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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준의 말대로 쥐들을 헤치고 나가니, 쥐들은 더 이상 따라오지 않았다.
그들이 잠시 멈춰서 꺼진 램프를 점검하는 동안,
비인은 유체이탈로 성에 들어가 채민이 있는 곳을 찾아보고 돌아왔다.
"무사해?"
가인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응, 무사해. 그런데…"
비인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 왜? 그 녀석, 무슨 고문이라도 당한 거냐? 응?"
강전이 눈에서 빛을 튀기며 묻자 비인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왕이랑 단 둘이 방에 앉아 있어. 탁자를 사이에 두고…
게다가 채민이… 굉장히 예쁘더라. 드레스를 잘 차려 입고 있는데… 그렇게 예쁜 줄 몰랐는 걸."
비인의 말에 차희가 눈을 치켜올렸다.
"걔, 왕한테 꼬리친 거 아냐? 그러게 우리가 구하러 가봐야 아무 소용없다니까…
괜히 우리만 병사들한테 잡히고, 걔가 우리 모르는 척 하면 우리만 죽는 거야.
그냥 돌아가자. 걔는 여기서 왕이랑 같이 사는 게 더 좋을지도 모르니까…"
"그런 거 아냐."
우준이 대답하며 아직까지 앉아있는 비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비인을 번쩍 일으켜 세운 후 먼저 걸음을 옮겼다.
"그런 게 아니라니… 여자들이 바라는 건, 돈 많고 권력이 있는 남자라구.
드레스에 좋은 음식, 좋은 악세사리… 공주가 되는 걸 싫어하는 여자는 없잖아.
분명히 걔, 우리가 찾아가면 곤란해할 걸."
"그럴 리 없으니까 가자."
채민을 강하게 믿는 듯한 우준의 말투에 차희는 무척 기분이 상했다.
우준과 채민 사이에, 자신은 감히 가늠해 볼 수도 없는 끈끈한 무언가가
착 들러붙어 있는 것 같아서 점점 불쾌해졌다.
게다가 이 중에선 차희의 편이 되는 사람들이 아무도 없었다.
인상을 찌푸리고 그들의 뒤를 따르던 차희는 앞으로 전략을 바꿔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말하고 걸어가던 그들이, 손바닥만한 크기의 거대 모기떼를 만난 것은
성으로 올라가는 입구에 거의 다 도달했을 때였다.
"미치겠군."
수 십 마리는 될 듯한 모기를 보며 강전은 한숨을 내쉬었다.
모기가 얼마나 큰지, 그 날카롭고 뾰족한 주둥이가 주사 바늘처럼 보일 정도였다.
위협적으로 윙윙거리는 소리에 가인이 말했다.
"난 이 세상에서 모기가 제일 싫어. 아무리 생각해도 모기는 쓸모없는 생물인 것 같아."
"맞아."
비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걸 어떻게 뚫고 지나가냐?"
리현이 도이네를 손끝에서 빙빙 돌리며 중얼거렸다.
"한 방 물리면 장난 아니겠는데? 피 다 빨릴 것 같아.
저건 모기가 아니라 흡혈귀 수준이라구."
강전은 도무지 방법이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수북한 모기들 뒤로 보이는 공간의 천장에 달린 문이 분명 그들이 찾고 있는 입구일 것이다.
그것이 눈앞에 보이는 상황에서 이런 장애물과 맞닥뜨렸다는 것이 그들을 절망스럽게 만들었다.
"아, 씨발. 조금만 더 가면 되는데…"
강전은 짜증난다는 듯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모기향 같은 거 없어?"
차희의 질문에 다들 고개를 저었다.
먹을 것조차 챙기지 못했던 여행에서 어느 누가 모기향을 준비했겠는가.
게다가 앞에 있는 모기들은 모기향 정도로 죽을 모기들이 아니었다.
"리현아."
우준이 낮은 목소리로 리현을 불렀다.
우준은 점점 마음이 급해졌다.
왕의 방에 채민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그 순간부터인 것 같다.
남녀가 한 방에 있다는 것은 그 뒤의 결과를 뻔히 보이게 했다.
드레스로 갈아입은 채민은 예쁘다고 했고, 그런 예쁜 채민과 함께 있는 왕이
아무리 냉혈한이더라도 그 후의 상황은 예상대로 흘러갈 것이다.
왕의 손이 채민을 건드릴지도 모른다는 상상만으로도 우준은 미칠 것 같았다.
우준 자신도 속에서 들끓어 오르는 감정의 소용돌이의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소용돌이에 대한 해명을 하고 있을 틈이 없었다.
"응, 왜?"
"전에 섬에서 채민이랑 먹을만한 식물을 채집할 때,
독버섯도 몇 개 챙겼다고 했지?"
"응. 몇 개 있어. 왜? 쟤들 먹이게? 쟤들이 순순히 먹어줄까?"
