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햇빛 한 바구니, 고양이 두 스푼-36화 (36/91)

-36-

우준이 일행에게 자기가 생각한 계획을 설명하고, 제이닐을 불러

제이닐이 해주었으면 하는 일에 대해서 부탁하자,

제이닐은 미안하다는 듯이 말했다.

"하지만 그건 조금 어려워."

"왜?"

"나는 저기 저 오빠랑 저 오빠만 환하게 보이거든.

저 두 사람에게만 들어갈 수 있어. 다른 사람의 몸에 들어가는 길은 보이지가 않아."

제이닐이 가리킨 것은 가인과 해윤이었다.

해윤이 기분 좋게 웃었다.

"역시 난 빛이 나는 남자야."

"저런 바보 같은 농담을 하고 싶을까…?"

리현은 정말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럼 해윤아. 너, 혹시 네가 가지고 있는 영능력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줄 수도 있어?"

우준의 질문에 해윤이 어깨를 으쓱했다.

"순간적으로 집어넣을 수는 있지. 그런데 그건 정말 몇 초도 안 되는 순간이야.

금방 확 사라져 버리거든."

"그럼 됐어."

우준이 오르골을 돌아보며 말했다.

제이닐은 여전히 오르골 안에 담겨 있어서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제이닐. 아주 잠깐 동안 빛이 보여도 가능할까?"

"응, 그건 돼. 영혼으로 있을 때랑 살아있을 때는 시간의 흐름이 다르거든."

"그래. 다행이다. 그럼 그렇게 좀 부탁할게."

"응. 오빠들, 내가 그거 해주는 대신에 이 오르골을 꼭 우리 아빠한테 전해줘야 돼.

우리 아빠가 여행 중이라서 집에 없을 수도 있거든."

"걱정하지 마, 제이닐.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전해줄 테니까."

우준의 대답에 제이닐이 가늘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오빤 정말 믿음직스러워. 꼭 우리 아빠처럼."

"이런… 강우준 너…"

강전이 충격을 받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언제 애를 낳은 거냐?"

"됐다, 인마."

우준이 피식 웃었다.

"자, 그럼 우리 한 번 해보자."

일부러 유괴범을 밖으로 유인하지는 않았다.

유괴범이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채고 경계를 하고 나오면 골치 아파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제 나올지 모르는 유괴범을 기다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언제 나오든 덮칠 수 있도록 잔뜩 긴장을 하고 있어야 했던 데다가,

유괴범의 눈에 띄지 않도록 한껏 몸을 움츠리고 있자니,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질러대며 좀 풀어달라고 애원을 했다.

피가 통하지 않아서 여기저기 쥐가 나,

다들 몇 번씩이나 손가락에 침을 발라 코에 묻히고 있었다.

"잠 자고 있는 거 아냐? 지금은 원래 자야할 시간이잖아."

해윤의 말에 강전이 고개를 저었다.

"유괴범은 착한 아이가 아니라구. 오히려 이 시간이 주 활동 시간대가 아닐까?"

"그럼 지금 누구 유괴하러 간 거 아냐?"

"쉿!"

다들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고 속닥거리는데,

우준이 한 팔을 들어올려 그들을 조용히 시켰다.

침을 삼키지도 못할 정도로 바짝 긴장해서 입을 꾹 다물고 유괴범의 집을 주시했다.

바로 문을 열고 누군가가 나올 줄 알았는데

몇 분이 지나도 아무 일이 없자, 긴장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그걸 안 우준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긴장을 풀지 마."

하지만 어쩌겠는가.

힘이 들어 죽겠는데…

몇 시간이나 긴장한 채로 버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잠도 제대로 못 자서 눈이 쓰라리고, 앞이 뿌옇게 보였다.

어찌 되어도 좋으니 10분만이라도 자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삐거덕거리는 소리와 함께 허름한 오두막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잠이 확 깼다.

순식간에 정신이 확 돌아온 그들은 입술을 꽉 깨물고 안에서 나오는 사람의 모습을 확인했다.

