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햇빛 한 바구니, 고양이 두 스푼-25화 (25/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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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벅뚜벅-

지하 감옥으로 이어진 계단을 내려오는 육중한 구두소리가 소름이 끼치도록 불쾌해서,

채민은 양팔로 몸을 감싸고 부르르 떨었다.

거칠고 축축한 돌벽의 가장자리에 몸을 붙여 될 수 있도록 상대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잔뜩 움츠렸다.

'제발 그냥 좀 지나가 줘.'

하지만 채민의 바람대로 되지는 않았다.

발소리는 채민이 있는 감옥 앞에서 멈추었고, 곧 철컹거리며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채민은 들어온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하고 싶지 않아서 눈을 질끈 감았지만

곧 이어 들려오는 목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

"내가… 한밤중에 시끄럽게 하는 것을 싫어한다는 건 알고 있을 텐데…"

그 목소리는 너무도 낮고 음침해서 듣는 것만으로도 온몸에 오싹한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어둠에 잠긴 목소리가 그토록 불쾌한 것인 줄은 미처 몰랐다.

감옥 안에서 그의 목소리가 무겁게 메아리쳤다.

메아리로 두들겨 맞는 기분이었다.

채민의 눈동자가 천천히 올라가 목소리의 주인공에게 향했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몸에 착 달라붙는 검은 슈트를 입은,

키가 크고 건장한 체격을 가진 남자였다.

오랫동안 햇빛 아래 나가지 않은 사람처럼 창백한 얼굴 위를 덮은,

어깨까지 늘어진 검은 머리카락이 살아 움직이는 듯 보였다.

그의 눈동자는 채민을 향하고 있지 않았지만,

눈에서 풍겨 나오는 냉혹한 살기에 온몸이 베이는 것 같았다.

그의 시선은 중년의 여인에게 꼭 달라붙어 오들오들 떨고 있는,

어린 사내아이와 계집아이에게 향해 있었다.

계집아이 쪽이 나이가 좀 더 많아 보였지만 그래봐야 6살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두 아이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한 표정이었지만

입술을 앙 깨물고 억지로 울음을 참고 있었다.

그 모습이 안쓰러워 당장이라도 안아주고 싶었다.

"폐하…"

중년의 여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조심스레 그를 불렀다.

'저 사람이 왕이구나.'

채민은 수후에게 들었던 왕에 대해서 떠올렸다.

어머니와 아내에게 배신을 당한 후로 변해버린 잔인하고 차가운 왕.

백성들을 숨막히는 공포 속에서 살게 만든 장본인.

그가 바로 눈앞에 있었던 것이다.

"제, 제발… 제발 용서하여 주십시오. 제발…"

중년의 여인은 안쓰러울 정도로 떨리는 목소리로 간절하게 애원했지만

왕의 눈빛에 담겨 있는 살기는 조금도 사라지지 않았다.

"이 어린것들이 철이 없어서… 제가 이 어린것들을 잘 보살피지 못해서…

차라리 제게 벌을 주시고 이 아이들은 용서해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폐하.

부디 넓으신 아량으로… 제발…"

왕의 입술이 비틀어져 올라갔다.

어두운 감옥조차 그 미소에 숨죽이고 몸을 떨었다.

"차라리 네게 벌을 내리라니… 웃기는 말이군."

왕의 목소리는 처음과 달라지지 않았다.

"네 새끼들에게나, 그 새끼들을 잘못 교육시킨 어미에게나 똑같은 처벌이 내려질 거라는 생각은 못 했던 건가?

넌 네 자신의 목숨이 그렇게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채민은 다시금 눈을 질끈 감았다.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 아이들에게 향하는 그의 냉혹한 눈빛을 견디기 힘들었다.

"걱정하지 마라. 내 넓은 아량을 베풀어, 네년이나 네 새끼들이나 외롭지 않도록

한 날 한 시에 저 세상으로 보내줄 테니…"

'어떻게 저런 사람이 있을 수 있지?'

채민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 질퍽한 악의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을 움츠리는 채민의 팔에 차가운 감촉이 느껴졌다.

허리에 매달려 있는 인어의 검이었다.

'아, 병사들이 이걸 발견 못 했구나.'

채민은 병사들이 그것을 발견 못 한 것이 아니라, 인어의 검이 스스로 자신을 발견할 수 없도록

모습을 감추었던 것이라는 걸 알지 못했다.

'모르는 척 해야 돼.'

채민은 입술을 깨물었다.

'난 지금 내 인생을 바꾸기 위해 여행을 하고 있는 거야.

힘도 없는데 남들의 일에 일일이 끼어들 수는 없어.

그랬다가는 다른 일행들만 더 힘들어질 뿐이야.

