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숲이 울부짖는 것만 같았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 것도 들을 수 없는 그들조차도
가인의 공포가 전염이 되어 온몸의 근육을 긴장시키고 걸었다.
당연히 걷는 속도가 느려질 수밖에 없었다.
우준은 앞서 걸어가면서도 채민이 걱정이 되어 몇 번이나 뒤를 돌아봤다.
몇 십 분 남짓 걸어오면서도 채민은 무언가에 걸려 넘어지고,
뭔가가 채민의 머리 위로 떨어져서 여기저기 상처투성이였다.
그걸 볼 때마다 우준이 달려가서 채민을 도와주려고 했지만,
차희가 우준의 팔을 꽉 붙들고 있는 통에 그러기도 쉽지 않았다.
우준의 팔을 잡고 늘어진 차희 대신에 가인의 다른 쪽 손을 지탱해준 것은 리현이었다.
리현과 가인, 비인의 뒤로 걸어가며, 채민은 많은 생각을 했다.
채민이 위험에 빠질 때마다 구해주던 우준은
"널 구하는 건 내 선택이야."라고 말했다.
우준의 말이 큰 위안이 되었지만 이번에 가인의 사건의 경우에는 상황이 달랐다.
불이 붙은 것은 가인의 선택이 아니었다.
가인은 그저 앉아 있었을 뿐인데 채민이 손을 올림으로 해서 목이 큰 화상을 입은 것이다.
비틀거리며 걸어가는 가인의 목덜미가 화상으로 인해 껍질이 다 벗겨져
붉게 부풀어 오른 것을 보는 채민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차라리 내가 다치는 게 나아. 나 혼자만 화상을 입고 나 혼자만 불행하면 그건 견딜만 해.
하지만 정말… 정말… 나 때문에 다른 애들이 고통을 당하는 건 못 견디겠어.'
"미안해."
마음 속에 담겨 있던 말이 소리를 지니고 흘러나왔다.
리현과 비인이 흘끗 뒤를 돌아봤지만 가인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있었다.
벽을 세운 듯한 가인의 등을 보며 채민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미안해, 가인아. 정말 미안해. 나 때문에 너무 많이 다쳐서… 정말 미안해."
"채민아."
등을 보인 채로 가인이 채민의 이름을 불렀다.
날이 서 있을 줄만 알았던 목소리가 뜻밖에도 너무나 다정해서
채민은 주먹을 꽉 쥐었다.
가인의 갈색 머리카락이 화상을 입은 목덜미 위에서 흔들리는 것을 본 채민은
그것을 치워주고 싶었지만, 괜히 손이 닿았다가 가인이 또 다치게 될까 봐 두려워
머뭇머뭇 그들의 뒤를 따르고만 있었다.
"채민아. 내가 널 왜 좋아하는 줄 알아?"
잘못 들은 거라고 생각했다.
그것도 아니면 가인이 잘못 말한 거라고 생각했다.
좋아하다니. 지금 싫어하고 원망해도 모자랄 판에.
"넌 예쁘게 생긴 데다가 지켜주고 싶을 정도로 작고, 가느다란 몸을 가지고 있어.
너 같이 예쁜 애라면 남자들에게 보호받는 걸 당연히 여기고,
힘든 일은 남자한테 미뤄버리고… 대부분 그러잖아."
"……"
"그런데 넌 궂은 일은 혼자 도맡아서 하고, 나조차도 징그러워서 하지 못하는
그런 일들을 다 해냈으면서도 그것을 가지고 잘났다고 생색내지 않아.
당연한 일을 했다는 듯이 말이야."
가인의 듣기 좋은 목소리가 부드럽게 숲에 퍼졌다.
"그게 좋아서, 그런 면들이 너무 좋고 좋아서 너로 인한 불운은 떠오르지도 않아.
몸에 불이 붙고, 몇 번 안 좋은 일을 당하고, 몇 번 다칠 뻔 했다는 것 정도로 널 미워하기에는,
네 성격이 너무 매력적이라서 난 널 도무지 미워할 수가 없어.
아니, 오히려 너에게 자꾸 반할 수밖에 없어."
이것 보라는 듯 채민을 보며 리현이 미소를 지었다.
채민의 눈에 눈물이 가득 차올랐지만 떨어지지 않고 그대로 고여 있었다.
맑은 눈물 속에 들어있는 눈동자가 터질 듯이 부풀어 오른 것처럼 보였다.
채민은 눈물이 흐르기 전에 얼른 손등으로 눈을 쓱 훔쳐냈다.
"나 지금 화상 당한 거 진짜 아파. 자꾸 목에 닿는 머리카락도 너무 아프고…
그러니까 이리 와서 머리카락을 좀 치워주지 않을래?"
"으응!"
