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햇빛 한 바구니, 고양이 두 스푼-8화 (8/91)

-8-

각호의 고기는 나쁘지 않았다.

좀 질기고, 불에 많이 타기는 했지만 시장이 반찬(배가 고프면 무엇이든 잘 먹을 수 있다는 뜻)이라고,

그들은 그 여느 때보다 맛있게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

든든하게 속을 채우고 나니 기분이 좀 나아졌다.

음침하게만 보이던 숲도 조금 더 밝아 보였고,

막막하기만 했던 그들의 여행도 희망적으로 느껴졌다.

우준도 어느 정도 기운을 차린 듯 했다.

"이것도 뭐, 나름대로 스테이크지."

강전의 말에 다들 하하하 웃는 여유도 부릴 수 있게 되었다.

"이 뿔은 쓸모가 있겠어."

불을 끄고 떠나기 전, 우준이 뼈와 약간의 살점, 가죽이 남은 각호의 옆에서

각호의 뿔을 집어들었다.

"여차하면 무기로 쓸 수도 있고…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이것저것 챙겨두는 게 좋겠지."

"무겁지 않아? 내가 들어줄게."

강전이 우준에게서 뿔을 받아들어 자신의 가방에 대충 쑤셔넣었다.

배낭보다 뿔이 더 커서 배낭 위로 끝 부분이 비쭉 튀어나왔다.

"그리고…"

우준은 사람의 뼈와 물건들이 널려 있는 곳에 주저앉아 뒤적거렸다.

"으윽! 뭐 하는 거야?"

가인이 정색을 하며 뒤로 물러섰다.

"혹시 모르잖아. 이 세계에 대한 정보라도 찾을 수 있을지…"

하지만 찾아낸 것은 남자의 것으로 보이는 놋쇠 반지뿐이었다.

값어치 없어 보이는, 더러운 놋쇠 반지였지만 우준은 그것을 자신의 가방 안에 집어넣었다.

이제 그곳을 떠날 준비를 마쳤다.

아직도 앞길이 막막한 상황이기는 하지만,

그들은 처음보다 좀 더 여유가 생겼다.

절대로 이길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각호를 이겼고,

아무 것도 먹을 것을 없을 줄 알았던 숲 속에서 고기로 배를 채웠으며,

강전의 힘으로 불을 피울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고,

무기로 쓸 수 있을 것 같은 각호의 뿔도 챙겼다.

그리고 그들은 처음보다 더 많이 서로를 믿었다.

"그럼…"

우준이 일행을 한 번 돌아보고는 발을 떼었다.

"가자."

하루 종일 걸었지만 마실 수 있을 것 같은 물을 찾지 못했다.

그들이 발견한 물이라고는, 기분 나쁜 색의 물웅덩이뿐이었다.

닿기만 해도 손이 썩어들어 갈 것 같은 웅덩이였기 때문에

그들은 인상을 찌푸리며 그것을 피해 지나갔다.

걷고, 걷고, 또 걸었다.

힘들어서 배고픔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아침에만 해도 새록새록 피어나던 희망이 자취를 감췄다.

끝이 보이지 않는 숲에서 이대로 죽는 게 아닌가 싶은 불안이 무겁게 몸을 짓눌렀다.

처음에는 재잘재잘 떠들면서 걸었지만 갈수록 그들은 말이 줄어들었고,

해가 질 무렵이 되자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적막한 침묵 속에서 한참을 걷던 그들은 높은 바위산을 발견했다.

사람이 올라가기 힘들 정도로 험해 보이는 산의 그림자가 그들의 위를 덮었다.

그들은 고개를 바짝 들어 산을 올려다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여길 넘어가야 하는 건가?"

"오늘은 좀 무리일 것 같은데… 이미 해도 졌고…"

"동굴 같은 데서 자면 좋겠다. 동굴 앞에 불을 피워놓으면 숲 한가운데서 자는 것보다는 안전하잖아."

넘어야 할 산이 있기는 해도 숲이 끝났다는 생각 때문인지, 그들은 조금씩 생기를 띄기 시작했다.

"그럼 동굴을 찾아서 조금만 올라가 보자."

발을 디딜 곳도 제대로 없는 험한 산이었기에,

그들은 서로에게 의지하면서 위로 올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가장 힘이 약한 채민이 뒤처지기 시작하자, 그들 또한 진행 속도를 늦췄다.

"미안해, 나 때문에…"

강전이 내민 손을 잡고 바위 위로 올라가며 채민이 말했다.

"에이, 에이. 미안하긴. 그래도 아침엔 네 덕분에 고기를 먹을 수 있었잖아.

너 아니었으면 우린 굶어죽었을 걸."

사실 각호의 배를 가르는 건 누구라도 할 수 있었던 일인데,

채민이 대단한 일이라도 한 듯 말해주는 강전에게 고마웠다.

"으응. 고마워…"

"됐어, 그런 말 하지 마. 난 그런 쑥스러운 말, 별로 안 좋아해. 읏챠!"

강전이 힘을 줘서 채민을 위로 끌어당겼다.

