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여기서 언제부터 산 거야?"
소녀는 밤에 갑자기 들이닥친 불청객들을 불만스럽게 노려봤다.
"네가 알 것 없어."
"까칠하긴…"
강전은 속에 있는 말을 그대로 밖에 내뱉었다.
가식적으로 소녀를 향해 웃어주지도 않고, 그렇다고 특별히 인상을 찌푸리지도 않았다.
"이름이 뭐야?"
채민이 다가와서 물었다.
소녀는 차마 채민에게까지 차갑게 대할 수 없어서 입안에서 웅얼거리듯 자신의 이름을 읊조렸다.
"소리현…"
"와아, 이름 진짜 이쁘다!"
순수하게 말하는 채민의 마음도 말과 같아서 리현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단지 조금… 조금 적응하기 힘들었을 뿐이다.
'내가 이 애랑 오랫동안 같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이 애는 한 번도 남들을 질책하거나 원망하는 생각을 한 적이 없어.
이 무너져 가는 오두막에 들어오면서도 '굉장하다.'라는 생각을 했을 뿐이야.
어떻게 저렇게 괴로운 삶을 살았으면서도 긍정적일 수가 있는 거지?'
리현이 살고 있는 곳은 여섯 명이 들어와 있기에는 너무 좁은,
잘못했다가는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오두막이었다.
숲의 나무로 만든 것 같은 칙칙한 색깔은 오두막 내부를 전체적으로 어두워 보이게 했지만,
식탁이라든가 선반 같이 생활에 필요한 가구들은 모양을 갖추고 있었다.
침대 위에 깔려있는 나뭇잎은 이 숲의 축축한 나뭇잎을 말려서 깔아놓은 것인지
상당히 푹신해 보였다.
"네가 만든 거야?"
가인이 물었다.
"아니. 내가 왔을 때는 이미 만들어져 있었어."
"그래? 그렇다면…"
"혹시 그 편지 주인이 만들어놓은 곳 아닐까?"
강전이 끼어 들었다.
"편지 주인이라니… 아…"
"너… 또 내 마음 읽었냐?"
강전의 불쾌하다는 목소리에 리현이 어깨를 으쓱했다.
"뭐, 어쩔 수 없잖아. 난 가까이 있는 사람의 마음이 저절로 읽힌다구.
물론 이 섬에 온 후로 그게 더 심해지기는 했지만…"
"예전에는 이렇게 자주 안 읽었어?"
"응. 읽힐 때도 있고 읽히지 않을 때도 있었거든."
"그렇다는 건, 이 섬에 이상한 힘이 있다는 거네."
강전이 손가락으로 이마를 문지르며 말했다.
"어쨌든 우준이 네가 많이 지쳐있는 것 같아서 하루는 묵을 수 있게 해주겠지만
그 이상은 안 돼. 내일 해가 뜨면 돌아가.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난 너희들과 떠날 생각 없어."
우준은 말없이 리현을 응시했다.
리현은 우준의 눈빛이 아주 불편했지만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고개를 돌렸다.
"일단 아까 읽던 일기장이나 계속 읽자."
비인이 가방에 소중하게 넣어두었던 일기장을 꺼내며 말했다.
그들은 촛불을 밝혀놓은 탁자에 둘러앉았고
리현은 왠지 그들이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침대에 몸을 눕혔다.
하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이거 큰일이네."
비인이 인상을 찌푸리며 어느 한 부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지저분한 종이 위에는 곧은 글씨로 이렇게 써 있었다.
[이 섬의 이상한 기운은 동식물을 변하게 만든다.
그리고 한 달에 한 번, 달이 둥글게 변하면서 붉은 빛을 내뿜는 날이면,
동식물이 미쳐 날뛰며 모든 것을 파괴하려고 든다.
몇 개월 간, 나는 운이 따라줬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한 번 더 그 시기가 온다면 살아남을 수 없을 것 같다.
아아. 안타깝구나.
이곳만 빠져나갈 수 있다면 이 섬의 밝혀지지 않은 비밀을 사람들에게 알릴 터인데…
누군가 이 기록을 발견한다면 반드시 살아 남아주기를…
그리하여 이곳의 진실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기를…]
다들 숙연해졌다.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도 이 섬에 대한 것을 밝히기 위해 애쓰고
끝까지 그것만을 걱정하는 이 사람의 열정이 대단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너도 이걸 겪었어?"
