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햇빛 한 바구니, 고양이 두 스푼-29화 (2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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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칼이 눈앞에서 왔다갔다,

때묻지 않은 커다랗고 맑은 눈동자도 칼을 따라 왔다갔다.

비명을 지르지도 못하고 울음을 삼키는 아이의 눈앞에선 냉혹한 칼이 계속해서 왔다갔다.

"누가 보고 싶지?"

오두막 안에 울리는 나직한 괴물의 음성에

아이의 눈에는 절망의 눈물방울.

"엄마… 엄마…"

아이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슬픔의 목소리에

괴물의 얼굴이 차갑게 일그러져.

"엄마가 보고 싶어요."

"그래."

부드러운 듯, 하지만 냉혹한 듯, 울리는 괴물의 목소리.

아이의 가슴에 피어나는 아주 작은 희망.

'날 풀어줄지도 몰라.'

하지만 그 희망이 눈동자에 꽃을 피우는 순간,

차가운 칼은 아이의 코를 베어내고.

"아아아악!"

고통에 찬 절규가 퍼져나가는 소리에

괴물은 음악을 감상하듯 미소를 지으며,

다시금 움직이는 차가운 칼날.

차희는 우준의 등에 업혀서 잠든 채민을 째려봤다.

하지만 불만을 입 밖으로 털어 내지는 않았다.

채민이 자신을 희생시킬 각오까지 하고 병사들을 물리친 상황에서

채민의 욕을 해봐야 다들 차희에게만 적의를 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분 나쁘게도, 이 일행은 다들 채민에게 호의적이었다.

대체 저 불행만 몰고 다니는 계집애가 뭐가 좋다고 이러는 건지 알 수 없다.

성을 벗어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몇 몇 병사가 막아서기는 했지만 리현과 가인에게는 아직 그들과 싸울만한 힘이 남아 있었다.

성을 벗어나자마자 가게에 들어가 어느 정도의 돈을 던져놓고

음식들을 마구잡이로 사서 나라를 벗어났다.

벗어난 후에 잘 닦인 길로 30분쯤 걸어가니 더 이상 사람이 다니는 길이 보이지 않았고,

험하고 울퉁불퉁한 길을 10분 정도 걷던 그들은

도무지 걸을 힘이 나질 않아 그만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가장 먼저 주저앉은 것은 체력이 완전히 바닥나 버린 강전이었다.

강전은 거친 돌바닥에 대(大)자로 누워 죽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난 이제 더 이상 못 움직여. 배째, 배째."

"하하. 네 배를 쨀만한 힘도 안 남았다."

비인이 대꾸하며 강전의 옆에 눕자, 다들 그들을 가운데 두고 둘러앉았다.

우준은 편평한 곳을 골라 조심스레 채민을 누이고는 그 옆에 앉아 주위를 한 번 둘러봤다.

위험할 것은 없어 보이는 평범한 곳이었다.

나무가 꽤 많은 편이기는 했지만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울창한 것도 아니고,

바닥의 거친 길 역시 걷지 못할 정도로 엉망은 아니었다.

게다가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산새 지저귀는 소리는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기까지 했다.

나무들이 내보내는 신선한 산소를 크게 들이마셨다.

지금까지 쉴 새 없이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전쟁터에 있다가 나온 기분이었다.

이 편안한 숲 자체가 환상인 것처럼 느껴졌다.

"으아. 우리가 이러고 있을 수 있다는 게 꿈만 같다, 진짜."

강전이 몸을 쭉 펴며 외쳤다.

"지금까지 겪은 일들이 다 꿈 같아, 난. 자고 일어나면 다시 원래 세계에 있을 것 같아."

가인이 말했다.

"그랬으면 좋겠어?"

비인이 묻자 가인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지금은 몸이 많이 힘들긴 하지만 그래도…"

가인은 동료들을 만나기 전의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귀신을 보는 자신을 피하던 부모님과 주위 사람들, 말해도 믿지 않던 사람들,

그들에게 귀신 보는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전전긍긍하며 살던 그 생활이 그리울 리가 없었다.

