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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바위산을 내려왔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들은 절망에 휩싸여 앞을 보지 못하고, 자신들이 무엇을 하는지 깨닫지도 못한 채,
그저 멍하니 바위산을 내려왔을 뿐이다.
내려와서 숨을 고르는 것조차 잊고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을 것 같은 이 끔찍하도록 눅눅한 섬에 대한 생각만 했다.
그러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우준을 보니,
우준은 여전히 뭘 생각하는지 알 수 없는 그런 표정이었다.
앞으로 어떻게 할거냐는 흔한 질문조차 하지 못하는 이유는
우준의 입에서 나올 절망적인 대답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해가 진 숲은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낄낄대며 우준들을 비웃는 것처럼 보였다.
가인이 떨며 두 팔로 몸을 감쌌다.
"자자."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불도 지피지 않아 어두운 그곳에서 우준이 꺼낸 말은
단조롭고 평범하기 그지없었다.
"자, 자자니!"
가인이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 이 상황에서 잠이 와? 여기 섬이잖아. 섬이라구.
끔찍하게 죽은 영혼들이 난무하는 섬이란 말이야."
"응. 나도 봤어."
"그런데 그런 말이 나오느냔 말이야! 앞으로 우리도 그 영혼들처럼 끔찍하게 죽을 거야.
이 섬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고 죽게 될 거라구!"
"왜?"
"왜, 왜냐니! 섬 주위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어.
수평선 너머에 희미하게나마 땅이 보였더라면 그래도 안심인데…
우리 아무 것도 못 찾았다구!"
가인은 극도의 혼란 상태에 빠진 듯 했다.
남들보다 좀 더 소심하기 때문에 수동적으로 움직이던 가인이
이렇게까지 자기의 감정을 크게 드러내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강전과 비인, 채민은 좀 당황해서 가인을 말리려고 했다.
하지만 우준은 아무래도 좋다는 표정이었다.
"그래. 하지만 우리는 처음부터 아무 것도 찾지 못했어.
저 앞에 바위산이 있다는 것조차 알지 못했잖아."
"하지만…"
"내일은 섬의 끝으로 가보자. 그리고 그곳에서 배를 만들자."
"아…"
가인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한 번도 배를 만들어본 적이 없고, 도구도 없어서 힘들겠지만…
어떻게든 되겠지."
안심을 시키기 위한 말이었다.
우준은 그들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1년이다.
적어도 그들의 17번째 해가 마감하기 전까지는 그들을 옭아매고 있는
무거운 운명의 사슬을 끊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든 운명은 그들을 죽이고 말 것이다.
그들에게 이 이야기를 하지 못한 것은,
1년이라는 시간밖에 안 남았다는 것을 알면 그들이 혼란에 빠져서
오히려 일을 망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배를 만들자는 우준의 말과 반드시 이 섬을 빠져나가면 길이 있을 거라는 듯한
우준의 표정은 그들을 안심시켜 주었고,
그들은 조금 편하게 잠이 들 수 있었다.
그 날 밤에는 아무 것도 나타나지 않았지만 우준에게는 꽤 괴로운 밤이었다.
죽을 것 같을 정도로 목이 마르고, 상처가 쑤셔왔다.
저쪽 세상에서는 이렇게 다쳐본 일이 없었다.
전직 경찰인 어머니를 둔 덕에 어릴 적부터 울고 싶을 정도로 체력 단련을 했고,
선생님인 주제에 싸움만 잘하는 어머니 친구 덕분에
체할 정도로 싸움을 배워야 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강해진 우준은 여러 명이 한꺼번에 덤벼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싸움에서 졌다고 해도 피가 철철 흐를 정도로 싸움을 하는 일은 거의 없지 않은가.
달리 의학적인 지식도 없는 데다가,
이 숲에서 어떤 게 이로운 식물이고 어떤 게 해로운 식물인지도 모르기에
섣불리 식물들에 손을 댈 수도 없었다.
'목 말라.'
우준은 울고 싶어졌다.
아무리 사명을 가지고 이곳으로 왔다고 하지만 우준은 고작 17살이었다.
저쪽에 있었더라면 사이 좋은 부모님과 함께 밥을 먹고,
친구들을 만나 떠들고 장난을 치다가 편한 침대에 누워서 잠을 자는 생활을 보냈을 것이다.
