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몇 번 더 동굴을 찾았지만 고통스러워 보이는 영혼이 꽉꽉 차 있다는 가인의 말에
포기하고 걷기를 수 차례, 다들 지쳐서 아무데나 누워서 자자고 결정을 지었을 때,
동굴을 하나 더 발견했다.
비인과 가인이 우준을 부축하는 동안,
앞질러서 걷던 강전이 동굴을 발견하고는 외쳤다.
"야! 여기 동굴 있다. 여기도 안 되면 그냥 밖에서 자자."
가인이 우준을 비인에게 맡겨두고 빠른 걸음으로 강전이 찾아낸 동굴로 향했다.
"어때?"
강전이 초조하게 묻자, 가인이 크게 한숨을 내쉬며 강전을 돌아봤다.
강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뭐야? 이번에도 꽝인 거냐?"
"아니…"
"응?"
"이번엔 오케이야! 여긴 깨끗해."
다섯 명이 모두 들어가도 넉넉한 크기의 동굴은 안쪽으로 작은 구멍이 뚫려 있었는데
거기서 바람이 새어나와 동굴 안의 공기를 깨끗하게 해주었다.
동굴 안에는 희미한 달빛조차 들어오지 않아 한 치 앞을 분간하기 힘들 정도였다.
단단한 바닥을 더듬고 들어가며 강전이 투덜댔다.
"불을 밝힐만한 게 없네. 이 근처에는 나무도 없고…"
"아, 나무라면…"
채민이 가방을 내려놨다.
"내가 좀 챙겨놨었어."
가방 안에서 떨어지는 나뭇가지를 보며 다들 같은 생각을 했다.
'저 가방은 어떻게 만들어졌기에 저게 다 들어가는 거지?'
나뭇가지는 밤새도록 태울 수 있을 정도로 많이 있었다.
"야, 이거 진짜 무거웠겠네. 말하지 그랬냐? 내가 들어줬을 텐데…"
강전이 나뭇가지 하나를 들어 태우려고 노력하며 말했다.
"아냐, 이 정도는 뭐…"
비인은 쑥스러운 듯 헤헤 웃는 채민의 모습이 좀 안쓰럽다고 생각했다.
'채민이는… 자기 때문에 자꾸 불행이 닥치니까 우리에게 미안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게 틀림없어.
그래서 자기가 조금이라도 더 도움이 되려고 하는 거고…
안타깝다. 그래도 여자애인데… 남자애들 네 명이랑 같이 있으면 보호 받고 싶고,
공주님 취급 받고 싶은 게 당연할 텐데…'
강전은 불을 붙인 나뭇가지로 모아둔 나무들에 불을 붙였다.
동굴 앞에 작은 모닥불이 생기자 동굴 안의 모습도 어렴풋하게나마 분간할 수 있게 되었다.
우준을 눕히기 전에 아래에 깔만한 게 없나 주위를 살폈지만
단단한 돌덩이들뿐, 보이는 건 없었다.
"정말 징그러운 곳이네."
강전이 투덜대며 그나마 평편한 자리를 찾아 비인을 불렀다.
"우준이는 이쪽에 눕히자."
우준이 불편하지 않도록 자리를 골라가며 우준을 눕힌 그들은 잠시 동굴 밖에 모였다.
"아무리 여기에 영혼이 없고, 아무 것도 없어 보인다지만,
그래도 불침번을 서는 게 좋을 것 같아."
비인의 제안에 다들 동의했다.
"일단 채민이를 빼면 나랑 강전이, 가인이 세 명이니까…"
"난 왜 빼?"
의아하다는 채민의 질문을 들은 강전이 네가 더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야, 넌 여자잖아."
"아니야. 괜찮아. 너네가 남자라고 해서 안 피곤하고, 안 무서운 거 아니잖아."
"하지만 힘이 약하잖아."
비인은 채민이 미안함을 느끼지 않도록,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아무래도 남자들이 여자보다 체력이 좋으니까 우리끼리 불침번 서도 돼."
"하지만…"
"채민아."
가인이 가느다란 목소리로 채민을 불렀다.
"네가 없었더라도 우리는 저 이상한 숲에 떨어졌을 거고,
각호를 만났을 거고, 계속 물을 마시지 못했을 거야."
