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햇빛 한 바구니, 고양이 두 스푼-22화 (22/91)

-22-

그들은 이 무시무시하고 강압적인 도시를 다니려면 다른 사람들과 같은 모습이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으려면 먼저 옷을 사야했는데,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팔아야 돈을 마련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처음에 도착한 나라가 이렇게 호의적이지 않은 공포스러운 나라라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커다란 불행이었고,

채민은 역시 자기 때문에 이런 곳에 제일 먼저 도착한 것이라고 자책하고 있었다.

어떤 돈을 사용하는지도 알 수 없고, 이 나라의 시세도 알 수 없었기에

그들은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었다.

괜히 상점에 들어갔다가 제 값을 못 받고 물건을 팔아버리면

앞으로의 여행길이 더 힘들어질지도 모르기에 섣불리 움직일 수가 없었다.

우준 역시 이번에는 어떻게 해야할지 알 수 없어서

인적이 드문 건물 뒤에 앉아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획일적으로 지어진, 아무런 장식도 없는 회색 벽돌 건물들 사이로

늦은 오후의 해가 붉은 빛을 드리우기 시작했고,

오는 중에 먹은 과일 이외에는 먹은 것이 없는 그들은

위장이 밥을 달라고 아우성치는 소리를 애써 무시해야 했다.

"내가 한 번 돌아보고 올게."

비인이 말했다.

"이 도시에 우리에게 도움을 줄 사람이 한 명 정도는 있겠지."

비인은 벽에 기대어 눈을 감았고, 비인의 유체는 몸에서 빠져나와 육체와 가느다란 끈으로

연결이 된 채 빠른 속도로 도시를 누볐다.

유체의 움직임은 육체 안에 들어있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빨랐기에

비인은 몇 분만에 나라를 전부 돌아볼 수 있었다.

비인이 눈을 떴다.

"찾았냐?"

강전이 다급하게 물었다.

"응. 찾았어."

비인이 씩 웃으며 일어났다.

"그래? 누구야? 남자? 여자? 어디에 사는데? 뭐하는 사람이야?"

"나이가 지긋하신 남자분이시고,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살아.

아마도 학자인 것 같은데, 우리가 처음에 있었던 무인도에 대해 연구하고 있나 봐.

하지만 그곳에 갔다온 사람이 없기 때문에 자료를 준다면 자기 목숨이라도 내어줄 수 있다고 생각해.

이 나라에서 유일하게 왕을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이야. 머릿속에 무인도에 대한 생각으로

꽉 차있어서 자기 연구를 위해서라면 죽을 수도 있는 사람이거든.

아마 우리가 그 무인도에 대해 알려주면 우리의 힘이 되어줄 거야."

비인이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이 도시는 그리 크지 않아. 저기 보이는 저 성에 왕이 살고 있고…

왕은 꽤 젊은 편이야. 고작해야 30대 초중반?"

"여자만 밝히는 변태 늙은이인 줄 알았더니…"

"그러니까 말이야. 하하. 성은 자세히 살펴보지 않아서 나머지는 잘 모르겠고…

이곳에는 200명 남짓한 사람이 사는 것 같아.

하나 같이들 왕에 대한 공포심 때문에 말 한 마디 제대로 못 하고 있고…"

도시에 대한 것을 말하며 골목길을 구불구불 걸어가던 비인은

10분쯤 걸었을 때 나타난 어느 회색 벽돌 집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아까 봤던 상점과 다를 것 없는 2층짜리 건물이었는데,

다른 점이 있다면 상점과는 달리 문이 굳게 닫혀 있다는 것이었다.

"만약 우리를 왕의 병사들에게 넘기면 어쩌지?"

가인이 머뭇거리며 물었다.

"걱정할 것 없어. 그럴 만한 사람은 아닌 것 같아."

비인이 자신 있게 말하고 앞으로 나서서 굳게 닫힌 나무 문을 손으로 두드렸다.