지금 내가 이들의 일에 끼어 드는 건, 좋은 일이 아니라 오만일 뿐이야. 자기만족…'

촤앙-

칼집에서 칼을 뽑는 소리에 눈을 뜬 채민은

왕의 날카로운 칼이 소녀의 목에 닿아 있는 것을 보았다.

소녀는 공포에 질려서 숨도 쉬지 못하고 있었고,

사내아이는 제 누나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만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으흐흐흑…"

억지로 참아도 흘러나오는 어린아이의 흐느낌이 가슴 아프게 울려 퍼졌다.

"폐, 폐하…"

중년의 여인이 몸을 부들부들 떨며 무거운 팔을 올려 자신의 딸 앞을 막으려 했지만,

그 전에 왕의 칼이 번쩍 빛을 냈다.

솨악-

칼이 바람을 가르자 채민은 비명을 지르고 싶은 것을 참으며 눈을 감았다.

"으아악!"

고통스러운 비명소리에 다시 눈을 뜨니, 중년 여인의 팔이 감옥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엄마, 엄마!"

"으아앙!"

제 엄마의 팔이 잘려나가는 것을 본 아이들은 충격 때문에

왕의 앞이라는 것도 잊고 울음을 터뜨리며 중년 여인에게 매달렸고,

왕은 그들에게 차가운 시선을 보내며 낮게 말했다.

"감히 내 칼을 가로막아? 불쾌하군."

"엄마아아…"

"시끄럽다!"

왕이 딱딱한 구둣발로 사내아이의 배를 걷어찼다.

"커헉…"

사내아이는 배를 움켜쥐며 숨을 토해냈고,

그 끔찍한 모습을 본 채민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번쩍-

비인이 눈을 뜬 것은 철문이 우준의 스웨인으로 인해 두부처럼 반으로 갈라진 것을

일행이 확인한 후였다.

그 놀라운 광경에 집중하느라 비인이 돌아온 줄도 모르고

우준의 힘에 감탄을 하고 있던 일행은,

뒤에서 들려오는 비인의 다급한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얼른, 얼른 움직여야 돼! 얼른!"

좀처럼 당황하는 일이 없는 비인이기에 일행은 채민이 심각한 사태에 빠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얼른 들어가자."

우준은 두말하지 않고 먼저 안으로 걸음을 옮겼고,

다른 아이들도 우준의 뒤를 따랐다.

우준의 걸음은 무척 빨랐지만 일행은 불평하지 않고 질퍽한 바닥 위에 열심히 발을 놀렸다.

희미한 램프의 빛을 의지해서 가는 거라 일행의 걸음은 불안하기 짝이 없었고,

아무리 서두른다고 서둘러도 잘 닦인 길을 걷는 것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느렸다.

게다가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지하수로 안에서 나는 악취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다들 몇 번이나 토하고 싶은 것을 꿀꺽꿀꺽 삼키며 참아내는 중이었다.

걸어가면서 비인은 채민이 갇혀 있는 감옥과 그곳에 갇혀 있는 다른 사람들,

그곳을 찾아온 왕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걸어가는 그들의 머리 위로 천장에 맺혀 있던 더러운 물이 떨어졌지만

그것에 신경 쓰는 사람은 차희밖에 없었다.

"잘 참고 있다고 생각했어. 그런 모습을 보고도, 그 착한 현채민이 아주 잘 참고 있다고 생각했어.

이대로만 참으라고… 조금만 더 참고 왕의 눈에 띄지 말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다들 침을 꿀꺽 삼켰다.

"그 바보가 칼을 빼들었어!"

"아아…"

다들 절망적인 탄식을 내뱉었다.

단지 어린아이가 밤에 시끄럽게 했다는 이유로,

아무리 시끄럽게 했어도 성에 사는 왕의 귀까지는 괴롭히지 않았음이 분명한데도,

아이들과 어머니까지 죽이려고 하는,

아이들의 앞에서 가차없이 어머니의 팔을 베는 왕이,

자기의 눈앞에 칼을 들이민 채민을 용서할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걔는 왜 일을 번거롭게 만들고 그런대? 그냥 가만히 좀 있을 것이지…

우리가 가봐야 걔는 이미 죽어 있는 거 아냐?"

차희의 말에 대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리현은 더 이상 차희를 상대하고 싶지 않았고,

다른 일행은 그런 끔찍한 상상은 하고 싶지도 않았던 것이다.

"마음이 급해서 얼른 돌아왔어. 뒤의 일을 보고 싶지도 않았고…"

비인의 목소리가 어두운 통로 안의 공기와 부딪혀 음울하게 울렸다.

우울한 메아리를 타고 들려오는 작은 소리에 우준은 걸음을 멈췄다.

무언가가 있다.

그것도 굉장히 많은 수의 무언가가 이 앞에 있다.

아니, 이쪽으로 몰려오고 있다.

우준의 예민한 오감은 우준에게 긴장하라고 쉴 새 없이 경고하고 있었다.

