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햇빛 한 바구니, 고양이 두 스푼-15화 (15/91)

-15-

얼음장 같이 차가운 바다 속에서 얼굴을 스치는 하늘하늘거리고 부드러운 이것은…

'머리카락?'

우준은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우준의 눈앞에 보이는, 두 개의 바다.

아니, 푸른색의 눈동자.

숨을 쉴 수 없어 괴로운 와중에도 그 푸른 눈동자가 가슴에 콱 박혀서 잠시 넋을 잃었다.

살며시 감기는 눈꺼풀에 잠시나마 가려지는 푸른 눈동자가 그리워져서

우준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뻗은 손에 잡히는 것은 눈동자가 아닌 푸른색 머리카락.

상대가 아프지 않도록 살짝 거머쥐는데 머리카락의 주인공이 퍼뜩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우준은 자기 앞에 있는 푸른 눈동자의 주인공의 모습을 처음으로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사람이었지만 사람이 아니었다.

사랑스럽게 생긴 작은 얼굴도, 얼굴에서 이어지는 미끈한 목과 어깨도,

가리지 않고 그대로 드러나 있는 풍만한 젖가슴과 늘씬한 배도,

어깨에서 이어진 가늘고 긴 팔도 전부 인간이었다.

하지만 배에서 이어진, 다리가 있어야 하는 그 부분에는

다리가 아닌 다른 것이 달려 있었다.

그녀의 머리카락 색과 같은 색을 가진, 속이 비칠 것 같은 맑은 푸른색의 꼬리지느러미가…

'인어…?'

왈칵-

너무 오래 물 속에 있어서 공기가 부족해진 폐가 멋대로 공기를 달라고 조르는 바람에

자기도 모르게 입을 벌려 물을 왈칵 들이마시고 말았다.

짠물이 입으로 밀려들어와서 목구멍이 타는 듯이 아파졌다.

우준의 괴로운 표정을 본 인어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조금씩 우준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기에 우준은 망설이지 않고 손을 내밀었고,

우준이 자신의 손을 잡는 걸 확인한 인어는 무서운 속도로 위를 향해 헤엄치기 시작했다.

"푸하앗!"

바다의 향기가 가득 담긴, 신선한 공기를 마실 수 있었던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우준이 가장 먼저 한 것은 주위를 둘러보는 일.

다행히 다른 일행들은 뒤집힌 배를 단단히 잡고 있었다.

"우준아!"

우준을 발견한 강전이 손을 흔들었다.

강전은 자기 몸에서 나오는 전류가 바다에 통할까 봐 걱정이 되어서인지,

배 위에 올라가서 물에 안 닿도록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있던 차였다.

"너도 인어가 구해준 거야?"

헤엄쳐서 다가오는 우준에게 가인이 물었다.

우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주위를 둘러봤다.

바다에 섞여 쉽게 발견할 수는 없지만 하늘하늘 움직이는 머리카락이 얼핏 보인다.

"하늘색…머리카락의…"

우준이 중얼거리자 비인이 고개를 갸웃했다.

"하늘색? 우리를 구해준 건, 녹색 머리카락이었는데? 꼭 해초 같은…"

"하늘색이든, 녹색이든… 내가 살아 생전에 진짜 인어라는 걸 다 보다니…

누가 믿어주기나 하겠냐? 조낸 신기하다."

강전이 활기찬 목소리로 말했다.

"게다가 우리들, 빠져나올 수 없다는 섬의 조류에서도 빠져나왔잖냐.

이제 육지에만 도착하면 만사 오케이라구!

으아, 진짜 소용돌이에 휘말렸을 때는 딱 죽는 줄만 알았는데…"

"육지에만 도착하면 만사 오케이겠지만…"

비인이 신중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우리들 짐도 다 잃어버리고, 방향도 모르는데다가, 배는 뒤집혀 있어.

육지에 도착하기 좀 힘들 것 같지 않아?"

"에? 그러네?"

일단 목숨을 구했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하던 강전은

뒤통수를 맞은 기분에 인상을 찡그렸다.

