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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화상에서 금화와 은화를 루인과 루페로 바꾼 그들은 마음이 든든해졌다.
사람이 사는 곳에서 거래할 수 있는 돈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위안이 되었기 때문이다.
비인의 당당한 태도 덕분에 잡화상 주인은 그들을 속일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들은 잡화상 근처에 있는 음식점에서 간단하게 아침을 먹었다.
고기를 넣어서 만든 수프와 야채볶음, 계란 프라이가 그들의 아침 식사였다.
음식점에서 식사를 하는 사람들 중에 외지인은 그들밖에 없는 듯,
사람들은 약간 경계의 시선으로 그들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었다.
"우리가 가진 것들 중에 팔만한 것 없을까?"
"글쎄… 나무줄기랑 반지 같은 것들을 팔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각호의 뿔도 무겁고 크니까 파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이제 우리는 무기를 살 수 있잖아."
"그럼 밥 먹고 무기를 사러 가보자."
그들이 식사를 마치고 무기상점으로 향할 때,
음식점 안에 있던 몇 몇 사람들이 일어서서 그들을 따라왔지만,
그들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따라오는 사람들은 아무리 봐도 평범한 옷을 입은 마을 사람들로 보였기 때문이다.
"무기를 좀 사러 왔는데요."
무기상점 주인은 눈썹이 진하고 근육질의 몸을 가진 남자였는데,
목소리가 무척 걸걸하고 호탕해서 가게 안에 쩌렁쩌렁 울릴 정도였다.
"하하하핫. 여행자들인가 보군. 젊은이들이 아주 기특한데?
우리 무기상점에서는 최상품의 고급 무기들을 다루고 있지. 최고의 장인이 만든 거야.
어떤 걸 원하나?"
"여자들이 쓸만한 무기를 보여주세요."
리현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리현의 모습을 한 번 쓱 훑어본 주인이 씩 웃었다.
"아가씨, 눈빛이 정말 좋은데? 몸놀림도 빠를 것 같고…
아가씨한테는 던져서 맞출 수 있는 단도나 표창이 좋겠어.
표적에 확실하게 맞출 수 있나?"
"네. 그런 건 잘 해요. 그런데 던진 후에 일일이 수거하려면 귀찮을 것 같네요.
쇠사슬 같은 걸로 연결이 된 단도는 없나요?"
"오오. 있지, 있어. 이게 우리 가게의 자랑인 무기인데 말이야.
가격은 좀 세지만 아주 예리하고 가벼워. 멀리까지 날아가지.
도이네라고 하는 무기야."
무기상이 작은 상자 하나를 꺼내며 말했다.
상자 안에는 여자의 손 정도 되는 길이의 날카로운 단검이 들어 있었는데,
단검의 칼자루 부분에는 은색의 길고 가느다란 쇠줄이 달려 있었다.
"여기 이 쇠줄 끝 부분에 고리가 있지? 그 고리를 손목에 걸고 쓰는 거야.
어지간한 갑옷 정도는 뚫을 수 있을 정도로 강하지.
어때? 마음에 드나?"
"네, 괜찮네요."
리현이 생긋 웃으며 도이네을 집어 끝을 손목에 걸었다.
도이네의 칼자루를 잡고 있는 리현의 모습은 강한 여전사처럼 보였다.
그 모습에 자극을 받은 차희가 앞으로 나서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저도 하나 가지고 싶은데… 뭐가 좋을까요?"
끝이 약간 늘어지는 듯한, 나른한 목소리에 무기상 남자가 미소를 지었다.
차희의 목소리는 남자를 자극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매혹적이었다.
"여자들이 사용하기에는 역시 단검이 가장 좋지. 가볍고 작으니까…"
"그럼 저도 도이네인가? 저걸로 주세요."
"아니."
무기상이 고개를 저었다.
"아가씨는 팔 힘도 별로 없어 보이고, 저 아가씨처럼 날카로운 눈을 가지고 있지도 않아.
표적에 정확히 맞출 수 없다면 도이네의 쇠줄은 독이 될 뿐이야.
아가씨는 그냥 단검을 지니는 게 좋겠어."
리현과 비교를 당한 차희는 기분이 나쁜 듯 인상을 찌푸렸지만
무기상의 확고한 태도에 뭐라고 하지도 못하고 입술만 삐죽 내밀었다.
우준과 채민에게는 각자 스웨인과 인어의 검이 있었기 때문에,
비인과 강전, 가인이 각자에게 맞는 검을 고르고,
각자에게 잘 맞는 갑옷을 하나씩 골랐다.
