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햇빛 한 바구니, 고양이 두 스푼-38화 (38/91)

-38-

오두막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채민은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느낌은 점점 강해졌다.

'잘 하면 될지도 몰라. 한 번쯤은 내가 쓸모 있을지도 몰라.'

"우리 아이들에게 밥을 줄 시간이군요."

유괴범이 식탁에 있던 먹거리를 살펴보며 물었다.

"배고플 텐데… 좀 드시겠습니까?"

"필요 없어."

우준이 으드득 이를 갈며 말했다.

채민의 몸이 점점 뜨거워지는 것이 잘못하다가는 목숨까지 잃을 것 같았다.

흐르는 피의 양이 너무 많았다.

우준의 바지까지 축축하게 적실 정도였다.

"하지만 당신의 파트너는 뭐든 좀 먹어야 할 텐데요.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죽을지도 몰라요."

"이렇게까지 해서 당신이 얻는 게 뭐지? 아이들을 괴롭혀서 죽이고, 사람들을 죽인다고

당신의 가족이 살아서 돌아온다는 건가?"

"고통과 집념, 저주는 생명을 창조하죠."

유괴범의 얼굴에 괴기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어른거리는 촛불에 흔들리는 얼굴이 공포스럽게 보였다.

"내 가족의 시체는 아주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앞으로 몇 명만 더 고통스럽게 죽이면

나의 가족들은 새로이 태어나겠지요."

"……!"

"내 가족이 새로운 생명을 얻으면 이 세상을 바꿀 생각입니다.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그거 정말 끔찍하겠군."

유괴범이 눈을 가늘게 떴다.

"과연 그럴까요? 어쩌면 지금보다 나을지도 모르지요. 지금도 좋을 거 없는 세상이니까요."

우준이 미간을 좁혔다.

아까부터 생각한 건데 유괴범은 이상할 정도로 신체의 한 부분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설마… 저기가 약점인가?'

우준은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을 발견한 기분이 들었다.

"그럼 잠시 나갔다오겠습니다. 살아남으려는 발버둥은 관두는 게 좋아요.

그런 모습은 내 기쁨만 가중시키거든요.

그렇게 되면 당신의 동료들이 당신을 구하러 오는 것도 기다리지 못하고

당신을 점점 더 괴롭히고 싶어질 테니까… 이왕이면 잠자코 기다리세요."

유괴범이 음식을 들고 오두막을 나가자마자 우준은 빠르게 주위를 한 번 둘러보고

아까부터 머리에 담고 있던 생각을 실천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우준은 먼저 몸을 움직여 채민의 다리쪽으로 향했다.

"채민아. 조금 아플 거야. 참을 수 있지?"

"응? 뭐 하려고?"

"이 빌어먹을 덫을 빼내려고…"

"하지만 넌 양손이 묶여 있잖아."

"다리과 팔은 떨어져 있잖아."

"어?"

우준은 묶인 두 손으로 덫의 한 쪽을 단단히 잡았다.

조심스럽게 한다고 한 건데 덫의 미세한 움직임에도 채민은 무척 고통스러워서

눈물이 찔끔 나왔지만 애써 신음을 삼켰다.

우준은 채민이 걱정돼서 채민의 얼굴을 한 번 살폈다.

"참을 수 있겠어?"

"하지만 너…"

"많이 아프겠지만 될 수 있도록 소리는 내지 말아줘.

이게 끝나기 전에 유괴범이 돌아오면 안 되니까."

우준은 채민이 뭐라고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발을 덫의 다른 쪽에 밀어넣었다.

그리고 그것을 양쪽으로 벌리기 위해 팔과 다리에 힘을 주었다.

삐그그…

덫이 천천히 벌어지기 시작하자 우준은 기회를 놓지 않고 자기의 발을 덫 사이로 끼어 넣었다.

덫이 벌어질 때마다 신경 조직을 스쳐서 까무러칠 듯이 아팠지만

채민은 주먹을 꽉 쥐고 천천히 호흡했다.

악 깨물고 있는 이가 부서질 것만 같았다.

우준이 발을 덫에 낀 채로 힘을 주자 덫의 이빨이 우준의 발을 파고들었지만

우준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계속해서 덫을 벌렸다.

"됐다! 이제 빼."

