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햇빛 한 바구니, 고양이 두 스푼-17화 (17/91)

-17-

"그랬구나."

비인의 설명을 들으며 일행은 이해할 수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진짜 괴로웠겠구만."

강전이 중얼거렸다.

"아무튼 지금은 이 문제를 길게 논할 시간이 없어."

비인의 목소리가 조금 빨라졌다.

"내가 배 안을 전부 훑어보고 왔는데… 그 녀석들, 저녁에 우리를 반찬으로 먹을 생각이야."

"뭐어어어?"

"식인을 일삼는 녀석들인 것 같아. 인간 고기의 맛에 혀가 길들여진 거지.

여자들은 신경질적이어서 이런 곳에 갇히면 금방 상한다고,

가장 싱싱할 때 먹어야 한다면서 오늘 저녁에 여자 세 명을 해치울 거래."

"세 명? 우린 두 명이잖아."

"아니, 저기 한 명 더 있잖아."

비인이 턱으로 쓰러져 있는 소녀를 가리켰다.

그녀는 아직도 죽은 듯이 잠들어 있었다.

천천히 오르내리는 가슴만이 그녀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배의 구조는 복잡하지 않아. 지하에는 이런 식의 창고가 몇 개가 더 있는데,

우리말고도 희생자들이 꽤 많아. 여자들은 이미 죽었는지 전부 남자들 뿐이야.

여기서 나가서 왼쪽으로 가면 방이 하나 있는데,

거기에 우리들의 짐이랑 다른 희생자들에게서 빼앗은 짐들이 있어.

해적질을 해서 약탈한 금품들도 꽤 되고… 돈 될 거 많던데?

나중을 위해서 챙겨두는 게 좋을 것 같아."

"지키는 사람은?"

"지하에는 아무도 없어. 튼튼한데다가 빠져나갈 구멍이 없으니 여기 관리는 소홀한 것 같고…

계단 위로 올라가면 해적들이 왔다갔다하고 있어서, 금방 걸리게 될 거야.

해적들은 총 20명 정도 되는 것 같고, 다들 칼을 하나씩 차고 있어.

세 명 정도는 총을 가지고 있더라.

선장실은 계단을 올라가서 왼쪽에 있어. 그리고 거기에… 그게 있었어."

"그거라니?"

"해석. 인어들이 말했던 거 말이야."

"뭐? 진짜?"

"응. 그게 분명한 것 같아. 그렇게 아름다운 건 처음 봤어. 물처럼 찰랑찰랑거리게 생겼는데 돌이라니…"

"와아, 나도 한 번 보고 싶다."

채민이 꿈에 젖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해석은 포기하는 게 좋을 것 같아.

해석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선장실 앞에 해적들 두 명이 보초를 서고 있거든.

일단 밧줄만 풀게 되면 내가 몸을 빠져나와서 해적들이 없는 곳만 골라가며 나갈 수는 있을 텐데…

해석을 가지고 가려면 해적들을 상대로 싸울 수밖에 없어.

우리는 지금 무기도 없고, 약하잖아. 해적들을 상대로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어."

"하지만… 하지만 인어들이랑 약속했잖아."

"야, 야. 약속은 깨라고 있는 거다, 인마.

이런 데서 살아남으려면 사람이 좀 야박하기도 하고, 약삭빠르기도 해야 돼.

목숨을 담보로 하면서까지 약속을 지킬 필요는 없다는 거야."

강전이 말했다.

"그래도… 약속은 지키라고 하는 거야.

우리가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수많은 인어들이 죽게 될 거야. 그건 안 되잖아."

"해석을 찾아서 나가려고 하다가는 우리가 죽을지도 몰라.

우리가 죽으면 해석을 인어에게 넘겨주지 못하고, 결국 인어들도 죽을 걸?

그러느니 우리라도 사는 게 낫지 않아?"

"사람 목숨은… 계산하는 거 아냐.

한 명의 목숨보다 열 명의 목숨이 더 귀하다고 계산할 수 있는 게 아냐.

구할 수 있는 데까지는 구해야 하는 거야."

채민은 물러서지 않았다.

리현은 정직한 눈동자로 강전을 똑바로 응시하며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채민을

조금 놀랍다는 듯이 쳐다봤다.