푸른 바다 위로 강렬하게 내리쬐는 태양이 눈부시게 흩어지고 있었다.

조각난 보석처럼 흐트러진 물결을 응시하며

다들 암담해하고 있을 때,

그들의 앞에 그들을 구해준 인어 두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우준이 보았던 하늘색 머리카락의 인어와

다른 일행을 구해준 녹색 머리카락의 인어는

아무리 봐도 인간이라고 생각이 될 만큼, 인간과 똑같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 순수해 보이는 눈망울만큼은 인간과 달랐다.

어린 아이의 것처럼 때묻지 않고, 누구도 의심하지 않을 듯한 눈동자가

신기한 것이라도 보듯 그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녹색 머리카락의 인어가 다가와 그들에게 그들이 잃어버린 짐을 내밀었다.

"아, 우리 짐이다!"

강전이 신나서 외쳤다.

"고마워."

그들의 목소리에 인어들이 또 고개를 갸웃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는 믿기 힘들 정도로 아름다워서

우준들은 숨을 쉬는 것조차 잊고 그들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혹시라도 자신들의 숨소리가 그들의 목소리를 방해할까 두려워,

그들의 목소리 한 조각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귀를 기울였다.

"인간은 처음 봐요. 우리는 이 위까지 올라오는 일이 별로 없거든요.

가끔 올라오더라도 인간이 없는 곳에만 올라와서요."

그녀의 목소리가 너무 아름다워서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세상에 나오기 전, 어머니의 뱃속에 있을 때, 그 편안하던 그리운 느낌이

그녀의 목소리에 담겨서 듣는 사람의 가슴을 만지고 지나갔다.

어떻게 세상에 이토록 아름다운 것이 존재할 수 있을까?

'인어들은 똥이라는 단어조차 아름답게 만들 거야.'

"푸훗…"

옆에 있던 채민이 하는 생각을 읽은 리현이 자기도 모르게 흘린 웃음소리에

다들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아멜이 도와주자고 해서 도와주긴 했지만…"

녹색 머리카락의 남자 인어는 불만스러운 표정이었지만

그의 목소리 또한 한없이 아름다웠다.

"난 별로 도와줄 생각 없었어."

"그렇게 말하지 마, 헤질."

"해석을 훔쳐간 것도 인간일 가능성이 높다구. 이 인간들이 해석을 훔쳐갔을지 모를 일이잖아!"

"해석? 그게 뭔데?"

강전이 그들의 대화에 끼어 들었다.

"인간은 몰라도 돼."

헤질이 투덜댔지만 아멜은 부드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바다의 온도를 조절하는 돌이에요. 몇 십 년에 한 번씩 해석이 품고 있던 태양의 힘이 사라지면

뭍으로 가지고 나와서 태양을 만나게 해줘야 다시 따뜻해져요.

우리는 해석을 지키는 임무를 맡은 사제예요.

얼마 전에 해석과 태양을 만나게 해줘야 해서 가지고 올라왔었는데,

그만 그것을 잃어버리고 말았어요.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라서 당연히 괜찮을 줄 알았는데…"

"요새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은 없어.

저 빌어먹을 섬에도 인간이 들어가는 걸."

강전이 툴툴댔다.

"해석이 사라지면 어떻게 되는데?"

가인의 질문에 아멜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인어들이 전부 얼어죽을 거예요. 우리가 살고 있는 깊은 바다는 태양이 닿지 않는 추운 곳이라서

해석이 없으면 한없이 차가워져요."

"그럼… 인어들도 이곳으로 올라오면 되지 않아?"

아멜이 고개를 저었다.

"우리가 사는 곳에서의 힘과 이 위에서의 힘은 달라요.

우리도 오랜 훈련을 거쳐서 이곳까지 올라올 수 있게 된 걸요.

아무런 훈련도 받지 않은 인어들이 준비 없이 올라오면 모두 몸이 부풀어서 터질 거예요."

"아… 수압 때문인가?"

채민이 중얼거렸다.