똑똑똑-

거리가 워낙 조용했기 때문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조차 크게 울려 퍼졌다.

가인이 흠칫하고 몸을 움츠리며 혹시 다가오는 사람이 없는지 주위를 살폈지만,

아까 병사들의 일 때문인지 거리에 나와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누구십니까?"

안에서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만 들어도 그가 지니고 있는 깊은 학식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지혜롭고 사려 깊은 소리였다.

"안녕하세요. 무인도에 대해 연구를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무인도에 대한 자료를 가지고 왔습니다."

벌컥-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문이 열렸다.

아직 불을 켜지 않은, 약간 어두운 문 안쪽에서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남들과 같이 회색 옷을 입기는 했지만,

빛나는 갈색 눈동자에 광기라고 생각될 정도의 지식 탐구에 대한 욕구를 지닌,

누가 봐도 학자라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을 듯한 인상의 노인이었다.

70세쯤 되어 보이는 그는 움직임에 전혀 불편이 없을 정도로 건장한 체격이었지만

머리와 눈썹은 희게 새어있었다.

"그게 사실입니까?"

그는 신중한 성격인 것 같았으나, 자신이 평생을 두고 열망하던 자료를 손에 넣을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인지 조급하게 물었다.

비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사실입니다."

"어서 안으로 들어오시지요."

그는 자신의 손자뻘밖에 안 되는 우준들에게 존댓말을 쓰는 신중함을 보였다.

"실례하겠습니다."

비인이 먼저 안으로 들어가자, 나머지 일행도 따라서 안으로 들어갔다.

학자의 깔끔한 외모와는 달리, 방안은 지저분하기 그지없었다.

양쪽 벽면에 만들어진 책장에는 두꺼운 책들이 가득했고,

방안 여기저기에도 책들과 연구 자료들이 즐비하게 널려 있었다.

말 그대로 발디딜 틈이 없었기에,

그들은 책과 종이들을 밟지 않으려 노력하며 조심조심 걸어야 했다.

그래도 부엌 바닥에는 다행히 책들이 떨어져 있지 않았는데,

부엌 중앙에 있는 2인용 식탁 위에는 역시나 책이 한 권 펼쳐진 채로 놓여 있었다.

학자는 책을 들어 다른 곳으로 옮기며 말했다.

"손님들을 모실 곳이라고는 이곳밖에 없군요. 의자가 부족하니 바닥에라도 앉으시겠습니까?"

그들은 좁은 부엌에 몸을 움츠리고 옹기종이 모여 앉았다.

먼저 우준들이 자신의 이름을 밝히고 소개를 하자,

학자도 살짝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수후라고 합니다. 그런데…"

수후는 다른 것들보다 무인도에 대한 자료가 궁금했는지 눈을 빛내며 물었다.

"무인도에 대한 자료는 어떻게 손에 넣으셨습니까?"

비인이 일행들을 한 번 돌아본 후에 말했다.

"우리가 바로 그 무인도에 갔다왔습니다."

"오오…!"

수후의 입에서 탄식인지 모를 탄성이 터져 나왔다.

"무인도에서 살아 나온 사람은 없었는데… 그게 사실이라면 정말… 정말 대단한 일이군요."

"여러 가지 일이 많이 있었지요."

비인의 말투는 수후만큼이나 차분했다.

"무인도에 대한 자료를 얻기보다는 여러분의 이야기를 먼저 듣고 싶군요.

괜찮다면 이야기해주시겠습니까? 아, 이런… 먼저 차라도 드려야 하는 건데…

저녁은 드셨나요?"

"네? 아, 그건…"

비인은 사양의 말을 하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너무나 배가 고팠기에 얼굴을 붉히며 대답을 피했다.

일행들이 몹시 굶주려 있다는 것을 깨달은 수후는 미소를 지으며 일어나 간단한 식사 준비를 했다.

식사를 하는 동안, 비인은 일행에게 물었다.

"우리에 대한 이야기를 다 해도 괜찮을까?"