"전부 해서 천 십 루인인데… 우리 가게를 이용해줬으니 10루인은 깎아주도록 하지. 천 루인만 내."
"네에? 천 루인이요?"
그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무기와 갑옷이라는 것이 몇 개 샀다고 천 만원을 오락가락할 만큼 비싼 것인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너무 비싼 거 아니에요?"
강전이 투덜대자 무기상이 인상을 찌푸렸다.
"자네들, 여행 처음인가? 우리 무기상점은 싸기로 유명한 곳이라구.
다른 곳에서 이 정도를 사면 2천 루인 이상을 줘야할 걸."
다들 리현을 돌아봤다.
리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맞아. 사실이야."
마음을 읽는 리현까지도 사실이라고 하니, 그들은 어떻게 더 깎을 수도 없었다.
"저, 그렇다면 다른 물건과 교환도 가능한가요?"
비인이 물었다.
"값어치가 있는 물건이라면 당연히 가능하지. 괜찮은 물건이라도 있나?"
무기상은 그래봐야 이런 어린 아이들이 얼마나 괜찮은 아이템을 가지고 있겠어,라고
무시하는 듯한 표정으로 그들을 쳐다봤다.
"나무줄기랑 또 해적선에서 얻은 반지랑…"
비인이 가방에서 이런저런 것들을 꺼낼 때였다.
음식점에서부터 조용히 그들의 뒤를 따라왔던 무리가 갑자기 그들에게 달려들었던 것이다.
"꼼짝 마라!"
다짜고짜 칼을 빼들고 덤벼드는 그들의 모습에 무기상도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칼을 빼든 무리들이 일제히 겉에 걸치고 있던 회색 옷을 잡아 뜯자,
그 안에 입고 있던 붉은 제복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모습에 강해 보이는 무기상도 "아, 이런…"하는 탄식을 내뱉으며 뒤로 물러났다.
자기와 관계가 없는 일이라면 일절 상관하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무슨 일이죠?"
리현이 눈을 부릅뜨며 앞으로 나섰다.
무기까지 손에 넣은 지금, 리현은 무서울 것이 없었다.
앞에 있는 너 댓 명의 병사 정도는 쉽게 이길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외지인이 돌아다닌다는 소리가 들려서 뒤를 밟았는데, 역시나 해적 무리였군."
"해적 무리라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너희들이 가지고 있는 그 반지! 그건 분명 검은 해적단이 가지고 다니는 반지다!
다른 나라에서는 검은 해적단이라면 쉬쉬하면서 모르는 척 하는 분위기지만,
우리나라의 병사들까지도 그럴 거라고 생각하지는 마라! 네놈들을 전부 체포하겠다."
"체포라니… 그게 무슨… 우린 검은 해적단과 관계 없어요!
오히려 그 검은 해적단을 무찌르고 오는 길이라구욧!"
차희가 빽 외치자 병사들의 얼굴에 비웃음이 떠올랐다.
"웃기고 있군. 니들이 검은 해적단을 무찔렀다구?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맛!
분명 두목에게 이 나라를 염탐하라는 명령을 받고 이곳으로 왔겠지.
우리는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아!"
"그러니까 오해라구욧!"
"시끄러!"
짜악-
병사 하나가 가차없이 차희의 뺨을 세게 때렸다.
"악!"
"차희야, 괜찮아?"
채민이 차희에게 다가가려 하자, 병사 하나가 채민의 목에 칼을 들이밀었다.
"움직이면 이 자리에서 죽이겠다."
"칼을 거둬."
우준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뭐라고?"
"칼을 거두지 않으면 네 목이 먼저 날아갈 거다."
"이 애송이가!"
어린 우준의 명령조의 말에 기분이 상한 병사가 채민의 목에 닿았던 칼을 자기 쪽으로 확 수거하는데,
가까이 있던 채민의 목에 작은 상채기가 나고 말았다.
하얀 목에서 피가 주르륵 흐르는 모습을 본 우준이 인상을 찌푸리는가 싶더니,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칼을 빼들어,
병사가 내리치는 칼을 막았다.
"이, 이 자식이…"
병사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자신은 두 손으로 있는 힘을 다해 내리쳤는데도,
우준은 한 손으로 가볍게 그의 칼을 막았기 때문에 크게 자존심이 상했던 것이다.
병사보다 한참 키가 큰 우준이 병사를 내려보며 입술을 살짝 벌렸다.
"칼을 거두고 우리를 그냥 보내. 이 나라에 해를 끼칠 생각은 없다.