덫의 이빨이 채민의 발목을 전부 뱉어내자마자 우준이 외쳤고

채민은 움직이지 않는 다리에 억지로 힘을 주어 간신히 다리를 빼냈다.

피가 뚝뚝 떨어졌는데, 그것이 우준의 피인지 채민의 피인지 알 수 없었다.

채민의 다리가 무사히 빠져나온 것을 확인한 우준은

이제 어떻게 자기의 발을 빼내야 할지 고민했는데,

그걸 눈치챈 채민은 인어의 검을 빼내어 덫에 덧물렸다.

"얼른 빼, 우준아."

"오케이."

우준이 손을 놔뒀지만 칼자루를 부수지 못하는 덫은 입을 벌리고 있었고

우준은 무사히 발까지 빼낼 수 있었다.

채민은 우준의 발에서 떨어지는 피를 안타깝게 쳐다봤지만

우준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묶인 손을 올려 채민의 머리를 쓱쓱 만져주며 말했다.

"검으로 이 밧줄을 좀 풀어줘."

채민은 아직도 칼자루에 물려있는 덫을 피해 칼집에서 칼을 빼내 우준의 양팔을 묶어두고 있는 줄을 베어냈다.

인어의 검은 몹시 날카로웠기 때문에 줄은 단번에 잘려나갔다.

우준은 자유로워진 손목을 슥슥 문질러 근육을 풀어주고는

여전히 인어의 검을 물고 있는 덫을 잡아 세게 벌렸다.

"양손을 사용하면 이렇게 쉽게 벌릴 수 있었던 건데…"

덫은 허무하리만큼 쉽게 입을 쩍 벌렸다.

인어의 검을 잘못 만졌다가는 우준 자신의 몸이 얼어붙기 때문에

덫을 이용해서 채민의 밧줄을 풀어준 우준은 덫을 오두막 문 앞에 놓으며 말했다.

"유괴범의 약점을 찾아냈어."

"응. 나도 방법을 하나 찾았어."

채민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희망에 빛나는 채민의 얼굴을 보며 우준이 물었다.

"그래? 어떤 방법인데?"

"내가 먼저 물어볼래. 유괴범 약점은 어디야?"

"아…"

우준은 채민이 대답을 피한다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유괴범의 약점이 어딘지 설명해주었다.

"심장인 것 같아. 아까부터 계속 가슴 쪽에 신경을 썼거든.

내장이 없이 살 수는 있어도 심장이 없이는 살 수 없었던 거겠지.

심장을 찔러버리면 유괴범은 죽을 거야."

"아, 그렇구나."

"그런데… 유괴범을 없앨 방법은?"

우준의 질문에 채민은 빙그레 웃었다.

욱씬-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채민의 미소를 보는 순간, 우준은 가슴이 너무 아파서

자기도 모르게 채민을 덥썩 끌어안고 말았다.

절대로 채민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꽉 보듬어 안고 채민의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었다.

"채민아."

"아…"

채민은 얼굴에 빨갛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대답했다.

귓가에 울리는 우준의 낮은 목소리가 최음제처럼 온몸의 신경을 자극했다.

"이곳에서 나가면 절대로 내 옆에서 떨어지지 마. 알겠지? 절대로…"

"으응…"

"다시는… 이렇게 심하게 다치게 하지는 않을 거야. 다시는…"

"고마워, 우준아."

채민이 부드럽게 대답했지만 우준은 채민을 놔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한참 그렇게 채민을 안고 있던 우준은 유괴범이 돌아오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채민에게서 떨어졌다.

"유괴범이 돌아온다."

우준이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우준아, 저 사람들을 양쪽에 끼고 문 옆으로 가."

"응?"

"어서!"

채민이 닦달하자 우준은 영문도 모르고 쓰러진 사람 두 명을 옆구리에 끼었다.

채민은 오두막을 한 번 쭉 둘러봤다.

나무로 튼튼하게 지어진 오두막.

하지만 이 오두막은 채민이 들어오는 순간부터 변화를 일으키고 있었다.

오두막을 지을 때, 딱 한 군데 부실한 곳이 있었는데

그곳이 불안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지금 오두막이 내지르는 비명소리로 봐서는 문이 열리는 순간 오두막이 무너질 것만 같았다.

유괴범이 들어오는 순간, 우준을 문 밖으로 밀어내고 유괴범을 확 끌어안은 채로

오두막 가운데로 들어가면 된다.