"어차피 도움을 청하러 온 거니까 상관없지 않겠어? 이것저것 거짓말을 늘어놔 봐야

결국은 다 들통날 것 같은데? 우리 거짓말에 속아줄 사람 같진 않아."

리현이 말했다.

다들 우준의 동의를 구하는 듯 우준을 쳐다봤고,

멍하니 앉아서 수후의 뒷모습을 응시하던 우준은 자신에게 몰린 시선을 깨닫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솔직하게 말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차려온 음식은 종류가 많지 않았지만 그들의 배를 채우기에는 충분한 양이었다.

맛이 좋은 치즈와 부드러운 갈색 빵, 각종 과일과 야채를 상큼한 소스로 버무린 샐러드,

삶은 달걀과 잘 익힌 소시지는 보기만 해도 식욕을 돋우기에 충분했다.

몹시 배가 고팠던 그들은 수후가 보는 것도 잊고 게걸스럽게 음식에 달려들었다.

배가 채워지자 그들은 수후에게 미안한 감정이 생기기 시작했다.

수후처럼 연구만 하는 가난한 학자가 이 정도의 음식을 차리려면

몇 개월 분의 식비를 다 사용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들의 생각을 짐작한 수후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리 집안은 오래 전부터 왕실과 가까운 집안이었기 때문에 먹고 사는데는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물론 집이 허름하고 좁기는 하지만, 그건 제가 넓고 화려한 것을 그다지 즐기지 않기 때문이지,

생활이 어려워서가 아니랍니다. 젊은이들이 많이 배가 고팠을 텐데, 그런 건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들이 식사를 마치자, 수후는 따뜻한 차를 내왔다.

잘 다듬어진 나무 컵에 담긴 차는 녹차와 비슷한 색을 지닌 투명한 차였지만

한 모금 입에 머금었을 때, 입안에 번지는 달콤함은

혀가 녹을 것 같을 정도로 부드러웠다.

생각지도 못한 맛에 그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수후가 말했다.

"요젠이라는 식물의 잎을 한 달 간 좋은 볕에 말려서 만든 차입니다.

이 나라에서 나지 않기 때문에 이곳에서는 비싸게 팔리고 있지만,

여기서 더 내륙으로 들어가면 요젠의 값이 점점 싸지지요."

"진짜 맛있어요."

채민이 밝은 목소리로 말하자, 수후는 손녀를 보는 듯한 인자한 눈길로 채민을 응시했다.

달콤하고 따뜻한 차는 그들의 몸의 근육을 편안하게 풀어주었다.

이제껏 단단히 긴장하고 있던 그들은 방금 전보다 좀 더 편안한 자세로 앉았다.

"그럼… 여러분의 이야기를 들려주시겠습니까?"

비인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비인은 자기들이 태어날 때부터 받았던 저주와 어떻게 해서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무인도에 떨어져서 그곳을 탈출하기까지 어떤 일을 겪었는지에 대해,

차분하고 조리 있게 이야기했다.

비인은 막힘 없이 이야기를 잘 했기 때문에,

자기들이 겪었던 일임에도 불구하고, 일행들은 흥미진진한 눈빛으로 비인의 이야기를 들었다.

수후는 중간중간 작은 탄성을 내뱉었을 뿐, 비인의 말이 끝날 때까지 흐름을 깨뜨리지 않았다.

비인은 조금도 과장하거나 미화시키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이야기했고,

비인의 이야기를 다 들은 수후는 몹시 감동을 받은 듯 했다.

"이곳 이외에 다른 세계가 있었다니…

내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알겠군요. 다른 세계가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해봤는데…"

수후가 엄지로 턱을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세계의 끝이라는 곳에 가시는 겁니까?

그곳에 가면 여러분들의 문제가 모두 해결이 되는 건가요?"

이번에 비인은 대답하지 못하고 우준을 쳐다봤다.

"네."

우준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곳에 가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겁니다."

