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햇빛 한 바구니, 고양이 두 스푼-20화 (20/91)

-20-

"정말 감사해요."

아멜의 목소리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아멜은 자신의 손에 들려져 있는 해석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응시했다.

아멜의 눈동자와 해석은 비슷한 색을 뿜고 있었다.

오묘한 물빛의 돌은 바다에 가까이 있을 때에 더 아름답게 빛을 발했다.

"인간들이 사는 곳은 저쪽에 보이는 길을 따라 쭉 가면 된다고 알고 있습니다."

헤질의 말투가 정중하게 변했다.

"여러분의 여정에 행운이 따르기를 바라겠습니다. 아, 그리고… 여러분을 위해 준비한 게 있습니다.

약소하지만…"

헤질의 손바닥에 올려져 있는 것은 손톱만한 크기의 보석이었는데,

그 보석은 하늘빛이지만 햇빛이 반사되는 각도에 따라서 빨간색, 노란색, 녹색의 빛이

부드럽게 지나갔다.

마치 노래를 하는 듯한 빛의 흐름은 일행의 넋을 빼놓기에 충분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인어의 눈물입니다. 인어는 대체로 눈물을 흘리지 않고,

바다에 있기 때문에 바닷물에 녹아서 사라지는 게 대부분이죠.

하지만 아멜이 뭍에 올라와 있을 때, 눈물을 흘려서 그것이 보석이 됐습니다.

인간들의 사이에서는 아주 비싼 값에 팔린다고 하더군요.

이것을 몸에 지니고 있으면 소유한 자의 육체가 빨라지게 됩니다."

"아아, 감사합니다."

비인이 인어의 눈물을 받아들었다.

"그럼… 우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바닷속의 인어들이 걱정이 되어서…"

"아무도… 죽은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채민의 말에 아멜이 빙긋 미소를 지었다.

"채민이라고 하셨지요?"

"네? 아, 네에…"

"당신은 정말 아름다운 눈동자를 가지고 있네요.

인간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본 것은 처음이지만,

먼 곳에서 인간을 봤을 때도 당신처럼 아름다운 눈동자를 가진 인간을 본 적은 없었어요."

"아…"

채민이 얼굴을 붉혔다.

"당신에게 이걸 줄게요."

아멜이 양손으로 잡아서 내민 것은 스웨인 이상으로 아름다운 검이었다.

"우리 인어들의 검이에요. 바다 저 깊은 곳에서만 나오는 특별한 금속으로 만들었어요.

절대로 무뎌지지 않고, 깨지지도 않아요. 물에 가까운 곳에 있거나 물이 닿으면

손에 잡고 있는 것만으로도 당신을 해치려는 적을 무찌를 거예요.

그리고… 당신과 인어의 검 사이에 대화가 가능할 정도로 마음이 통하게 되면,

당신은 이것을 통해 물을 부릴 수 있게 될 거예요. 물을 다스리는 검이거든요."

"아멜… 너…"

헤질이 뭔가 불만을 말하려는 듯 했지만 고개를 저으며 입을 꾹 다물었다.

"괘, 괜찮아요. 난 해석을 찾는데 도움도 안 됐고…"

귀한 검이라는 것을 눈치챈 채민이 두 손을 저으며 거절했지만

아멜은 빙긋 웃으며 채민이 검을 받기만을 기다렸다.

스웨인이 어두운 귀기를 품고 있다면

인어의 검은 보는 것만으로도 청량함이 느껴지는 맑은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함께 있으면 불운이라는 것은 어디론가 멀리 사라져 버릴 것 같은,

밝은 느낌의 검이었다.

속이 들여다보이는 투명한 칼집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었고,

칼자루 또한 칼집과 같은 소재의 투명한 것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 안으로 보이는 검은 아름다운 물빛을 빛내며

채민이 받아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채민은 떨리는 손으로 검을 받아들었다.

차가운 감촉이 손에 스르륵 전해졌다.

"고, 고맙습니다."

