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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을 통하지 않고서 마을로 갈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고 했지만,
아무리 지도를 봐도 그런 방법은 찾을 수 없었다.
숲은 대륙을 가로질러 가로로 넓게 펼쳐져 있었기 때문에
다른 길로 가려면 바다를 통해서 가는 방법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했다가는 며칠이나 늦어질 것이 분명했다.
가인은 불안한 표정으로 숲을 한 번 쳐다봤다.
하늘 아래 펼쳐진 숲은 언제나 보던 숲과 다를 바 없었다.
섬의 숲에 비하면 양반인 셈이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들려오는 끔찍한 절규는 가인을 긴장하게 만들었다.
'나 때문에 늦어지는 건 안 돼. 저 영혼들이 꼭 우리를 해치라는 법도 없고…'
가인은 마음을 굳게 먹으려고 애썼다.
여자인 채민과 리현도 우는 소리 같은 건 절대로 하지 않는데,
남자인 자신이 심약한 모습을 내보일 수는 없었다.
지금까지 보인 약한 모습만 해도 얼마나 많았던가.
다들 징그럽고 힘들어도 견디고 참는데, 자신은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이번만큼은 내가 용기를 내야 돼. 나 때문에 돌아갈 수는 없어.'
가인은 눈을 한 번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귓가에서 울리는 비명소리가 고막을 아프도록 때렸지만
고개를 저어 그것들을 떨쳐버리려고 애썼다.
"그래, 가자. 지금까지 잘 해왔으니까 이번에도 역시 잘 할 수 있을 거야."
용기를 내어 일어서기는 했지만 숲이 다가올수록 가인의 몸이 점점 떨리기 시작했다.
소리만으로도 이렇게 끔찍한데, 숲에 사는 영혼들을 봤다가는 까무러칠 것만 같았다.
우준의 옆에서 걷던 채민은 가인이 걱정되었지만
자기에게 붙어 있는 불행으로 인해 가인까지 다칠까 봐
섣불리 가인의 옆으로 다가가지도 못하고 계속 뒤를 돌아보기만 했다.
차희가 가인의 옆으로 다가가 가인의 팔을 잡았다.
가인의 두려움이 차희에게 전염되어 차희도 약간 긴장 상태였기에
차희의 몸은 사람의 체온보다 약간 더 열을 띄고 있었다.
"가인아."
차희가 부드럽게 가인을 부르자 가인이 차희를 쳐다봤다.
가인의 눈동자는 안쓰러울 정도로 흔들리고 있었다.
"눈 감아."
"응?"
"넌 영혼을 볼까봐 무서운 거잖아. 그럼 안 보면 되는 거 아냐?
그러니까 그냥 눈감아. 이제부터 내가 널 잡고 걸어갈게."
"야, 그거 괜찮은 생각이다."
강전이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그거 좋겠다. 내가 반대쪽 손을 잡아줄게, 가인아."
비인의 말에 가인은 입술을 깨물고 차희와 비인을 한 번씩 쳐다봤다.
대부분의 영혼들은 물리적인 힘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자신들을 볼 수 없다는 걸 알면 영혼들은 크게 광분하지 않는다.
단지 자신들과 눈이 마주치게 될 때에야 자신을 볼 수 있다는 것을 알고는
접촉을 하려고 드는 것이다.
그러니 보지 않으면 괜찮을지도 모른다.
운이 좋으면 아무 일도 없이 이 숲을 빠져나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응."
가인이 고개를 끄덕이고 눈을 감았다.
긴 속눈썹이 눈 아래에 살짝 그늘을 만들었다.
여느 여자들보다 더 여자 같아 보일 정도로 예쁘장한 얼굴이었다.
"와아. 너 눈 감으니까 확 키스해 버리고 싶다."
강전이 농담 삼아 말하자 가인이 입을 열었다.
"리현아. 강전이 엉덩이를 아주 세게 차줘."
"오케이."
리현은 강전이 방어할 틈도 없이 강전의 엉덩이를 퍼억 찼고,
인상을 구기고 엉덩이를 움켜쥐는 강전을 보며 다들 키득키득 웃었다.