지저분한 갈색 옷을 걸치고, 입에 담배를 꼬나 물고, 휘적휘적 걸어나오는 그는

모자를 푹 눌러써서 얼굴을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유괴범 이외의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남자를 확인하는 순간, 우준은 지체하지 않고 남자의 앞으로 뛰어나가 튼튼한 오라를 던졌다.

우준이 던진 오라는 정확히 남자의 머리를 통과해 몸을 단단히 묶었고,

남자는 갑작스러운 사태에 당황한 듯 우왕좌왕했다.

"지금이야!"

우준의 외침에 일행은 한꺼번에 남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아니야!'

해윤이 계획한 대로 남자의 몸에 영능력을 주입시키고,

그 틈에 강전이 오르골을 열어 남자의 품에 안기는 순간,

리현은 뭔가 이상함을 느끼며 그 자리에 멈췄다.

'이게 아니야!'

모든 것은 정확하게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우준이 남자를 잡고, 해윤이 영능력을 주입시키고, 강전이 오르골을 열어 유괴범의 품에 안긴다.

순간적으로 영혼이 들어갈 수 있는 상태가 된 유괴범의 몸에 제이닐의 영혼이 들어간다면,

싸우지 않고도 유괴범의 육체를 조절할 수 있으니 이것만큼 괜찮은 방법이 없었다.

제이닐의 영혼이 들어간 채로 마을로 돌아가, 제이닐이 유괴범의 몸에서 빠져나오면

유괴범은 꼼짝없이 그들에게 붙잡히는 몸이 되는 것이다.

제이닐의 영혼은 순식간에 남자의 몸으로 들어갔고,

남자는 가인의 몸에 제이닐이 들어갈 때처럼 간질 환자 마냥 몸을 떨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이 온몸을 떨던 남자가 축 늘어지는 순간,

리현의 머릿속에 강하게 읽히는 마음이 하나 있었다.

'계획대로 되는군.'

그 소리는 그들이 함정에 빠졌을 때, 위에서 들려오던 음험한 목소리와 같은 것이었다.

'아까부터 집 주위에 누군가가 있는 것 같아서 불안했지.

혹시나 해서 잡아놓은 마을 녀석 한 놈에게 내 옷을 입혀 내보내길 잘했어. 크크크큭.

이제 다 죽여주마.'

"도망쳐!"

리현의 외침에 다들 놀라서 리현을 쳐다봤다.

모든 것이 완벽한데 도망치라니…

"그건 유괴범이 아니야!"

리현은 전에 없이 당황하여 발을 동동 구르며 외쳤다.

"그 사람은 유괴범에게 잡혀 있던 마을 사람 중에 한 명이야.

진짜 유괴범은 따로 있다구!"

바로 그 때, 닫혀 있던 오두막의 문이 벌컥 열리며 총을 든 남자가 뛰어나왔고,

우준들은 재빨리 몸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유괴범은 도망치는 패거리 중 한 명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총알은 해윤의 볼을 스치고 지나가 옆에 있던 나무에 박혔다.

뜨거운 고통을 느끼며 해윤은 볼에 흐르는 피를 쓱 훔치고 뒤를 돌아봤다.

"아, 진짜! 감히 나한테 총을 쏴?"

탕-

유괴범이 다시 한 번 방아쇠를 당겼고, 총알이 해윤의 목 근처를 스치고 지나가자

가인이 해윤의 팔을 잡아끌었다.

"총에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없어! 얼른 도망쳐, 이 바보야!"

"아, 짜증나잖아! 감히 내 얼굴에 상처를 내다니!"

가인에게 질질 끌려가면서도 해윤은 버럭버럭 성질을 냈다.

채민 역시 서둘러 도망치려고 했지만 몇 걸음 가지도 못하고

유괴범이 설치해놓은 덫에 발이 묶이고 말았다.

산짐승을 잡는데 쓰는 단단하고 날카로운 덫은 채민의 가느다란 발목을 거칠게 씹어댔고,

날카로운 쇠가 뼈 끝에 닿자, 채민은 발목이 끊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채민이 비명을 지르지 않았던 것은

이 순간 비명을 질렀다가는 일행들이 도망치는데 방해가 될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누구든 머뭇거렸다가는 유괴범의 총에 맞아죽기 십상이었다.

