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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 한 바구니, 고양이 두 스푼-18화 (18/91)

-18-

순식간에 모든 일이 일어났다.

천성이 잔혹한 해적은 일행들 앞에서 여자들을 잡아죽일 생각이었다.

자신들의 소중한 사람을 잃을 때 일그러지는 그들의 표정과 고통의 절규를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무 문제없이 그들을 죽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강했고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었다.

게다가 잡혀온 녀석들은 전부 두꺼운 밧줄로 꽁꽁 묶여있지 않은가.

눈이 동글동글하고 귀염성 있게 생긴 계집을 먼저 죽이는 게 만족스러울 것 같아서

킬킬거리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겁에 질린 듯, 커다란 눈으로 해적을 올려다봤는데,

그게 또 해적의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죽임을 당하기 직전의 여자들의 얼굴을 보는 건,

정말 오싹할 정도로 기분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며 칼을 들어올리는 순간,

뭔가가 바람처럼 움직이더니 자신의 무릎 뒤를 후려쳤다.

예상치 못한 공격인 데다가, 예상했다고 하더라도 버틸 수 없을 정도로 강한 공격이었기에

해적은 버티지 못하고 털썩 쓰러지고 말았다.

자유로운 손으로 몸을 움직여 묶인 두 다리로 해적의 다리를 차서 넘어뜨린 우준은

해적의 손에서 칼이 떨어지자 재빠르게 칼을 붙잡아 다리를 묶고 있던 밧줄을 단번에 쳐서 끊었다.

예상치 못한 사태에 해적이 크게 소리를 지르려고 했지만

그것보다 빠르게 칼이 번쩍였고,

해적은 입을 벌린 모습 그대로 머리와 몸이 분리되었다.

"으으…"

눈앞에서 사람이 죽는 것을 본 가인과 채민은 비명이 나올 것 같았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해적의 목에서 콸콸 쏟아지는 피와 바닥에 뒹구는 해적의 머리는

영화에서 보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구토증이 밀려왔다.

정작 해적을 죽인 우준의 표정은 냉정하기 그지없었다.

살아있는 동안 사람을 죽이는 일이 있을 거라고는 한 번도 상상 못 했던 우준이지만,

이곳으로 오겠다 결심을 한 순간부터 이런 일이 생길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처음으로 사람을 죽인 우준은 온몸이 후들후들 떨릴 지경이었지만

그런 모습을 일행에게 보이지 않기 위해 감정의 변화를 애써 억누르고 있었다.

'사람을 죽이다니…'

우준은 착잡했지만 그것에 집착하고 있을 틈이 없었다.

손발이 자유롭게 되자, 다들 찌뿌둥한 몸을 이리저리 비틀어 근육을 풀었다.

"이야, 나 사람 죽은 건 처음 보네."

성격 급한 강전조차도 질린다는 표정으로 해적의 머리를 흘끗 쳐다봤다.

우준은 말없이 구석에 쓰러져 있는 차희의 밧줄을 풀어주었다.

우준이 차희를 번쩍 안아들려고 할 때, 채민이 우준에게 다가갔다.

"괜찮아, 우준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올려다보는 채민의 모습에 우준이 잠시 움찔했다.

"괜찮은 거야?"

"응."

우준이 중얼거리며 손을 들어 채민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려다가

머리에 닿지 못하고 손을 거두었다.

사람을 죽인 손으로 차마 채민의 머리를 만질 수 없었던 것이다.

우준의 마음을 알아챈 채민은 울먹이는 목소리로 우준에게 말했다.

"나… 나도 죽일 수 있어."

두 손으로 우준의 손을 꼭 잡았다.

"나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몇 명이든 죽일 수 있어.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러…니까…"

울음이 터져 나와 말을 잇지 못하는 채민을 응시하던 우준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우준의 손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채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응, 그래. 난 괜찮아."

부드러운 손길을 느끼며 채민은 안심을 했지만,

정작 큰 위안을 받은 것은 우준이었다.

채민의 한 마디가 마음의 짐을 조금은 덜어내 주었다.

"내가 주위의 상황을 좀 살펴볼게."

비인이 벽에 기대며 말했다.

다들 무슨 말인가 했지만 비인이 죽은 듯이 잠잠해지자 그 뜻을 알 수 있었다.

비인은 또 다시 유체이탈을 해서 주위를 살펴보러 나간 것이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다들 초조한 마음으로 비인이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언제 해적이 들이닥칠지 몰라 불안했다.

해적은 수가 많았고 무기도 있었지만 그들에게 무기라고는 방금 빼앗은 칼 하나,

강전의 전기 능력뿐이었다.

