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축축한 흙 냄새와 섞여 숨을 쉴 수 없게 만드는 악취가 풍겨왔다.
쿠웅 소리가 날 정도로 깊은 곳에 떨어졌지만
몸에 느껴지는 고통보다 악취가 더 견디기 힘들었다.
다행히 팔 다리가 부러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코를 틀어막고 주위를 둘러보던 그들의 눈에 반쯤 썩어버린 시체들이 눈에 들어왔다.
"꺄아아아악!"
차희가 비명을 질렀다.
가인과 비인은 치밀어 오르는 구토증을 애써 참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아무리 눈을 감아도 썩은 시체의 눈에서 기어 나오는 구더기의 영상은
머릿속에 남아서 그들을 괴롭혔다.
"미치겠군."
우준이 중얼거리며 위를 올려다봤다.
대충 6미터 정도 파인 구멍인 듯 했다.
감청빛 하늘이 둥글게 보였다.
"너 때문이야!"
차희가 채민을 향해 도끼눈을 치켜 뜨며 속삭였다.
작은 목소리라서 다른 일행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채민은 움찔하며 차희를 돌아봤다.
"너의 불행이 우리를 여기에 빠지게 만든 거야."
"……"
"나도 너에게 이렇게 싫은 소리하는 거 싫어. 그러니까 네가 알아서 좀 떠나줘."
차희의 목소리가 애원하듯이 변했다.
"이런 더러운 꼴 겪으면서 개죽음 당하기는 싫다구."
"차희야…"
"부탁이야. 너만 없으면 우리 여행이 한결 편할 거란 말이야. 우준이도 덜 다치고…"
채민은 입술을 깨물며 우준을 쳐다봤다.
우준은 위를 올려다보며 어떻게 해야 여기서 빠져나갈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었다.
그 때, 둥근 하늘을 가장자리로 사람의 그림자가 보였다.
얼굴의 형태는 뚜렷이 보이지 않지만, 그가 지닌 지독한 악의는 그가 누구인지 짐작할 수 있게 했다.
도움을 청할 생각조차 잊게 만들 정도로 강한 악의였다.
"제가 이 숲에 건 주술을 깨뜨리다니요."
동굴 안에 울리는 그의 목소리는 나직하고 정중했지만,
일행은 부르르 떨며 서로 바짝 붙어 앉았다.
금방이라도 시체들이 벌떡 일어나 일행에게 덤벼들 것만 같았다.
"일 년이나 걸려서 힘들게 쳐놓은 주술인데… 정말 곤란하게 됐습니다."
그 목소리를 들으며 채민은 생각했다.
'목소리가 정말 맨질맨질하다.'
"우리를 어쩔 셈이지?"
우준의 질문에 그는 잠시 시간을 두었다가 대답했다.
"일단 그대로 내버려둘 생각입니다."
"그리고 나선?"
"보아하니 당신들은 꽤 강한 것 같네요. 내 힘으로 일곱 명을 상대하기는 힘들 테니,
이곳에 가둬두고 힘이 빠지기를 기다려야겠죠."
"만약 우리가 힘이 빠지기 전에 여기서 빠져나가면 어쩌려고?"
"후후후."
비웃음이 가득 담긴 웃음소리에 강전은 자존심이 상한 듯 벌떡 일어났지만,
옆에 있던 시체의 팔에 발이 걸려서 넘어지고 말았다.
퍼석-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썩어서 조직이 연약해진 시체의 팔이 부러지고,
그 안에서 더 심한 악취와 함께 구더기가 기어나왔다.
"우욱!"
다들 토악질을 하는 모습을 보며 남자는 즐거운 듯 웃었다.
남이 괴로워 하는 모습에 큰 희열을 느끼는 듯 했다.
"빠져나갈 수 없습니다."
그가 조소가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왜냐하면 조금 빠져나가기 힘들게 만들어놨거든요.
발을 디딜 곳도 없고, 잘못 건드리면 와르르 무너져 내릴 거예요.
생매장 당해서 죽고 싶지 않으면 조용히 있는 게 나을 겁니다."
"가만히 있어도 결국 개죽음 아닌가?"
"글쎄요… 혹시 모르지요. 살아남은 사람은 건져내서 좀 더 고통스럽게 만들어줄지… 후후후후."
음험한 목소리였다.
"부디 고통스럽게 죽기를 바랍니다. 고통만큼 매력적이고 정직한 건 세상에 없으니까요."
그가 사라지자 해윤이 말했다.
"이야. 더럽게 기분 나쁜 놈이네. 저 시체들보다 더 기분 나쁜데?"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익숙해지지 않을 것 같은 악취였다.
우준은 눈으로 벽면을 살펴봤지만 그의 말대로 발을 디딜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나무 뿌리라던가, 작은 돌조각이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매끈매끈하게 잘 닦여 있어서 발을 디디고 올라가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얼른 여기서 올라가고 싶어."
차희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며 우준의 품에 안기자,
우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한 팔로 차희의 어깨를 감쌌다.
"응, 나도 그래."
우준은 인상을 찌푸리고 여기저기 구겨져 있는 시체들을 살펴봤다.