목이 마를 때는 물을 마실 수 있고,
피가 철철 흐르도록 깊은 상처를 입었을 때는 병원에도 갈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 이곳에는 아무 것도 없다.
그 흔하던 물조차도 없었다.
'진짜 목 마르다.'
조금 이른 아침에 일어나 가방에 챙겨두었던 각호의 고기 구운 것과 뱀 구운 것으로 요기를 했다.
"우준아. 너 너무 안 먹는 거 아니냐?"
강전이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우준은 아까부터 손가락 크기의 작은 고기 하나도 다 씹지 못하고 있었다.
우준의 입술을 바짝 말라붙어서 금방이라도 찢어져 피가 날 것 같았고,
눈 밑은 까맣게 변해 죽은 사람 같았다.
"뭐… 입맛이 별로 없어서…"
"그래도 잘 먹어야지. 바다까지 가려면 꽤 걸어야 할 텐데…"
"응, 뭐…"
우준은 어깨를 으쓱했을 뿐, 더 먹는 기색은 없었다.
돌을 씹는 것 같아서 도무지 음식이 넘어가지 않았다.
"일단 가보자."
대충 요기를 한 후에 그들은 바다가 있다고 짐작되는 곳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숲을 걷는 동안 이상한 형태의 벌레 따위가 습격을 하기도 했지만
그런 것들은 강전의 힘으로 어렵지 않게 처리할 수 있었다.
채민은 우준의 상태가 걱정이 되어서 계속 우준의 옆을 걷다가
우준이 자기 때문에 몇 번 다칠 뻔하자 한숨을 내쉬며 일행의 제일 뒤로 물러났다.
가인과 비인이 우준을 부축해주려고 했지만 우준은 괜찮다며 두 사람의 호의를 정중하게 거절했다.
해가 머리 위에 떠올랐을 때, 잠시 쉬며 남은 고기로 요기를 했고,
다시 걷던 그들은 채민이 뭔가에 발을 채여 크게 넘어지자 걸음을 멈췄다.
"아우우…"
채민이 넘어진 것은 오전부터 지금까지 여러 번 있었던 일이기에
그들은 대수롭지 않게 채민의 손을 잡아 일으켜주었지만,
비인이 채민의 발 근처를 가리키며 외쳤다.
"저기에 뭔가 묻혀 있어!"
사람의 영혼에 이골이 난 가인은 혹시 해골이 아닐까라는 생각부터 했지만
적갈색 흙 위로 삐죽 나와 있는 것은 적어도 해골은 아니었다.
"무슨… 상자 같은데?"
강전이 흙을 탁탁 털어 내며 말했다.
"파보자."
가인이 나뭇가지를 하나 집어들었다.
처음에는 이곳에 있는 어느 것도 만지고 싶지 않았지만 이제는 그 불쾌한 눅눅함에도 익숙해졌다.
손에 전해져오는 축축함도 더 이상 더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모두가 모여서 상자를 파내는 동안 우준은 바닥에 앉아 숨을 고르고 있었다.
'이거 정말… 죽을지도 모르겠는데…'
공포라기보다는 안타까움이 밀려왔다.
저들을 두고 그냥 죽는다는 것은 책임감 없는 짓이기 때문이다.
저들을 이 위험한 곳으로 데리고 온 것은 결국 자신이 아니던가.
"자물쇠가 걸려 있어."
가인의 낙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준은 힘겹게 일어나 그들에게 다가갔다.
상자의 모양새로 봐서는 땅에 묻힌 지 그리 오래 된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흙이 좀 묻어서 더러워졌기는 하지만 자물쇠도 그렇고,
모퉁이에 있는 쇠도 크게 녹슬어 있지 않았다.
"묻힌 지 3개월 정도 됐으려나?"
강전이 상자에 손을 대자 파지직하고 전기가 일었다.
"에고고… 안에 들어있는 게 타버릴지도 모르겠네. 난 못 건드리겠다."
강전이 물러났다.
"내가 해볼게."
우준이 나서자 비인이 만류했다.
"우준아, 넌 좀 쉬어. 너 진짜…"
죽을 것 같다는 말은 꿀꺽 삼켰다.
말에도 힘이 있다는데, 괜히 그런 말을 내뱉었다가 우준에게 큰일이라도 생기면
자신들은 목표를 잃게 되기 때문이다.