채민이 약속을 꼭 지키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기 때문에 일행들에게 자꾸만 불행이 닥친다고 생각하는 채민이기에

이번에도 역시 일행들이 반대를 하면 그 뜻에 따를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채민은 이 부분에서만큼은 절대 양보할 수 없다는 듯,

단호하게 강전을 응시했다.

강전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우준을 돌아봤다.

"우준이 넌 어떻게 생각해?"

"약속은 당연히…"

"아아아아악! 난 여기 싫어! 싫다구! 아직도 여기라니! 내보내줘!"

우준의 말을 끊고 여자의 절규가 들려왔다.

갑작스러운 큰 소음에 다들 화들짝 놀랐다.

심장이 입으로 튀어나올 것 같다는 게 이런 상황에 쓰는 말이라는 것을 몸소 체험한 그들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이 창고 안엔 그들 말고도 한 사람이 더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비명의 주인공은 이제껏 죽은 듯이 잠들어 있던 그녀였다.

"더 이상… 더 이상 이런 어둠은 싫단 말이야아아아악!"

우는 건지 화를 내는 건지 알 수 없는 목소리로 그녀는 쉴 새 없이 소리를 질러댔다.

신경질적인 비명에 그들은 온몸의 털의 곤두서는 느낌을 받았다.

'이러다가 해적들이 몰려오면 어쩌려고…'

하지만 다행히 그들이 우려하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여자가 소리를 지르는 건 빈번히 일어나는 일이기에 해적들은 신경 쓰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저녁 준비를 하느라 한창 분주했다.

"소리 좀 그만 질러, 이 기집애야!"

참다 못한 강전이 빽 소리를 치자 여자가 입을 다물었다.

순식간에 정적이 찾아왔다.

잠깐 잠잠하던 여자가 곧 코를 훌쩍훌쩍거리더니 급기야 꺼이꺼이 목놓아 울기 시작했다.

"으흑… 흑흑… 아흐흐흑…"

어찌나 처량 맞게 우는지…

강전은 소리를 지를 의욕조차 잊고 고개를 저었다.

'저런 기집애가 우리 일행이 되는 건, 정말 사양하고 싶은데…'

여자의 울음소리가 잦아들 생각을 하지 않자,

기다리다 못한 리현이 여자에게 물었다.

"너… 저주 받았어?"

"……"

울음소리가 뚝 끊겼다.

거칠던 숨소리도 낮아졌다.

그녀는 우준들을 경계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어떤 저주야?"

"너넨… 뭐야?"

이윽고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뭐라고 딱히 설명할 말은 없네."

어깨를 으쓱하는 리현의 마음에 순간적으로 여자의 마음이 읽혔다.

"아, 너… 태우는 저주를 받았구나?"

"넌 뭐얏!"

여자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변했다.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신경질적인 반응이었지만 리현은 그녀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는 지금껏 수도 없이 많은 배신을 당했던 것이다.

배신을 당했기에 사람을 믿지 않고 경계하는 그녀의 행동을

리현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태우는 힘이라구?"

강전의 목소리가 밝아졌다.

"야, 잘 됐다. 그럼 우리 좀 풀어주라. 같이 도망가자."

"내가 니들을 어떻게 믿고 풀어줘?"

그녀가 날카롭게 말했다.

"응? 믿고 안 믿고가 어디에 있어? 일단 네 밧줄 풀고, 우리들 풀어주면 되잖아.

태우는 힘이라면서?"

"하아? 그러니까 니들이 뭐라도 된다고 나한테 풀어달라는 거야?

설령 내가 풀어준다고 해서 이 배를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아?

니들은 여기서 못 빠져나가. 발버둥치지 말고 그냥 죽어. 추하니까…"

"뭐얏? 뭐 이런 기집애가 다 있어?"

강전이 버럭했지만 리현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박차희. 베베 꽈서 말하지 말고 솔직하게 말해."

"……!"

차희는 심장이 철렁할 정도로 놀라서 자기의 이름을 부른 여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둠 속이라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그녀는 차희가 아는 사람이 아니었다.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목소리다.

'내 이름을 어떻게 아는 거지?'