"너희들이 있잖아."

가인의 말에 강전이 씩 웃으며 가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인마. 그런 말은 너무 낯 부끄럽다구."

"하지만 사실인 걸. 너희들이 있어서 마음만큼은 정말 편해.

그런 말 있잖아. 사람이 몸이 아프면 살고 싶지만, 마음이 아프면 죽고 싶어진다는 말.

예전에 나는 늘 죽고 싶었는데… 지금은 살고 싶은 생각 뿐이야."

가인의 말을 들으며 다들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우준이 그들을 찾아주기 전까지 그들은 늘 죽고 싶었다.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거라는, 그게 더 편할 거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이 세계에 와서 그들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끔찍한 일들을 많이 겪고,

자신의 손으로 사람을 죽이는 상황까지 처했지만

죽고 싶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새삼 고마운 마음에 우준을 쳐다봤지만

우준은 평소와 다름없는 멍한 표정으로 하늘을 응시하다가 말했다.

"밥 먹자."

채민이 깨어난 후에 그들은 간단히 요기를 하고 지도를 펼쳐 들었다.

커다란 지도를 바닥에 조심스레 펼쳐놓은 그들은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자신들이 있는 위치를 가늠해 보았다.

"우린 대충 이쯤에 있는 것 같지 않아?"

가인이 지도의 한 부분을 손가락으로 꾹 누르며 말했다.

"그리고 이쪽으로 쭉 올라가서 이 숲을 통과해야 다음 마을에 도착할 수 있는 것 같은데…"

가인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기던 그들은 한숨을 푹 쉬었다.

다음 마을까지 가려면 지금까지 걸어온 거리의 네 배를 더 걸어야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다음 마을에 닿기 전에 커다란 숲을 통과해야 했는데,

그들은 더 이상 숲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섬에 있는 동안 거대하고 불쾌한 숲에서 시달린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밤을 새서 숲을 통과하느냐, 아니면 숲에 도착하기 전에 좀 쉬느냐인데…"

"서두르면 오늘 내로 숲을 지나갈 수 있을 것 같지 않냐?

숲은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있잖냐. 지금 걸어온 만큼만 걸어가면 도착할 것 같은데,

그 전에 쉬는 건 좀 아깝잖아.

어차피 숲을 벗어나고 나서도 한참 걸어야 할 것 같은데… 그냥 지나가자."

"난 상관없지만 강전이 넌 괜찮겠어? 많이 지쳤잖아."

비인이 걱정스레 말하자 강전이 킬킬 웃으며 말했다.

"인마. 내가 그 정도로 지칠 것 같냐? 밥도 먹고 좀 쉬었더니 팔팔해졌다."

우준이 하늘에 떠있는 해의 위치를 대충 가늠해 보았다.

"그래. 오늘 중에 숲을 통과하는 게 좋을 것 같다. 해도 아직 걸려 있고…"

우준의 시선이 채민에게로 향했다.

아직도 뼛속이 시린 느낌에 양팔로 몸을 감싸고 앉아 있던 채민은

우준이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자 허리를 꼿꼿이 세우며 웃었다.

"왜?"

채민이 입고 있던 아름다운 드레스는 이미 전부 찢어지고 더럽혀졌지만

목걸이와 귀걸이만은 여전히 반짝반짝 빛을 내고 있었다.

"몸 좀 괜찮아?"

"응, 응! 그럼! 여기까지 업혀 왔는데 안 괜찮을 리가 있겠어?

덕분에 편하게 왔어, 우준아."

채민은 웃었지만 우준은 미간을 좁혔다.

채민의 파리한 입술은 아직도 채민이 추위에 떨고 있다는 것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그래도 힘들지도 모르니까 내가 부축해줄게, 채민아."

차희가 빙긋 웃으며 말하자 리현이 인상을 찌푸렸다.