앞서가던 우준이 걸음을 멈추자 다들 이상하게 생각하며 물었다.

"왜 그래, 우준아?"

"뭔가… 있어."

우준이 중얼거리며 스웨인을 빼들었다.

"뭐, 뭔가 있다니?"

차희가 우준의 팔에 매달리며 물었다.

"아주 불쾌하고… 많은 수의…"

"꺄아아악!"

우준이 말을 끝내기 전에 그것을 발견한 차희의 비명이 공기를 갈랐고,

그들은 우준이 말하는 그것들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있었다.

어두운 통로 저쪽에서 검은 그림자가 일렁이며 일행들을 덮치듯 다가오고 있었다.

왕은 채민이 들고 있는 검이 범상치 않은 것임을 대번에 알아봤다.

하지만 왕의 관심을 끈 것은,

어떻게 이 허술해 보이는 소녀가 이렇게 좋은 검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도,

감옥에 갇혀 있는데도 검을 가지고 있을 수 있는지도 아니었다.

그는 아무 힘도 없어 보이는 채민이 검을 자신에게 겨누었다는 것에서 굉장한 신선함을 느꼈다.

채민은 분명 덜덜 떨고 있었다.

검을 들고 있는 채민의 팔도, 서 있는 채민의 가느다란 다리도,

금세 무너질 것처럼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왕을 노려보는 채민의 눈동자만큼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것이 왕을 자극했다.

이 나라의 대신들도 감히 왕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데,

어떻게 이 작은 소녀가 이렇게 흔들림 없는 눈동자로 마주볼 수 있단 말인가.

왕은 아주 오랜만에 자신을 자극하는 사람이 생긴 것에 기쁨을 느꼈다.

위잉-

검이 푸른빛을 내뿜었다.

강하지는 않지만 분명히 검기였다.

왕은 다시 한 번 놀랐다.

아무리 대단한 검객이라도 검기를 내뿜으려면 고도의 집중력과 체력이 필요했다.

하지만 채민은 벌벌 떨고 있는 데다가 체력도 약해 보였다.

그런데 어떻게 검기를 내뿜을 수 있단 말인가.

혹시 이 소녀, 겉모습만 이럴 뿐, 상당히 강한 검객인 것이 아닐까?

왕은 약간 긴장하며 언제든 채민의 공격에 맞설 준비를 했다.

"어떻게…"

채민의 입술이 벌어지며 가느다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떻게 사람이 이래요?"

그녀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훨씬 가늘고 훨씬 연약해서,

왕은 다시 한 번 의아해졌다.

검기를 내뿜을 정도로 힘을 사용하고 있다면 목소리 또한 몸에서 흐르는 기에 반응해

강하고 견고해질 터.

하지만 채민의 목소리는 강하고 견고하기는커녕,

잘못했다가는 소리가 공기 중에 흩날려 바로 앞에 서 있는 왕의 귀에까지 닿지도 못할 것 같았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잖아요."

채민이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화가 나고 사람이 미워도… 이건 아닌 거잖아요."

채민의 목소리에 울음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왕은 가만히 채민을 노려봤다.

채민보다 예쁜 여자들은 널리고 널렸다.

훨씬 성숙한 몸으로 남자의 오감을 자극할 만한 여자들이 밟히고 밟혔다.

하지만 호기심을 주는 사람은 채민뿐이었다.

제대로 씻지도 못해 땟국물이 흐르는 채민으로 인해 그런 감정이 생긴다는 게,

왕은 참으로 신기했다.

"이름은?"

이윽고 왕의 입술이 떨어지며, 예의 그 음험하고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현채민."

예의 바른 채민은 왕의 질문에 바로 대답을 했고,

그것은 왕에게 만족감을 주었다.

"칼을 거두어라."

"거두면… 이 사람들을 죽일 거잖아요."

"아니."

왕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묻어 나왔다.

"네가 나의 흥미를 끄는 동안에는 죽이지 않도록 하지."

채민의 얼굴이 밝아졌다.

대번에 밝아진 채민의 얼굴은 어두운 감옥을 환하게 할 정도로 빛이 났다.

왕은 다시 한 번 놀라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꼬질꼬질한 얼굴에서 빛이 난다는 느낌을 받은 경우는 처음이기 때문이다.

"그럼… 저 아주머니를 치료해주면 안 될까요? 피가 너무 많이 흘러서… 죽을지도…"

왕이 잠시 인상을 찌푸렸다.

"갈수록 태산이군. 다른 때라면 넌 지금 이 자리에서 내 칼에 죽는다."

왕의 협박에도 채민의 눈동자는 여전히 견고하게 중심을 잡고 있었다.

"후우…"

왕은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돌렸다.

"좋아. 사람을 보내 치료하도록 하지. 넌 날 따라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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