게다가 정신을 잃은 차희까지 챙겨야 하기에 해적들과 싸울 틈이 없었다.

"지금 지하에는 해적들이 아무도 없어. 저녁 준비가 한창인 것 같아."

비인이 입을 열었다.

비인이 말하는 동안 리현은 해적의 옆구리에 걸려 있는 열쇠 꾸러미를 빼들었다.

열쇠가 많은 것으로 보아 여기저기 닫힌 문을 열기에 유용할 것 같았다.

"잘 하면 걸리지 않고 빠져나갈 수도 있겠어. 해적들이 없는 곳으로만 가면 되니까…"

"그래, 그래. 야, 얼른 빠져나가자. 불안해 죽겠다."

"하지만…"

채민이 입을 열었다.

"해석은?"

"인마,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라구. 그건 나중에 다시 찾으러 오면 되잖아.

잘못하면 우리들 전부 죽는단 말이야."

강전이 조급하게 말했다.

채민은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약속이야. 인어들이 구해주지 않았더라면 우린 그곳에서 죽었어.

그러니까 우리도 인어들의 목숨을 구해줘야지."

"아, 젠장. 미치겠네, 진짜…"

강전이 짜증스레 내뱉었다.

"지하에 먹을 게 있어?"

우준이 비인에게 묻자 비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과일이랑 채소가 있는 창고가 있어. 사람들이 갇힌 창고도 있고…

하지만 그들을 다 구했다가는… 우린 여기서 못 빠져나가.

미안하기는 하지만 그들은 이 세계의 사람들이잖아.

우린 상관하지 말고 이곳에서 빠져나가는 게 좋겠어.

물론… 마음이 불편하긴 하겠지만…"

비인이 조심스레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아니."

우준이 차희를 번쩍 들었다.

"전부 다 구해서 나가자."

"야, 인마. 넌 네가 무슨 신이라도 되는 줄 아냐? 다 구하는 건 무리라구."

"신이 아니기 때문에… 무리인 줄 알면서도 도전하는 거다."

우준은 단호했다.

다들 걱정스러운 듯 했지만 우준의 의견을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일단 그들의 리더는 우준이었고, 그들이 아무리 자기들끼리 빠져나가겠다고 해도

우준은 혼자서라도 남아 그들을 구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해석도 되찾을 거야."

"야, 야…"

강전의 목소리에서 힘이 빠졌다.

"그게 말이 되냐구."

"생명의 은인을 모르는 척 하는 건 말이 되나?"

우준이 강전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 한 마디는 꽤나 영향력이 있어서, 강전을 비롯한 다른 아이들의 마음에 작은 파동을 일으켰다.

그들에게는 "양심"이라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 그래. 어차피 한 번 죽었던 목숨. 죽든 살든 해봐야지, 뭐."

강전이 어깨를 으쓱했다.

"우준아, 그 애는 내가 들게."

가인이 말했다.

"괜찮아. 어차피 지하에서 먹을 걸 찾아서 먹이면 금방 일어날 테니까… 얼른 움직이자."

옆의 창고 문을 열고 과일을 좀 꺼내서 으깨어 차희의 입을 벌리고 즙을 흘려 넣자,

차희는 잠시 신음을 흘리다가 눈을 떴다.

차희는 눈앞에 보이는 아이들의 모습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몇 번이나 눈을 꿈뻑거렸다.

"믿어보길 잘 했지?"

강전이 씩 웃으며 말하자 차희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응, 그러네."

아직은 힘없는 목소리였다.

"부축해줄까?"

비인이 말하자 차희가 핏기 하나 없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조금만…"

척 보기에도 연약해 보이는 차희였기에 핏기 하나 없는 얼굴은 곧 쓰러질 것마냥 힘들어 보였다.

숨쉬는 것조차 힘든 듯, 차희는 살짝 입술을 벌리고 쌔액쌔액 숨을 토해냈다.

"다른 사람들도… 구하게?"

차희는 불만스러운 듯 했다.

"어째서? 그 사람들은 풀려났어도 너희들을 구하려고 하지 않았을 걸."

"내 말이."

강전이 자기와 뜻이 같은 사람이 있다는 게 기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서둘러야 돼."

유체이탈로 주위를 살펴보고 온 비인이 말했다.

"주방에서 반찬거리를 데리러 간 해적이 왜 안 올라오는지 궁금해하고 있어.

곧 있으면 아래로 내려올 태세야."

"그래, 얼른 구하자."