중요한 것은 유괴범의 가슴과 자신의 가슴이 맞닿아 있어야 한다.

지금까지의 불운으로 봐서, 오두막의 파편은 채민의 심장을 향해 떨어질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유괴범의 심장과 자신의 심장이 같은 위치에 있으면 파편은 유괴범의 심장을 꿰뚫을 것이다.

'난 늘 운이 없었으니까 이번에도 아마 긴 파편이 떨어지겠지.

유괴범의 몸을 통과해서 내 심장까지 꿰뚫을지도 몰라.'

채민은 우준의 뒤로 가서 서며 생각했다.

듬직한 우준의 등을 보며 서글픈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이게 어디야. 내 살아생전에 이렇게까지 누군가의 애정을 받아본 게 어디야.

우준이는 정말 진심으로 날 걱정해주고 지켜줬잖아. 그거면 된 거지, 뭐.'

유괴범의 발자국 소리가 가까워 올수록 채민의 다리가 덜덜 떨렸다.

무서웠다.

너무 무서웠지만 다른 방법을 생각할 수 없었다.

인어의 검은 제대로 사용할 수 없었고, 우준이 검을 잡았다가는 얼어버릴지도 몰랐다.

'내게 닥칠 불행을 이렇게 확실하게 느껴본 건 처음인데 피할 수가 없다니…

하지만 뭐, 이건 이것대로 괜찮은 거겠지.'

오두막의 문을 열고 아무런 의심 없이 안으로 들어오던 유괴범은

문 앞에 설치된 덫에 걸려 순간적으로 몸을 기우뚱했다.

유괴범이 중심을 못 잡는 틈을 타서 채민은 앞에 있는 우준의 등을 발로 퍼억 찼고,

양쪽에 두 남자를 끼고 있던 우준은 버티지 못하고 앞으로 밀려났다.

우준이 무사히 오두막을 빠져나가는 것을 확인한 채민은 빠르게 유괴범의 뒤로 가서

유괴범을 끌어안고 오두막 가운데로 뛰어들었다.

유괴범은 채민 정도는 이길 수 있을 정도로 힘이 셌지만

예상치 못했던 덫에 걸린 터라 채민에게 이끌릴 수밖에 없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건지 모르겠군요.

당신이 날 붙잡고 있으면 뭐든 해결될 것 같았나요?

당신을 죽이고 오두막 밖으로 나가서 당신의 일행을 잡으면 끝인데 말이에요."

유괴범은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채민은 유괴범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단단히 유괴범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길지 않았지만 17년을 살며 처음으로 '살아있다'는 기분을 들게 해준

우준과 동료들에게 감사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아마도 이 순간만이 기억에 남아있을 것이다.

그들을 만난 후에야 비로소 살아있을 수 있었으니까.

"날 빠져나갈 수 없어요."

채민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느릿느릿하고 차가운 목소리에 유괴범은 아주 오랜만에 오싹함을 느꼈다.

부모님의 피로 새로운 생명을 얻은 후 처음으로 느끼는 공포였다.

덫에 걸려 꼼짝도 못하고 있던 여자가 내는 목소리라고는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유괴범은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몸을 빼내려고 했지만

유괴범의 몸을 단단히 옭아맨 채민의 팔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죽을 듯이 피를 흘리던 이 작은 소녀의 어디에 이런 강한 힘이 감추어져 있었는지 궁금했다.

"당신은 거짓말쟁이에요."

채민이 흘끗 천장을 올려다봤다.

'조금만 더 있으면 돼.'

"거짓말쟁이라니…"

유괴범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어떻게든 빠져나가고 싶었다.

밖에 나가서 죽어도 좋으니 이 소녀에게서만큼은 멀어지고 싶었다.

온몸의 세포가 이 소녀는 위험하다고 외치고 있었다.

"당신의 부모님이 사람들에게 맛있는 것을 대접하고 그것으로 기뻐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는 걸로

행복을 느꼈다고 했나요?"

"그, 그래."

"그렇다면 당신은 거짓말을 한 거예요."

우지끈-

오두막의 어느 곳인가가 부러지며 나는 소리가 채민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긴장한 유괴범은 그 소리를 듣지 못했는지 채민에게서 떨어져 나가기 위해

몸을 비틀고 있었다.

"그런 사소한 것으로 행복을 얻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저주하면서 죽을 리는 없다구요!"