"아직까지는 해석이 가지고 있던 열이 조금 남아있어서 살 수 있지만

이 상태로 며칠이 더 지나면 인어들은 전멸하고 말 거예요."

"그러니까 이렇게 하는 게 어때?"

입술을 삐죽 내밀고 있던 헤질이 꼬리지느러미를 이용해 바다 위로 한 번 튀어 올랐다가

다시 물 속으로 들어갔다.

아름다운 동작이었기에, 배 위에 있던 일행에게 물이 튀었는데도

아무도 불쾌해하지 않았다.

"우리가 당신들을 육지까지 데려다주겠어. 사람이 살고 있다고 알려진 육지로…

그러니까 당신들은 그 대가로 해석을 찾아줘.

우린 바다 밖으로 나갈 수 없어서 어떻게 할 수가 없거든."

"그래, 좋아. 그렇게 하자."

강전이 대답했다.

강전의 속셈은 따로 있었다.

일단 물 밖으로 나가면 그들이 자신들을 어쩔 수 없으니 도망쳐 버리면 그만이라는 생각이었다.

강전의 말에 진심으로 안심하는 헤질과 아멜의 모습을 보며 리현은 생각했다.

'인어들은 진짜 순진하구나. 인간들이 자기들을 속일 거라는 생각을 못 하는 걸까?

대부분 이런 상황에서는 한 명 정도를 인질로 잡아두겠다는 제안을 할 텐데…'

헤질과 아멜이 불쌍하기는 했지만, 리현 역시 강전의 생각에 찬성이었다.

돌을 훔쳐간 것이 누구인지도 모르는데다가

특별한 무기도 없는 그들이 정체 모를 그들과 싸워서 이길 리도 만무했다.

게다가 그들은 지금 해야할 일도 많았다.

별로 상관도 없는 사람들의 일에 일일이 끼어 들다가는

중간에 죽임을 당하기 십상이다.

"여기서 육지까지 멀어?"

"우리들이 배를 끌고 가면 오래 걸리지 않아요.

해가 지기 전에 육지에 닿을 수 있을 거예요."

아멜이 대답대로였다.

인어의 헤엄 속도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빨랐다.

인간과 비슷한 모습이기에, '그래봤자 얼마나 빠르겠어.'라고 생각하고 있던 그들은

어지간한 자동차의 속도보다 빠른 인어의 속도에 놀라서

뒤집힌 배의 솟아 나온 부분을 꽉 잡고 있어야 했다.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을 정도로 바람이 빠르게 그들의 얼굴을 치고 지나갔다.

제대로 말도 하지 못하고 삼 십 분 정도 매달려 있었을 때,

그들은 육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끝도 없을 것만 바다의 저편에 당당한 모습으로 솟아 오른 갈색의 대륙은

며칠 간의 섬 생활로 고생을 한 그들에게 큰 위안을 주었다.

단지 그곳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가슴이 벅차 오르는 것을 느꼈다.

바다 끝에서 떠오르는 커다란 태양보다도 웅장한 모습으로 다가오는 대륙을 보며

그들은 잠시 할 말을 잊고 멍하니 대륙을 응시했다.

정신 없이 육지를 보느라 배의 속도가 서서히 줄어드는 것조차 느끼지 못했던 그들은

육지에서 어느 정도 떨어진 곳에 배가 멈추자

의아해하며 헤질과 아멜을 쳐다봤다.

"우리는 여기까지만 올 수 있어요."

아멜이 말했다.

"사람이 사는 대륙과 가까운 곳의 물은 몸에 안 맞거든. 따끔따끔해."

헤질이 말했다.

"여기서부터는 물이 거세지 않으니까 헤엄치거나 배를 저어서 갈 수 있을 거예요."

"고마워. 구해주고 육지까지 데려다줘서…"

가인의 말에 아멜이 빙긋 웃었다.

"곧 우리들도 당신들에게 도움을 받게 될 텐 데요, 뭘.

늦어지면 인어들이 모두가 죽게 될 거예요.

조금이라도 빨리 해석을 찾아주세요."