"아, 진짜 아파 죽겠네. 내가 진짜로 키스라도 하고 맞은 거면 억울하지도 않지."
"진짜로 키스했으면 살려두지 말라고 했을 거야."
가인의 말에 강전이 씩 웃으며 손가락으로 가인의 이마를 꾹 눌렀다.
"이제 마음 좀 풀렸냐?"
가인이 웃었다.
"응, 고마워."
다들 강전이 가인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서 실없는 농담을 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가인은 차희와 비인의 손을 꽉 잡았고,
그것을 확인한 우준은 숲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겉으로 보기에 숲은 한없이 평화로워 보였다.
작게 지저귀는 새소리가 간간이 들려왔고,
공기 역시 나무들로 인해 아주 산뜻했다.
촉촉한 흙내음은 기분을 상쾌하게 해줄 정도였기 때문에
그들은 가인이 벌벌 떨고 있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가인은 절대로 눈을 뜨지 않겠다는 듯,
눈가에 주름이 생길 정도로 눈을 질끈 감고 차희와 비인에게 의지해서 걷고 있었다.
그렇게 20분 정도 걸었을 때,
두리번거리며 걷던 강전이 어느 곳을 가리켰다.
"야, 저기에 뭔가 떨어져 있어."
강전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이미 그곳을 향해 달려가서 무언가를 주워왔다.
강전이 가지고 온 것은 작은 오르골이었다.
가로 20cm, 세로 15cm 정도 크기의 오르골은 전에는 은빛으로 반짝반짝 빛났을 것 같지만,
오랫동안 숲에 방치되어 있어서 거뭇거뭇하게 색이 변해 있었다.
예쁜 문양이 붙어있고 뚜껑을 여는 부분에 하트 가운데에 천사가 조각이 되어 있는 것으로 봐서는
꽤나 비싼 물건으로 보였다.
"예쁘다."
오르골의 모양새에 차희는 자기도 모르게 가인의 손을 놓고 말았다.
한 쪽 손에 의지할 것이 없어지자 가인은 무심결에 눈을 떴고,
그 순간 가인의 얼굴에 아주 가까이 다가와 가인의 눈을 뚫어져라 응시하는
눈동자와 눈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
"으앗!"
가인이 비명을 지르며 눈을 질끈 감았지만 이미 늦었다.
가인 이외에는 볼 수 없는 그것은 입술에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가인의 머리카락을 확 잡아당겼고,
일행은 가인의 목이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뒤로 휙 젖혀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아아! 어떻게 해! 미안해, 가인아!"
차희는 미안하다고 말하면서도 다시 가인에게 다가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가인의 몸이 무언가에 의해 계속 휘둘려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인은 가인의 손을 꽉 붙잡고 놓지 않았다.
"눈 뜨지 마, 가인아."
비인이 말했다.
"절대로 손을 놓지 않을 테니까 눈을 뜨지 마."
가인은 눈을 뜨지 않았지만 알 수 없는 그것들은 계속해서 가인을 끌어당겼다.
보다 못한 비인은 가인을 꽉 끌어안았고, 절대로 주지 않겠다는 듯
허공을 노려보며 외쳤다.
"이 애를 건드리지 마, 이 빌어먹을 자식들아!"
어지간하면 격한 말을 하지 않는 비인의 외침은 생각보다 훨씬 우렁찼다.
비인의 목소리가 숲을 울렸다.
그것이 효과가 있었는지 가인은 잡아당기던 힘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숲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여전히 고요했다.
"뭐, 뭐야?"
당황한 강전이 오르골을 손에 쥔 채로 가인에게 다가오자 가인이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거… 그거 가지고 가까이 오지 마."
"으응? 뭐 말이야?"
"네 손에 들고 있는 그거!"
"엥?"
강전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손에 들린 오르골을 내려다봤다.
아무리 봐도 평범해 보이는 귀여운 오르골인데 가인의 반응을 이해할 수 없었다.
"왜 그래? 이거 그냥 오르골이야. 피도 안 묻어있고…"
"아아. 제발 그거 가지고 가까이 오지 말아줘."