리현이 피식 웃었다.

"네가 불태우는 저주를 받은 것처럼 나도 저주를 받았거든.

사람의 마음을 읽는 저주…"

"그게… 저주…라고?"

"그래."

"웃기지 마! 그게 뭐가 저주야? 그거 아주 편리하잖아! 네가 원하면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고,

돈 벌이도 할 수 있고, 네가 마음에 둔 남자가 널 좋아하는지 아닌지도 알 수 있잖아!

네가 내 저주를 알아? 내 저주는 태우는 거라구! 흥분만 하면 온몸에서 열기가 뿜어져 나와

주위의 것들을 다 불태운단 말이야! 남자친구도 날 이상하게 여기고 피하는 이 마음을 네가 아느냐구!"

"그러는 넌 내 마음을 알아서 그렇게 쉽게 말해?"

리현이 차갑게 말했다.

"네 말대로 내가 좋아하는 남자의 마음을 읽었다고 쳐.

그런데 그 남자가 내 앞에서 입으로는 '널 사랑해.'라고 하면서

속으로는 다른 여자를 생각하고, 날 귀찮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런 걸 읽었을 때의 내 기분이 마냥 '아, 역시 내 저주는 편리해. 아주 유용해.'일 것 같아?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던 사람들이 나를 천덕꾸러기로 생각한다는 거,

사실은 그들이 나의 부모님을 죽게 만들었다는 거…

그런 것들은 차라리 모르면 좋은데… 전부 알게 되었을 때의 기분을 네가 알아?"

"……"

"네가 그 능력 때문에 상처를 받고 배신을 당한 거, 알고 있어.

그렇다고 남의 상처에 대해서 가볍게 말하지 마.

각자가 받는 상처는 각자에게 있어서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고통인 거야.

네가 보기엔 별 것 아닐지라도…"

"……"

차희는 그저 눈물만 흘렸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우준이 입을 열었다.

"네 능력의 문제가 뭔데?"

낮고 신뢰가 가는 목소리가 창고의 안을 가득 채우자

차희는 고개를 번쩍 들고 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창고의 문틈으로 들어오는 희미한 빛에 비친 우준의 부드러운 실루엣을 본 차희는 인상을 찌푸렸다.

'난 이제 남자 안 믿어!'

예쁘장한 외모였다.

몸매도 어디에 가서 빠지지 않았고, 목소리도 고왔다.

손가락도 예뻤고, 다리고 늘씬했으며, 가슴도 풍만하고, 옷도 잘 입었다.

겉모습을 보고 반한 남자들은 쉴 새 없이 차희에게 접근했지만

차희의 이상한 체질에 접하고 나면 다들 괴물을 보는 듯한 표정으로 차희를 떠나갔다.

그 어떤 남자도, 정말 믿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남자조차도

차희의 곁에 남아주지 않았다.

'다시는 남자 안 믿어.'

우준이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네가 밧줄을 태워서 끊어주기만 하면, 나머지는 우리가 어떻게든 해볼게.

너도 여기서 해적들의 저녁 식사감이 되는 건 원하지 않을 거 아냐."

"더 이상 배신을 당하느니…"

다시 한 번 소리를 빽 지르려고 했지만 우준의 목소리는 너무 다정하고 믿음직스러워서

차희 역시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죽어버리는 게 나아."

상처를 받아 떨리는 목소리가 안타까워서 채민이 한숨을 내쉬었다.

"뭐가 널 그렇게 고통스럽게 하는 거야?"

우준의 질문에 차희가 대답했다.

"어릴 적부터 흥분을 하면 몸에서 열이 났어.

크게 흥분을 할 때는 불꽃이 튀기기도 할 정도였고, 그것들이 주위의 사물들을 태우곤 했어.

하지만 나도 사람이잖아. 나도 누군가 사랑하게 되는 건 당연하잖아.

좋아하는 남자가 생겼고 이 이상한 체질을 감추면서 잘 사귀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봐. 날 이상한 눈으로 보면서 떠나더라. 다들 그러더라.

우리 가족들도 날 무서워하고 피했어. 남자친구랑 헤어진 날, 너무 괴로워서 거울 앞에 서서 생각했어.