"부디… 당신들의 목표를 이루길 바라겠어요."

우준들이 멀어지는 것을 본 헤질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멜. 너 어쩌자고 인어의 검을 줘버린 거야? 저건 인간의 욕망과 부딪치게 되면

세상을 멸망시킬지도 모를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구."

"헤질. 네가 보기에 저 검을 받아든 채민이 욕망의 힘에 눌릴 사람처럼 보였어?"

"…그건… 아니지만…"

"잘은 모르겠지만… 채민의 주위에는 온갖 나쁜 것들이 도사리고 있었어.

채민을 없애려고 그녀의 주위에서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고 있었어. 너도 봤지?"

"그래."

"인어의 검은 이미 채민을 주인으로 정하고 있었어.

만약 검이 채민을 인정하지 않았다면 검을 받아드는 순간, 채민은 얼어버렸을 거야."

"그렇겠지…"

"저들은 우리 인어들 전부의 목숨을 살려줬어. 저들이 아니었으면 우리는 멸종했을 거야.

그러니까… 난 저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어. 채민이라면… 저 검을 이용해서

자신들이 목적한 바를 이루기 위해 노력할 거야. 절대로 자신을 위해 사용하진 않을 거야."

"하지만… 만약 네 생각이 틀리다면? 채민이 다른 마음을 품게 된다면?"

"그 땐… 아마도 세계가 멸망하게 되겠지."

인어들이 알려준 길은 비교적 평탄했다.

온갖 위험이 난무한 데다가 기분 나쁜 식물들로 가득 차있던 무인도에 비하면

천국의 길을 걷는 거나 다름없을 만큼 편안한 길이었다.

사람들이 자주 오가는 길인지 1킬로 정도 걸어갔을 때는 아예 길이 다듬어져 있었다.

길 가장자리에 서 있는 나무들도 흔히 볼 수 있는 종류의 평범한 나무들이었다.

길도 잘 닦여 있어서 걷기에 편했지만 채민은 몇 번씩이나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발이 걸려서 넘어질 뻔 했다.

그럴 때마다 우준이 옆에서 채민을 붙잡아주었기 때문에 다치지는 않았지만.

인어의 검은 크기에 비해 아주 가벼웠기 때문에 허리춤에 차고 걷기에는 불편함이 전혀 없었고,

인어가 채민에게 준 것이기 때문에 아무도 인어의 검에 손을 대려고 하지 않았다.

채민은 조심스레 우준에게 인어의 검을 넘기려고 했지만,

우준은 고개를 저으며,

"난 이 검이 있으니까…"

라고 중얼거렸을 뿐이다.

인어의 검을 가지고 있는 채민은 다른 때보다 책임감이 더해진 것을 느꼈다.

무기를 들고 있는 이상, 위험이 닥치면 자신이 나서서 일행을 지켜야만 할 것 같았다.

'난 약하지만… 내 친구들을 다치게 하진 않을 거야.'

채민은 굳게 다짐했다.

차희는 조금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앞서 걸어가는 채민과 우준의 뒷모습을 지켜봤다.

두 사람은 마치 연인인 것처럼 딱 달라붙어서 걸어가고 있었는데,

아무리 봐도 채민쪽에서 우준에게 들러붙는다기보다는

우준이 자진해서 채민에게 가까이 붙어 가는 걸로 보였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창고에 갇혀 있을 때 들었던 나직하고 믿음이 가는 그 목소리가 귀에서 떠나질 않는다.

눈을 떴을 때 보였던 검고 깊은 눈동자를 기억하고 있다.

그 눈동자가 온몸을 훑는 것만 같아 짜릿함을 느꼈던 자신의 모습도 떠올랐다.

우준에게 자신이 특별하다고 생각했다.

우준은 차희를 위해서라면 목숨이라도 바칠 것처럼 행동했고, 그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지금 우준에게 가장 특별한 사람은 채민인 것처럼 보였다.

