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햇빛 한 바구니, 고양이 두 스푼-33화 (33/91)

-33-

퍼벅-

이제는 죽는구나 싶었다.

퍼어억-

강전의 전기조차 아무런 힘도 되지 않는 상황에서 칼을 휘둘러 봐야 소용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실 칼을 빼들 여유조차 없어서 다들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되었다는 절망에 사로잡혔다.

모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렇게 죽게 되는 건가?'

다들 절망에 빠져 눈을 감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우준은 눈을 똑바로 뜨고 자기에게 달려드는

아이의 영혼을 노려봤다.

퍼벅-

그 아이가 우준에게 달라붙으려는 순간,

나무 뒤에 몸을 감추고 있던 검은 그림자가 달려와 아이의 영혼을 향해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아이의 영혼은 힘을 못 쓰고 멀리 날아갔다.

검은 그림자는 팔을 휘둘러 강전의 목에 붙어 있는 아이와

덤벼드는 아이들을 하나하나 차례로 떨쳐냈는데,

별로 큰 힘을 실은 것 같지 않은 그의 작은 움직임에도

영혼들은 사족을 못 쓰고 멀리 나가떨어졌다.

그의 등장 때문이었을까?

살의를 불태우던 아이들의 영혼이 점점 이성을 되찾는가 싶더니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 결국 자기들이 있던 자리로 되돌아갔다.

우준은 그가 하는 행동을 모두 지켜봤지만

눈을 감고 있느라 무슨 일이 생겼는지 모르는 일행들은

시간이 지나도 자기들 몸에 아무런 통증이 없는 것을 이상하게 여겼다.

"나… 벌써 죽었나?"

리현이 중얼거리자 비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우리 벌써 죽은 것 같다. 안 아프지?"

"하지만 계속 안 아팠는데? 죽으면서 고통을 잊게 된 거야?"

채민의 질문에 대답한 것은 강전이었다.

"아, 씨발! 난 아직도 귀가 아파서 죽겠다구! 왜 똑같이 죽은 니들은 안 아픈데,

나만 겁나게 아픈 거냐! 아, 젠장!"

그러면서 번쩍 눈을 뜬 강전은

자기의 앞에 서 있는 낯선 얼굴에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으아아악! 넌 저승사자냐?"

강전의 말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들을 도와준 그는 위 아래로 전부 검은 옷을 입고 있었는데,

얼굴은 가인이 제이닐에게 씌었을 때보다 하얗고, 머리카락은 암흑 같이 검은 데다가,

눈빛은 한없이 냉정하고, 입술은 무서울 정도로 빨개서,

딱 저승사자의 모습, 그것이었다.

강전의 말에 다들 눈을 번쩍 뜨고, 자기들 앞에 있는 그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다들 강전과 같은 반응을 보였다.

"으아아앗! 저승사자닷!"

그 말에 그가 씩 웃었다.

얄팍한 붉은 입술이 원을 그리며 올라가 섬뜩한 느낌을 주었다.

"그래. 난 니들을 데리러 온 저승사자다!"

"아, 빌어먹을! 난 아직 죽고 싶지 않다구!"

"나중에 데려가면 안 돼? 이번엔 좀 봐주라."

"그런데 너… 저승사자치고는 꽤 잘 생겼다?"

다들 그를 보며 한 마디씩 하는 동안, 우준은 자기 목에 걸려 있는 펜던트를 내려다 봤다.

펜던트에서 푸른빛이 은은하게 번지고 있었다.

붉은 달빛조차도 펜던트의 푸른빛에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펜던트를 연 우준은 그 안에 있는 풍경이 지금 자기들이 있는 바로 그 장소를

비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우준은 시선을 옮겨 다른 일행과 저승사자 놀이를 하고 있는 그를 쳐다봤다.

우준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야, 야. 난 저승사자 아니야! 난 조해윤이라는 멋쟁이 이름이 있다구!"