가인이 물었다.
"아니. 난 여기에 온지 오래 되진 않았어. 2주 정도?"
"그렇다는 건, 이 일이 일어나기까지 진짜로 얼마 안 남았다는 거네."
"그런데 리현아."
채민의 목소리에 리현은 누워있던 몸을 일으켰다.
채민은 왠지 함부로 대하면 안 될 것 같았다.
'나까지 저 애를 상처 주고 싶지 않아.
저 애는 단 한 번도 나에 대해서 나쁜 생각을 한 적이 없어.'
채민이 동그란 눈으로 리현을 쳐다봤다.
"넌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된 거야?"
"그건…"
리현은 말을 해야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였다.
저 애들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난…… 됐어. 상관할 거 없잖아. 어차피 내일이면 니들이랑 나는 남남이야.
내 일에 신경 쓰지 마."
"까칠하게 굴기는…"
강전이 투덜댔다.
"야, 어차피 얼굴 보고, 통성명도 한 사이에서 어떻게 돌아선다고 남남이 될 수 있냐?"
리현이 싸늘하게 웃었다.
"하아? 그래? 그럼 넌 내가 죽을 위기에 닥치면 네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날 구해줄 수 있어?
아니, 그게 아니지. 이런 큰일도 필요 없어.
내가 오갈 데도 없고 돈도 없어서 너한테 돈 빌리러 가면 나쁜 생각 없이 좋은 마음으로 빌려줄 수 있어?"
"없어!"
"그것 봐!"
"난 돈이 없어. 그러니까 돈을 빌려줄 수도 없지.
내가 너한테 돈을 빌려주지 않는 게 배알이 꼬이는 거라면
당당하게 말해주마. 난 돈이 없어서 너한테 빌려줄 수 없다고!"
"하…"
리현은 할 말을 잃었다.
"그게 무슨…"
"그게 문제인 거냐? 남들이 겉과 속이 달라서?
그러는 넌 얼마나 똑같은데? 완전 똑같아?
가끔 싫은 사람한테도 웃어주고, 싫은 일도 해줘야 하는 경우가 생기는 거잖아.
안 그래? 중요한 건 노력이지. 그 싫은 일을 받아들이고,
어떻게든 그것을 사랑하도록 노력하는 거. 그게 중요한 거 아냐?"
"…마, 말로는…"
"물론 말로는 아무나 다 할 수 있겠지. 하지만 넌 뭘 하고 있는데?
무슨 노력을 했는데?"
"……"
"너에게 상처 주는 사람들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 봤어?
아니면 마음을 읽지 않으려고 노력해봤어?"
"내가 왜 그 사람들을 이해해야 하는 거지?"
"왜라니… 당연하잖아. 사람이니까!"
"사람…"
"네 말대로 네가 나한테 돈을 빌리러 왔다고 치자.
난 도무지 별로 친하지도 않은 네가 나한테 돈을 빌리러 온 게 이해가 안 되는 거야.
그래도 무슨 사정이 있어서 그러는 거겠지라며 이해하려고 노력하잖아. 너도 마찬가지여야 하는 거 아냐?
상대방이 무슨 생각을 하던, 이 사람도 어떤 사정 때문에 그렇겠지 이해해야 하는 거 아냐?"
"넌 돈 안 빌려준대매!"
"그건 내가 돈이 없으니까 그렇지!"
"그만! 지금 요점에서 벗어나고 있잖아!"
비인이 끼어 들었다.
리현은 자신이 흥분한 게 창피해 얼굴을 붉혔다.
강전은 안 그래도 매서운 눈매를 더 치켜올리고 리현을 쏘아봤다.
"죽고 싶어서 왔어."
리현이 말했다.
"인간들에게 치이는 거 짜증나고 미치겠어서 죽고 싶다고 생각했어.
누구든 이 빌어먹을 능력 좀 없애줬으면 좋겠다고, 그게 아니면 차라리 죽고 말겠다고 바랐어.
그랬더니 갑자기 내 방의 거울이 빛을 내는 거야. 푸른빛을…
나도 모르게 손가락을 댔더니 이곳으로 빨려 들어왔어.
여기는 아무 것도 없더군. 사람이 없어. 그래서 그들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아.
여기처럼 마음이 편한 곳은 없었어! 니들이 오기 전까지는!"