"아…"
"네가 있었기 때문에 각호의 껍질을 벗길 수 있었고,
그 고기로 배를 채워서 체력을 보강할 수 있었어."
"……"
"불행이 너 때문에 오는 게 아니야.
그것들은 그저 우리가 행복을 찾으러 가는 길에 놓인 장애물이고,
우린 힘을 합쳐서 가장 좋은 방법으로 그 장애물을 건너는 중인 거야."
"맞아."
강전이 씩 웃었다.
"네 덕분에 지금 이렇게 불도 피워서 따뜻하잖냐.
너 아니었으면 누가 나무를 챙기기나 했겠냐?"
'따뜻한 건 너희들이야.'
채민은 어떻게 표정을 관리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너무 기뻐서, 너무 행복해서, 그런데도 자꾸만 눈물이 나오려고 해서,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으응."
채민이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고마워."
밤에 부는 바람은 바위산에게 날카로운 상처를 남기고 지나가는 모양이다.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바위산은 고통스럽게 울어댔다.
그 소리가 시끄러워서 불침번을 서는 소년이나
누워서 잠을 청하는 다른 일행들이나 귀를 틀어막아야 했다.
우우우웅-
낮게 부르짖는 바위산이 가끔 한 번씩 소리를 높일 때면
귀가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곤히 잠들어 있는 것은 우준뿐이었다.
아마도 기절을 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사실 다른 일행들은 우준이 살아있는 게 신기하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저기 있잖아…"
강전이 불침번을 서려고 동굴 앞에 나가 있었다.
타오르는 불빛과 부딪혀 어른거리는 강전의 뒷모습을 보며
불안한 마음을 달래고 있는데,
가인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우리 몸 위로… 뭔가가 지나다니지 않아?"
"너도… 느꼈냐?"
비인이 생각하고 싶지 않다는 듯, 질린 목소리로 되물었다.
"난 나만 느낀 건 줄 알았는데… 반쯤 꿈인가 싶기도 하고…"
"나도…"
채민의 대답에 다들 파랗게 질렸다.
"가인이 너, 보이는 거 없어? 영혼이라든가…"
"아냐, 없어. 여기는 깨끗해. 죽음의 흔적도 없어."
"그럼… 대체 뭐지?"
"계속 왔다갔다하는 것만 보면… 위험한 건 아닌 것 같은데…"
"그럼 그냥… 무시하고… 잘까?"
비인의 말에 다들 그냥 눈을 감았지만,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어두운 동굴 속에서 몸 위로 뭔가가 지나다니는 느낌은
그냥 무시해 버리기에는 위험했기 때문이다.
"강전이를 불러볼까?"
"괜히 큰소리 냈다가 이것들이 광분하면 어쩌려구?"
다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속닥거리고 있는데,
모닥불 앞에 앉아서 흥얼거리던 강전이 벌떡 일어나는 게 보였다.
강전은 나뭇가지 하나에 불을 붙여들고 동굴로 다가왔다.
"야, 야. 초비인. 교대…… 으아앗! 이게 다 뭐얏!"
"꺄아아아악!"
강전의 외침에 채민과 비인, 가인은 덩달아서 비명을 지르며 다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와중에도 채민은 우준이 무방비 상태로 누워 있다는 걸 깨닫고
얼른 우준에게 다가가 우준을 감싸려고 했다.
"나 일어났어."
채민이 정체 모를 무언가에 벌벌 떨면서도 우준의 앞을 막아섰을 때,
우준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 비명 소리를 듣고도 안 일어나는 게 이상한 거지…"
우준은 중얼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가인과 비인, 강전은 이미 동굴 밖으로 피신을 한 후였지만
뒤쳐진 채민과 우준은 여전히 동굴 안에 남아 있었다.
두 사람의 앞에는 다섯 마리의 뱀들이 혀를 날름거리며 두 사람을 둘러싸고 있었다.
강전이 들고 있는 불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뱀의 껍질은 금색으로 반짝였다.
혀를 날름거리지 않았으면 그것들을 황금으로 만든 동상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어슴프레한 동굴 안에서 뱀들의 날카로운 눈만이 차갑게 반짝였다.
그들은 채민과 우준을 공격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채민이 주먹을 꽉 쥐며 뒤로 물러났지만 뒤는 벽으로 막혀 있었다.