'저건 또 무슨 꿍꿍이야?'

가능하다면 집중을 해서 차희의 마음을 읽어볼까 했지만,

될 수 있도록 남의 마음을 읽지 않기로 결심한 리현은

충동적인 욕구를 꾹 눌러 참았다.

"그래, 그럼… 더 늦기 전에 일어나자."

"시, 싫어!"

두 시간 정도 걷자 저 멀리에서 우거진 나무가 보이기 시작했다.

해가 점점 아래로 기울고 있던 터라,

더 어두워지기 전에 숲을 빠져나갈 생각으로 걸음을 빨리 하던 그들은

가인이 걸음을 멈추고 비명을 지르자 깜짝 놀라 멈춰 섰다.

"싫어! 싫어!"

가인은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다들 이유를 알 수 없어서 가인을 멀거니 쳐다봤다.

가인의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경기라도 일으키는 것 마냥 심하게 떨고 있어서 다들 가인에게 다가서지 못했다.

"왜 그래, 인마?"

강전의 질문은 가인의 귀에 들어오지 않는 듯 했다.

가인은 듣고 싶지 않은 소리라도 들리는 듯 양손으로 귀를 세게 틀어막고 있었다.

일행은 어디서 다른 소리가 들리나 싶어 귀를 기울여봤지만

들려오는 것이라곤 나무에 바람이 스치는 소리와 그들의 숨소리뿐이었다.

"야, 인마. 차가인!"

보다 못한 강전이 가인의 앞에 쭈그리고 앉아 가인의 양어깨를 꽉 잡았다.

"인마. 나 봐봐!"

"으아아아아!"

"나 좀 보라구!"

억지로 가인의 얼굴을 들어 자신을 향하게 한 강전은 심장이 내려앉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가인의 눈에 가득 담긴 공포와 절망이 강전의 가슴으로 휘몰아쳐 들어왔던 것이다.

"너, 너… 너 왜 그래?"

강전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물었지만 가인은 덜덜 떨고만 있었다.

이가 딱딱딱 부딪히는 소리가 일행의 귀에도 들릴 정도였다.

"가인아?"

채민이 다가가서 가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가인아."

채민의 손은 아직도 약간 차가웠기 때문에,

자신의 체온과 다른 것이 자신을 만지자 가인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채민을 돌아봤다.

맑고 청명한 채민의 눈동자가 굳게 버티고 가인을 응시했기 때문에

가인은 온몸에 들러붙어 녹아들어오는 공포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가인이 채민의 손을 꽉 잡았다.

채민은 아팠지만 내색하지 않고 가인을 똑바로 쳐다봤다.

"저 숲은 안 돼."

"응? 그게 무슨 말이야?"

"저 숲에 들어가서는 안 돼."

가인이 끔찍하다는 듯 눈을 감았다.

"왜? 왜 안 되는데? 저 숲을 지나가지 않으면 다른 마을로 갈 수 없다구.

다시 바다로 가서 배를 타고 삥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잖냐."

강전이 닦달하듯 말했지만 가인은 눈을 감고 침만 꿀꺽꿀꺽 삼킬 뿐이었다.

"야, 최강전. 가인이 무서워 하는 거 안 보이냐? 너무 그렇게 닦달하지 좀 마라.

이 성격 급한 놈아."

리현이 질책하자 강전이 투덜댔다.

"아, 젠장. 그럼 이유를 말해야 할 거 아냐.

지금 해가 떨어지고 있다구. 해 떨어지기 전에 숲을 지나가려는 게

우리의 목표 아니었냐?"

"멍청이. 그냥 오늘 여기서 노숙하고 내일 해가 밝으면 저기를 지나가도 되는 거야."

"쳇…"

강전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것이 불만인 듯 욕설을 내뱉었지만,

잔뜩 겁에 질려있는 가인의 얼굴을 흘끗 보더니 입을 꾹 다물었다.

가인이 이유 없이 벌벌 떨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귀신이 보여?"