자신감에 넘치는 우준의 대답은 수후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비인의 이야기를 통해 들은 우준이라는 인물은 굉장히 책임감이 강하고 매력적인 인물이었기에,

수후는 이 당당한 모습의 잘 생긴 젊은이를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그런데 혹시 세계의 끝이 어떻게 가야하는지 알고 계십니까?"

우준의 질문에 수후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들어본 적도 없고… 하지만 우리 조상 중의 한 분이 모험가이셨는데,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꽤 정확한 지도를 그려놓으신 게 집안 어딘가에 있을 겁니다.

그걸 드리도록 하지요."

"우와! 감사합니다!"

채민이 활짝 웃으며 꾸벅 인사하자 수후는 다시 미소를 지었다.

참 밝은 아이라고 생각하며…

"그런데 나에게 부탁하고 싶은 게 무엇인가요?"

밖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어린 아이의 울음소리도 들리지 않는 고요한 나라였다.

그래도 인구수가 꽤 많음에도 불구하고 이 정도로 조용한 이유는

왕의 폭정 때문에 백성들이 숨을 죽이고 살기 때문이었다.

"사실 우리들이 이 세계에 처음 왔기 때문에 이 세계의 사는 방식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어떤 화폐를 사용하는지, 물건을 사거나 팔 때 가격은 얼마 정도가 적당한지…

그런 것들에 대해서 도움을 좀 주셨으면 합니다."

수후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일어나서 부엌을 나갔다가 무언가를 한 가득 들고 들어왔다.

바닥에 내려놓은 그것들은 이곳에서 쓰이는 화폐와 종이뭉치, 그리고 펜이었다.

깃털 장식이 아름답고 칼자루 부분이 부드럽게 다듬어진, 고급스러운 펜은

수후가 그것을 얼마나 오래 사용했는지 알 수 있을 만큼 손때가 묻어있었다.

"이것들이 이곳에서 쓰이는 돈입니다."

지름 4cm가량의 동그란 동전은 중앙에 아름다운 성이 새겨져 있었는데,

검은색 동전과 구릿빛의 동전 두 종류가 있었다.

"여기에 이 검은 동전이 바로 루인이고, 이 구릿빛 동전이 루페입니다.

1루인을 10루페로 따지지요."

"그렇다면 1루인으로는 뭘 살 수 있죠?"

리현의 질문에 수후가 잠시 미간을 좁히고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보통 1루인이면 두 사람 분의 식사를 할 수 있습니다.

3루인을 주면 호화스럽지는 않아도 깔끔한 여관방을 하나 빌릴 수 있지요."

"흐음…"

일행들은 속으로 화폐 가치에 대해 따져보았다.

1루인에 두 사람 분의 식사를 할 수 있다는 건,

1루인이 그들의 돈으로 따졌을 때, 만 원 정도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1루페는 대충 천 원 정도로 따지면 될 것이다.

단지 그것만 알았을 뿐인데도 그들은 큰 성과를 얻은 기분이 들었다.

숨통이 트였다.

"그렇다면…"

비인이 들고 있던 가방에서 해적선에서 얻은 금화와 은화를 꺼내며 물었다.

"이런 건 얼마 정도 받을 수 있을까요?"

"금화의 경우에는 하나에 100루인, 은화의 경우에는 10루인씩 받을 수 있을 겁니다."

상당한 값어치가 나가는 금화와 은화를 보면서도

수후의 얼굴엔 전혀 돈에 대한 욕망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그저 관찰만 하는 듯, 무덤덤하게 반짝이는 그것들을 보았을 뿐이다.

"나라마다 물가가 조금씩 다르니 거래를 할 때는 얕잡아 보이지 않도록 하는 게 좋을 겁니다.

그리고 어느 곳에서나 그렇듯이 힘있어 보이는 무리에게는 함부로 대하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눈은 너무 선량해서 다들 쉽게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주의를 기울이세요."

"네, 정말 감사합니다."