당신들이 그냥 물러나면 우리도 조용히 이 나라를 떠나도록 하지."
"그, 그래. 좋아."
병사는 우준의 힘이 생각보다 강하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동료들에게 눈짓을 하며 주춤주춤 가게를 빠져나갔다.
"피를 안 흘리고 끝내서 다행이야."
가인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목 괜찮아?"
우준이 걱정스레 채민에게 다가갔다.
"아아, 응. 이 정도야, 뭘… 허구한 날 있는 일인 걸."
채민이 헤헤 웃자, 우준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생겼다.
우준이 손을 올려 흐트러진 채민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넘겨주고는
허리를 굽혀 채민의 목에 입을 가져갔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채민은 놀라서 눈을 크게 뜬 채로 굳어버렸고,
우준의 혀가 채민의 상처를 핥는 동안,
그 농밀하고 진득한 모습에 일행들도 입을 쩍 벌린 채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천천히, 아주 꼼꼼히 채민의 목에 난 상처에서 피를 핥아낸 우준이
여전히 굳어있는 채민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앞으로 안 다치도록 내가 좀 더 주의를 기울일게. 미안하다."
"미, 미, 미, 미안하다니!"
바짝 긴장해 있던 채민이 다급히 외쳤다.
"나, 나, 난 원래 잘 다치는 애인데… 그래도 네가 있어서 이 정도로 끝난 거잖아.
내가 고맙고 미안하지. 정말… 네가 미안할 거 하나도 없어. 그러니까…"
얼굴을 붉히고 서둘러 이야기하는 채민의 모습이 귀여워서
일행은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우준까지도 옅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단지 차희만이 채민을 흘겨보며,
'아, 내가 다쳤어야 했던 건데…'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일단 무기상에게 값을 지불한 그들은 갑옷을 입고, 무기를 소중히 장착한 후에 무기상점을 나섰다.
문을 열고 밖으로 한 걸음 내딛는 순간,
붉은 제복의 병사를 태운 말 한 마리가 굉장히 빠른 속도로 달려왔고,
병사는 가장 앞에 있던 채민을 낚아챘다.
"이 계집을 되찾고 싶으면 순순히 성으로 오는 게 좋을 거다!"
병사는 크게 외치고 다른 곳에서 기다리던 병사 무리와 함께 성을 향해 사라졌다.
너무나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에 다들 멍하니 서 있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외쳤다.
"으앗! 채민이가 납치 당했어!"
영문도 모르고 말에 짐짝처럼 얹힌 채 성안으로 들어온 채민은
말이 멈추자마자 누군가가 뒤통수를 세게 때리는 바람에 기절하고 말았다.
눈을 떴을 때는 축축한 지하 감옥 안에 갇혀 있었는데,
검은 해적단의 해적선에서 맡았던 것과 비슷한 피비린내가 그득한 곳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해적선에서는 바다의 짠냄새가 섞여 있었다는 것 정도일까?
그 불쾌한 냄새를 다시 맡아야 한다는 사실에 채민은 몸을 부르르 떨며 주위를 둘러봤다.
열 평 정도 되는 크기의 감옥 안에 갇혀 있는 사람은 채민뿐이 아니었다.
어린 아이 몇 명과 나이 들어 보이는 중년의 여성들이 지친 표정으로
여기저기 구겨지듯 쓰러져 있었다.
'저런 어린 아이들이 무슨 잘못이 있다고…'
4, 5살밖에 안 된 것 같은 아이들이 이런 끔찍한 곳에 갇혀 있다는 사실이 안쓰러워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지하 감옥은 채민이 갇힌 곳 말고도 여러 개가 더 있는 듯,
여기저기서 사람들의 고통스러운 신음소리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채민은 두 팔과 다리가 자유롭다는 것을 깨닫고는 조용히 걸어서 창살 앞까지 갔다.
감옥 안은 횃불 두 개가 밝히고 있었기 때문에 어두운 편이었고,
지하에는 지키는 사람이 없는 듯 했다.
위쪽에서 사람들이 왔다갔다하는 발걸음 소리와 이야기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이끼가 끼어있는 흑회색 벽은 굉장히 두꺼워 보였다.
'후우…'
채민은 한숨을 내쉬었다.
'또 이럴 줄 알았어. 이번에는 다들 그냥 갔으면 좋겠다.
괜히 나 때문에 목숨이 위험해지면… 우준이가 또 다치면…
난 정말 내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아.
이번에는 날 놔두고 그냥 갔으면 좋겠다.
그러면 우리 일행에게 계속 닥쳐온 불행이 전부 사라질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