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위험햇!"
우준의 선택은 하나밖에 없었다.
높은 곳에 달려 있던 거대한 샹들리에에 맞으면 채민이 죽거나, 적어도 반불구가 될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왕을 놓아주면 병사들이 달려들겠지만, 우준은 하나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채민이를 구해야 돼!'
우준은 채민의 위험을 느끼자마자 바로 채민을 향해 몸을 날렸고,
그 틈을 타서 병사들은 방안으로 뛰어들어왔다.
콰앙-
샹들리에가 커다란 소리를 내며 이제껏 채민이 서 있던 자리 위로 떨어졌지만 채민은 무사했다.
우준이 채민을 안고 재빨리 옆으로 굴렀기 때문이다.
샹들리에의 파편 몇 개가 우준의 팔을 베고 지나갔지만 상처는 깊지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우준과 채민이 아니었다.
상황이 역전되어 버린 것이다.
자신의 병사들의 보호를 받으며 왕은 의기양양하게 그들을 노려봤고,
수 십 명의 병사들이 그들을 빽빽이 에워쌌다.
"괜찮아?"
우준은 그들 따위는 상관 없다는 듯 채민에게 물었다.
채민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가 사라졌다.
"나… 나 때문에 또…"
울먹이는 채민의 모습을 보며 우준이 고개를 저었다.
"아냐. 달라."
우준은 채민의 위에서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나에겐 두 가지 선택이 있었어. 널 지킬 것인가, 그대로 왕의 목을 겨누고 있을 것인가."
다들 우준을 쳐다봤다.
우준은 채민의 손을 잡아, 채민을 바로 세워주며 말을 이었다.
"난 너를 지키고 싶었던 거야. 그건 내 선택이야."
차희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차희의 옆에 서 있는 가인이 후끈한 열기를 느끼고 이상히 여기며 차희를 쳐다보자,
차희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니, 어떻게 해야하나 싶어서… 우리들, 병사에 둘러싸였잖아. 어떻게 빠져나가야 하지?"
"긴장 좀 늦춰. 너 이러다 쓰러지겠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강전의 손에서도 전기가 파지직파지직 튀기고 있었기에,
비인은 강전에게 닿지 않도록 조금 옆으로 물러나야 했다.
사실 강전은 아까 쥐들을 해치고 나올 때 힘을 많이 쓴 상태였기 때문에
몸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앞이 핑핑 도는데, 지금 또 긴장해서 전기가 흘러나오니
체력이 딸려서 쓰러져 버릴 것 같이 불안했다.
힘이 없어서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로 간신히 서서 버티고 있기도 벅찬 상황이었기에
병사들이 달려들면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걱정하지 마, 강전아."
비인이 말했다.
"내가 어떻게든 넌 지켜줄게."
"짜식…"
강전이 피식 웃었다.
"너한테 도움을 받을 정도로 약하진 않아. 걱정하지 말고 네 몸이나 지켜."
강전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하자 비인이 웃었다.
"한 번쯤은 나도 누군가를 지켜야하지 않겠어?"
차희는 단검을 손에 꽉 쥐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괜히 따라왔어.'
후회가 밀려왔다.
'차라리 그 배 안에서 죽는 게 마음 편했을지도 몰라.
이런 건 정말 싫어. 우준이도 다른 애만 지켜주고…'
짜증이 났다.
그 때, 우준이 채민을 차희의 옆에 세우고 차희와 채민의 앞을 막아섰다.
우준의 널찍한 등이 그들의 앞에 굳건히 버티고 있었다.
"니들 둘은 내가 지켜. 절대로 내 뒤에서 떨어지지 마."
우직한 목소리에 차희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방금 했던 후회가 눈 녹듯이 사라졌다.
그들이 앞으로 있을 싸움에 대비하는 모습은, 왕이 보기에는 가소로워 보일 지경이었다.
우준과 채민이 좋은 검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나머지는 쉽게 구할 수 있는 무기를 달랑 든 채로 긴장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훤히 보였기 때문이다.