가인이 너무 절실하게 애원했기에 강전은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물러났다.
"왜 그래? 이거에 뭐라도 붙어 있어?"
"모르겠어. 잘 모르겠는데… 분명히 뭔가가 있어."
가인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뭐가 있는 건지 확실히는 모르겠어?"
"……"
가인은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던 고요한 숲의 공기가 뒤바뀐 느낌에 다들 몸을 부르르 떨며
주위를 한 번 쓱 둘러봤다.
가인의 힘이 전해져서인지, 아니면 가인이 느끼는 공포가 전해져서인지,
땅에 일렁이는 나무의 검은 그림자조차 귀신으로 보일 정도로 으스스한 분위기였다.
"대체 이게 뭐길래…"
강전이 중얼거리며 오르골의 뚜껑을 열었다.
무슨 일인가 일어날 줄 알았지만 오르골에서는 다정함이 물씬 느껴지는 음악만
잔잔히 흘러나올 뿐이었다.
하지만 가인은 그 소리조차 끔찍하다는 듯 입술을 깨물고 얼굴을 무릎에 묻었다.
"가인아."
안타까움을 느낀 채민이 가인에게 다가가 손을 얹는 순간,
갑자기 가인의 몸에 화르륵 불이 붙었다.
"아아앗!"
목덜미에 느껴지는 뜨거움에 가인은 비명을 질렀다.
너무 갑작스러운 상황이기에 다들 어쩔 줄을 모르고 멍하니 불꽃을 지켜보는데,
우준이 윗옷을 벗으며 달려와 옷으로 가인의 목 뒤를 세게 내리쳤다.
퍼엉- 퍼엉-
큰소리가 날 정도로 서너 번 옷을 내리치자,
회색 연기를 내며 불이 꺼졌다.
"아아…"
하지만 가인은 이미 심각하게 화상을 입은 상태였다.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면서도 가인은 눈을 뜨지 않았다.
"뭐야? 왜 갑자기 불이 붙은 거야?"
"그러게…"
다들 긴장한 차희의 몸에서 불이 옮겨 붙은 게 아닌가 싶어 차희를 쳐다봤지만
차희는 가인과 멀찍이 떨어져서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절대로 불이 붙을만한 거리는 아니었다.
보기에도 아플 만큼 목덜미가 빨갛게 익어버린 가인을 보며 발을 동동 구르던 채민의 생각이
'아, 또 나 때문인 거야. 내 불운이 가인이한테 옮겨간 거야.'
라고 생각하는 순간, 강전의 시선이 채민에게 닿았다.
강전의 눈에 담긴 의심스러운 눈초리에 채민은 땅 속에 숨어버리고 싶었다.
'이제 강전이도 내 불운을 원망하기 시작했어.'
강전은 잠시 채민을 응시하다가 한숨을 내쉬고는 오르골을 옆에 내려놓고 가인에게 다가갔다.
"많이 아프겠다. 괜찮냐?"
"하하. 괜찮을 리가 없잖아. 아파 죽겠어."
가인이 애써 고통을 억누르며 힘겹게 내뱉었다.
"사람 사는 곳에서 약도 좀 샀어야 했는데… 너무 급하게 나오느라 아무 것도 준비 못 했네."
리현이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괜찮아. 이 정도 화상에 죽지는 않겠지. 그보다 난 얼른 이 숲을 빠져나가고 싶어."
그 때, 무언가가 리현의 목덜미를 스윽 만지고 지나갔다.
"응? 왜?"
리현은 일행 중의 한 명이 그런 줄 알고 뒤를 돌아봤지만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에엥? 잘못 느낀 건가?"
리현이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가인을 쳐다보려는데,
또 무언가가 목을 스으윽 스쳤다.
휙-
이번에는 재빨리 뒤를 돌아봤지만 역시 아무도 없었다.
"왜 그래?"
차희가 묻자 리현이 어깨를 으쓱했다.
"아, 아무 것도 아니야. 그냥 좀 이상해서…"
"혹시… 뭔가가 자꾸 목을 만지고 있지 않아?"