시체는 20구가 넘어 보였는데, 아마도 유괴범을 잡기 위해 들어온 마을 사람들인 것 같았다.
하지만 무기들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아마도 이들이 모두 죽은 후, 유괴범이 전부 수거해간 모양이었다.
'방법이 없을 리는 없어.'
우준은 생각했다.
"진짜 어떻게 해야하냐? 누구 점프를 높이 뛰는 저주에 걸린 사람은 없냐?"
해윤의 말에 다들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건 저주가 아니라 공포다, 공포. 내 눈앞에 4, 5m씩 점프를 뛰는 사람이 있으면 졸 무서울 것 같아."
"맞아, 맞아."
다들 우준을 믿기 때문이었을까?
아주 절망적인 모습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을 무사히 이곳에서 빠져나가야 한다는 우준은 책임감으로 어깨가 무거웠다.
게다가 붉은 달빛 때문인지 자꾸만 기분이 안 좋아졌다.
지금까지는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다른 일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지만,
가만히 앉아있노라니 이 세계로 온 후에 했던 일들이 자꾸만 떠올라 우준을 괴롭혔다.
목을 벨 때의 감촉이 손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살갗을 가르고 뼈를 조각 내는 그 느낌이 손끝에 남아 우준을 사정없이 나무랐다.
아무리 다른 세계의 존재라지만 그들도 역시 숨을 쉬고 생각을 할 수 있는 인간.
'난 살인을 한 거야.'
우준은 입술을 깨물며 머리를 뒤로 젖혔다.
머리가 축축한 흙더미에 닿았다.
채민은 안타까운 심정으로 우준을 쳐다봤다.
우준의 괴로운 표정을 보니, 채민 역시 가슴이 아팠던 것이다.
우준에게 무슨 말이든 하고 싶지만 괜히 가까이 갔다가 우준에게 위험이 생길 것 같아
될 수 있도록 일행에게서 멀리 떨어져 앉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 두 사람을 보며 리현이 혀를 찼다.
삐리리리-
그 때, 갑자기 벨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다들 화들짝 놀라 긴장을 하며 어디서 나는 소리인지 알기 위해 두리번거렸다.
원래 살던 세계에서 자주 듣던 음악이었다.
"뭐지? 무슨 소리야?"
이쪽 세계에서 저쪽 세계의 음악을 듣게 된다는 건,
생각해본 적이 없는 일이기 때문에 다들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말고도 우리 세계에서 온 사람이 또 있는 건가?"
다들 떠들썩하게 이야기하는데, 비인이 한 손을 들어올렸다.
"가만… 이거… 핸드폰 벨소리 같지 않아?"
그 말에 다들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 그러네! 누구 핸드폰이야? 다들 자기 핸드폰을 갖고 있어?"
강전이 자기 주머니를 뒤지며 물었다.
"내 건 아닌데…"
"하하하. 나한테 전화해줄 만한 사람도 없어."
"난 핸드폰 없는데…"
일행이 각자 자기 핸드폰을 확인하는 중에도 우준은 여전히 머리를 뒤로 기댄 채,
지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우준아."
차희가 우준의 팔을 살짝 건드렸다.
우준이 대답없이 차희를 돌아봤다.
깊고 슬픈 눈동자가 차희를 당황하게 했다.
차희는 자기가 우준을 부른 목적도 잊고 입을 살짝 벌린 채 우준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야, 강우준. 네 핸드폰 아냐? 네 쪽에서 들리는데?"
강전의 말에 우준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다가
퍼뜩 뭔가가 떠올라 주머니를 뒤져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얼마 전, 어머니가 사준 최신형 핸드폰에서 깜빡깜빡 빛이 나고 있었다.
"것 봐라, 네 핸드폰이잖냐."
강전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핸드폰 액정에 떠오른 이름은 "은비".
우준은 평소와 달리 잔뜩 흥분한 모습으로 서둘러 핸드폰 폴더를 열려고 했다.
하지만 그 순간 핸드폰이 끊기고 말았다.
"앗!"
우준은 절망했다.
지금 이 순간, 비의 목소리가 간절히 그리웠기 때문에
전화를 받지 못했다는 절망감에 표정이 어두워졌다.
"우앗! 좀 더 빨리 받았으면 좋았을 뻔했네."
해윤이 정말 아쉽다는 듯 말했다.
"그런데 이상하잖아. 어떻게 핸드폰이 울린 거지? 여기에서도 핸드폰이 되나?"
"되고 말고를 떠나서… 다들 핸드폰 꺼지지 않았어? 빳데리가 이렇게 오래 갈 리가 없다구."
"응, 맞아. 내 핸드폰도 빳데리 나갔더라."
"내 것도 나갔어."
우준이 핸드폰에 그리운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엉? 그런데 어떻게 울린 거냐?"
"귀신 아냐?"
"야, 진짜 오싹하다."
다들 의아해했지만 우준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내가 아는 분들 중에… 주술 같은 걸 사용하시는 분이 계셔.
아마 그 분이 한국에 돌아오신 거겠지.