채민이 넘어지려고 하거나, 뭔가가 채민의 위에 떨어지려고 할 때마다

우준이 먼저 몸을 움직여 채민을 그것으로부터 떨어지게 했다.

고작 몇 분을 걸어오면서 그런 일이 수도없이 일어났는데,

우준의 얼굴에선 귀찮다는 감정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채민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서 채민을 지킬 준비를 했을 뿐이다.

"저기, 있잖아."

차희가 가까이에 서 있던 비인의 팔을 살짝 잡았다.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걸어가던 비인이 차희를 돌아봤다.

"우준이랑 채민이랑 사귀는 사이야?"

"음? 아닌데… 그건 왜?"

"아니, 그게… 우준이랑 채민이랑 계속 같이 걸어가길래…"

"아아, 그거. 차희 너는 늦게 합류해서 잘 모르겠구나.

우리들에게는 하나씩 저주가 있잖아. 채민이의 저주는 계속 불운이 닥친다는 거야.

우리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곳인데도 채민이에게는 위험한 곳이거든.

봤지? 채민이 지금도 계속 넘어질 뻔했잖아.

그래서 우준이가 가까이에서 채민이를 지키는 거야.

하하. 네 말을 듣고 보니까 두 사람이 사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네."

"아아, 그렇구나."

차희는 내심 안심했지만 그래도 기분은 여전히 안 좋았다.

그렇다면 채민이 기집애가 있는 한은 우준이 자신의 옆에서 걸어줄 일은 생기지 않는다는 것 아닌가.

우준이 자신만을 지켜줬으면 좋겠고, 자신을 위해 애를 썼으면 좋겠다는 욕심이 생겼다.

"저기, 우준아. 저 나무에 나무 열매가 있어. 우리 저걸 좀 따서 요기를 하자. 배고파."

차희가 예쁜 목소리로 우준의 곁에 다가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아, 그래."

우준이 순순히 자신을 따라오려는 것 같자, 차희는 내심 쾌재를 불렀지만,

우준은 정중하게 차희의 손에 잡힌 자신의 팔을 빼내며

한 팔로 채민의 어깨를 감쌌다.

"채민아. 가자."

차희가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나무를 탈게!"

강전이 한 손을 번쩍 들고 유쾌하게 외치며 나무를 펄쩍펄쩍 올라가는 동안,

우준은 발을 단단히 땅에 밀착시키고 자세를 낮춘 후,

강전이 올라간 나무의 옆에 있는 나무의 줄기를 향해 다리를 뻗었다.

커다란 나무 줄기가 흔들리는가 싶더니 위에서 나뭇잎과 함께 잘 익은 열매들이 후두둑 떨어졌다.

"아, 뭐야! 네가 그렇게 다 따버리면 난 뭐가 되냐?"

강전은 툴툴대면서도 싫지 않다는 표정으로 다시 아래로 내려와 나무 열매를 줍기 시작했다.

평화로운 길을 걸으면서 다들 마음에 여유를 되찾았기 때문에 표정이 무척 밝았다.

"맛있게 생겼다. 사과 같이 생겼는데?"

"응. 독은 없겠지?"

가인이 조금 걱정된다는 듯 열매를 옷에 슥슥 문질러 닦으며 물었다.

"괜찮겠지. 여긴 그곳 같은 무인도는 아니잖아."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내가 먹어볼게."

채민이 열매 하나를 들고 베어 물려고 하자, 우준이 채민의 손을 잡았다.

채민은 입을 벌린 자세 그대로 우준을 올려다봤다.

"내가 맛 볼게."

우준은 채민이 입에 넣으려던 열매를 향해 허리를 굽혔고,

채민의 얼굴과 우준의 얼굴은 열매 하나를 사이에 둔 거리만큼 가까워졌다.

아삭-

우준이 입을 벌려 채민의 손에 들려있는 열매를 한 입 베어무는 순간,

채민은 손에서 힘이 빠져 열매를 툭 떨어뜨리고 말았다.

채민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지만 우준은 개의치 않고 우물우물 입안에 든 것을 씹었다.