"괜찮아. 해볼게."
"아냐! 내가… 내가 할 수 있어!"
채민이 우준의 팔을 잡았다.
"나… 자물쇠 따는 방법 알아. 예전에 친구한테서 배웠거든."
"넌 대체 어떤 친구를 사귄 거냐?"
강전이 킥킥 웃었다.
"그냥 좀… 노는 친구."
"어머나. 너 노는 애였구나?"
아주 잠시였지만 그들에게도 농담을 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채민은 자기와 함께 있으면 닥치는 불행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스스럼없이 대해주는 이 아이들이 너무나 좋았다.
'내가 사람과 함께 있으면서 이렇게까지 편안했던 적이 있었나?'
채민은 머리에 꽂혀 있던 실핀을 하나 빼들었다.
나무 때문에 햇빛이 가려져서 조금 어둡기는 했지만 그럭저럭 해볼만 했다.
…중요한 건 보이는 게 아니라 손가락의 감각이야.
예전에 잠시 알던 친구가 해주었던 말을 떠올렸다.
…손에 전해지는 느낌을 예민하게 받아들여야 돼.
그건 핀으로 쑤시던, 번호를 돌려서 열던 마찬가지야.
보려고 하지말고 손으로 느끼려고 해야 돼.
그리고 손가락 끝에, '이거다!'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과감하게 돌진해야 하는 거야.
중학교 때 같은 반이었던 그 친구는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포기한 날라리였다.
학교 애들은 전부 그 친구를 무서워했지만 채민은 삶 자체가 무서웠기 때문에
딱히 그 친구를 무서워하지도 않았다.
그 친구가 미국으로 이민을 가기 전까지 채민은 그 친구와 많은 시간을 함께 했고
많은 것을 배웠다.
그 친구는 채민에게 이상한 일이 생겨도 특별히 채민을 무서워하는 기색은 없었다.
'그러고 보면… 그 때가 나에게 있어서 가장 즐거운 시간이었는지도 몰라.'
탈칵-
자물쇠가 열렸다.
"이야! 현채민 너 진짜 대단하다!"
"반해버릴 것 같아!"
"멋져! 멋져! 아, 진짜 반해버린 것 같아!"
"잘했어."
상자의 자물쇠를 연 것 정도로 크게 기뻐하는 동료들을 보며
채민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래, 지금도… 아주 즐거워.'
그 친구가 비행기를 타기 전에 했던 말을 떠올렸다.
…넌 말이지, 나 이상으로 좋은 친구들을 만나게 될 거야.
인생은 아직 길잖아! 이 세상엔 진짜로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살고 있다구!
'맞아. 이 세상엔 정말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있어.
그리고 아마도 내 인생은… 17년보다 더 길어질 거야.'
상자 안에는 표지가 단단한 회색의 두꺼운 노트가 3권 들어있었다.
다른 것이 없나 찾아봤지만 들어있는 것은 딱 그것뿐이었다.
날짜와 함께 뭔가를 빼곡하게 적어나간 그것은 아무리 봐도 일기장으로 보였다.
일기는 3권 째 중간부분에서 끝나 있었다.
"이상해."
가인이 중얼거렸다.
"응, 정말 이상하다."
강전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한글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영어도 아니고, 불어도 아니었으며, 독어나 일본어도, 한문도 아니었다.
아마도 그들이 살던 세상에는 없는 언어처럼 보였는데,
그것은 이상할 것이 없는 일이었다.
이곳은 원래 살던 곳이 아니니까.
정말 이상한 것은 생전 처음 접하는 그 언어를 읽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마치 한글을 읽듯 어려움 없이 그 글자를 읽을 수 있었다.
"지금 우리한테 닥친 일 중에 이상하지 않은 일은 없잖아."
비인이 침착하게 말하며 1권의 노트를 꺼내 쭉 훑어봤다.
"이 섬에 대한 이야기인가 봐. 이거 쓴 사람은 모험가인 모양인데,
아직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지 않은 이 섬에 대한 것을 알아보기 위해 이곳으로 건너왔다.
대륙의 남서쪽에 위치한 이 섬은 올 때 어려움이 없었지만 벗어날 때는 어려움이 있었나 봐.
빠져나가려고 할 때마다 갑자기 조류가 이상하게 변해서 빠져나갈 수 없었대.
