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변하는 게 두려운 건 너만이 아니야."
채민이 말했다.
"나도 무서워. 지금 저 애들이 나에게 잘 해주고, 내 불행을 이해해주지만,
더 큰 불행이 생겼을 때 날 배척하면 어쩌나 너무 두려워.
처음으로 사귄 친구들이라서 두려움이 더 커. 미움 받을까 봐 무서워.
하지만… 그 이상으로 즐거워. 저 애들과 함께 있는 거.
변할지도 모른다는, 아직 생기지도 않은 불안 때문에 현재의 행복을 포기하고 싶지 않아."
아방해 보이는 채민이 이토록 분명하게 자신의 의견을 전하는 것에 리현은 조금 놀랐다.
"만약 저 애들이 내 불행 때문에 날 멀리하게 되고 싫어하게 되면…
그 때 가서 다시 어떻게든 해볼 거야."
리현이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채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난 너처럼 용감하지가 못한가 봐."
땅이 입을 벌리고 뜨거운 숨을 토해냈다.
독한 냄새가 나는 연기와 함께 불길이 치솟았다.
숲이 울분을 토해내듯 온몸을 떨었고 땅이 내뱉은 붉은 용암의 덩어리들은
하늘을 잠시 밝히다가 숲에 떨어졌다.
나무들은 땅이 뱉은 뜨거운 한숨에 몸이 닿으면 자신들의 몸을 불태워 하늘을 붉게 물들였다.
가장 먼저 깬 것은 우준이었다.
감각이 예민해진 우준은 땅이 갈라지기 전부터 깨어 있었다.
콰광!
가까운 곳에 뭔가 떨어지는 소리에 나머지 일행도 전부 깨어났다.
"뭐, 뭐지?"
가인이 겁에 질린 목소리로 물었다.
"폭발이야."
리현이 눈을 비비며 말했다.
"종종 있어. 내가 이곳으로 온 후로 세 번째 폭발일 거야."
"뭐, 뭐가 폭발하는 건데?"
"화산 폭발 비슷한 건데… 땅이 갈라지면서 용암이 터져나오더라구.
큰 폭발이 일어난 적은 없으니까 아마 괜찮을 거야.
대부분 숲에서 불이 났다가 제풀에 꺼지더라구. 숲은 굉장히 눅눅하니까…"
"하지만 운 나쁘게 여기로 불똥이 튈 수도 있는 거 아니냐?"
창문으로 새어 들어오는 타는 냄새를 맡으며 강전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대체적으로 폭발은 그리 크지 않……"
콰앙-
하늘을 찢는 듯한 소리와 함께 오두막 위에 불 붙은 돌덩어리 하나가 떨어진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우지직-
처음부터 바람을 피할 정도로만 만들어진 오두막의 지붕은 거대한 돌덩어리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고, 뜨겁게 달구어진 돌덩어리는
채민의 침대가 있는 바로 그곳으로 투욱 떨어졌다.
다행히 돌이 떨어지기 전에 우준이 채민을 끌어당겨서 채민은 살 수 있었다.
우준이 채민을 끌어당긴 것은 우연에 가까웠다.
언제나 채민에게만 안 좋은 일이 생기니 이번에도 그러지 않을까 싶어서
손을 뻗어 당겼는데 역시나 그곳으로 돌이 떨어졌던 것이다.
한 번은 이렇게 피할 수 있었지만 또 돌이 떨어지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일단 밖으로 나가야하지 않을까?"
비인이 말했다.
"하지만 밖이 더 위험할 것 같은데…"
가인이 말할 때, 다시 돌 하나가 오두막을 향해 날아왔고
이번에는 오두막을 지탱하고 있던 기둥 하나를 무너뜨렸다.
와지직-
"피햇!"
우준의 외침과 함께 다들 오두막 밖으로 몸을 날렸지만
채민은 침대에 발이 걸려서 넘어지고 말았다.