리현이 가인의 머리 위에 손을 얹으며 묻자 가인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보이지는 않고… 들려."

"무슨 소리를 듣고 있는 건데?"

"절규…"

"절규?"

"응. 죽어간 영혼들의 뼈를 깎는 절규."

"흐음…"

"저 섬에서 들었던 것보다 더 절박하고, 더 괴롭고, 더 아프고, 더 서러워서…

그래서 가까이 갈 수가 없어."

"하지만… 우리는 저곳을 지나가야 돼."

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쟤들이 우리한테 해를 끼칠 것 같아?"

"모르겠어."

가인의 목소리가 심각하게 잠겼다.

"잘 모르겠어. 지금 저 영혼들은 슬픔과 증오로 똘똘 뭉쳐 있어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을 못할지도 몰라."

"낮에 가면 좀 괜찮을까?"

우준의 질문에 가인이 고개를 저었다.

"그것도 잘 모르겠어. 저 숲 자체가 거대한 영적 세계를 이루고 있는 것 같아.

대부분의 영혼들은 해가 밝으면 힘을 크게 쓰지 못하지만,

저 숲은 영적 에너지가 충만해서… 아아, 나도 잘 모르겠어."

가인이 혼란스러운 듯 머리를 흔들자, 우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가인의 어깨를 힘있게 꾹 눌렀다.

"괜찮아. 오늘은 여기서 자자. 내일 해가 밝아지면 걸어가자.

어차피 다들 지친 것 같으니까…"

검은 비단 위에 박혀 있는 반짝이는 보석의 물결은

소리 없는 빛을 은은하게 지상으로 뿌려주었다.

은은한 은색의 빛은 나뭇잎에 내려앉아 반짝이는 물결처럼 흔들렸고,

그 사이로 떨어진 빛이 모래알 위에 흘러 빛의 바다를 이루었다.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잠이 오지 않아 멀뚱히 눈을 뜨고, 깜빡깜빡 빛을 보내는 별을 응시하던 채민은

나무에 기대어 앉아 있는 우준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오자 자기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비야."

우준에게서 그 이름을 여러 번 들었던 것 같다.

싸울 때에도 우준은 가끔 무의식적으로 '비'라는 이름을 내뱉곤 했다.

'다, 다시 자는 척을 해야 돼.'

하지만 이미 늦었다.

우준의 시선은 아까부터 채민에게 향해 있었던 것이다.

다시 누우려다가 우준과 눈이 마주친 채민이 어색하게 웃었다.

"에헤… 우준아. 안 자?"

"응. 넌?"

"난 잠이 좀 안 와서…"

"그래."

잠깐 하늘을 올려다본 우준이 다시 채민을 보며 자신의 옆을 손바닥으로 탁탁 쳤다.

뭔가 해서 쳐다보던 채민은 그것이 이리로 와서 앉으라는 뜻임(아마도)을 깨닫고,

머뭇머뭇 일어나서 우준의 옆으로 갔다.

처음 봤을 때부터 느낀 거지만,

달빛 아래의 우준은 굉장히 매력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준의 높은 콧등 위로 부서져 내린 달빛은 날카로운 코끝을 흘러

얇은 입술을 만지고 내려가 조각 같은 턱선을 지나 단단한 목에 머물렀다.

빛이 우준의 얼굴 위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달빛 속에 녹아들 듯이 아름다워서

채민은 침을 꼴깍 삼키며 우준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지금 봐두지 않으면 평생 볼 수 없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기에…

"그렇게 쳐다봐도 얼굴은 안 뚫려."

채민이 누워있던 자리를 계속 응시하고 있던 우준이 눈도 돌리지 않고 말하자,

채민은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돌렸다.

"저, 저기 있잖아."

"응. 있어."

"이런 거 물으면 기분 나쁠지도 모르겠는데… 저, 비라는 애가 누구야?"

용기가 사라지기 전에 후다닥 묻고 나자 차라리 마음이 편했다.