"채민아."
강전이 작게 채민을 불렀다.
"너 그 검으로 물을 좀 불러올 수 있겠냐?"
채민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난 아직 이 검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모르겠어. 미안해."
자괴감이 들었다.
할 줄 아는 것이 너무 없었다.
그래도 다들 하나씩 도움이 되는 저주를 받았는데,
채민의 저주만큼은 아무데도 쓸데가 없었다.
오히려 동료들을 불편하게 만들고 위험에 빠뜨릴 뿐이다.
"물이 있으면 전기의 힘을 제대로 사용할 수 있을 텐데…"
강전이 중얼거리며 자신의 칼을 손으로 꽉 쥐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왕이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저들이 내 침소에 쳐들어온 죄는 너희에게 묻지 않겠다.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저들을 다 죽이지 못한다면,
그 때는 너희들도 살려두지 않겠다.
한 놈도 살려두지 말고 다 죽여라."
병사들에게 있어서 왕의 명령은 절대적이었다.
그리고 병사들 또한 우준 일행은 별 거 아닌 무리였기에,
그들은 무기를 잡고 우준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날카로운 창과 칼이 우준들의 사이에 찔러 넣어졌다.
"꺄악!"
차희가 비명을 지르며 구석으로 도망가려 하자,
우준이 차희의 팔을 잡았다.
차희의 몸에서 나오는 강한 열기 때문에 우준의 손바닥이 화상을 입었지만
우준은 아랑곳하지 않고 차희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절대로 널 다치게 하지 않을 테니, 가만히 내 뒤에 있어."
명령과도 같은 어조에 차희는 찔끔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준이 잠시 병사들에게서 눈을 뗀 사이, 병사 한 명이 창으로 우준의 허리를 찌르려 했다.
"우준아!"
채민이 우준을 밀치고 병사를 막아섰고,
병사의 창은 우준의 허리 대신에 채민의 팔을 스치고 지나갔다.
주르륵-
깊게 패인 상처에서 붉은 피가 흐르는 것을 본 우준의 눈빛이
해적선에서와 같이 돌변했다.
우준의 눈동자에 적에 대한 강한 살의가 화르륵 불타올랐다.
"다 죽여주지."
우준은 방금 채민의 팔에 상처를 낸 병사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병사는 서둘러 방패로 칼을 막았지만,
강력한 스웨인에게 방패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방패는 반으로 쫙 갈라졌고, 병사가 놀랄 틈도 없이 우준은 다시 한 번 스웨인을 휘둘러
병사의 머리를 반으로 갈랐다.
병사는 자신의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른 채,
머리가 좀 욱신거린다고 생각하며 손으로 머리를 만져보려고 했지만,
그 전에 눈에서 빛이 사라지고 다리에 힘이 풀려 털썩 쓰러지고 말았다.
"으으으…"
눈앞에서 사람이 죽어나가는 것을 본 차희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힘이 빠져서 주르륵 쓰러지는 차희를, 채민이 부축했다.
차희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열기가 채민의 드레스를 바짝바짝 태우고,
차희에게 닿은 손까지도 달구었지만 채민은 손을 떼지 않았다.
"차희야. 정신차려. 쓰러지면 안 돼."
채민이 차희를 어르며 일으켜 세우려고 했지만 차희는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병사의 머리에서 흘러내리는 뇌수가 꾸물거리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 같은 환각이 보였다.
"우, 우웨엑!"
차희가 토하자, 채민은 차희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그 동안에도 싸움은 한창이었다.
강전은 쓰러질 것 같이 힘들면서도 계속 병사들을 향해 칼을 휘둘렀고,
비인은 강전에게 다가가는 병사들을 베었다.
처음에는 머뭇거리던 가인도 채민이 팔을 베이고 나자,
이것이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고는 눈을 꾹 감고 칼을 휘둘렀다.
가장 돋보이는 것은 리현이었다.
리현의 도이네는 쉴 새 없이 공중을 날아 병사들의 목과 가슴을 꿰뚫었다.