죽어버리고 싶다고… 이딴 체질로 살아가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고…

갑자기 거울에서 푸른빛이 번지기 시작했고, 난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받으면서

정신을 잃었어. 깨어보니… 꽁꽁 묶인 채로 이 해적선에 갇혀 있었어.

나 한 명이 아니었어. 꽤 많은 사람들이 붙잡혀 있더라.

너희들도 알겠지만 이상하게도 이곳에서는 내가 살던 곳에서 쓰던 언어가 아닌데도 말이 통해.

여기에 갇혀 있던 사람들이랑도 말이 통했지. 하아… 그게 문제였어."

차희의 목소리가 어두워졌다.

"내 태우는 능력 말이야. 태울 수는 있어. 어떻게 보면 유용하겠지.

하지만 단점이 하나 있어."

차희가 갑자기 왜 능력의 단점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지 알 수 없었지만

다들 입을 다물고 차희가 말을 계속 하기를 기다렸다.

"태우고 나면 온몸의 열량을 다 소비해 버려서 기절을 해버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차희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배가 고파서 기절하는 거야."

차희는 우준들의 비웃음이 터져 나오기를 기다렸지만 아무도 웃지 않았다.

창피한 단점을 말했는데도 아무도 웃지 않아서 차희는 내심 안심했다.

"사람들에게 말했어. 한 명을 풀어줄 테니까 우리들 모두의 밧줄을 풀어주고

함께 도망치자고… 난 기절하게 될 테니까 조금 불편하더라도 날 좀 챙겨달라고…

자아… 그럼 여기서 문제! 과연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다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결과가 눈에 보이는 듯 했다.

채민은 가슴이 아파서 입을 꾹 다물고 잘 보이지 않는 차희의 얼굴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차희는 어두운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배신당했다는 괴로움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잘 모르는 애들에게 보여주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난 불편한 존재였겠지. 다들 날 버리고 도망쳤어.

아니, 도망치려고 했어. 하지만 결국 해적에게 잡혔고, 그들의 반찬이 되었지.

두 번째도, 세 번째도, 네 번째도… 계속 똑같은 일의 연속이었어.

누구 하나, 나와의 약속을 지키는 사람들이 없었어.

그래도 어떻게 보면 다행이겠지. 그들이 도망치려고 발악하다가 먹히는 바람에,

난 지금까지 살아있을 수 있었으니까…"

일부러 냉정한 척 말했지만 차희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채민이 안타까워서 입을 열려는 순간, 우준이 먼저 말했다.

"걱정하지 마. 괴로워하지 마. 이제 넌 그런 배신을 경험하지 않을 거야."

우준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이 널 배신하더라도, 우리는 널 배신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넌 이제 배신으로 인한 괴로움에 빠져 허덕일 필요 없어."

"하하하…"

신뢰하게 될 것 같아서 일부러 웃음을 흘렸다.

최대한의 조소를 흘렸다.

"웃기고 있네.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말했어. 다른 사람들은 뭐, 배신하겠다고 말하고 배신했는지 알아?

온갖 감언이설로 날 꼬드겼어. 반드시 구하겠다고, 데리고 나가겠다고…

이 세계의 아름다운 것들을 함께 보자고…"

"난 이 세계의 아름다움 따위를 너에게 보여주려고 하는 게 아니야.

내가 너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은, 네 인생의 행복이야.

너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

'어째서…'

차희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어째서 저 애의 목소리는 저렇게 믿음직스러운 거지?

어째서 내가 믿을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거지?

난 더 이상 배신당하고 싶지 않아. 더 이상 괴롭고 싶지 않다구!

정신차려, 박차희!'

"약속할게. 절대로 널 두고 가지 않아."

"웃기지 마. 알지도 못하는 니들에게 힘을 빌려줄 생각따윈 없어."

"야, 야."

듣다 못한 강전이 끼어 들었다.

"너 실컷 배신당하지 않았냐? 별 것 아닌 놈들한테 힘을 빌려주고,

아주 그냥 짓밟힐 만큼 짓밟혔잖아.

그러니까 막판에 한 번만 더 사람을 믿어 봐봐.