그들은 진심으로 수후에게 감사해하며 수후가 이야기해주는 이 세계에 대한 것들을 들었다.

수후는 계속해서 차분하게 세계에 대한 것을 설명해주었다.

수후의 말에 따르면 이 세계는 여러 개의 나라로 나뉘어져 있는데,

각 나라에서 일어나는 일은 될 수 있도록 다른 나라에서 참견하지 않는 것이

서로에 대한 예의라고 했다.

사는 사람들마다 자기들이 살고 있는 지역과 가장 알맞은 체질을 지녔기 때문에,

어차피 다른 곳과 전쟁을 해봐야 이득이 없기 때문에 전쟁은 피한다고 했다.

소문에 의하면 세계의 끝에는 모든 것을 들어주는 "신"이 살고 있는데,

지금껏 실제로 그 신을 만나본 사람은 없다고 한다.

욕심이 많은 사람들은 그 신을 만나기 위해 길을 떠났지만,

신에게 닿는 길을 알지 못해서 그냥 돌아오거나

험한 여정으로 인해 중간에 죽게 되는 것이 대부분이라고 했다.

간혹 신을 만난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그런 사람을 만났다는 사람은 없기 때문에

아마도 떠도는 소문일 거라고들 생각했다.

상당히 불편한 자세로 앉아있었지만 수후의 말에 푹 빠진 그들은

온몸의 근육이 좀 풀어달라고 아우성친다는 것조차 알지 못했다.

수후는 이 나라가 왜 이렇게 공포 분위기에 짓눌려 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어린 시절에는 어머니에게 배신을 당하고, 커서는 아내에게 배신을 당한 왕의 광기.

수후의 이야기가 끝났을 때에는 이미 날이 밝은 후였다.

아침 햇살이 작은 창문으로 들어와 부엌을 비추었을 때에야,

그들은 굳어버린 몸을 억지로 폈다.

으드드득-

뼈가 자리를 잡는 소리가 귀를 울렸다.

"정말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비인이 꾸벅 인사하자 수후가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제가 평생 염원하던 곳에 대한 것을 알려주셨으니 이 정도는 당연하지요.

앞으로 더 도움이 될 일이 있으면 찾아오십시오.

그리고 될 수 있도록 빨리 이 나라에서 빠져나가는 것이 좋을 겁니다.

외부인의 방문을 반기지 않는 나라거든요.

옷을 준비해 놨으니, 나가기 전에는 옷을 갈아입고 행동을 하십시오.

지금 여러분의 옷은 너무 눈에 띄는군요."

수후의 사려 깊음에 그들은 몹시 감동을 받았다.

아침을 먹고 가라는 수후의 제의를 한사코 거절하며 집을 나서던 그들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수후에게 무인도에서 발견한 노트 세 권을 내밀었다.

"이건…?"

비인의 손에 들려져 있는 노트를 의아하다는 듯 쳐다보는 수후에게 비인이 말했다.

"무인도에서 발견한 노트인데, 그곳에 찾아갔던 모험가가 쓴 일종의 탐험 일기입니다.

저희도 이걸 보고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곳에 살고 있는 생물과 그 섬의 이상한 생태계에

대해서 잘 설명이 되어있거든요. 모험가는 이미 죽은 것 같았지만…"

"아아…"

수후는 감격에 떨리는 손을 내밀어 조심스럽게 노트를 받아들었다.

"아, 이런… 이런 귀한 것을…"

수후의 눈에 눈물이 스르륵 맺히는 것을 본 일행은

사람이 무언가에 저토록 열중할 수 있다는 게,

사람을 얼마나 빛나게 만들어주는가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

이미 머리가 희게 새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수후는 젊은이 이상으로 생기가 있어 보였다.

"부디 수후님의 연구에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네요."

일행은 몇 번이고 고맙다고 말하는 수후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수후의 집 앞을 떠났고,

그들이 건물들 사이로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던 수후는

낡은 노트 세 권을 소중히 품에 안고 집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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