방패를 뚫을 만한 힘은 없었기에, 방패에 맞으면 튕겨나오기는 했지만,
리현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먼저 도이네로 병사들의 다리를 찔러, 병사가 잠시 주춤하며 방패를 내리는 틈을 타서
다시 한 번 도이네를 던졌다.
한참 밀릴 것만 같던 우준 일행이 쉽게 쓰러지지 않자,
왕의 얼굴에서 비웃음이 사라졌다.
잘 훈련된 병사들임에도 우준 일행들을 쉽게 당해내지 못한다는 것에서 수치스러움을 느꼈다.
'내 병사들이 이 정도밖에 안 되다니…'
왕은 화가 치밀었다.
당장에라도 칼을 들어 병사들의 목을 다 베어버리고 싶지만,
지금 병사들을 베었다가는 자신이 죽을 게 뻔했기에 꾹 참고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다.
'네놈들은 고작해야 일곱이지만 이쪽은 수 백 명. 곧 지치게 될 테지.'
병사들을 일종의 소모품으로밖에 생각하지 않는 왕은
우준 일행에 의해 병사들이 죽어 가는데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계속 이렇게 싸우다 보면 우준 일행이 지쳐서 나가떨어질 것이라는 게 왕의 생각이었다.
왕의 생각은 딱 맞았다.
지하수로를 뚫고 오느라 지쳐 있던 우준 일행은 더 이상 싸울 힘이 남아있지 않았던 것이다.
마지막 힘을 짜내서 칼을 휘두르고 있기는 하지만,
언제 체력이 바닥날지 알 수 없었다.
강전은 이미 몇 번이나 무릎이 꺾여서 넘어졌다가 비틀거리며 일어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비야. 내게 다른 사람들을 지킬 힘을 줘.'
우준은 속으로 부르짖으며 스웨인을 휘둘렀다.
너무 지쳐서 스웨인의 무게가 몇 톤짜리 쇳덩어리처럼 느껴졌다.
팔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질렀다.
'다시 한 번 왕을 잡아야 돼.'
채민은 생각했다.
우준은 뒤에 가만히 있으라고 했지만 우준과 다른 아이들이 지쳐 가는 것이 눈에 보였다.
리현조차도 눈이 반쯤 풀려 있었고, 강전은 거의 반죽음 직전에 몰려 있었다.
게다가 다들 방패가 없는 상태라서 상대의 칼과 창에 맞아 온몸이 피투성이였다.
채민은 인어의 검을 손으로 꽉 쥐었다.
차가운 기운이 손에서부터 온몸으로 번져나갔다.
'이 애들을 지키고 싶어, 검아. 내 목소리 들리니? 나 이 애들을 지키고 싶어.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이 애들을 지키고 싶어. 어떻게 해야할까? 난 어떻게 해야할까?'
불안하게 방안을 둘러보던 채민의 눈에 구석에 놓인 화병이 들어왔다.
화병에 꽂혀 있는 꽃이 싱싱하게 살아있는 것으로 봐서, 그 안에 물이 담겨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인어의 검은 물과 반응한다고 했다.
화병에 담긴 적은 양의 물로도 반응할지는 모르겠지만,
채민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주춤주춤 뒤로 물러난 채민은 얼른 달려가서 화병을 가지고 돌아왔다.
다들 싸우느라 바빠서 채민에게 신경을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준만이 채민이 사라진 것을 느끼고 잠시 뒤를 돌아봤지만
앞에서 내리치는 칼을 받아내느라 다시 시선을 옮겼다.
화병을 가지고 온 채민은 꽃을 빼내어 멀리 집어던지고 검의 끝을 화병 안에 집어넣었다.
부르르르.
검이 진동하는 것이 느껴졌다.
'날 도와줘. 제발, 제발 내게 힘을 줘. 제발.'
인어의 검을 병에서 빼냈을 때, 검은 형형한 푸른빛을 내고 있었다.