차가운 생김새와 어울리지 않게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말하는 해윤을 보며 우준이 중얼거렸다.

"일곱 명… 다 찾았다."

해윤이 자기들의 일행이라는 것을 알게 된 일행은 해윤에게 자기들의 여행 목적에 대해서 설명했다.

"난 뭐, 특별히… 이 저주 때문에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어."

다들 바짝 긴장했다.

만약 해윤이 같이 가기를 거부한다면 어떻게 설득을 해야할까?

그들의 시선을 즐기는 잠시 시간을 끈 해윤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래도 역시… 행복한 건 기분이 좋은 거겠지?"

일행들의 소개가 끝난 후, 해윤이 자기에 대해 설명을 했다.

"난 역시 힙합을 좋아해. 남자는 힙합이다."

그러고 보니, 해윤의 차림은 힙합이었다.

통이 큰 힙합 바지에, 역시 커다란 티셔츠.

아무 무늬도 없는 검은색이라서 어찌보면 검은 도복을 입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자기를 살펴보는 아이들을 보며 해윤이 엄지를 번쩍 치켜올렸다.

"그리고 역시 힙합은 검은색이야. 죽이게 멋있지?"

"넌 자뻑 체질이구나."

발랄한 해윤이 싫지 않은 리현이 중얼거리자 해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하지만 자뻑해도 될 만큼 죽이게 섹시하잖냐."

해윤을 무시하며 강전이 물었다.

"그런데… 왜 쟤들이 갑자기 우리한테 덤벼든 거지? 제이닐이 제대로 얘기하지 않았나?"

"담배 냄새 때문이야."

가인이 말했다.

"네가 핀 담배의 냄새가 유괴범이 피던 담배 냄새랑 같아서 애들이 흥분한 것 같아."

"아아…"

강전이 미안하다는 듯 웃자, 비인이 말했다.

"그것 봐. 역시 담배는 만악의 근원이야."

"진짜 마음 놓고 담배도 못 피겠구만."

"원래 학생이 마음 놓고 담배를 핀다는 것부터가 이상한 거야. 바보."

가인이 웃으며 말하자 해윤이 가인을 쳐다봤다.

가인에게 닿은 해윤의 시선은 좀처럼 떨어질 줄 몰랐다.

해윤의 시선을 느낀 가인이 고개를 돌려 해윤을 쳐다보자, 해윤이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넌 볼 수 있어서 좋겠다.

이 숲은 영혼의 기운이 너무 강해서 저들을 볼 수 있었지만…

사실 난 영혼을 본 건 처음이거든."

"하지만 넌… 없앨 수 있잖아."

가인의 말에 해윤이 금세 기운을 되찾고 껄껄껄 웃었다.

"그렇지! 난 없앨 수 있지. 그 누구보다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구."

"진짜인지, 거짓말인지…"

강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자, 해윤이 씩 웃으며 강전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진짜야. 난 강해. 너무 강하기 때문에 영혼들이 몰려드는데, 난 그놈들을 볼 수 없어서 없애기가 힘들어."

"그럼 소용없는 거 아니냐?"

"응. 그래서 지금까지의 난 쓸모 없는 멍청이였고, 그 이유로 가문에서 파문을 당했지.

하지만 이제 아니야."

"이제 아니라니? 이젠 영혼을 볼 수 있어?"

차희의 질문에 해윤이 고개를 저었다.

"보이지 않던 게 하루아침에 보일 리가 없잖아.

영혼이 보인다는 이유로 여기서 평생 살 수도 없는 거고…"

"그럼?"

해윤은 강전을 놔주고 가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가인의 손을 꽉 잡으며 말했다.

"네가 내 눈이 되어 줘. 그럼 난 내 모든 것을 걸고 널 지켜줄게.

너의 영안(靈眼;영혼을 보는 눈)과 나의 영력이 하나로 뭉치면, 우리는 최고야."

해윤의 눈동자는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가인은 그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귀신들이 두렵지 않았다.