"어떻게 전해줘야 되죠?"

채민의 질문을 들으며 리현은 생각했다.

'순진덩어리가 여기에 하나 더 있구만.'

"바닷물에 손을 담그시면 돼요.

우리는 미세한 파동을 느낄 수 있으니까, 여러분 중의 한 명이라도 손을 담그면

우리들을 찾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어요. 늘 긴장을 하고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부탁해요.

우리 인어들을 살려주세요."

"네."

채민이 다짐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꼭 찾아올게요."

수월할 줄 알았다.

대륙을 발견했으니 뭍에 땅을 디디고 안으로 들어가 사람들을 만나면,

모든 것이 술술 풀릴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큰 오산이었다.

그들은 염원하던 뭍에 발을 디딜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의 배가 해안에 닿기 전, 어디선가 나타난 커다란 검은 배 한 척이

그들을 집어삼킬 듯 다가왔고, 그들이 무슨 방법을 생각하기도 전에

그들의 몸은 밧줄로 꽁꽁 묶인 채, 검은 배 안으로 옮겨지고 있었다.

그랬다.

그들은 그 해안에서 악명 높은 검은 해적단의 손아귀에 걸리고 말았던 것이다.

잡혀서 들어갈 때만 해도, 그들은 쉽게 빠져나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자신들의 입장을 잘 설명하면 아무 일 없이 끝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은 검은 해적단의 무서움을 전혀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안일한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검은 해적단은 산채로 사람의 배를 갈라 그 내장을 꺼내먹는 것을 즐겼고,

꼬챙이에 꽂혀진 사람들이 괴로워하며 울부짖는 절규를 음악 삼아 식사하곤 하는,

사람의 이성이 통하지 않는 무시무시한 해적이었던 것이다.

해적들에게 발길질을 당하면서 해적선의 지하 창고로 내려가는 중에

속이 매스껍도록 풍겨오는 진한 피비린내를 맡을 때쯤에야,

그들은 자신들의 처한 상황을 조금씩 이해할 수 있었다.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리현은 해적들이 지금 자신들을 어떻게 요리해먹을까

즐거운 상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에,

다른 아이들보다 몇 배는 더 큰 불안에 휩싸여 있었다.

햇빛이 들지 않는 어두운 지하를 밝히는 등잔에 채워진 기름조차

인간의 몸에서 빼낸 지방으로 만들어낸 기름이라는 것을 알게 된 리현은

차라리 그 섬에 있는 것이 나을 뻔했다는 생각을 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인간이라는 동물이라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짐승들은 먹기 위해 사냥을 하지만, 인간들은 즐기기 위해 서로를 죽인다.

"얼른 들어가!"

해적 중의 하나가 거칠게 외치며 우준의 등을 발로 찼다.

우준은 넘어질 듯이 창고 안으로 들어갔고, 다른 아이들도 따라서 안으로 들어갔다.

해적의 허리에 걸려있는 커다란 칼이 등잔불과 닿아 위협적으로 빛났다.

"크크큭… 좀 지저분하긴 하지만 맛있게들 생겼군."

해적들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은 가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해적들은 콰앙- 문을 닫았고, 자물쇠를 잠그는 듯한 소리가 들리더니

점점 발소리가 멀어졌다.

창고 안에 있는 빛이라고는 문틈에서 들어오는 희미한 등잔의 빛뿐이었기에

그들은 창고 안이 어떻게 생겼는지 확실히 알 수 없었다.

창고 안에 가득 차 있는 역겨운 피 냄새를 맡으며

온몸의 신경을 바짝 곤두세우고 있는 수밖에 없었다.

무슨 말이든 해서 공포를 덜어내고 싶었지만,

이 고요한 침묵을 깨뜨리면 안 될 것 같다는 불안한 기분에

그들은 입을 꾹 다물고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흔들리는 숨소리만이 그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공포로 가득 찬 어둠과 침묵 속에서 얼마나 시간을 보냈을까?

불안한 침묵을 깨뜨리고 우준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안에… 한 사람이 더 있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