"그걸 태우자."
"아!"
우준의 말에 다들 탄성을 질렀다.
"모기향이 없으니까 독버섯들을 몇 개 태우자.
그리고 연기가 빠질 때까지 다른 곳으로 가 있다가 돌아오자."
그럴 듯한 방법이었다.
리현은 매고 있던 커다란 배낭을 내리고 뒤적거려 버섯을 몇 개 꺼냈다.
"이 정도만 태우면 되겠지?"
징그럽게 생긴 버섯을 본 차희가 얼굴을 구기며 물러섰다.
"그런 건 어디서 난 거야?"
"너 만나기 전에 있었던 섬에서…"
"진짜 이상하게 생겼다."
"그 섬에 있는 것들 중에 예쁘장하게 생긴 건 아무 것도 없었어.
하늘조차도 이상했으니까…"
가인이 생각하고 싶지 않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얼른 태우자."
리현이 램프를 기울여 불을 붙이려고 하자,
우준이 리현의 손에서 버섯을 빼앗았다.
"리현아. 애들이랑 같이 여기서 좀 떨어진 곳으로 가 있어."
"응? 왜? 내가 태울게."
"내가 태울게. 독버섯을 태우는 것만으로도 이상한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될 수 있도록 멀리 벗어나 있어. 너네 떠나고 1분 후에 불을 붙일 테니까."
"야, 야. 그럼 넌 어쩌고? 그냥 내가 태운다니까."
"그냥 내 말 들어."
다시 버섯을 뺏으려는 리현의 손을 잡고 우준이 나직하게 말했다.
"이 고집쟁이."
무슨 말을 해도 우준이 생각을 바꾸지 않으리라는 것을 깨달은 리현은
어쩔 수 없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불 붙이고 나서 바로 우리한테 뛰어와야 돼."
"걱정 마. 나도 죽고 싶지는 않으니까."
일행이 멀리 벗어난 것을 확인한 우준은 바로 버섯에 불을 붙였다.
버섯은 약간 말라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쉽게 불이 붙었고,
뿌연 연기를 내며 타기 시작했다.
우준은 버섯들을 한 곳에 모아 두고는 돌아서서 일행을 향해 달려갔다.
한참 후 그들이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을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모기들은 서로의 몸에 자신들의 주둥이를 박은 채,
바닥에 너부러져 있었다.
손바닥만한 모기들이 서로에게 주둥이를 꽂고 늘어져 있는 모습은 끔찍했다.
모기들을 밟지 않고 지나가려 했지만 워낙 빽빽이 들어차 있어서 피할 수가 없었다.
밟을 때마다 모기의 몸이 버석거리며 부서지는 느낌에 아주 기분이 나빴다.
다들 절로 인상을 찌푸리며 조심조심 걸어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그들은 입구의 아래에 설 수 있었다.
방안에서 채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요. 아직은 죽고 싶지도 않아요."
채민의 말에 우준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차희는 인상을 찌푸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입구를 폭탄으로 부수고 올라왔을 때는 아무도 없었다.
아마도 창고로 쓰이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 후에도 쉬웠다.
비인이 유체이탈로 병사들이 지키지 않는 곳을 알아내어 그곳으로 몰래 걸어왔기 때문이다.
"왕이 칼을 빼들었어."
순간적으로 채민의 마음을 읽은 리현이 작은 목소리로 알려주었다.
우준은 고개를 끄덕이고 스웨인을 손에 잡았다.
앞으로의 혈투를 예상한 듯, 스웨인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비야, 이번에도 내게 힘을 줘. 난 저 애를 지키고 싶어.'
"당신의 칼은 내 목을 벨 수 없어요. 왜냐하면…"
채민이 말했을 때, 우준은 발로 문을 세게 걷어찼다.
콰앙-
단단하게 닫혀 있던 문이 형편없이 나가떨어졌다.
갑작스러운 침입에 왕이 눈을 크게 뜨고 우준을 쳐다봤다.
우준은 빠르게 몸을 움직여 채민의 목을 겨누고 있는 왕의 칼을 쳐서 떨어뜨리고,
스웨인으로 왕의 목을 겨누며 말했다.
"왜냐하면 내가 채민이를 죽게 놔두지는 않을 거기 때문이지."
"넌… 누구냐…"
"난 채민이의 동료다."
우준이 단호하게 말했다.
왕은 이들이 성의 철통 같은 수비를 뚫고 들어왔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오랫동안 전쟁이 없기는 했지만, 왕은 병사들을 교육 시키는데 힘을 아끼지 않았다.
자신을 지켜줄 것은 권력과 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은 후로는
자신의 휘하 병사들만큼은 그 어떤 공격에도 대비할 수 있도록
쉴 새 없이 훈련을 시켰다.
그런데 이 애송이 녀석들 앞에서는 그 강한 병사들도 무력하단 말인가.