마치 섬이 살아있어서 그를 보내고 싶어하지 않는 것 같았대."
그들은 오싹함을 느끼며 주위를 둘러봤다.
섬이 살아있다.
그 말이 너무나 그럴 듯하게 들렸다.
거대한 나무들이 그들을 굽어보고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는 것 같이 느껴졌다.
"그는 이곳에서 여러 가지 식물과 동물에 대해서 연구를 했대.
여기에 보면 먹을 수 있는 식물과 없는 식물에 대한 것도 있고,
이 섬의 대략적인 지도도 나와있어. 식수가 있는 곳도 표시되어 있고!"
"정말?"
"응. 여기서 멀지 않은데?"
"그럼 일단 물이나 먼저 퍼오자. 우준이 정말… 너무 위험하잖아."
가인이 우준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이럴 게 아니라, 다같이 그곳으로 가자.
우준이가 그랬잖아. 이런 곳에서 일행이 흩어졌다가는 큰일날 거라고…"
채민의 말에 다들 동의했다.
그들은 우준을 부축하고 물이 있다는 그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야, 뭐해? 빨리 가자."
가는 중에 잠시 걸음을 멈추고 바닥을 살피는 비인을 향해 강전이 재촉했다.
"아, 이건… 꽤 쓸모 있는 풀인 것 같아. 아까 여기서 그림을 봤거든."
겉으로만 보기에는 전혀 쓸모 있을 것 같지 않은 풀이었다.
검붉은 색의 그것은 피가 흘러 그대로 굳은 듯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비인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그 풀을 쑥 뽑아냈다.
"크흐흐흑."
풀을 뽑는 순간 들리는 나직한 신음에 다들 꽁꽁 얼어붙었다.
휘둥그레진 눈으로 서로를 쳐다보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물었다.
"설마… 그 풀이 낸 소리는 아니겠지?"
"그, 글쎄… 정말… 해괴하네."
그렇게 말하면서도 비인은 풀을 뽑는 것을 멈추지 않았고,
풀은 뽑힐 때마다 고통에 찬 신음을 흘렸다.
"이거 씹어서 먹으면 체력 보강이 된대. 상처도 금방 낫고…"
"근데 우준이가 이거 씹을 힘이나 있을까?
아까 보니까 고기도 제대로 못 씹던데…"
"내가 씹어서 먹여주지, 뭐."
비인이 나서자 강전이 비인의 등을 아프도록 타악 때렸다.
"아아, 아프다, 인마."
"야, 넌 남자야. 아무리 아무 생각도 없는 강우준이라도
남자가 씹어서 먹여주는 풀을 먹고 싶겠냐? 이왕이면 여자가 낫지. 안 그래, 채민아?"
"아, 나?"
채민이 당황해서 얼굴을 붉히고 되물었더니 강전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 말이야. 우준이가 묘하게 널 잘 챙겨주는 것 같기도 하고…
이왕이면 네가 씹어서 넘겨주는 게 우준이도 기뻐할 것 같은데?"
"기뻐하긴…"
그 때, 우준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기뻐한다는 거냐? 정신 멀쩡한 사람 두고 없는 취급하지 마."
"아, 강우준. 다 들렸냐?"
"힘은 없어도 귀는 멀쩡해."
우준이 중얼거리며 비인에게서 풀을 받아들었다.
씹고 싶지 않을 만큼 끔찍한 색깔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우준은 풀을 입에 넣고 우물우물 씹기 시작했다.
비릿한 냄새가 입안에 퍼졌다.
피 냄새 같은 게 아주 기분이 나빴다.
'이런 걸 먹을 날이 오다니…'
우준은 정말 끔찍하다고 생각하며 씹고 있던 약초를 꿀꺽 삼켰고,
그 모습을 보던 채민은 조금 알 수 없는 기분이 되었다.
자신이 씹어서 우준에게 먹여주는 야릇한 상황이 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우준이 기를 쓰고 풀을 씹을 만큼 자기와 입을 맞추기 싫었던 걸까하는 의문이 생겼기 때문이다.
'으아아아!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이런 때에 이런 속편한 생각이나 하다니…'
두 번 정도 더 약초를 씹어 삼킨 우준은 아직 기운이 전부 회복되지는 않았지만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일단… 물 좀 마시러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