시원스레 대답하고 가인에게 다가가던 채민은 또 가인의 몸에 불이 붙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멈칫하며 물러섰다.
"아… 저기… 리현이한테 해달라고 하면 안 돼? 난… 난 피가 무서워서…"
"네가 해줘. 리현이는 내 손을 잡고 있잖아."
"하지만…"
"아아. 진짜 너무 아프다. 목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아."
"아…"
채민은 얼른 가인의 목에서 머리카락을 치워주고 싶은 생각에 몇 번이나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안절부절못했다.
리현을 쳐다보며 대신 좀 치워달라고 눈빛으로 말했지만
리현은 그저 빙긋 웃어주고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발만 동동 구르던 채민은 자꾸 아프다고 말하는 가인의 목소리에 더 이상 머뭇거릴 수가 없었다.
조심스레 다가가 가인의 상처에 손이 닿지 않도록 조심하며
조심조심 머리카락을 떼어냈다.
짓무른 화상 부위에 머리카락이 찰싹 달라붙어 있어서 걸음을 옮기며 머리카락을 떼어내는 것은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이었다.
또 다시 가인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길까봐 전전긍긍하면서도
채민은 쉴 새 없이 손을 놀려 머리카락을 전부 떼어내어
상처에 닿지 않도록 옆으로 치워 주었다.
이마에 맺힌 땀이 주르륵 볼을 타고 흘렀다.
자신이 해야할 일을 마친 채민이 얼른 가인에게서 떨어지려는데,
그 순간 가인이 눈을 번쩍 뜨고 돌아서서 채민의 손을 꽉 잡았다.
채민은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고 가인을 쳐다봤다.
귀신들이 무서워서 감고 있던 가인의 커다란 눈은
더 이상 귀신 따위에 지지 않겠다는 듯 채민은 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그 안에 담긴 맑은 갈색 눈동자 안에 채민의 놀란 얼굴이 한 가득 담겼다.
"아…"
채민이 손을 빼려고 했지만, 아무리 곱상하게 생겼어도 가인은 남자.
단단히 잡고 있는 가인에게서 손을 빼낼 수가 없었다.
그렇게 채민의 손을 잡은 채로 한동안 채민을 응시하던 가인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이것 봐."
그리고 미소만큼이나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가인은 채민의 손을 자신의 이마에 대며 말했다.
"아무렇지도 않지?"
그들은 한참을 걸었다.
무성한 나뭇잎 사이로 흘러 들어오던 햇빛도 서서히 빛을 잃고 있었다.
배가 고프고 다리도 아팠지만 가인이 두려워하는,
무언가 튀어나올 것 같은 이 숲에서 빨리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에
끼니도 거르고, 한 번도 쉬지 않고 걸었다.
그런데 숲은 끝나지 않았다.
지도상에 나와있는 숲은 해가 지기 전에 충분히 벗어날 수 있을 정도의 크기였는데,
아무리 걸어도 끝이 보이지 않으니 이상했다.
마치 한 곳에서 빙빙 돌고 있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걷던 그들은 어느 순간부터 말을 잃었고,
고요한 침묵 속에서 걷는 데에만 열중했다.
한참을 걷던 강전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기 말이야. 내 착각이겠지만… 우리들 뒤로 누군가가 따라오고 있는 것 같지 않아?"
다들 대답하지 않았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알 수 없는 것이 자신들을 덮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강전 역시 특별히 대답을 기대했던 것은 아닌 듯,
다시 입을 꾹 다물고 걸어갔다.
바삭바삭-
떨어진 나뭇잎을 밟는 소리만 크게 울렸다.
"어두워지기 전에는 이곳을 빠져나가야 할 텐데…"
비인이 걱정스럽게 중얼거렸다.
점점 어두워질수록 나무들이 울어대는 것 같았다.
섬에서의 그 끔찍한 모양새의 나무들보다 모양은 나았지만
분위기의 으스스함만큼은 섬의 숲 못지 않았다.
해가 떨어지자 차가운 냉기가 공기를 타고 흘러나왔다.
땅에서 올라오는 냉기와는 사뭇 다른 기분이었다.
"불을 밝혀야겠어."
그들은 가방에서 램프를 꺼내들었고, 불을 붙이는 순간 나무에 거꾸로 매달려 있는
검은 그림자에 놀라서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으아아아아!"
그것은 아주 또렷하게 그들의 눈에 보였다.
나무들마다 하나씩, 또는 둘씩 다리가 묶인 채로 머리를 아래로 늘어뜨리고
덜렁덜렁 흔들리는 그것들.
혀를 길게 빼물고 원망스러운 눈초리로 그들을 응시하는 그것들은 분명히 사람이었다.
그것도 초등학교 입학 전의 어린 아이들.