채민이 넘어질 거라고는 생각 못 했던 우준은 그만 채민을 잡고 있던 손을 놓치고 말았다.
"안 돼!"
우준이 다시 돌아서서 채민을 구하려는데,
우준의 옆을 스쳐 지나가는 그림자가 있었다.
리현이었다.
우준보다 몸이 빠른 리현은 채민의 위에 있던 나무가 떨어지기 전에 채민의 손을 잡을 수 있었고,
지체 없이 채민을 당겼지만 리현이 간과한 것이 하나 있었다.
리현은 한 손으로 채민을 끌고 나올 만큼 힘이 세지 못했던 것이다.
당연히 나오는 속도가 조금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채민은 시큰거리는 발목의 통증을 무시하려고 애쓰며 리현의 뒤를 따라 나왔고
두 사람이 오두막 문을 나서려고 하는 그 순간에 오두막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갓!"
리현은 온힘을 다해 채민의 팔을 끌어당겨 밖으로 던졌고
그 힘에 이기지 못해 비틀거리다가 주저앉고 말았다.
"리현아!"
리현의 위로 와르르 무너지는 오두막을 보며 채민이 절규했다.
다시 달려들어가려는 채민의 팔을 붙잡은 것은 가인이었다.
"안 돼, 채민아. 지금 들어가도 구하지 못해. 너마저 죽을 셈이야?"
"하지만, 하지만…"
"리현이는 목숨을 바쳐서 널 구한 거야."
"으… 으으…"
"가만…"
오두막을 향해 서 있던 우준이 오른손을 들며 말했다.
"죽지 않았어."
"응?"
"아직 죽지 않았어."
검은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불붙은 돌덩이와 용암 덩어리들이 오가는 위험한 상황이었다.
몸을 피해야 마땅한데 우준은 오두막을 향해 달려갔다.
"야, 야! 곧 전부 불탈 거라구!"
강전이 다급히 외쳤다.
"아니야, 아직 안 죽었어!"
우준은 분명 리현의 기척을 느꼈다.
오두막은 형편없이 무너져 내렸지만 리현의 기척이 느껴지는 곳이 있었다.
날카롭게 조각난 나무들을 피해 들어간 우준은
조금도 다치지 않고 멀쩡한 리현을 발견할 수 있었다.
리현은 놀란 눈으로 우준을 쳐다보고 있었다.
"살아있었구나."
순간 우준의 마음이 강하게 읽혔다.
'다행이다!'
우준의 마음은 진심으로 외치고 있었다.
'죽지 않았어!'
"얼른 이곳에서 나가자."
우준이 내미는 손을 리현은 더 이상 거부하지 않았다.
커다란 손에 자신의 손을 포개놓으며 리현이 중얼거렸다.
"나 읽을 수 있었어. 나무가 떨어지려는 위치를 읽을 수 있었어."
분명 그랬다.
오두막이 무너지는 순간,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어디로 떨어질지 정확하게 읽혔다.
마치 사람의 마음을 읽을 때처럼 나무들도 자신들이 떨어질 곳을 알리고 있었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기에 리현은 무척 당황했다.
리현이 무사히 나오는 것을 보고 일행은 환호를 하며 달려들었다.
"이야! 살아있었구나!"
"다행이다!"
하지만 채민은 겁에 질린 표정으로 가까이 오지 못하고 그들을 보고만 있었다.
"채민아…"
리현은 채민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었기에
자신을 둘러싼 아이들을 가만히 밀쳐내고 채민에게 다가갔다.
"가까이 오지 마!"
"채민아."
"나, 나 때문이야! 내가 그 오두막에 있어서… 그래서… 그래서 돌이 날아온 거야.
그래서 오두막이 무너진 거라구! 나 때문에 네가 죽을 뻔했어!"
"그런 거 아냐, 채민아."
"그런 게 아니긴 뭐가 아니야! 나 때문이라는 거 다들 알잖아.