"하지만…"
채민이 조심스레 리현의 곁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사실은 조금 외로웠지?"
"……"
"그래서 우리를 발견했을 때, 그렇게 도와준 거지?"
"그런 거 아냐! 니들 따위 죽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어!
내 목숨도 누군가 가져가 버렸으면 좋겠는데 남의 목숨 따위 어떻게 되든 내 알 바 아냐!"
"그러면 왜 싸운 거냐?"
가만히 앉아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우준이 입을 열었다.
"뭐?"
"이곳에 있는 괴물들이 수없이 널 공격했겠지.
너 죽고 싶다면서 왜 그 괴물들이랑 싸운 거냐?"
"그건… 그, 그건…"
"결국 살고 싶었던 거잖아."
"닥쳐!"
리현이 벌떡 일어나서 오두막 밖으로 뛰쳐나가려 했지만
그 전에 우준이 리현의 손목을 잡았다.
"잘 들어, 소리현."
우준이 듣기 좋은 낮은 음색으로 말했다.
"널 기만하는 쓰레기 같은 인간이 이 세상에 많다면
너의 상처를 감싸주고 네게 진심을 보여줄 사람도 이 세상에 있는 거야.
힘들겠지만 조금만 참아 봐. 그러면… 분명 변하게 될 거야. 우리들 둘러싼 세상이…"
리현이 입술을 깨물었다.
어째서 이 애의 목소리는 이토록 믿음이 가는 걸까?
지금껏 어느 누가 그럴 듯한 목소리로 말을 해도 듣지 않았는데
이 애가 하는 말은 믿고 싶어진다.
그게 불안해서 리현은 우준의 팔을 뿌리쳤다.
"이거 놔! 아무리 네가 그럴 듯하게 말해도 나는… 니들이랑 함께 할 생각 없어!"
"그래도 난 네가 우리랑 같이 가줬으면 좋겠어."
"시끄러!"
리현은 결국 버럭 소리를 치고 오두막에서 나가버렸다.
"아, 기집애. 되게 까칠하네."
"그러게 말이야. 왜 자기 혼자만 상처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거지?
부모님한테 버림을 받은 나도 있는데…"
가인이 중얼거렸다.
"부모님한테… 버림받았어?"
채민이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가인을 쳐다봤다.
"응. 난 태어났을 때부터 귀신을 봤거든.
부모님은 그런 내가 무서웠나 봐. 아무도 없는 곳을 쳐다보기도 하고,
보이지 않는 것에 휘둘리기도 하고 그랬으니까…
내가 4살 때쯤이었나? 아침에 일어났더니 집이 텅 비어있더라.
말 그대로 부모님이 증발해 버린 거지.
난 영문도 모르고 울어댔고 날 발견한 사람들에 의해서 고아원에 가게 됐어.
그런데 거기서도 다들 날 무서워했어. 내가 자꾸 이상한 걸 보니까…
그래서 난 친구도 없었고 날 이해해주는 사람도 만나지 못하고 혼자 지내다가
10살 때 고아원을 나왔어. 사람들의 시선을 견디기 힘들었거든.
뭐, 그래도… 그 나이쯤 되니까 내가 귀신을 본다는 것만 안 걸리면 사람들이
날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걸 깨닫게 되더라구. 그래서 티를 내진 않았지.
하지만 혼자서 그 모든 공포를 견뎌내기는 너무 힘들더라. 괴롭고 괴로워서 죽어버리고 싶었어.
어느 날, 귀신 때문에 목숨을 잃은 사람을 보고 정신 없이 달렸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어느 폐건물에 앉아 있더라구. 귀신이 엄청나게 많은…
무서워서 움직이지도 못하고 며칠을 그곳에서 벌벌 떨고 있다가 우준이를 만난 거야.
우준이가 날 찾아냈어."
"아…"
채민이 우준을 돌아봤다.
"그랬구나. 그러면 비인이랑 강전이는?"
"우린…"
강전이 어깨를 으쓱했다.
"좀 웃겼어. 내가 학교 끝나고 집에 가는데 비인이 녀석이 갑자기 날 붙잡았어.
생전 처음 보는 녀석이 날 붙잡아서 한다는 말이,
'너구나. 너야.'였어. 큭. 웃기지 않냐? 미친놈을 만났구나 싶었지.
그래서 손을 뿌리치고 걸어가는데 계속 따라오는 거야.