다들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우준을 쳐다봤다.

"어때?"

우준이 멍한 표정으로 그들을 돌아보더니 두 손으로 다급히 목을 움켜쥐었다.

"뭐, 뭐야? 뭐야? 괜찮아? 너? 얌마!"

강전이 당황해서 다가오자, 우준이 목을 움켜쥔 모습 그대로, 아무 멍한 표정으로 말했다.

"맛있네."

순간 분위기는 가라앉고,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한동안 수습할 수 없는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리현이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개그를 하려면 표정이라도 좀 바꾸던가. 이건 정말 썰렁해서, 원…"

다들 키득키득 웃으며 열매를 하나씩 집어들어 배를 채웠고,

다른 나무에 달려 있는 열매들도 따서 맛을 봤다.

배불리 먹은 후에는 각자 차희에게 자신에 대해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럼 갈 길이 머니까 좀 서두르자."

리현이 먼저 일어나서 배낭을 매며 말했다.

"오케이. 자네는 나랑 뜻이 맞아서 좋아."

강전이 장난스레 말하자 리현이 고개를 저었다.

"자네랑 뜻이 맞는다는 말은 정말 듣기 괴로운 말이군, 그래."

"어이, 어이. 그게 무슨 소리! 오히려 감사해야 하는 거 아닌가?"

"됐네. 저리 꺼지게, 성격 급한 노란 말벌."

"인마. 노란 말벌이라니!"

"머리가 노란 게 성격까지 급하고, 물리면 치명타일 것 같이 생겼잖아.

그러니까 넌 노란 말벌이지. 안 그러냐?"

"야, 그 별명 좋다."

비인이 웃으며 동의하자 강전이 발끈하며 외쳤다.

"아니! 믿었던 너마저!"

다들 소란스러운 틈을 타서 차희가 채민에게 다가갔다.

채민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고 있던 우준은 짐을 챙기기 위해 잠시 채민과 떨어져 있었다.

"너… 불행이 자꾸 일어난다고 했지?"

"응? 아, 으응."

채민은 곱지 않은 눈으로 자신을 보던 차희가 먼저 말을 걸어주는 것이 기뻐서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저주 때문에 우준이가 옆에 있어주니까 되게 좋은 모양이지? 실실 웃어대는 거 보면…"

"응?"

채민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차희를 돌아봤다.

차희의 표정은 독설하는 입과는 달리 웃고 있었다.

"알아둬, 현채민. 너의 불행 때문에 우리의 여행이 점점 더 어려워질 거야.

그리고 넌 분명 우준이를 크게 다치게 할거야.

우준이는 강하지만… 아마도 네 불행은 우준이를 죽게 만들 거야."

"아…"

"그럼…"

우준이 짐을 챙겨서 다가오려 하자, 차희는 생긋 웃으며 채민의 손을 잡고

악수를 하듯 크게 흔들며 우준이 들으라는 듯 말했다.

"채민아. 그럼 우리 이번 여행 잘 해보자!"

상처를 입고 있던 차희가 금방 밝아진 것을 본 일행들은 흐뭇해했지만

채민은 눈을 멀거니 뜬 채로 차희의 얼굴을 쳐다봤다가

짐을 들고 걸어오는 우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언제나 걱정하던 그것.

일행들은 괜찮다고, 네 잘못이 아니라고 했지만

채민의 마음을 끊임없이 불편하게 만들던 그 사실을 차희가 다시 한 번 일깨워준 것이다.

'그래, 맞아.'

채민은 입술을 깨물었다.

'나 때문에 이 애들도, 우준이도 위험해질 거야.'

"자, 그럼 가자."

아무 것도 모르는 일행은 그곳을 떠나기 위해 서둘렀고,

자신의 짐을 챙겨들고 그들의 뒤를 따르며 채민은 고민하기 시작했다.

'난 역시… 이 애들을 떠나야 하는 걸까?'

하나님을 빽으로 세상과 맞짱 뜬다...by백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