채민은 입을 꾹 다물고 터져나올 것 같은 비명을 간신히 참았지만,

우준은 자기의 앞에 채민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뒤를 돌아봤다.

"채민아!"

발목에서 피를 줄줄 흘리며 쭈그리고 앉은 채민을 발견한 우준이

채민에게 달려가기도 전에 채민이 외쳤다.

"오지 마! 얼른 도망쳐!"

우준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어떻게 도망쳐?"

우준은 망설이지 않고 채민을 향해 달려갔고, 우준을 본 유괴범은 우준을 향해 총을 겨누었다.

탕탕탕-

총이 연속해서 발사되었지만 모두 우준의 몸을 스치고 지나갔을 뿐,

치명상을 입히지는 못했다.

유괴범의 관심이 우준에게로 돌아가자, 다른 일행은 무사히 유괴범의 눈 밖으로 벗어날 수 있었지만

멀리 가지는 못하고 수풀에 숨어 우준과 채민을 지켜봤다.

유괴범이 씩 웃으며 우준과 채민을 향해 다가왔다.

우준은 채민을 지키기 위해 채민의 앞을 가로막으며 스웨인을 빼들었다.

어스레 피어오르는 새벽빛에 서늘한 빛을 발하는 스웨인을 보며 유괴범이 씩 웃었다.

"재미있는 물건을 가지고 있군요."

"이 애는 절대로 죽이지 못할 거다."

"호오… 그렇습니까? 하지만 내가 이 자리에서 당신을 쏴죽이면

그녀를 보호할 사람은 아무도 남지 않을 텐데요.

설마 이미 도망쳐버린 당신의 동료들이 돌아와 줄 거라는 희망적인 생각을 하는 겁니까?

그런 생각은 버리는 게 좋을 겁니다. 원래 인간이라는 생물은 이기심으로 만들어진 생물이거든요.

일단 자기 안전이 우선이고, 자기의 안전이 보장이 되어야 다른 사람을 챙길 여유가 생기는 거지요.

뭐, 가끔은 당신처럼 자기 안전보다 남의 안전을 우선시하는 특이한 생물이 태어나기도 하지만요."

"주절주절 뭐라고 지껄여 대는 건지…"

"당당하시군요."

"한참 잘못 생각하고 있어. 난 내 동료들이 날 구하러 오지 않기를 바라.

그 애들이 무사히 이곳에서 빠져나가기를 바랄 뿐이다."

"하하하하하."

새벽빛을 등지고 있는 유괴범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어서 제대로 파악하기 힘들었지만,

키는 중간 정도의 키, 체격 역시 중간 정도의 체격이었고,

머리카락은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거짓말."

유괴범이 입술을 비틀고 비웃으며 나직하게 말했다.

"사실은 속으로 굉장히 무서운 거지요? 그들이 당신을 구해주러 왔으면 좋겠지요?

그들이 진짜로 구하러 오지 않으면 원망하고 저주할 거잖아요. 안 그래요?"

"……"

"왜요? 내가 너무 정곡을 찔렀나요?"

"아니. 그냥 갑자기… 네가 너무 멍청해 보여서 할 말을 잃었다."

"……굉장히… 사람을 열 받게 하는 성격이군요, 당신은…"

"……"

우준은 말없이 유괴범을 노려봤다.

유괴범 역시 잠시 우준을 노려보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뭐, 어차피 이 자리에서 바로 죽일 생각은 없었습니다.

어쩌면 어리석은 당신의 동료들이 당신을 구하러 올지도 모르는 일이니까요.

일단은 당신과 그 옆에 있는 여자를 살려두는 편이 좋겠지요?"

잠시 말을 끊은 유괴범이 자기 대신에 귀신이 들린 남자를 턱으로 가리켰다.

"저 남자를 묶은 밧줄을 가져와서 당신 파트너의 손을 묶으세요."