만약 이번에도 배신을 당하면, 역시 인간들이란 믿을 게 못 된다고 결론을 내리면 되는 거잖냐."

"웃기고 있네. 내가 누구 좋으라고 한 번 더 배신을 당해?

너에게는 쉬운 말일지 모르겠지만 배신을 당한다는 거 죽는 것보다 싫은 일이야! 알아?

그렇게 함부로 말하지 마!"

"누구는 배신 안 당해본 줄 알아?"

강전이 빽 소리쳤다.

"네 인생만 빡빡하고 거친 줄 아느냐고!"

"소리치지 마!"

차희도 지지 않고 외쳤다.

"내가 니들을 믿을 이유가 없잖아! 믿어야 할 이유도 없잖아!

나한테 부탁하는 주제에 소리를 지르고 야단이야?"

"네가 먼저 소리 질렀잖아!"

"그만들 해."

비인이 두 사람을 말렸다.

두 사람은 계속 소리를 질러봐야 해적들만 자극한다는 것을 깨닫고는

씩씩거리며 잘 보이지 않는 서로의 얼굴을 노려봤다.

시간은 계속 가고 있었지만 차희는 마음을 열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리현은 차희의 마음에 집중을 해볼까 했지만 관뒀다.

원하지 않아도 갑자기 밀려들어오는 게 아니라면

함부로 남의 마음을 읽지 않겠다고 다짐했기 때문이다.

뚜벅뚜벅뚜벅-

또 다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이쪽으로 오는 건가?'

그들은 팽팽하게 긴장을 해서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발소리에 집중했다.

이번에도 발소리는 가까워오는 듯 하다가 반대편 쪽으로 멀어졌다.

우준은 더 이상 안 되겠다 싶었는지 차희를 홱 돌아봤다.

우준의 까만 눈동자가 살짝 빛났다.

"차희야."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는 아주 다정해서 차희는 순간 울컥하고 눈물이 나올 뻔했다.

부모님조차도 차희를 이토록 다정하게 불러준 적이 없었다.

"믿지 못하겠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하지만 마지막으로 한 마디 할게. 네가 도와준다면, 우리는 반드시 널 데리고 이곳에서 나갈 거다.

믿어줘. 네가 위험에 처하는 일이 생긴다면… 그건 내가 죽었기 때문일 거야."

거부할 수 없을 정도로 단호하고 신뢰가 가는 목소리였기에

차희는 자기의 의지와 상관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안 돼! 더 이상 사람을 믿지 마!'

머리의 외침과는 다르게 차희의 입술이 벌어졌다.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어쩔 수 없네.

날 깨우려면 몇 시간 정도 그냥 눕혀놓거나 포도당 주사를 놔주거나,

간단한 주스라도 입안에 흘려 넣어주면 돼."

"응, 알겠어."

어둡긴 했지만 우준의 입가에 살짝 번진 미소가 보이는 듯 했다.

"반드시 데리고 갈게."

우준은 꾸물꾸물 움직여서 차희의 곁으로 갔다.

우준이 가까이 오는 순간, 차희는 숨이 턱 막혔다.

우준에게서는 편안하고 그리운 향기가 났다.

비릿한 바다 내음에 섞인 우준의 향기가 차희의 심장을 뛰게 만들었다.

다시는 남자 때문에 뛰는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심장은 생각처럼 움직여주지 않았다.

차희와 우준이 서로의 등을 맞댔다.

우준의 체온이 고스란히 차희에게 전해졌다.

그걸 지켜보던 채민이 잠깐 인상을 찌푸렸지만 그것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럼 태운다?"

차희가 우준의 손목을 묶은 밧줄에 손을 대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서서히 손가락에 힘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다들 차희와 우준에게 집중을 하느라 밖에서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를 듣지 못했다.

발자국 소리는 그들이 갇혀 있는 창고 앞에서 멈췄고,

차희의 손에서 나온 불꽃이 밧줄을 서서히 태우는 동안,

벌컥-하고 거칠게 창고의 문이 열렸다.

그제야 그들은 화들짝 놀라 열린 문을 쳐다봤고, 문을 연 주인공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커다랗고 날카로운 칼을 양손에 든, 잔혹해 보이는 인상의 해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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