차희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리현이 인상을 찌푸렸다.
"뭐야? 너도 그래?"
"으응. 좀 전부터 뭔가가 계속 목을 스치고 지나가."
"어? 나도 그래. 너네도 느꼈냐?"
강전이 묻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야, 뭐야. 뭐지? 뭐가 만지는 거야?"
"귀신."
가인이 짧고 분명하게 대답했다.
너무나 확신에 찬 가인의 목소리는 오싹할 정도로 차가웠다.
이곳에 있는 가인이 진짜 자기들이 알고 있는 가인인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귀, 귀신?"
"응. 귀신."
가인의 손을 잡은 비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나랑 눈이 마주쳐서 이것들이 우리의 존재를 깨달았어. 접촉을 시도하는 거야."
"으아으아! 야, 난 귀신은 싫다구. 얼른 가자, 얼른!"
강전이 서둘러 오르골을 집어들었다.
"강전아. 그건 놔두고 가."
가인이 말했다.
"하지만 이거 의외로 쓸모 있을지도 모르잖냐. 일단 가져가자."
강전의 말에 가인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걸음을 옮겼다.
우준은 당연한 듯 채민의 옆에 서려고 했지만,
채민은 반사적으로 우준에게서 한 걸음 물러났다.
"왜 그래?"
우준의 질문에 채민이 고개를 푹 숙이고 말했다.
"미안해, 우준아. 나… 좀 혼자 있고 싶어."
"설마 아까 가인이한테 불 붙은……"
"그런 거 아니얏! 핫!"
소리를 빽 지른 채민은 급히 입을 틀어막고 우준을 올려다봤다.
우준은 뭘 생각하는지 알 수 없는 멍한 눈으로 채민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런 거 아니고… 그냥 좀 혼자 있고 싶으니까… 그러니까 난 좀 뒤에서 걸어갈게."
"……"
"먼저 걸어가."
"그래."
우준은 어쩔 수 없이 먼저 걸음을 옮겼고, 그 옆으로 차희가 다가가서 우준에게 팔짱을 꼈다.
"나 정말 귀신 같은 거엔 약하거든. 이 숲 나갈 때까지만 이러고 있자. 무서워 죽겠어."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는 차희에게 싫다, 좋다 대답하지 않는 우준을 보며
차희는 허락으로 알고 우준에게 매달린 채로 신이 나서 걸었다.
슬픈 얼굴로 우준과 차희의 뒷모습을 지켜보는 채민의 시선을 느끼며
차희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것 봐, 현채민. 넌 나한테 못 이겨. 불행 따위를 가지고 오는 네가
우준이 같이 매력적인 남자를 갖는 건, 정말 안 될 일이야.
우준이를 위해서라도 넌 좀 멀리 떨어져 있는 게 좋아.'
사실 아까 가인의 목에 불을 붙인 것은 차희였다.
차희는 몸에서 열을 뿜는 것뿐만이 아니라 멀리 있는 물체를 쏘아보는 것으로도
불을 붙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지만 그것은 일행에게 숨기고 있었다.
딱히 말할 기회도 없을뿐더러, 감추고 있다가 어느 순간 능력을 짜잔하고 드러낼 때,
일행들의 놀라움을 즐기고 싶었기 때문이다.
숨기고 있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절하지 않기 위해, 입에 과일을 몇 개 넣고 씹으며 기회를 기다렸다가,
채민이 가인의 몸에 손을 대는 순간 불이 붙게 만들었다.
꼭 가인이 아니었더라도 누구든 채민의 손이 닿으면 불을 붙일 생각이었다.
'가인이한테는 좀 미안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어. 난 쟤가 마음에 안 들어.
우리 일행을 위험에 빠뜨릴 게 분명해. 그 전에 떨어져 나가는 게 좋아.'
이번에도 다들 채민을 감싸고 돌까봐 걱정했는데,
그 때 채민을 향하던 강전의 시선은 분명 불만이 담긴 시선이었다.
'다들 너에게서 멀어지게 만들겠어, 현채민.
이건 우리 일행을 위해서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