차가운 돌이 등에 닿자 채민은 섬뜩함을 느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독이… 있을까?"
뱀에게서 눈을 뗐다가는 바로 공격을 할 것 같아서
눈을 떼지도 못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우준에게 물었다.
"흐음…"
우준은 아직 어지러웠다.
피를 많이 흘리고 먹은 거라고는 각호의 고기뿐.
식물을 통한 적은 양의 수분조차 섭취하지 못한 우준이 멀쩡할 리 없었다.
하지만 책임감은 우준을 극한의 상황에서도 견딜 수 있도록 해주었다.
눈앞이 핑핑 돌고 뿌옇게 흐려지다가 멈춰져 있는 사물이 가까이 오는 것 같은 환각까지 보여서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지만, 우준은 다리에 힘을 주고 뱀을 똑바로 노려봤다.
"불… 불이면 되지 않을까?"
우준의 상태를 짐작한 채민이 조심스레 물었다.
"응?"
"원래 동물들은 불을 무서워하잖아. 이것들도 마찬가지 아닐까?"
"그래, 그렇겠다."
우준은 될 수 있도록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려고 했지만
죽어 가는 듯한 목소리는 우준이 얼마나 힘든지 짐작케 했다.
'우준아…'
채민은 죽을 것 같이 괴로운 상황에서도 자기들 때문에 내색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우준이 안쓰러워졌다.
"강전아."
"어, 불 던져줄까?"
"응. 잘 조준해서 이쪽으로 좀 던져 줘. 그리고 뱀들이 도망을 치면…"
"뒷일은 우리가 처리할게."
가인과 비인은 양손에 커다란 돌을 들고 뱀들과 맞설 준비를 끝낸 후였다.
"그럼… 간다!"
강전이 들고 있던 불을 채민을 향해 던졌다.
채민은 불을 잡아야했지만 후끈하는 열기와 나무에서 튄, 탄 조각이 얼굴에 닿아
깜짝 놀라 몸을 움츠리고 말았다.
"앗!"
장작은 채민의 몸을 향해 그대로 날았다.
'아, 또야…'
채민은 크게 화상을 입게 생겼다고 생각하며 눈을 질끈 감는데
뜨거움이 느껴지지 않았다.
조심스레 눈을 떠보니 우준이 장작을 손에 잡고 있었다.
화아아악-
우준이 뱀들의 바로 앞에서 불붙은 나무를 휘둘렀다.
붉게 타오르는 불이 몸부림을 치며 뱀들의 앞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뱀들은 전혀 두려워하는 빛이 없었다.
오히려 그까짓 불쯤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슬금슬금 둘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미치겠군."
우준이 중얼거리며 나무를 두 손으로 꽉 쥐었다.
"왜… 불을 안 무서워하지?"
"타지 않는가 보지."
우준은 중얼거리며 나무를 빠르게 휘둘러 가장 앞에 있는 뱀의 머리를 정확히 가격했고,
뱀은 힘을 견디지 못하고 공중으로 부웅 떠서 강전들이 있는 곳으로 날아갔다.
"으아아앗!"
뱀이 날아오는 것은 갑작스러운 사태였기에, 강전들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가
곧 정신을 차리고는 커다란 돌덩이로 뱀의 머리를 짓눌렀다.
뱀은 괴로운 듯 황금빛 몸을 뒤틀었지만 빠져나오지 못하고 결국은 축 늘어졌다.
강전은 그것으로 만족을 못하겠는지 뱀의 꼬리 부분에 손가락을 살짝 대고
전기를 내보냈지만, 이미 늘어진 뱀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전기 때문에 신경이 자극을 받아 조금 부르르 떨었을 뿐이다.
우준의 강한 힘에 뱀들은 잠시 머뭇거렸지만 네 마리가 한꺼번에 덮치려는 듯
우준과 채민을 향해 달려들었다.
우준은 빠르게 두 마리를 해치울 수 있었지만 나머지를 처리하기에는 시간이 없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채민이 나서서 그 중의 한 마리의 머리를 콱 밟았고,
마침 뛰어들어온 비인이 돌로 다른 한 마리의 몸뚱아리를 짓눌렀다.
으지지직-
뼈가 부서지는 소리 같은 게 들리자 채민은 인상을 찌푸렸다.
"각호에 비하면 손쉬웠지만… 뱀은 정말 징그러워."