대부분 머리카락이 긴 걸로 보아 여자아이들인 듯 했지만
간간이 머리가 짧은 남자아이들도 눈에 띄었다.
환상인지 현실인지 분간할 수 있는 공포스러운 상황에서
우준들은 서로에게 바짝 달라붙어 그것들을 쏘아봤다.
"아아아…"
가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으흐으으…"
너무도 서러운 흐느낌에 걱정이 된 비인이 가인의 손을 꽉 잡았지만
가인은 진정하지 못하고 아예 털썩 주저앉아 펑펑 눈물을 쏟았다.
바람이 불 때마다 아이들이 내는 비명소리가 섞여서 들려왔다.
고통스러운 비명에 그들은 귀를 틀어막았지만
소리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가만히 보니 그 아이들은 전부 고문을 당한 흔적이 있었다.
무언가에 찔린 듯 눈이 없는 아이, 코가 없는 아이, 팔이 없는 아이…
피가 뚝뚝 흐르는 끔찍한 몰골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달은 강전이 외쳤다.
"야, 쟤들 구해야 하는 거 아냐? 다들 다쳤어."
강전이 뛰쳐나가려는데, 가인이 강전의 다리를 붙잡았다.
파지지직-
흥분한 강전의 몸에서 전기가 통해 찌릿했지만 가인은 손에서 힘을 빼지 않았다.
"가지 마."
"인마. 가지 말라니… 지금 네 옆에 있어주는 애들 많잖아. 쟤들 구하고 올게."
"아니야, 아니야. 쟤들은… 쟤들은…"
가인의 목소리가 벌벌 떨리고 있었는데, 그것은 공포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가슴속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안타까운 슬픔에 의한 것이었다.
휘오오오오-
가느다란 바람이 그들을 스치고 지나갔다.
가인이 눈물 젖은 눈을 들어 강전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쟤들은 살아있는 애들이 아니야."
"뭐엇?"
믿을 수가 없었다.
저렇게 또렷이 보이는데, 만질 수 있을 것처럼 형체가 분명한데 사람이 아니라니…
일반적으로 귀신이라고 하면 다리가 안 보이거나
모습이 희미해서 뒤로 사물이 비치거나 하는 것 아닌가.
가인의 눈에서는 끊임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쟤들 다 죽었어."
가인은 말하기 괴로운 듯, 땅에 있는 흙을 움켜쥐었다.
"쟤들 다 죽은 애들이라구!"
"인마, 그게 무슨 소리야?"
강전이 불안하게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만약 저들이 다 귀신이라면, 아무리 아이들이라도 전부 다 덤벼들면 속수무책일 것이 아닌가.
게다가 그들에게는 영혼을 퇴치할 힘도 없었다.
"죽은 애들이라니? 쟤네가 다 귀신이라는 거야?"
리현이 다급하게 묻자 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 죽었어. 이 숲에서…"
"왜? 왜 죽은 건데?"
"왜냐하면… 왜냐하면…"
말을 하려던 가인이 갑자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처음에는 추워서 떠는 것 정도로 가볍게 떨리던 가인의 몸은
경련이라도 일어난 듯이 크게 떨리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입술이 혀를 깨문 듯 입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눈동자를 허옇게 까뒤집고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몸을 떠는 가인의 모습에
다들 어쩔 줄 몰라하고 있는데, 우준이 자신의 주먹을 가인의 입에 집어넣었다.
위아래로 부딪히는 이가 혀를 상하게 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악 다물려는 가인의 이가 우준의 살을 파고들었지만
우준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을 뿐, 손을 빼지는 않았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다른 아이들이 가인의 팔과 다리를 잡아서
경련을 좀 진정시키려고 했다.
강전이 가인의 머리를 고정시키기 위해 몸을 숙이는 순간,
강전의 가방에 들어 있던 오르골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그것과 동시에 가인 역시 경련을 멈췄다.
뒤집어져 있던 가인의 눈동자도 정상으로 되돌아왔다.
우준은 가인이 완전히 멈췄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 주먹을 빼냈다.
주먹은 가인의 치아 형태 그대로 찢겨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가인아, 너 괜찮은 거냐?"
우준은 상처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가인의 팔을 잡고 물었다.
하지만 가인은 우준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자신이 그렇게도 질색하던 오르골을 집어 들고는 뚜껑을 열었다.
어둠 속에 발하는 희미한 불빛에, 나무마다 거꾸로 매달려 있는 죽은 아이들.
그리고 그 숲에 울리는 작은 오르골 음악 소리.
어쩐지 그 상황이 무섭다기보다는 슬프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슴 가득 들어찬 슬픔의 이유를 알 수 없어 서로를 쳐다보는데,
가인이 동그란 눈을 치켜 뜨고 강전을 쳐다보며 물었다.
"오빠는 누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