아침에 채민이 다친 것을 의식하고 있는지, 채민의 손이 아닌 손목을 잡아서 올렸다.

"여기에 동굴이 있어!"

조금 앞서서 가던 비인의 외침에 다들 걸음을 빨리 했다.

바위산에 위치한 바위 동굴은 다섯 명이 충분히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넓었고,

꽤 안정적으로 보였다.

"이야, 여기 괜찮은데?"

강전이 기분 좋게 말하며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가인이 강전의 팔을 붙잡았다.

"왜 그래? 얼른 들어가서 쉬자. 다리 아프다. 배도 고프고…"

"여긴 위험해."

"엥? 어딜 봐서? 그렇게 깊어 보이지도 않는데…"

"뭐가 위험한지는 모르겠지만…"

가인이 인상을 찌푸리며 눈을 감았다.

"이곳에서 죽은 영혼이 잔뜩 있어. 수 십 명은 되는 것 같아.

많은 영혼이 있을 자리가 부족해서 서로에게 끼어 있을 정도야."

"으엑…"

강전이 몸서리를 치며 뒤로 물러나다가 팔꿈치로 채민을 툭 치고 말았다.

"아앗!"

튀어나온 것이 전혀 없었는데도 채민의 발이 무언가에 걸렸고,

채민은 중심을 잃고 방금 올라왔던 낭떠러지로 미끌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완전히 떨어지기 전, 우준이 팔을 뻗어 채민의 손목을 잡았다.

"크흑…"

다친 곳이 기절할 정도로 아팠다.

지금까지 억지로 참고 있었는데, 강한 힘을 주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신음을 흘리고 말았다.

채민이 눈을 크게 뜨고 우준을 올려다봤다.

고통스러워 보이는 우준의 표정에 가슴을 졸이는데,

투욱-하고 얼굴에 무언가가 떨어졌다.

피였다.

겨우 멎었던 피가 다시 우준의 팔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자, 잠깐 기다려!"

갑작스러운 사태에 당황하고 있던 가인과 비인이 다가왔다.

강전은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전기 때문에 어쩌지도 못하고 발만 동동 굴렀다.

"조금만 버텨, 우준아."

가인이 말했다.

"한참이라도 버틸 수 있어."

우준이 고통을 참으며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고집은…"

비인이 중얼거리며 우준보다 몸을 좀 더 앞으로 기울여 팔을 뻗었다.

비인의 손이 채민의 손목에 닿았다.

"잡았어!"

비인이 말했지만 우준은 채민을 잡은 손에서 힘을 빼지 않았다.

"우준아, 힘 빼. 내가 잡아 올릴 수 있어."

"둘이 같이 하는 게 더 빨라."

"아무튼 고집은…"

비인은 중얼거리면서도 채민의 손을 꽉 잡았고,

"하나, 둘, 셋."을 함과 동시에 채민을 위로 확 끌어올렸다.

"하아…"

우준이 고통스럽게 뒤로 드러누었다.

"괜찮냐, 너?"

강전이 우준의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전기로 지져줘."

"에?"

"네 전기로, 내 상처를 좀 지져줘. 죽지 않을 정도의 전기로…"

"야, 야. 어, 어떻게 그러냐? 나 그거 못 해."

강전이 정색을 하며 외쳤다.

"왜 그래?"

가인이 다가왔다.

"이 자식이 미친 소리를 하잖아. 죽고 싶어서 환장한 것도 아니고…"

"죽고 싶지 않아. 하지만 이대로 피를 계속 흘리다가는 죽고 말 거야.

게다가 이곳에 어떤 세균이 있는지도 모르는 상태잖아.

세균에 감염되어서 죽을지도 몰라. 우리는 항생제도 없는데…

전기로 지지면 어느 정도 살균도 될 거야."

"저, 전기로 지진다구?"

가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가인은 입술을 깨물고 우준을 쳐다봤다.

어떻게 이 애는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건지…

어쩌면 죽을지도 모르는 건데…

"그러다가 잘못 되면 어쩌려구?"

"그러니까 잘못되지 않게 잘 해야지."

강전이 뒤로 물러났다.

"난 못 해."

"그럼 난 이대로 죽는 건가?"

"야, 그런 소리 하지 말고… 네가 진짜로 이대로 죽으면 난 죄책감에 잠을 못 잘 거다."

"그러니까… 전기로 내 어깨의 상처를 지져 줘."

"하지만… 그러다 잘못되면…"

"온몸에 전기가 통할 정도로 전기를 보내면 난 죽겠지.

하지만 내 어깨의 혈관과 상처를 태운다고 생각하면서 조금씩 손가락으로 건드려 봐.

죽진 않을 거야, 아마…"

"이 자식아. 왜, 왜 그렇게 날 믿는 건데? 난 그런 거 해본 적도 없다구!"

"나도 이런 곳에 와본 적 없어."

"누가 와본 적 있대?"

"하지만 너희들은 날 믿어주잖아."

"……"

"다들 첫경험이잖아. 그래도 믿어야지. 그래야 여기서 살아남을 수 있어."