그들은 일단 앉아서 어떻게 해야 유괴범을 찾을 수 있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일단 우리가 가진 무기들을 잘 활용해야 돼."

차희가 말했다.

"폭탄은 몇 개 남았어?"

"일곱 개 정도 남았을 거야."

"폭탄으로 주술을 파괴할 수는 없을까?"

"무리겠지. 여기에 들어오는 사람들이 폭탄 하나 안 가지고 왔겠어?"

"이 근처에 물은 있어? 물이 있으면 채민이가 가지고 있는 검도 힘을 쓸 수 있잖아."

차희의 말에 채민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물론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검으로 도움이 된다면야 어떻게든 하고 싶지만,

검을 사용했을 때 심장까지 얼어붙을 것 같은 차가움은 생각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 사용하지 마."

우준이 말했다.

"채민이는 아직 이 검으로 물을 다루기에는 힘이 부족해.

한 번 더 그랬다가는 얼어붙을지도 몰라."

"하지만 방법이 없잖아. 내가 한 번 사용해 볼까? 난 온몸에서 열이 나니까…"

"안 돼!"

채민이 다급히 말하자 차희가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 네 검을 뺏겠다는 말이 아니라…"

"그게 아니라… 이 검, 내가 아닌 사람이 만지면 얼어붙어."

"에에? 정말?"

"응. 내가 감옥에 갇혀 있을 때도 검을 빼앗기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가

병사들이 내 검을 빼앗으려다가 얼어서 죽었기 때문이래."

"으아. 되게 무서운 검이네."

해윤이 신기하다는 듯 달려들었다.

"야, 야. 그 대단한 검 좀 한 번 보자."

채민이 검을 뽑아서 보여주자 해윤이 눈으로만 살펴본 후 쾌활하게 말했다.

"야, 이거 진짜 멋지다. 안 무거워?"

"응. 무겁진 않아."

"아, 나도 이런 검 하나 있었으면 좋겠네.

난 검 같은 거 가지고 있으면 거기에 강한 영기를 담아서 사용할 수 있는데…"

"그럼 다음 마을에 도착하면 네 검을 하나 사자."

"어어? 야, 나 돈 없다."

해윤이 두 손을 저으며 말하자 리현이 답했다.

"우리는 돈 있어."

"그런데 난 돈이 없다니까."

"우리는 이제 동료니까 네 돈, 내 돈 같은 거 따지지 않는다구."

"우와."

해윤이 웃었다.

"동료라… 그거 멋진데?"

"그런데 말이야."

이제껏 가만히 앉아서 영혼들의 움직임을 살피던 가인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일단 우리들, 이 숲에 걸려 있다는 주술부터 파괴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래야 이 무기들을 사용하던지 하지."

"그러게. 여기서 계속 못 빠져나가면 유괴범을 만나서 죽기 전에 굶어서 죽을지도 몰라.

가인이 화상도 빨리 치료해야 할 텐데…"

다들 침울해졌지만 해윤의 표정만은 밝았다.

해윤은 일행이 왜 그런 걸로 고민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한 번 둘러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야, 야. 왜 이런 걸로 고민을 하고 그래?

이 정도 주술쯤은 내가 깨뜨릴 수 있다구."

"뭐어? 그게 정말이야?"

다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해윤을 쳐다봤다.

"앙. 이 정도는 길바닥에서 껌딱지 떼는 것보다 쉽겠는데?

말했잖아. 난 강하다니까!"

"이 자식! 진작 좀 말하지!"

"아하하하하. 난 니들이 그걸로 고민을 하는 줄은 몰랐거든."

해윤은 킬킬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들 해윤이 뭘 하려나 싶어서 올려다봤다.

해윤은 팔을 뻗어 허공을 한 번 쭉 휘젓더니 일행을 돌아보며 말했다.

"긴 검 좀 빌려줘. 니들이 이 주술에서 금방 풀려나도록 해줄게."

가인이 자신의 허리에 매고 있던 검을 해윤에게 건넸다.