리현 역시 왜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을 구해야 하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이왕이면 채민의 편을 들어주고 싶었기에 군소리 없이 열쇠를 들고 가

사람들이 갇혀 있는 지하실의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 그들이 갇혀 있던 곳과 다를 바 없는 창고가 모습을 드러냈다.

상자들이 불규칙하게 흩어져 있는 그곳에는 다섯 명 남짓한 남자들이

팔 다리가 묶인 채로 오들오들 떨며 문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제 자기들이 죽을 차례라고 생각하는 듯,

그들의 얼굴에는 절망과 체념, 공포가 가득 담겨 있었다.

"구하러 왔습니다."

비인이 말하며 한 걸음 안으로 들어갔다.

아직 그들은 상황 파악이 안 되는 듯, 겁에 질린 눈으로 비인을 쳐다보고 있었다.

비인이 밧줄을 풀어주러 다가갔지만 "으으으…"하는 신음을 흘리며 뒤로 물러나는 사람도 있었다.

답답한 마음에 리현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못 들었어? 당신들 구하러 왔다구! 남자가 돼서 벌벌 떨기나 하고…

살고 싶으면 정신들 똑바로 차렷!"

"구, 구해주러 왔다구?"

연약한 인상의 남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다니까!"

자신보다 훨씬 나이가 많아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리현은 거침없이 반말을 내뱉었다.

"기쁘겠지만 환호성은 나중에 지르세요."

비인이 한 쪽 무릎을 꿇고 앉아 밧줄을 풀며 말했다.

"우리는 아직 해적들을 무찌르지 못했거든요. 소란스러워지면 해적들이 몰려들 겁니다."

"해적들을 못 이겼다고? 그런데 어떻게 이곳으로 온 거지?"

우준이 칼로 밧줄을 끊어주려는데 남자가 몸을 옆으로 틀며 물었다.

"우리들을 잡으려고 들어온 녀석 하나를 해치우고 열쇠를 얻었어요.

지금 이런 거 일일이 설명할 틈 없으니까 빨리 협조해요! 여기서 죽고 싶어요?"

"어차피 나가봐야 죽어. 오히려 죽는 게 빨라질 뿐이야!

나, 나는 그냥 여기에 이대로 있겠어."

연약한 인상의 남자가 비인에게서 손을 빼내며 말했다.

"뭐라구요?"

비인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여기에 있겠다니… 당신들, 저 해적들이 어떤 놈들인지 몰라서 그러는 겁니까?

저들은 사람을 먹는단 말입니다. 저들의 한끼 식사가 되고 싶은 겁니까?"

"우, 우리가 저들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우리는 무기도 없어.

이곳에서 나가면 죽는 시간만 빨라질 뿐이라구!"

"그러면 여기에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겠단 말입니까?"

"모를 일이지. 저들을 설득해서 나도 해적단에 들어가면 살 수 있을지도…"

날카로운 인상의 남자가 제딴에는 현명한 선택이라는 듯 말했다.

강전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한 손으로 노란 머리카락을 벅벅 긁으며 말했다.

"그것 봐. 어차피 저렇게 비굴한 놈들이라구. 일부러 구하러 올 필요가 없었다니까.

계속 있어봐야 시간만 지체될 뿐이야. 얼른 떠나자."

"강전이 말이 맞아."

사람들의 용기 없는 태도에 염증을 느낀 비인이 손을 털고 일어나며 말했다.

"살려는 의지가 없는 사람들을 데리고 나가봐야 우리만 위험해져.

얼른 우리라도 도망치자."

"너, 너희들도 그냥 이곳에 있는 게 좋을 거야!

도망치려던 자들 중에 살아남은 사람은 아무도 없어!

이 해적단은 악명 높기로 유명한 검은 해적단이라구! 절대로 살지 못해!

차라리 해적단에 들겠다고 빌어보는 게 나을 걸."

그 말을 들은 우준이 잠시 미간을 좁혔다가 몸을 돌렸다.

"그래, 가자."

채민은 못내 아쉬운 듯 몇 번이고 뒤를 돌아봤다.

그들을 구할 수 있는 힘이 없다는 것이 괴로웠다.

우준이 채민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괜찮아. 어차피 해석을 찾으려면 해적들과 한바탕 해야 돼.

그들을 전부 죽이면 저 사람들도 구할 수 있어."

"하지만… 해적들을 다 이길 수 있을까?"

"난…"

우준이 채민을 돌아보며 빙긋 웃었다.

남들처럼 환한 웃음은 아니지만 엷게 떠오르는 우준의 미소는 언제나 보기 좋았다.

심장이 튀어나올 정도로 다정한 미소였다.

"몸으로 싸우는 건 잘해. 걱정하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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