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서늘한 냉기는 차희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조차
차게 식힐 정도로 강했다.
채민은 검을 잡고 있는 손이 얼어붙는 듯한 통증을 느꼈지만
검을 놓지 않고 오히려 꽉 쥐었다.
…휘둘러…
어딘선가 희미하게 목소리가 들려왔다.
처음 듣는 낯선 목소리의 주인을 찾아 두리번거리던 채민은
그 소리가 외부에서 들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 머릿속에서 울리고 있는 것임을 깨달았다.
맑고 청명한, 성별을 알 수 없는 묘한 목소리.
…적들을 향해 날 휘둘러…
채민은 알 수 없는 힘에 끌려 앞으로 나아갔다.
적들의 사이로 나가는 채민을 본 우준이 붙잡으려고 했지만
채민의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냉기에 손을 뻗을 수가 없었다.
가까이 가면 손이 얼어붙을 것 같았다.
"채민아, 위험해."
막 채민을 향해 칼을 휘두르는 병사를 발견한 리현이 다급히 외쳤다.
다들 늦었다고 생각했다.
병사의 칼이 이미 채민의 가슴까지 닿아 있었던 것이다.
가인이 차마 보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을 때,
채앵하는 울림과 함께 병사의 칼은 산산조각이 났다.
채민의 몸에 닿는 순간, 얼어붙어서 깨어져 버린 것이다.
다들 이 믿을 수 없는 상황에 눈을 크게 뜨는데,
채민은 입술을 깨물고 인어의 검을 들어올렸다.
검을 움직일 때마다 그곳에서 뻗어 나오는 차가운 냉기가
살갗을 베어낼 듯이 움직였다.
채민은 눈을 질끈 감고, 왕과 병사들을 향해 칼을 휘둘렀고,
그 순간 방안에 있던 공기가 인어의 검을 향해 몰려드는가 싶더니
병사들이 그 자리에서 멈춰버렸다.
아니, 멈춘 것이 아니라 공격하려던 자세 그대로 얼어붙었다.
병사들 뿐이 아니었다.
채민이 검을 휘두른 쪽 앞에 있는 사물들 역시 하얗게 서리가 끼어 있어서
건드리면 깨질 것 같았다.
채민은 검에 서려 있던 냉기가 서서히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동상에라도 걸린 듯, 손끝이 지끈지끈 아파 왔다.
투욱-
너무 아파서 검을 놓치고 말았다.
적들이 일순간에 얼어붙은 믿을 수 없는 상황에 다들 말문을 열지 못하고
입만 헤에 벌린 채 서 있는데,
우준이 터벅터벅 다가와 채민의 두 손을 꼭 감싸 잡았다.
얼어붙은 채민의 손에 우준의 체온이 뜨거운 불꽃처럼 닿았다.
채민은 고통스러웠지만 아픈 내색을 하지 않으려 애쓰며 이를 악물었다.
금방이라도 비명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이것들, 다 죽은 건가?"
이윽고 강전이 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며 물었다.
어디고 몸이 성한 곳이 없는 강전은 노랗던 머리카락조차 붉게 물들어 있었다.
"죽은 건 아니고… 잠시 얼어있는 것 같아. 녹아버리기 전에 도망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그들 가까이에 다가가서 살펴보던 비인이 말했다.
"몇몇은 죽겠지만 생명력 강한 몇몇은 살아남을지도 모르잖아.
다들 도망갈 힘은 있어?"
"그 전에 왕을 죽이는 게 좋을 것 같지 않냐?"
강전이 칼을 들어올리다가 힘겨운 듯 다시 떨어뜨리며 물었다.
채민의 두 손을 잡고 호호 불어주던 우준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지금 이런 상태에서는 이 왕을 죽인다고 해도 나아지는 건 없어.
왕에게 물들어 버린 또 다른 지배자가 나오게 될 뿐이야."
차희가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빗으며 말했다.
"그래도 죽여버리자. 우리를 이렇게까지 힘들게 만들었잖아. 다들 죽을 뻔했다구."