가인의 검은 다른 아이들의 검보다 1.5배 정도 더 긴 검이었는데,

굉장히 가늘고 가벼워서 쉽게 부러질 것 같지만,

잘 구부러져서 잘 부러지지 않는 검이었다.

"이야, 진짜 기네. 난 키가 별로 안 커서 이렇게 긴 검은 좀 다루기 힘든데…"

해윤은 중얼거리면서도 검을 잡은 손을 앞으로 쭉 내밀었다.

다들 해윤을 쳐다보고 있는데, 가인의 눈이 동그래지더니 탄성을 질렀다.

"아!"

"응? 왜?"

다른 일행이 보기에는 해윤이 그저 검을 앞으로 내뻗고 있는 것으로만 보였기 때문에

가인이 탄성을 지른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가인의 눈에는 일렁이는 해윤의 강한 영력이 확실하게 보였다.

강하다는 해윤의 말은 절대로 과장이 아니었다.

해윤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영기는 해윤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몇 십 명의 영혼을 소멸시킬 수 있을 정도로 강했고,

칼에 깃든 영력은 20m 거리에 있는 영혼을 벨 수 있을 정도로 길고 날카로웠다.

그 어마어마한 영력에 놀란 가인은 일행에게 설명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해윤의 옆모습만 쳐다보고 있었다.

"이 정도면 되려나?"

다른 영능력자라면 몇 십 년의 수행을 하고, 몇 시간 정신통일을 해도 따라잡지 못할 영력을 내뿜으면서도

해윤은 전혀 힘든 기색이 없었다.

휙휙-

해윤이 검을 휘두를 때마다 나무에 매달려 있던 영혼들이 움찔움찔했다.

"해, 해윤아."

가인이 조심스레 해윤을 부르자, 해윤은 검에 영기를 실은 상태 그대로 가인을 돌아봤다.

"앙?"

"저기… 나무에 매달려 있는 영혼들은 다치지 않게 해줘."

"흐음? 쟤들은 벌써 몇 십 명이나 사람을 죽였다구."

"하지만…"

가인의 표정이 어두워지자 해윤이 씩 웃었다.

"내가 앞으로 모실 공주님은 마음이 굉장히 여리구만.

오케이. 쟤들은 안 다치게 할게."

"야! 나 남자라구!"

"하지만 이쁘잖아. 예쁘게 생겼으면 다 공주님이지, 뭐."

해윤이 호쾌하게 말하고선 다시 앞으로 시선을 옮겼고,

잠시 칼을 여기저기 움직여 영혼들에게 닿지 않을 정도의 거리를 가늠해 보더니,

일행을 향해 말했다.

"주술을 깨뜨리면 잠깐 숲이 흔들릴 거야.

영적 파동 때문이니까 너무 무서워들 말라구."

일행이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해윤은 칼로 반원을 그리듯이 크게 한 번 휘둘렀고,

그 순간 갑자기 숲이 일렁이며 움직이는 느낌이 들었다.

일행들은 아무도 느끼지 못했지만 가인은 시야가 확 트이는 느낌을 받았다.

흐리게 끼어있던 안개가 깨끗하게 걷혔다.

"끝."

해윤은 가인에게 검을 넘겨주며 웃었고,

가인 역시 이렇게 강한 영능력을 가진 아이와 알게 되었다는 사실이 기뻐서 활짝 웃었다.

"뭐야? 주술이 파괴된 거야?"

"응. 어때? 나, 끝내주게 멋지지? 다시 한 번 반하겠어?"

"반한 적이 없으니 다시 한 번 반할 리도 없지."

리현은 퉁명스레 대꾸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해윤이 말이 맞다면 주술이 풀린 걸 테니까, 다시 한 번 지도를 확인해 보자."

"지금 확인해도 별 수 없을 것 같은데… 우리 나침반도 없잖아."

강전이 말했다.

"아, 그런가? 그럼 일단 그냥 걸어볼까?"