모두 죽은 것을 확인한 후, 모닥불에 둘러앉아 한숨을 돌릴 때, 가인이 중얼거렸다.
"응, 정말 징그러웠어."
"하지만 채민이 넌 대단하던걸. 여자 애들은 원래 뱀 같은 거 못 건드리는데…
정말 든든해. 멋지더라."
비인이 웃으며 말했다.
"멋지긴…"
채민이 쑥스러운 듯 얼굴을 붉혔다.
사실은 채민도 뱀이 징그러워서 견딜 수 없었지만
이런 상황에서 뒤로 빠져 꺅꺅 소리만 지르는 무가치한 일행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잠도 별로 자지 못했는데 이미 동이 트고 있었다.
바위 산 위로 떠오르는 태양은 우준들이 살던 곳과 다를 바 없는,
눈이 따가울 정도로 환하고 만져보고 싶을 정도로 붉은 태양이었다.
다들 피곤이 풀리지 않아 아픈 눈을 손등으로 비비고 있는데
우준은 죽은 뱀들을 모아놓고 멍하니 그것을 보고 있었다.
"뭐 하냐?"
"금이야."
"응?"
"쓸모 있겠어, 이거."
"뭐 말이야? 설마 뱀을 말하는 건 아니겠지?"
"응, 그 뱀을 말하는 거다."
우준은 옆에 있던, 조금 날카로운 돌은 집어들었다.
"으윽! 뭐 하려는 거야?"
가인이 정색을 하고 물었다.
"껍질을 벗기게."
"껍질은 왜? 아무리 그게 진짜 금이라도 우리가 지금 금이 궁한 게 아니잖아."
"그걸 어떻게 알아?"
우준이 뭘 생각하는지 알 수 없는 멍한 눈동자로 가인을 돌아봤다.
비인의 옆에 앉아 있던 가인이 움찔했다.
우준은 정말 좋은 녀석이고, 책임감이 있기는 한데,
저 멍한 눈빛만큼은 정말 익숙해지기 힘들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이 세계,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모르잖아.
일단 가져갈 수 있는 건 다 가져가 봐야 돼."
"아, 그렇구나."
우준의 날카로운 지적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껍질 벗기는 건 내가 할게."
채민이 나섰다.
"아냐."
"나 진짜 괜찮아. 내가 해도 돼."
채민은 우준이 자기에게 징그러운 일을 시키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을 알았기에
우준을 옆으로 밀어냈다.
"나 해부 많이 해봤는걸. 뱀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야.
그리고 넌… 아직 팔도 다 안 나았잖아."
우준이 미간을 좁혔다.
'왜 이 애는… 다른 사람들의 짐을 자기가 지려고 하는 거지?'
강전도 인상을 찌푸렸다.
'뱀이 덮친 것도 자기 탓이라고 생각하고 있나 보네.'
비인은 채민이 안타까웠지만 잠자코 있었다.
지금 나서서 채민에게 무슨 말을 해봤자 채민은 납득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궂은 일을 맡아서 하는 걸로, 네 마음이 좀 편해진다면 가만히 있어야겠지.
하지만… 전부 네 책임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는데…'
채민이 땀을 뻘뻘 흘리며 다섯 마리의 뱀의 껍질을 다 벗겨냈을 때는
해가 바위산 위로 둥근 몸을 전부 드러내고 있었다.
풀 한 포기 없는 바위산이라서 그런지 아직 정오가 되지도 않았는데
타는 듯한 뜨거움에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흘렀다.
회색 빛 바위 위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으아, 진짜 쪄죽겠구만."
강전이 투덜대며 앞장을 섰다.
"부축해주지 않아도 되겠어?"
비인이 걱정스레 묻자 우준이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그들은 중간에 쉬는 일 없이 계속해서 산을 올랐고,
신발 밑창이 바위에 붙어 녹아 내릴 때쯤, 바위산의 가장 높은 곳에 도착했다.
둥글고 편평한 바위 위에 올라섰을 때, 그들은 세상을 얻은 듯 기쁨의 환호성을 내질렀지만,
그 환호성이 끝나기도 전, 끝을 알 수 없는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가장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 숲은 그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크진 않았다.
단지…
사면이 끝이 안 보이는 검푸른 바다로 둘러싸여 있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