강전이 입술을 깨물었다.

강전은 혼란스러운 듯 노란 머리카락을 벅벅 문질러 흐트러뜨렸다.

도움을 청하듯 비인과 채민, 가인을 돌아봤지만

그들은 전부 강전에게 "화이팅!"을 외치고 있었다.

"아, 젠장! 진짜 미치겠네!"

희끄무레한 바위 위로 우준의 피가 번져 가는 것을 보며 강전은 버럭 외쳤다.

이대로 우준이 계속 피를 흘리다가는 정말 죽을 것 같았다.

어쩔 수 없다.

이제 방법은 하나뿐이다.

강전은 떨리는 손을 우준의 어깨에 가져갔다가 다시 벌떡 일어났다.

"난 못 해! 진짜 못 하겠다구! 그러다가 너 죽으면 어떻게 해!

난 지금 초 흥분상태라구! 내 전기를 조절하지 못하겠단 말이다!"

"죽지 않아."

죽어 가는 목소리와 달리 우준의 눈은 반짝이고 있었다.

우준은 흔들림 없이 강전을 응시하며 말했다.

"난 죽지 않아. 그러니까 안심해도 돼."

"야, 야…"

강전의 목소리가 애원조로 바뀌었다.

"너밖에 없어, 강전아."

채민이 강전의 어깨에 손을 댔다가 전기가 통하자 찔끔하며 손을 뗐다.

"거 봐. 전기가 심하잖아."

강전이 중얼거리자 채민이 다시 강전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이번에도 역시 전기는 통했지만 채민은 떼지 않았다.

파지지지직-

전기가 몸을 타고 흐르는 게 느껴졌지만 그리 큰 고통은 아니었다.

"야, 인마. 손 떼. 아프잖아!"

하지만 채민은 떼지 않고 한동안 있다가 타는 냄새가 날 때에야 손을 떼었다.

"야! 너 괜찮아?"

연기가 피어오르는 채민의 손을 잡으려던 강전이

자신의 몸에 전기가 흐른다는 것을 깨닫고는 얼른 손을 위로 올리며 물러섰다.

"괜찮아, 채민아?"

가인이 다가왔다.

"응."

채민이 웃었다.

사실 굉장히 아프다.

너무 아파서 눈물이 찔끔찔끔 나오고, 다리가 후들거리지만 여기서 아픈 내색을 하면 안 된다.

"이것 봐. 손은 탔지만 난 안 죽었잖아."

"야, 너…"

강전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너, 그거 알려주려고…"

강전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렸다.

"괜찮아. 나도 어차피 물집투성이여서 세균 감염의 위험이 있었는걸."

강전은 더 이상 물러설 수 없었다.

오동통한 볼을 가진, 저 연약해 보이는 채민도 자신의 손을 태워가면서까지 격려를 해주는데,

자기의 죄책감을 핑계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강전은 주먹을 꽉 쥐고 우준에게 다가갔다.

"많이 아플 거다."

강전이 말하자 우준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렇겠지."

"하지만… 넌 절대로 죽지 않을 거야."

"응, 그럴 것 같다."

"내가…"

가인이 우준의 옆에 앉았다.

"내가 손 잡아줄게. 아프면 내 손을 꽉 잡아."

"너한테도 전기가 오를지도 몰라."

강전이 우준의 윗옷을 벗겨내며 말했다.

"괜찮아. 그래도 잡아줄 거야."

강전은 크게 심호흡을 하고 우준의 상처 부위에 조심스레 손을 댔다.

파직-

강전이 크게 흥분했기 때문에 강한 스파크가 튀었다.

"읏…"

"아, 미안. 조절할게."

강전은 불안으로 흔들리는 자신의 마음을 가다듬으려고 노력했다.

'해내야 돼. 우준이를 살려야 돼.'

몇 번 심호흡을 한 강전이 다시 우준의 어깨에 손을 댔을 때,

강전의 눈빛은 침착했고, 강전의 손 역시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강전의 손이 우준의 상처를 태우며 지나가는 동안,

우준은 인상을 찡그렸지만 가인의 손을 아플 정도로 세게 움켜쥐지는 않았다.

살이 타는 냄새가 진동을 했다.

어둠이 점점 깊어지면서, 강전의 몸에서 튀는 전기만이 잠깐잠깐씩 빛을 발했다.

강전의 이마에 송글송글 땀이 맺혀 아래로 툭툭 떨어졌다.

'우준이는 괜찮을 거야.'

비인이 생각했다.

'분명 나는 우리들이 이곳과 다른 곳에서 좀 더 행복한 듯이 웃고 있는 걸 봤어.

절대로 틀리지 않을 거야.'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강전이 우준의 몸에서 손을 떼고 온통 땀투성이가 된 얼굴을 쓱 훔치며 말했다.

"됐어."

"우준이는?"

채민의 질문에 강전이 우준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야, 너 살아있지?"

우준이 천천히 눈을 뜨고 대답했다.

"응. 살아있네. 땡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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