'내 일에 상관하지 마.'라고 우준이 말한다 하더라도

묻고 싶은 걸 물었으니 괜찮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다행히도 우준은 그렇게 차갑게 대답하지 않고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소꿉친구."

"소꿉친구?"

"응."

"여자?"

"응."

"아아…"

할 말이 없어졌다.

'이제 무슨 말을 해야하는 거지?'

정적을 견디기 힘들어서 안절부절못하는 채민의 귀에 우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준은 아까와 마찬가지로 낮게 말하고 있었지만,

그 목소리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었다.

위험한 상황이 닥쳐도, 그 위험을 물리쳐도 시종일관 아무 감정도 실리지 않았던 멍한 목소리가

이번만큼은 들뜬 듯 일렁이고 있었다.

물론 다른 사람이 듣는다면 차이를 느낄 수 없겠지만 채민은 그 차이를 알 수 있었다.

우준의 목소리에는 그리움이 가득 담겨 있었다.

"우리 어머니는 경찰이었어.

천재적인 두뇌를 가진 덕분에 어릴 적엔 시설에 들어가서 많이 고생했지만

아버지를 만나서 그곳을 빠져나왔고, 경찰이 되었어.

유능했지만 '빌어먹을 경찰에서 일하고 싶지 않아.'라고 말하고 경찰을 그만 뒀대.

그리고 사무실을 차려서 경찰들도 도와주고 의뢰 받은 일도 해결하고…

뭐, 아무튼 경찰로 있을 적에 비의 부모님을 만나서 친해졌는데…

비의 어머니는 알아주는 교사였어. 욕도 많이 하고, 싸움도 잘 하는 사람인데…

교사가 천직이었는지 많은 애들이 비의 어머니를 좋아했거든."

"혹시…"

"아, 너도 들어봤으려나? 최승현 선생님이라고…"

"응응. 그 선생님 정말 유명하잖아. 그 선생님한테 배워보는 게 꿈이었는데…"

"응. 고등학생이라면 한 번쯤 꿈꾸어볼 선생님이지.

자기들 입장에서 생각해주고, 자기들을 위해 싸워주는…"

우준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비는 바로 그 최승현 선생님의 딸이야. 그리고 성격도 승현 선생님이랑 똑같아.

싸움 잘 하고, 의지가 강하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는 주저하지 않고 덤벼들어.

이곳으로 와서 어려운 일을 겪을 때마다 비를 떠올리게 되더라.

비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까?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러다 보면 해답이 나왔어."

"아아…"

비에 대해서 질투조차 할 수 없었다.

비를 향한 우준의 믿음과 애정은 감히 질투라는 더러운 감정으로 깨뜨리기에는

너무나도 강하고 고귀해 보였다.

"비였더라면… 자기가 죽더라도 자기가 지키기로 한 사람들을 포기하는 일은 없을 거야."

"으응."

"그래서 난 절대로 너희들을 포기하지 않아."

낮고 강한 목소리는 편안했지만, 채민은 왠지 가슴 한 구석이 욱신욱신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우준이 천천히 채민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우준의 눈동자에 담긴 짙은 애정에 채민은 혼란스러워졌다.

그 애정이 누구를 향한 것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비를 향한 걸 거야.'

채민은 그렇게 결론지으려고 애썼다.

헛된 기대를 가졌다가 그 기대가 무너지는 순간 느낄 고통은 겪고 싶지 않았다.

'저건 비를 향한 게 분명해.'

우준 같이 매력적인 남자가 자기를 좋아해주는 행운은 절대로 있을 리 없다는 걸 채민은 알고 있었다.

불행의 연속인 채민의 삶에 그런 행운이 찾아와 줄 리 없었다.

공기를 타고 흐르는 별빛 아래서,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보며 밤을 세워 이야기했고,

다음 날, 아침 햇살에 눈을 비비며 일어난 일행은

서로에게 기대어 행복한 표정으로 잠을 자고 있는 우준과 채민을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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