"맞아, 맞아."
강전도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죽이지 말자."
채민이 말했다.
채민은 이제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인어의 검을 사용한 냉기가 몸속에 남아 있어서 온몸이 차게 식어가고 있었다.
심장까지도 얼어붙지 않을지 걱정이 될 정도였다.
입술이 파랗게 질린 채민은 얼어붙으려는 입술을 억지로 움직여 말했다.
"우리의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지만…
될 수 있으면 우리 손에 피를 묻히지 말자.
죽이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서 죽였다가는… 나중에 우리, 후회하게 될 거야."
다들 대답할 수 없었다.
처음에 사람을 죽였을 때는 다들 죄책감에 힘들었지만
지금 그들은 자신이 사람을 죽였다는 것조차 잊고 있었던 것이다.
"하긴… 이래서야 사람을 벌레처럼 죽여대던 이 왕이랑 다를 바가 없겠네."
가인이 채민의 말에 동의하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인간으로서의 모습은 잊지 말아야 하는데…
사람을 너무 죽였더니 무감각해졌었나 봐."
"하지만 이 왕은 그냥 살려두면 이 나라 백성들이 다시 공포에 떨지 않겠냐?"
"이 왕을 죽인다고 뭔가 달라질까? 결국 이 왕 때문에 상처를 받은 누군가가 왕이 되어
또 같은 일을 반복할 수도 있는 거잖아.
이 왕을 바꾸어 놓으면 이 나라가 바뀔지도 모르지만…
죽이는 걸로는 아무 것도 해결이 안 돼. 결국 같은 일이 반복될 뿐이야."
인어의 검을 사용한 부작용 때문인지 채민의 몸이 점점 더 차갑게 굳어가자,
우준은 채민을 꽉 끌어안았다.
우준의 몸에서 전해지는 체온이 아프도록 뜨거워서 채민은 눈을 질끈 감았다.
새까맣게 타서 죽을 것만 같이 뜨거웠다.
"우리는… 사람을 바꿀 힘이 없어."
우준이 말했다.
"우리가 좀 더 강했더라면 왕을 붙잡아 앉혀놓고 설교라도 할 테지만…
우린 아직 너무 약해."
우준의 말은 자신을 향한 질책이었다.
자신이 데리고 온 동료들조차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채민이 인어의 검을 사용하게 만들어서 그 부작용으로 온몸이 얼어붙어가게 만든 것에 대한 질책.
"더 강해져야 돼."
다짐하듯이 말했다.
우준의 몸 역시 채민의 몸에서 전해지는 차가운 냉기에 서서히 체온을 잃어갔지만
우준은 채민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동료라지만 다른 남자가 채민을 끌어안고 있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언제나 멍해서 읽을 수 없는 우준의 감정이 정확하게 읽히자
리현은 조금 놀라서 고개를 갸웃했다.
'헤에…'
책임감 강한 리더인 우준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 재미있어서 피식 웃던 리현은
우준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말했다.
"채민이 나한테 넘겨. 난 여자잖아."
다들 리현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우준은 잠시 리현을 응시했다가 채민을 안고 있던 팔에서 힘을 뺐다.
"너도 사람은 사람이었구나."
리현이 흥얼거리듯 중얼거리며 채민을 안았다.
채민의 몸은 아까보다 훨씬 따뜻해져 있었다.
"차희는 기절했어."
가인이 차희의 옆에 가서 차희를 흔들다가 깨우는 것을 포기하고는 말했다.
"일단 성을 빠져나가야 하지 않을까? 남은 병사들이 몰려올 것 같은데…
나가서 뭐든 먹여서 차희를 깨우고 이 나라를 벗어나는 게 좋을 것 같아."
가인의 제의에 우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다들 그 정도의 체력은 남아 있지?"
사실 강전은 자신도 차희처럼 기절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리현도 쓰러지지 않은 상황에서 자신이 기절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며 팔을 번쩍 들었다.
"물론이지! 이 빌어먹을 나라에서 벗어나자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