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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 한 바구니, 고양이 두 스푼-21화 (2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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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이 된다면 백성들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나라를 평화롭게 만들겠다는,

그런 소망을 가슴에 품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10살 되던 해, 그의 어머니는 자신을 지켜주던 보좌관과 사랑에 빠졌고,

어머니를 믿었던 아버지는 그들의 정사 장면을 목격하고는 실의에 빠져 괴로워했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다시 돌아올 거라고 믿고 모르는 채 나라를 돌보는 일에만 신경 썼고

어머니는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리고 다른 남자, 또 다른 남자와 놀아났다.

'왜 아버지는 어머니를 계속 그냥 놔두는 걸까?'

어린 그의 의문을 풀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난 절대로 저런 사랑은 하지 않을 거야.

날 가장 사랑하고, 날 가장 위해주는 여자를 왕비로 앉힐 거야.'

나라 일에만 신경 쓰는 아버지와 남자들과 사랑을 나누는데 시간을 보내는 어머니로 인해

혼자서 커야만 했던 그는 여자에 대한 불신을 가지고 자라나 청년이 되었다.

그가 청년이 되자 그의 아버지는 자신이 할 일은 이제 끝이 났다는 듯 조용히 세상을 떠났고,

그는 대신들에 의해 떠밀리듯 왕이 되었다.

왕이 된 그가 가장 먼저 한 것은 부정한 어머니를 처벌하는 것이었다.

그는 용서해달라고 애원하는 어머니를 먼 곳으로 유배시켰고,

자신의 신부감을 찾아 하루가 멀다하고 파티를 열었다.

그 중에 가장 아름답고 청초한 외모의 소녀가 눈에 띄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풍성한 흑발은 은하수의 물결처럼 빛이 났고,

짙은 갈색 눈동자는 총명해 보였으며, 오똑한 코와 입술은 가장 알맞은 위치에서

그녀의 얼굴을 조화롭게 만들었다.

그가 다가갔을 때, 소녀의 얼굴에 떠오른 붉은 홍조는

그의 마음을 설레게 하기에 충분했고,

그의 품에 쏙 들어오던, 알맞은 크기의 소녀의 몸은 그로 하여금 확신하게 했다.

'그래, 이 여자야. 이 여자라면 우리 어머니처럼 남편을 배신하는 일은 없을 거야.'

결혼식은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그를 믿고 따르는 그녀와의 행복한 결혼 생활을 통해 마음의 안정을 찾은 그는

나라를 돌보는 일에 집중할 수 있었고,

나라는 차츰 그가 원하던 이상향의 모습을 갖추어 갔다.

그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

나라는 부강했고, 백성들은 행복했으며, 대신들은 그의 말이라면 목이라도 바칠 태세였고,

왕비는 언제나 정숙하고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건 그의 생각이었을 뿐, 정숙하다고 믿었던 그의 아내에 대한 소문은

시녀들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퍼져 있었다.

결혼을 한지 3년이 지났을 때에야 그 소문을 처음 접한 그는 분노했고, 곧 좌절했으며, 절망했다.

하지만 아내를 깊이 사랑했던 그는 그녀를 용서할 수밖에 없었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그녀의 약속을 믿으려고 노력했다.

그녀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같은 일이 일 년에 몇 번씩 반복되자,

어린 시절 어머니의 배신으로 인해 받았던 상처가 곪아 터져 버리고 말았다.

겨우겨우 자신을 억제하고 있던 그는 결국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녀의 앞에서 그녀의 정부의 목을 베어버렸다.

그녀가 파랗게 질려 벌벌 떠는 모습은 그에게 이상할 정도의 쾌감을 주었고,

그는 그녀의 전 애인들까지 전부 불러들여 그녀의 앞에서 하나하나 죽여버렸다.

그녀는 굳어버린 입을 억지로 벌려 용서해 달라고 빌었고,

진심으로 반성하고 후회하는 듯한 그녀의 얼굴을 보며 그는 생각했다.

'아, 결국 세상은 힘으로 눌러야만 하는 거구나.'

그리하여 그가 다스리는 그 나라는 그의 난폭한 힘이 지배하는,

숨이 막힐 정도로 괴로운 나라가 되고 말았다.

떠나고 싶어도 마음대로 떠날 수 없는 그런 나라가…

처음으로 사람이 사는 곳에 도착했지만 그들은 마냥 기뻐할 수만도 없었다.

도시의 분위기가 몹시 이상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얼굴에는 척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공포가 서려 있었다.

누구 하나 밝은 표정을 짓는 사람이 없었다.

"여긴… 왜 이 모양인 거야?"