너도 알고 있잖아. 너 진짜로 죽을 뻔했어. 진짜 죽을 뻔했다구!"
"나, 읽을 수 있어."
"응?"
채민의 얼굴이 눈물 범벅이 된 것이 안쓰러워서 견딜 수가 없다.
"나 물건들의 움직임을 읽을 수 있어. 약하게나마…"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러니까 이제 괜찮아."
리현은 채민이 피하기 전에 달려가 채민을 끌어안았다.
"이, 이거 놔! 또 위험해져!"
"괜찮아."
리현은 몸부림치는 채민을 단단히 안고 말했다.
"이제 난 물건의 움직임을 파악할 수 있으니까 네가 위험할 때 대비할 수 있어."
"……"
"같이 가자."
"……"
"나 너랑 같이 가고 싶어. 그래서 언젠가… 같이 쇼핑을 하고 밥을 먹고 싶어."
채민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 리현의 어깨를 적셨다.
리현은 가느다란 채민을 안고 채민의 등을 부드럽게 토닥였다.
"그러니까 같이 가자. 이제 내가 지킬게, 널."
"하지만, 하지만 난…"
"넌 내 마음을 지켜 줘. 다른 모든 사람들이 나에게 가식적으로 대하더라도
너만은 나에게 진심을 보여줘. 내가 미울 땐 밉다고 말해줘.
그러면 우리는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는 거니까…"
땅은 숨을 고르며 서서히 벌린 입을 다물기 시작했고
더 이상 하늘에는 핏빛의 불덩어리가 오가지 않았다.
하지만 여전히 흩날리는 새까만 재가 뒤섞인 공기는
숲의 불쾌함을 몇 배나 더하게 했다.
나무 사이로 서서히 동이 트고 있었다.
해안은 오두막이 있던 곳에서 멀지 않은 곳이 있어서
모험가가 남겨둔 책자에 있는 지도를 확인하며 걸어가니 금방 발견할 수 있었다.
탁 트인 푸른 바다는 어느 세계에서나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새파란 하늘 아래에 하늘과 같은 모습으로 이어진 바다는
태양의 빛을 반사시키며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육지와 부딪혀 철썩거리는 바다의 숨소리는 막막하기만 했던 그들의 가슴을
잠시나마 시원하게 뚫어주었다.
바다의 비릿한 내음조차도 원래 살던 세계와 같아서 그들은 조금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갈매기가 없어."
우준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어떻게 이곳을 빠져나가야 할지 고민하는 순간에 우준이 내뱉은 말은
참으로 뜬금없는 말이었기에,
일행들은 다들 어안이 벙벙해져서 우준을 쳐다봤다.
"게도 없네."
"야, 야."
강전이 우준의 어깨에 살짝 손을 올려놓았다.
"이런 바다는 싫어."
어린 아이 같은 투정에 다들 피식 웃었다.
신뢰할 수밖에 없는 믿음직스러운 리더였던 모습의 우준에게서 다른 면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혹시 조개 껍질이라도 있을까 싶어서 발로 모래사장을 툭툭 차던 우준은
결국 아무 것도 발견해내지 못했다.
"얼른 여기를 빠져나가자. 진짜 기분 나쁜 곳이야."
"게나 갈매기가 있으면 안 빠져나가려고 했냐?"
"……"
"야, 야. 뭐야, 그 정곡을 찔렸다는 표정은…?"
"……"
"눈 피하지 마, 이 자식아!"
강전이 장난스레 말하며 팔로 우준의 목을 졸랐다.
우준은 강전을 대롱대롱 매단 채로 일행을 돌아보며 말했다.
"나무를 모아오자. 우리에겐 배가 필요해."
"근데…"
가인이 끝이 안 보이는 바다를 응시하며 물었다.
"우리 중에 배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이 있긴 한 거야?"