우두두둑-

이번에 들린 소리는 꽤 컸기에 유괴범 또한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올려다보는 유괴범의 미끈한 얼굴 위로 나뭇조각 하나가 툭 떨어졌다.

유괴범은 인상을 찌푸렸다.

"당신의 거짓말도 이제 끝이야!"

채민의 외침과 동시에 오두막은 처참하게 무너져 내렸고

유괴범은 눈을 크게 뜨고 자기의 몸 위로 떨어지는 오두막의 원령들을 응시했다.

떨어지는 나뭇조각 하나하나를 붙들고 있는,

지금껏 자신이 죽인 아이들의 원혼이 똑똑히 눈에 보였다.

그리고 아주 날카롭고 커다란 나무 하나가 유괴범의 심장을 향해 똑바로 날아오기 시작했다.

"안 돼!"

무너져 내리는 오두막을 보며 우준을 절규했다.

채민이 왜 자신을 오두막에서 밀쳐냈는지 알 수 없었다.

밖으로 던져지듯 나가자마자 희생자들을 내려놓고 아까 칼을 던져둔 곳으로 달려가

스웨인을 집어든 후 바로 오두막으로 다시 뛰어들려고 했지만,

우준이 오두막의 문을 잡으려는 순간 엄청난 소리와 함께 오두막이 와르르 내려앉았다.

아주 큰 오두막은 아니었지만 두껍고 단단한 나무로 지어진 오두막이었기에

그 아래에 깔렸다면 살아남기 힘들 것이다.

"으아아아! 채민아!"

우준은 눈앞에 일어난 상황임에도 믿을 수 없었다.

이제야 채민이 무슨 생각으로 자신을 밀어낸 건지 깨달았다.

채민은 처음부터 그럴 예정이었던 것이다.

자신의 불운으로 유괴범의 발목을 잡아 함께 죽을 생각.

"으으…"

그래도 어쩌면 살아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우준은 앞뒤 가리지 않고 스웨인을 휘둘렀다.

오두막이 무너지는 소리에 달려왔던 일행이 혼자서 날뛰는 우준을 발견하고는 다가와 우준의 팔을 잡았지만,

두 사람이 달라붙어도 멈추게 하지 못할 만큼 우준의 힘은 강했다.

퍼억- 퍼억-

앞을 가리고 있는 나무들이 사정없이 베어나갔다.

"우준아!"

비인이 뒤에서 우준을 끌어안았다.

"우준아! 정신차려! 우준아!"

"채민이가… 채민이가…"

우준이 생각하는 것이 리현에게 또렷이 전달되었다.

채민의 희생 정신에 오싹할 정도로 감동을 받은 리현이 몸을 부르르 떨며 우준의 팔을 잡았다.

"잘 들어, 우준아. 네 운은 강하지?"

"빌어먹을! 저리 비켜! 너랑 말 장난 할 시간 없어!"

우준이 팔을 뿌리치며 외쳤다.

하지만 리현은 다시 우준의 팔을 잡았다.

우준은 다시 뿌리치고, 그것이 몇 번 반복되다가 참지 못한 리현이 결국 우준의 뺨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우준의 얼굴이 옆으로 휙 돌아갈 정도로 인정사정 없는 손찌검에 다들 입을 쩍 벌렸다.

"뭐냐, 너…"

"이 병신아! 진정하라구! 네 운은 강해서 분명 채민이를 찾을 거야.

하지만 채민이는 불행이 따라다니는 애잖아.

네가 그렇게 칼을 휘둘러댔다가는 살아있는 채민이조차도 그 칼로 죽이게 생겼다구!"

그제야 우준이 들고 있던 칼을 아래로 내렸다.

혼란스럽게 요동치던 검은 눈동자가 서서히 안정을 되찾았다.

리현이 크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채민이가 나뭇조각에 찔리지 않았다면 죽지는 않았을 거야.

가장자리부터 이 파편들을 치우자."

우준은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자신도 왜 이렇게 흥분을 가라앉히기 힘든지 알 수 없었다.

지금껏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이성을 유지할 수 있을 거라고 자신했었는데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의 폭발이 일어나서 이성이라는 것이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빌어먹을…"

지켜주겠다고 약속했으면서 오히려 도움을 받았다.

"빌어먹을…"

우준은 이 상황이 정말 미쳐버릴 것만 같이 괴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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