"……"

"반항하지 않는 게 좋아요. 당신의 칼보다는 나의 총이 더 빠를 테니까…

혹시 '내가 죽더라도 이 애만 살리면 돼.'라는 바보 같은 생각을 하는 건 아니죠?

죽는 순간 나의 총이 당신에게 향할지, 당신의 파트너에게 향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에요. 나조차도요."

우준은 이를 으드득 갈며 유괴범을 노려보다가 시키는 대로 남자의 몸에 묶여 있는 밧줄을 풀었다.

"응? 오빠? 뭔가 잘못된 거지? 응?"

남자의 몸안에 들어가 있는 제이닐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묻자,

우준이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괜찮아질 거야. 잠시 네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 있어."

"오빠…"

"너와의 약속은 반드시 지킬 테니까…"

우준이 줄을 풀고 돌아서는 순간,

타앙-하고 총성이 들리더니 총을 떠난 총알이 우준의 볼을 스쳐

남자의 이마에 정확히 박혔다.

남자의 이마에서 피가 주르륵 흐르고, 남자의 몸이 뒤로 넘어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땅에 쓰러지는 동안,

유괴범은 미소를 지으며 우준에게 다시 총을 겨누었다.

"당신들 때문에 아까운 목숨 하나 그냥 버리는군요.

이렇게 순식간에 죽는다는 자각도 없이 사람을 죽이는 건 내 취향이 아니라서요."

우준이 미간을 좁혔다.

"천천히 아주 고통스럽게 자기가 죽어간다는 자각을 하며 죽게 만들어야 속이 후련한데 말이죠."

"개새끼."

"자아, 어서."

유괴범이 얼른 줄을 묶으라고 눈빛으로 재촉했다.

우준은 줄을 들고 허리를 굽혀 채민의 팔에 밧줄을 묶었다.

"우준아."

채민이 미안한 듯 우준을 쳐다보자, 우준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난 지금 후회하지 않으니까 너 역시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하지만… 또 나 때문에…"

"늘 말하지만, 이건 나의 선택이야."

"그래도…"

"괜찮아."

우준은 채민과 계속 대화를 하면서 줄을 묶었는데,

그 줄을 묶는 방법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채민은 그것에 대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우준은 유괴범을 향해 등을 돌리고 있었기 때문에,

우준이 어떻게 줄을 묶는지는 유괴범의 눈에 보이지 않았다.

우준은 줄을 끌어당겨 채민의 손바닥에 어느 정도의 여유분을 쥐어주고는

그 상태 그대로 줄을 묶었던 것이다.

"괜찮으니까 어떻게 해서든지 네가 살아날 생각만 해. 알겠지?"

"으응."

"다 묶었다."

우준이 손을 털고 일어나자, 유괴범이 천천히 다가와 채민의 손을 확인하고는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유괴범의 얼굴이 빛에 드러나 정확한 윤곽을 나타냈는데,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얼굴에 채민은 좀 놀랐다.

음험하고 변태 같이 생긴 느끼한 아저씨일 거라고 생각했던 유괴범은

이제 겨우 30살 정도 됐을 법한, 대학 강사 풍의 깔끔한 젊은이였던 것이다.

우준 역시 유괴범의 외모를 보고 좀 놀라기는 했지만,

어떻게든 유괴범을 해치우기 위해 틈을 보고 있었다.

"자아, 그럼 이제 해야할 것은 당신의 칼을 수거하는 일인데…

그 칼은 내가 만지기를 원하는 것 같지 않군요."

말하는 것으로 봐서는 무기에 대해서도 정통(正統-바르게 알고 있다)한 것 같았다.

"자아, 그 칼을 저 멀리에 던져두세요. 안 그러면 당신의 파트너를 쏴 죽일 테니…"

우준을 향하고 있던 유괴범의 총이 채민의 머리를 겨눴다.

우준이 채민의 목숨을 자신의 목숨보다 더 아낀다는 것을 알아챈 듯 했다.

우준은 유괴범을 똑바로 노려보며 스웨인을 멀리 던져버렸고,

그걸 본 유괴범은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채민의 발목을 물고 있는 덫에

자신의 발을 터억 얹어놓았다.