"……"
다들 대답을 하지 못하고 서로의 눈치만 살폈다.
"그럼 다들 수영은 할 줄 알아?"
"난 잘 해."
우준이 단호하게 말했다.
설령 진짜 잘한다고 해도 자기 입으로 당당하게 잘한다고 말할 수 있는 우준이
경이롭다 못해 신기하기까지 한 아이들이었다.
"강전아, 넌?"
"난 물에 들어가서 허우적대면 전기가 흘러나와서 주위 사람들이 다 죽을 걸."
"전기뱀장어."
우준이 말했다.
"오케바리. 바로 그거!"
강전이 씩 웃으며 한 쪽 눈을 찡긋했다.
리현은 자기의 콤플렉스에 대해서 지적하는데도 구김 없이 웃을 수 있는 강전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강전이는 물에 닿으면 안 되고, 우리들은 대부분 수영을 못 해.
우준이가 잘 한다고는 하지만 몇 명이고 구해낼 수 있는 건 아니잖아.
우리 엄청 튼튼한 배를 만들어야 돼."
가인이 긴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게다가 섬 근처의 바다에 이상한 조류가 있다면서?
지금은 이렇게 잔잔하고 평화로워 보이지만 괜히 도전했다가 조류에 휘말려서 빠지게 되면…
우리들… 다 죽어."
"응, 맞아."
우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인마. 네가 그렇게 확실하게 수긍하면 어쩌자는 거냐?"
강전이 웃음기 담긴 목소리로 물었다.
얼마 전까지는 조금 신경질적이고 성격이 급했던 강전이지만
일행 한 명을 더 만났다는 사실에 신경이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하지만…"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바다를 응시하던 우준이 일행을 향해 몸을 돌렸다.
우준의 검은 눈동자는 흔들림이 없었다.
"이것저것 다 따지다 보면,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조금 무모하게 생각이 되어도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니까,
용기를 내서 도전해야 돼."
우준이 일행의 뒤로 보이는 숲을 쳐다봤다.
간밤의 지진으로 인해 쓰러지거나 부러진 나무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누군가 물에 빠진다면 어떻게 해서든 구해낼게.
조류가 배를 휩쓸면, 그건 그 때 가서 빠져나올 방법을 생각하면 돼.
지금 우리는 이 순간에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되는 거야.
우리가 이 순간에 할 수 있는 건, 배를 만들만한 나무를 모아오는 일이야."
"내가…"
비인이 살짝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예전에 탈 것에 관심이 많아서 배를 만드는 방법에 대한 책을 읽어본 적이 있어.
어떻게 만들어야 좋을지 생각해 볼게."
"응. 그렇게 해. 그리고 채민이랑 리현이는 나무를 묶을 때 쓸 나무 줄기 같은 거랑
바다에 나갔을 때 먹을 식량을 좀 조달해 줘. 이 책에 먹을 수 있는 게 기록되어 있으니까…"
"하지만 나도 나무 같은 거 들 수 있어."
채민이 말했다.
리현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채민을 돌아봤다.
채민은 자기 때문에 일행이 불행에 휘말린다고 생각해서
일부러 궂은 일을 맡으려고 하고 있다.
"괜찮으니까…"
우준이 채민에게 다가왔다.
우준의 얼굴은 언제나 그렇듯 무표정하고, 무슨 일을 생각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멍했지만
눈빛은 굉장히 다정해서 채민의 상처를 어루만져주고 있는 듯 했다.
우준이 손을 올려 채민의 어깨에 살짝 얹었다.
"내가 말한 대로 해줘. 괜찮으니까…"
리현은 채민이 우준의 말에 큰 위안을 받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흔들리던 채민의 마음이 서서히 안정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준을 향하고 있는 채민의 눈빛은 리더를 향한 신뢰 이상의 것이 담겨 있었다.
'채민이 너…'
리현은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래. 저 애라면 괜찮을지도 모르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