"아니. 지도 확인하자. 저쪽이 북쪽이거든. 우리는 어느 쪽으로 가야하는데?"

해윤이 한 방향을 가리키며 묻자 차희가 신기하다는 듯 해윤을 올려다봤다.

"어떻게 알아? 저쪽이 북쪽인 걸?"

"응? 그냥 저쪽이 북쪽이니까. 원래 북쪽은 아무리 남쪽이나 동쪽이라고 우겨도 북쪽인 거잖아."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나침반도 없이 저기가 북쪽인 걸 어떻게 알았어?"

"엥? 왜 몰라? 원래 다들 아는 거 아냐?"

"아니. 평범한 인간들은 몰라."

강전의 말에 해윤이 허리에 손을 얹고 하하하 웃었다.

"역시 난 비범한 인간이었어."

리현은 한심하다는 듯 해윤을 쳐다보며 말했다.

"원래 짐승들이 방향 감각이 뛰어나대."

"어이, 어이. 예쁜 언니. 그런 식으로 말하면 고 예쁜 입술에 키스해 버릴 거야."

"닥쳐 줬으면 좋겠네."

지도를 확인한 그들은 가야할 방향을 정하고는 그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만약 유괴범이 그들을 살려 돌려보낼 생각이 아니라면 숲을 빠져나가기 전에 나타날 것이고,

끝까지 나타나지 않는다면 우선 마을에 가서 싸울 채비를 갖추고 다시 돌아오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언제나 그렇듯 우준이 채민을 데리고 가장 앞에 섰고, 해윤이 우준의 옆에 섰다.

해윤은 당연하다는 듯 가인을 옆으로 데리고 왔다.

나무에 매달려 있는 어린 아이의 영혼들은 제이닐이 잘 말해줬기 때문인지,

해윤의 힘이 무섭기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공격하려는 생각은 없어 보였기 때문에

가는 길이 험하지는 않았다.

해윤의 강한 영능력을 경험한 가인은 기분이 좋아져서 다른 때보다 조금 말이 많아졌다.

"한 번은 세수를 하는데, 누군가가 자꾸 날 쳐다보는 기분이 드는 거야."

가인은 자기가 경험한 영혼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런 어두운 숲에서 귀신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은(게다가 나무에는 끔찍한 영혼들까지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등줄기가 서늘할 정도로 무서운 일이었지만,

가인이 이렇게 기분 좋게 이야기를 하는 것은 처음이기 때문에

다들 잠자코 가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무서워서 계속 눈을 감고 세수를 했거든.

비누기가 다 없어졌는데도 계속 물로 헹구다가 얼른 나가야겠다 싶어서

눈을 감은 채로 수건을 찾아서 물기를 닦아냈어.

그리고 휙 돌아선 다음에 이제 괜찮겠지 싶어서 눈을 떴는데…

바로 얼굴 앞에 눈동자가 빨간 여자가 날 쳐다보고 있었어.

아무리 귀신 경험을 많이 해도 이렇게 눈 떴을 때 갑자기 앞에 보이면 진짜 깜짝 놀라게 된다니까."

일행은 다들 오싹해져서 좀 더 서로에게 달라 붙었지만

해윤만큼은 신기하다는 듯이 말했다.

"와아. 진짜 부럽다. 나도 영혼 좀 보고 싶은데…

조금이라도 영혼이 보이면 이 능력으로 많은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을 텐데…"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며 걸어가던 우준이 갑자기 발을 멈췄다.

"이런…"

우준의 입에서 절망적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왜 그래, 우준아?"

"다들… 움직이지 마. 그리고… 내가 셋을 세면 뒤를 돌아서 달려."

"으응? 왜, 왜?"

"설명할 시간 없어. 하나, 둘……"

퍼석-

하지만 우준이 셋을 세기 전, 그들이 갑자기 하늘이 멀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들이 밟고 서 있던 땅이 아래로 내려앉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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