강전이 중얼거리며 도시를 둘러봤다.

아주 일관된 모습의 도시였다.

회색 벽돌로 지은 깔끔한 건물들이 늘어선 그곳은 길가에 떨어져 있는 작은 쓰레기 하나 찾아볼 수 없었고,

건물 사이사이에 심어져 있는 나무와 꽃들도 굉장히 신경 써서 관리하는 듯

싱싱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자랑하고 있었다.

사람이 살기에 딱 좋은 분위기였지만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전부 울상이었기에

그들은 기묘한 기분을 느끼며 천천히 길을 걸어갔다.

"좀… 이상하지 않아?"

두리번거리던 가인이 누구에게랄 것 없이 물었다.

"음…"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큰소리를 내면 큰일이 날 것 같은 억눌린 분위기였기에

다들 작은 목소리로 속닥거리는 수밖에 없었다.

도시의 사람들은 전부 회색, 또는 갈색의 깨끗한 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이방인인 그들은 굉장히 눈에 띄었다.

그들의 옷은 회색이나 갈색이 아닐뿐더러,

커다란 싸움을 거치고 온 후였기 때문에,

아무리 바닷물에 대충 씻었다고 해도 여기저기 찢어져 있어서 몹시 지저분해 보였다.

사람들은 그들과 가까이 하면 병이 옮기라도 한다는 듯 슬금슬금 그들을 피했다.

눈도 마주치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태도에 강전은 슬슬 기분이 나빠졌다.

"다들 공포에 질려있어. 왕을 두려워 하는 것 같아."

리현은 아무리 듣지 않으려고 해도 들리는 사람들의 마음의 소리 때문에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난폭한 왕, 조금만 잘못을 해도 잔인하게 사형을 시키는 왕.

그에게 억눌려 숨도 쉬지 못할 것 같지만 소리내어 불만을 말할 수도 없는

그들의 절규가 그대로 리현에게 들려왔던 것이다.

그 때, 갑자기 주위가 소란스러워졌다.

왕의 병사들로 보이는, 붉은 제복을 입은 병사들이 어느 집으로 몰려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들과 눈이 마주치지 않으려고 고개를 숙이며 옆으로 피했고,

아이를 데리고 나온 여자들도 얼른 아이를 품에 안고

서둘러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우리도 모습을 감춰야 할 것 같아."

비인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이고 병사들의 눈이 닿지 않는 건물 뒤로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병사들은 어느 집으로 몰려가느라 그들에게는 미처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었기에

그들은 걸리지 않고 무사히 모습을 숨길 수 있었다.

병사들이 걸음을 멈춘 곳은 2층의 작은 건물이었는데,

짙은 갈색의 아치형 나무문이 있는 깨끗한 집이었다.

위층은 사람이 살고, 아래층에서는 생선 등의 어패류를 파는 곳인 듯,

열린 문 옆에 놓인 나무 간판대에는 잘 다듬어진 생선과 조개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상점의 주인인 듯한, 중년의 남자가 고개를 조아렸다.

"왕의 병사들께서 무슨 일이신지…?"

"이 집의 딸을 데리고 가려고 왔다. 당장 딸을 내놔라."

"그, 그게 무슨…"

"감사하게 생각하는 게 좋을 거다. 너희들이 미천한 딸자식이 우리 폐하의 눈에 든 것을…

폐하의 사랑을 실컷 받고 호화로운 생활을 하게 될 테니,

그렇게 똥 씹은 표정을 할 것 없다. 얼른 딸을 데리고 와라."

"나, 나리.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희 딸은 아직 15살밖에 안 된 어린 아이입니다.

그런 어린 아이가 폐하께 실례라도 범하면 어쩌겠습니까?

제발 다시 생각해주십시오. 제발…"

"폐하께서 정하신 일이다. 감히 폐하의 명을 어길 셈이냐?"

"하나밖에 없는 딸아이입니다. 우리 부부는 그 아이 하나 보고 살아왔습니다."

주인 남자가 울음이 가득 찬 목소리로 간절히 애원했다.

"그러니까 더 잘 된 일 아니냐! 네놈들과 같이 있어봐야 평생 생선이나 팔다가 죽을 딸년을

폐하께서 마음에 들어하셔서 왕궁의 생활을 하게 해주신다고 하는데,

뭔 잔소리가 이렇게 많은 거냐! 당장 딸을 내놔라! 다 베어 죽이기 전에!"

"나리, 나리. 제발…"

그들의 실랑이를 듣던 차희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하네. 왕의 눈에 들면 좋은 거 아냐? 왕이 너무 늙어서 그러는 건가?"