"으읏…"

뼈가 반으로 잘리는 듯한 고통이었기 때문에 악 물고 있는 채민의 이 사이로

고통스러운 신음이 새어나왔다.

그 모습에 우준의 눈썹이 꿈틀하자, 유괴범은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그 발 치워."

명령조의 말을 들은 유괴범은 총을 들어 우준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빠악-

듣기에도 아픈 소리를 내며 우준의 머리가 옆으로 돌아갔다.

우준의 머리에서 붉은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하지만 우준은 전혀 고통스럽다는 표정을 내보이지 않고 다시 고개를 돌려

유괴범을 똑바로 노려봤다.

"그 발 치우랬지."

빠악- 빠악-

총이 우준의 머리가 깨질 정도로 몇 번이나 두들기자,

보다 못한 채민이 유괴범의 다리를 잡고 흐느끼며 말했다.

"제발… 제발 그만 해요. 제발…"

"헉… 헉…"

유괴범은 숨을 고르며 총 휘두르는 것을 멈추고 덫에 올린 발에 힘을 줬다.

드드득-

뼈 안으로 날카로운 쇠끝이 파고드는 느낌이 들었지만 채민은 이를 악물고 참았다.

이번에 또 신음을 흘렸다가 우준이 화를 내면 유괴범이 정말로 우준을

때려 죽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머리에서 흐르는 피 때문에 피범벅이 된 우준을 보며 채민은 눈물을 흘렸다.

가슴이 찢어질 것 같이 아팠다.

'내가 맞았어야 했던 건데… 이번에도 나 때문에…'

자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다친다는 게 괴로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하지만 우준의 얼굴에 고통스러움은 떠올라 있지 않았다.

비굴함이 전혀 없는 당당한 눈동자로 우준은 여전히 유괴범을 노려봤다.

"지금 당신이 나에게 명령을 내릴 입장이 아닐 텐데요."

"……"

"내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는 게 좋아요. 이 녀석은 커다란 산짐승을 잡을 때 쓰는 덫이죠.

날이 아주 잘 갈아져 있고 튼튼해서, 내가 발에 한 번만 더 힘을 주면,

당신 파트너의 가느다란 발목 정도는 쉽게 절단이 날 거예요.

그럼 당신의 파트너는 어떻게 될까요?"

"……"

유괴범의 얼굴에 잔인한 미소가 떠올랐다.

"아마도 당신의 그 성격 때문에 발목 하나를 잃고 평생을 병신으로 살게 되겠죠."

"내가 뭘 어떻게 해야하는데?"

누그러진 우준의 태도에 유괴범은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채민의 팔을 묶은 줄을 가리켰다.

그 줄의 끝은 아직도 길게 남아있었다.

"그 줄을 이리 집어주세요."

우준은 입을 꾹 다물고 유괴범이 시키는 대로 했다.

피가 흐르는 채민의 발목이 신경 쓰여서 견딜 수가 없었다.

"자, 이제 당신의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서 이 앞으로 내밀어요.

만약 허튼 수작을 부렸다가는 당신 파트너의 발목이 먼저 날아가게 될 거예요."

우준은 잠자코 손을 내밀었고, 유괴범은 줄로 우준의 팔목을 단단히 묶었다.

이리저리 비틀어도 풀지 못할 만큼 꼼꼼하게 묶은 유괴범이

다시 총을 채민의 머리에 겨누고 말했다.

"자, 그럼 나의 오두막으로 초대하지요."

"일단… 쟤 발목에 덫 먼저 풀어주면 안 되겠어? 저러다가 진짜로 발목이 잘리겠어."

"이런… 그건 좀 무리겠는걸요."

유괴범이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지금껏 저 덫을 다시 열어본 적이 없어서요.

저 덫에 걸린 짐승들은 전부 발목을 절단 낸 후에야 덫에서 풀려날 수 있었거든요."

"빌어먹을!"

"욕하지 않는 게 좋아요."

유괴범이 우준의 등을 총으로 쿡 찌르며 말했다.

"욕 하는 인간들은 다 죽여버리고 싶어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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