러내고 으르릉거렸다.

그 소리에 숲이 반응을 하는 듯 느껴졌다.

"나무들이… 떨고 있어…"

채민이 중얼거렸다.

분명 나무들은 각호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바람이 스치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고요하던 숲이

요동을 치고 있었다.

"이게… 첫 번째 시련이야."

각호가 그들을 덮치기 위해 몸을 낮추자 우준이 말했다.

"뭐, 뭐라고?"

우준이 각호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자세를 낮춰 옆에 있던 나뭇가지를 잡았다.

축축하고 미끈한 느낌이 기분 나빴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아무런 위험도 없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잖아."

"크아아앙!"

각호가 위협적으로 소리를 내며 슬금슬금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우준이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그들은 우준이 미쳤다고 생각했다.

금방이라도 부러질 듯한 나뭇가지 하나를 들고,

저 단단해 보이는 뿔을 가진 각호에게 다가가다니…

저건 죽으려고 작정한 것과 같은 것이 아닌가.

"가만히 있어도 죽고, 뭔가를 해도 죽을 거라면…"

우준이 어느 정도 나아가서 멈췄을 때에야,

그들은 우준이 자신들을 각호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앞으로 나섰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우준의 몸은 각호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작았지만,

단단해 보이는 등은 절대로 지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해보고 죽는 게 나아!"

"쿠아아앙!"

우준이 말을 마치는 순간, 각호의 거대한 몸이 우준을 향해 날아들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