그 때 난 내가 남자한테까지 인기가 많다는 생각에 좀 어깨가 으쓱했는데,
이 녀석이 그러더라. 날 봤다고… 만나고 싶었다고…
사실 이 녀석이 여자에게 인기가 많을 타입이기는 하지만 내 입장에서는 이 녀석이 좋아질 리가 없잖냐.
남자인데… 그래서 짜증을 내면서 꺼지라고 하는데 우준이랑 가인이가 다가왔어.
그러더니 '운명을 바꾸자.'라고 말하는 거야.
난 어처구니가 없었지. 몇 분 사이에 웬 남자놈들이 이렇게 꼬이나 싶은 거야.
하지만 우준이한테 이런저런 설명을 들었고, 이 녀석이 하는 말은 어쩐지 설득력이 있어서
결국 합류하게 된 거야. 같이 있다가 널 발견했고…"
밤이 점점 깊어지고 있었지만 리현을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숲의 나무들이 웅웅거리며 낮게 비명을 질러댔고,
정체 모를 짐승의 포효 소리가 가까운 곳에서 들려오기도 했다.
며칠 밖에서 노숙을 했던 그들은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낡은 오두막조차도 감사할 지경이었다.
"소리현 찾아봐야 하는 거 아냐?"
강전이 걱정스러운 듯 입을 열었다.
"아까 걔 싸우는 걸로 봐서 자기 한 몸 지킬 수는 있겠다만…
그래도 여자 혼자 나가서 위험할 수도 있잖아. 이런 밤중에…"
"오두막 앞에 있어."
우준이 말했다.
"엥? 어떻게 알았냐, 너? 너도 마음을 읽냐?"
"그게 아니라… 인기척이 느껴져서…"
우준은 이 세계로 온 후에 온몸의 감각이 몇 배쯤 더 예민해진 것을 느끼고 있었다.
리현은 오두막 앞에서 움직임 없이 앉아있었지만 우준은 그것조차도 감지할 수 있었다.
"와아. 대단하네."
가인이 신기한 듯 우준에게 다가왔다.
"귀 되게 좋다?"
"귀가 아니라… 온몸의 신경이 변한 것 같아. 니들은 안 그래?"
"음… 난 별로 모르겠는데…"
"나도…"
다들 고개를 갸웃했다.
"저기… 내가 나가보고 올게."
채민이 말했다.
"리현이가 좀 걱정이 돼서…"
"그래. 걔가 넌 좀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던데… 한 번 나가봐."
강전이 손을 살짝 올리며 말했다.
달리 갈 곳이 없었기에 오두막 앞에 앉아 있었다.
이곳은 숲임에도 불구하고 하늘도 풍경도 전혀 예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곳에 오면서부터 마음이 놓인 것은 사실이다.
언제 사람의 마음을 읽게 될지 몰라 전전긍긍하던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삐걱-
오두막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채민이 밖으로 나왔다.
채민은 발소리를 죽이고 다가와 리현의 옆에 앉았다.
"왜 나왔어? 추우니까 들어가."
리현의 말에 채민이 고개를 저었다.
"그냥 네 옆에 있을래."
"친한 척 하지 마."
"……"
채민은 말이 없었다.
리현은 흘끗 채민의 옆모습을 훔쳐보고는 다시 눈을 돌렸다.
아까부터 계속해서 들려오는 채민의 마음이 부담스러우면서도 그리웠다.
이 애는 리현이 오두막 밖으로 나왔을 때부터 계속 리현을 걱정하고 있었다.
'어두운데 나가서 다치면 어쩌지?'
'많이 상처 받은 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하지?'
'무슨 말을 해야지 리현이가 기분이 안 나쁠까?'
'앗! 지금 내 마음을 읽고 있는 거 아냐?'
마지막 생각을 읽은 리현은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흘렸다.
처음으로 타인을 귀엽다고 생각했다.
'귀여워, 이 애.'
"난 위험하지 않아."
리현이 말했다.
"일단은 동물들의 마음도 대충 읽을 수 있거든. 이곳에 와서부터 말이야.
그래서 걔들이 언제 공격을 할지, 어떤 방식으로 공격을 할지 대충 알 수 있어.
지금 이 주위에는 우리를 공격하려고 하는 게 아무 것도 없어.
그러니까 일단은 위험하지 않아."
"헤에, 다행이다."