병사들이 싸우는 소리 또한 듣지 못했다.
"얘들아."
채민이 활짝 웃으며 일어나는 모습에 다들 침을 꿀꺽 삼켰다.
비인의 말대로였다.
처음부터 교복을 입고 꾸미지 않은 모습만 봤던 그들은
채민이 예뻐 봐야 얼마나 예쁘겠느냐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실제로 그 모습을 접했을 때의 놀라움은 굉장히 컸다.
특별히 화장을 진하게 한 것도 아닌데,
그저 깨끗하게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는 것만으로도
채민에게서는 수수한 아름다움이 가득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우와, 진짜 졸 예쁘네."
강전이 솔직하게 말하며 엄지를 세워 보이자, 채민이 얼굴을 붉혔다.
"예쁘긴…"
"아, 졸 예쁘다. 상황이 이렇지만 않았으면 내가 확 꼬셔버렸을 텐데…"
강전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하며 웃었다.
그 때, 문이 떨어져나가는 소리를 들은 병사들이 무기를 앞세우고 몰려들었다.
자기들 딴에는 신속하게 달려왔는데
이미 침입자의 칼이 왕의 목에 겨눠져 있는 것을 본 병사들은
동시에 생각했다.
'우린 죽었다.'
왕은 눈에서 불을 내뿜으며 병사들을 노려봤다.
"대체… 경비를 어떻게 서길래 이런 어중이떠중이들이 내 방에 이리도 쉽게 들어오는 것이냐!"
우준의 날카로운 칼이 목에 닿아있는데도 왕의 기세는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병사들이 움찔하며 무기를 다잡았다.
"죽고 싶지 않으면 칼을 버려라!"
병사 하나가 외치자 리현이 피식 웃었다.
"칼을 버리면 죽이려는 게 아니고?"
"어디서 굴러먹다 온 계집 따위가 감히 말대꾸를 하는 거냐! 우린 왕의 병사다!"
"그런데 어쩌지? 니들의 왕은 우리의 칼에 목이 베이게 생겼는데…"
"폐하의 목을 베고 나서 너희들이 무사히 이곳을 도망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거냐!"
"응."
우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살고 싶으면 칼을 버리는 게 좋을 거다!"
병사들은 우준이 왕을 죽일 수 없을 거라고 믿는 듯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우준이 왕을 죽이고 나면 우준들에게는 마땅한 인질이 없기에
나라에서 빠져나가기가 더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준의 일행은 아무리 봐도 어디서 빌어먹다 온 거렁뱅이들 무리 같아 보였다.
나이도 어린 데다가 며칠 씻지 못한 듯 지저분했고,
몸에 근육도 없는 것이, 힘이라고는 하나도 없어 보였다.
그나마 우준과 가인의 키가 상당히 크고 우준에게는 단단한 근육도 잡혀 있었지만,
가인은 핏기가 없이 파리한 데다가 얼굴은 여자처럼 곱상하게 생겨서,
다른 사람 몸에서 흐르는 피만 봐도 기절을 할 것 같았다.
병사들은 우준 일행이 조금도 무섭지 않았다.
하지만 우준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들은 주춤하며 뒤로 물러서는 수밖에 없었다.
병사들은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왕이라고만 생각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왕의 냉혹한 눈동자는 언제라도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듯 빛났기에,
그와 두 눈을 마주치는 것조차 피할 정도로 왕을 두려워했다.
하지만 우준의 눈동자는 왕보다 더 심했다.
우준의 눈은 사람의 눈 같지가 않았다.
왕의 눈동자가 증오로 가득 차 있다면, 우준의 눈동자는 아무 것도 채워져 있지 않았다.
아무 것도 채워지지 않은 눈동자는 병사들을 모조리 집어삼킬 듯한 어둠으로 꽉꽉 메워져 있었다.
왕의 눈을 감히 쳐다보기 힘들었다면,
우준의 눈동자는 평생 꿈속에서 따라다닐 것만 같은 공허한 눈동자였기에,
병사들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물러서라. 우리는 이곳에서 지체할 시간이 없어."
우준의 말에는 한 단어, 한 단어에 힘이 실려있었다.
이건 그들이 믿는 왕보다 더한 카리스마였다.
"물러서면 너희들을 모두 죽이겠다."
왕이 단호하게 명령하자, 우준의 눈빛에 넋을 잃고 주춤주춤 물러서던 병사들이 제정신을 차렸다.
"당장 이 자들을 죽여라."
왕이 말했다.
"내가 죽는다 하더라도 이 세상 모르고 날뛰는 것들을 그냥 보내줄 수는 없지."
왕의 말에 병사들은 무기를 다잡으며 서로의 눈치를 슬슬 봤다.
그 때였다.
채민의 위쪽 천장에 멀쩡히 매달려 있던 커다란 샹들리에의 줄이 끊어진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