"그게 아니라… 왕의 눈에 들어서 왕궁으로 들어가게 되면

왕의 놀이개감이 되어서 별 흉한 꼴을 다 당하다가 결국 죽임을 당하고 만다는

소문이 퍼져 있어서 그래. 실제로 지금까지 왕의 눈에 들어서 들어간 여자 중에

부모와 연락이 되는 아이들이 하나도 없나 봐.

산 깊은 곳에서 시체를 발견했다는 소문도 있고…"

리현이 말했다.

"불쌍하다."

가인이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주인 남자는 한사코 병사들에게 딸을 내어주지 않으려고 버텼지만,

그것은 오래가지 못했다.

병사가 칼을 빼내어 망설임 없이 주인 남자의 목을 베어버렸던 것이다.

그 병사도 한 때는 왕의 폭정에 치를 떨었던 젊은이였을 테지만,

힘과 권력을 얻은 대부분의 사람이 그러하듯,

그 역시 왕의 폭력적인 권력의 맛을 보고 나자

자기보다 약한 자를 죽이는 것에서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게 되었다.

"아버지!"

주인 남자가 목에서 피를 뿜으며 쓰러지자

가게 안에 숨어 있던 딸아이가 절규하며 뛰어나왔다.

회색의 무릎까지 오는 원피스를 입은 여자아이는

척 보기에도 앳되어 보이는 귀여운 외모의 아이였다.

귀밑에서 찰랑이는 단발머리가 아주 잘 어울렸지만

아이의 얼굴은 눈물 범벅이 되어 있었다.

"아버지, 아버지!"

아직 15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는 아버지를 눈앞에서 잃은 슬픔을 견디지 못하고

아버지의 시체를 잡고 흔들다가 기절하고 말았다.

인형처럼 힘없이 쓰러지는 아이를 보는 병사들의 눈에는

약간의 동정심도 묻어있지 않았다.

주인 남자를 베어버린 병사는 뒤에 서있던 병사들에게 명령했다.

"여자를 들어라. 어서 돌아가자."

한 병사가 나서서 아이를 번쩍 안아들자, 안에 있던 아이의 어머니가 뛰어나왔다.

"나리, 나리. 제발 우리 아이를 놔주세요. 제발…

하나뿐인 딸아이입니다. 남편도 잃었는데 딸까지 잃으면

이 불쌍한 여자는 어찌 살겠습니까? 무슨 낙으로 살겠습니까?"

"위대한 왕이 다스리는 이 나라에서 낙이 없이 산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지."

병사의 말에 어머니의 얼굴에 약간의 기대감이 싹터 올랐다.

우준들도 혹시 아이를 돌려줄까 싶어 기대를 가졌지만,

리현은 입을 틀어막고 낮게 외쳤다.

"안 돼!"

병사는 "앗!"하고 놀랄 새도 없이 칼을 빼내어 아이 어머니의 목을 베었고,

아이의 어머니는 눈을 휘둥그레 뜬 채 털썩 쓰러지고 말았다.

쓰러지면서도 물기 젖은 어머니의 눈은 자신의 딸을 향하고 있었고,

냉혹한 병사들의 시선 아래서 서서히 감기던 그 눈에 맺혀 있던 눈물은

아이가 점점 멀어지자 스르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병사들이 사라지고 난 후, 아이 어머니의 눈에선 빛이 사라졌다.

가인이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어떻게 해…"

가인의 눈에서도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저 아주머니의 영혼이 계속 병사들의 주위를 맴돌고 있어.

얼른 빛이 있는 곳으로 가야지 죽은 자의 세계로 돌아가게 될 텐데…

자기 딸이 걱정이 되어서 떠나질 못하고 있어."

가인의 목소리가 괴롭게 떨렸다.

"우리가… 저 애를 도와줄 수 없을까?"

채민이 안타깝게 묻자 우리가 고개를 저었다.

"안 돼."

단호한 우준의 거절에 차희는 고소하다고 생각했다.

"우리에겐 한 나라를 상대할 정도의 힘이 없어.

일일이 이런 일에 끼어 들다가는 우리의 목적을 이루지 못해.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어. 미안하다, 채민아."

하지만 우준이 부드럽게 말하며 채민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순간,

차희는 다시 불같은 질투심에 휩싸이는 수밖에 없었다.

차희의 질투의 감정이 너무 커서 리현은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저 기집애가…'

차희가 채민을 별로 좋게 보지 않는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피부에 느껴질 정도의 감정을 알고 나자 리현은 차희가 몹시 싫어졌다.

'우리 채민이를 건드리기만 해봐라. 뼈도 못 추리게 해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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