동그란 눈이 반달을 만드는 채민의 눈웃음이 못 견디게 사랑스럽다.
'뭐, 뭐야? 나 왜 이래? 다른 사람한테 정을 주면 안 된다구!'
리현은 마음을 굳게 먹어야겠다고 다짐했지만 그건 쉽지 않았다.
몸을 옆으로 조금씩 움직이며 흥얼거리는 채민이 귀여웠기 때문이다.
"난 있지…"
"아, 운명을 바……"
채민이 말하려는 걸 미리 알아버려서 말하려는데 채민이 홱 돌아보며
검지로 리현의 입술을 꼭 눌렀다.
그리고 장난스럽게 눈을 가늘게 뜨고 흘겨보며 말했다.
"그냥 내가 하는 말로 들어. 내 마음을 읽었어도 내가 하는 말로 들어.
원래 그래야 하는 거잖아. 그치?"
그러면서 배시시 웃는 모습이 밉지 않아서 리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난 운명을 바꾸게 되면 제일 먼저 사람이 굉장히 많은 토요일에 명동에 가고 싶어.
그래서 친구랑 손 붙잡고 돌아다니면서 쇼핑도 하고, 밥도 먹을 거야."
"……"
"늘 불행이 따라다니니까 주위 사람들까지 위험해져서 그런 걸 해본 적이 한 번도 없거든.
그래서 그런 게 너무 하고 싶었어. 너무 하고 싶어서 매일 책으로, 잡지로, 영화로, 인터넷으로
그런 것들을 보면서 대리 만족을 했는데… 운명을 바꾸게 되면 그걸 할 수 있겠지?
꼭 하고 싶어."
채민의 소박한 꿈이 리현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채민은 진심으로 그것들을 바라고 있었다.
다른 여자 아이들이 당연한 듯 하는 그런 일을 채민은 간절히 꿈꾸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리현은 자신도 모르게 채민에게 말할 뻔했다.
'그래, 나랑 같이 하자. 나랑 쇼핑도 하고, 영화도 보고, 밥도 먹고…
어느 날은 같이 바다에도 놀러가고 그러자.'
목구멍까지 넘어온 말을 꿀꺽 삼켰다.
'사람이 많은 곳은 나에게도 괴로워. 그들이 하는 불쾌한 생각들이 전해지거든.
하지만… 넌 정말 착하구나. 난 내가 상처를 받을까 봐 그런 일들을 피하는데,
넌 다른 사람들이 너로 인해 다치게 될까 봐 하고 싶은 일들을 꾹꾹 눌러 참고 있었던 거구나.
넌 정말 너무 착하구나, 채민아.'
어스레한 달빛이 소리 없이 내려앉았다.
달빛은 눅눅하고 불쾌한 숲의 분위기마저 몽환적으로 바꾸었다.
아름다운 달의 가루가 꿈결처럼 번져나가고 있었다.
"같이 가고 싶어."
채민의 목소리 또한 꿈결 같았다.
"너랑 같이 가고 싶어."
"……"
"우리 둘 다 사람이 많은 곳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어서
함께 쇼핑을 하고 밥을 먹는 거야. 그렇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산타할아버지를 기다리는 어린 소녀처럼 꿈에 부푼 채민의 목소리가 듣기 좋아서
리현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가고 싶지 않아, 채민아."
리현이 힘들게 말했다.
"어릴 적에 부모님이 여행을 가시다가 돌아가셨어.
그리고 난 혼자 남게 됐거든.
부모님 보험금이랑 아버지 공장 같은 것들을 처분해서 유산이 많긴 했지만
어린 나이라서 보호자가 필요했어. 그래서 친척들이 날 맡겠다고 달려들었거든.
근데 그 친척들 중에서 진심으로 우리 부모님의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더라.
전부 돈에 대한 생각뿐이었어. 돈, 돈, 돈!
그렇게 친했던 이모마저도 날 데려가서 돈을 자기가 사용한 후,
난 대충 키우다가 분가시킬 생각을 하고 있더라. 하하…
난 아무도 믿을 수 없어. 너도 마찬가지야. 네가 나쁜 애가 아니라는 건 알아.
하지만… 언제 어떻게 변하게 될지 몰라. 그래서 난… 너희들과 함께 가고 싶지 않아.
지금 이렇게 꿈에 부풀어 있다가도, 언젠가는 변하게 될 게 분명하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