그 분이라면 저쪽에서 이쪽으로 전화를 거는 일 정도는 쉽……"
우준이 여기까지 말했을 때, 다시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고
우준은 이번엔 망설이지 않고 바로 핸드폰을 받았다.
"여……"
[야, 이 씨팍 쉐리야!]
핸드폰 폴더를 열자마자 들리는 여자의 커다란 욕설에 다들 어안이 벙벙해졌다.
[너, 이 강우준 새끼! 너 죽을래? 앙? 이 새끼야! 너 지금 어디야?
이 새끼가 여행 떠난다는 쪽지 하나 달랑 남겨두고 사라져? 어디냐고, 이 새꺄!
그래서 조용한 곳 찾았냐? 앙? 찾았냐고!]
"비야…"
우준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이름에 채민은 좀 놀랐다.
우준이 그토록 그리워하고 마음에 담고 있는 "비"라는 아이가
이렇게까지 거칠고 욕을 잘 하는 아이인지는 몰랐기 때문이다.
"쟤는 대답할 시간도 안 주고 화를 내네. 하하하."
해윤이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그래, 이 새끼야. 내 목소리는 안 잊어버렸나 보지? 앙?
너 지금 어딘데? 왜 안 돌아와? 너 떠난지 꽤 오래 됐다구!
게다가… 너 지금 어디에 가 있는 거냐? 승호 삼촌이 너 이상한데 가 있다고 의아해하더라.
너 지금 어디야?]
"나… 꼭 해야만 하는 일을 찾았어."
[꼭… 해야만 하는 일?]
"응. 그래서 잠깐 다른 세계에 왔어."
[얼마나 걸리는데?]
우준이 단지 "꼭 해야만 할 일을 찾았어."라고 말했을 뿐인데,
비가 충분히 납득하고 이해한다는 듯 대답하는 것을 보고,
채민은 비와 우준 사이에 이어져 있는 끈끈한 애정을 깨달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너무나 신뢰해서 이렇다저렇다 설명을 해댈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모르겠어. 아마도… 1년… 아니면 그 이상?"
[돌아올 수 있는 거지?]
"응. 돌아갈 거야."
[그래. 그럼 됐어.]
"비야."
[응? 왜?]
"나… 사람을 죽였어."
우준의 말에 일행의 표정이 침통하게 변했다.
앞을 가로막는 적을 죽일 때에는 한없이 싸늘하고 감정이 없어 보이던 우준이었기에
그것을 마음에 담아두고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기 때문이다.
[괜찮아.]
그리고 비의 대답에 일행은 다시 한 번 놀랐다.
왜 죽였는지도 모르면서 괜찮다고 말하다니…
설마 우준이 통화하고 있는 "비"라는 아이는 수도 없이 사람을 죽이는 살인마란 말인가?
[이유 없이 죽이지 않았잖아. 아마도 그들을 죽이지 않았더라면 네 목숨이 위험했을 테지.]
우준이 입술을 깨물었다.
우준에게 보여주는 비의 신뢰는 믿을 수 없도록 강해서
통화를 듣고 있는 일행들은 우준이 미치도록 부러워졌다.
[잘 들어둬, 강우준. 난 뻔뻔하고 이기적인 애이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건 어떻게든 이루고 싶어.
내가 지금 원하는 건, 강우준 네가 죽지 않고 내 옆으로 돌아오는 거야.
그러니까 네 목숨이 위험하면 누구라도 죽여. 어떻게 해서라도 내 곁으로 무사히 돌아와. 알겠어?]
"응…"
[몇 십 명을 죽이든, 나라 하나를 말아먹든… 너만 무사하면 돼.
앞을 가로막는 것들 다 죽여버리고 내 옆으로 와. 알겠지?]
"으응…"
비의 말을 듣던 리현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좋은 애다, 저 애. 우준이가 사람을 죽이는 걸 다 자기 책임으로 돌리려고 하고 있잖아."
"그러게 말이야. 저렇게 말하면 꼭 우준이가 저 애의 명령을 지키기 위해서 사람을 죽이는 것 같으니까…"
비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준아. 내가 지금 네가 갑자기 사라지는 바람에 무척 화가 났거든.
네놈만큼은 꼭 내 손으로 죽여야겠으니까… 반드시 살아서 돌아와.
네 목숨을 다른 놈들에게 줄 수는 없지.]
단호한 의지가 담긴 그 진지한 발언에 다들 하하하 웃고 말았다.
우준 역시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럴게."
[울지 마, 인마. 너 우는 모습, 한 개도 안 예쁘니까…
그리고 이 망할 놈아. 너 진짜 소심하다. 그런 거 마음에 담아두고…
네놈이 살인자가 되더라도 네놈을 옆에서 비웃어주면서 평생 같이 있어줄 친구들
졸라 많잖아. 안 그래? 그러니까 강우………]
비가 말하는 도중에 전화가 끊겼다.
하지만 우준은 여전히 핸드폰을 귀에 댄 채로 눈을 감고 있었다.
귓가에 남아 있는 그 목소리를 끝까지 기억하려는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