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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해가 지고 다들 지쳐 있었지만 채민의 상태가 몹시 안 좋았기 때문에
쉬지 않고 마을에 가기로 결정을 내렸다.
"나 이제 우리 아빠한테 가는 거야?"
오르골로 들어가지 않고 가인의 어깨에 매달려서 같이 따라오던 제이닐이 물었다.
"응. 지금 마을로 가는 거야."
"헤헤. 신난다. 우리 엄마가 요리를 되게 잘 하거든. 우리 엄마 쿠키는 세계 최고야.
다들 우리 엄마 쿠키를 먹고 싶어서 집에 찾아오고 그래.
케이크도 되게 맛있게 만들어. 난 생크림 케이크를 좋아해서 엄마는 늘 케이크를
하얀 생크림으로 예쁘게 장식을 해주시거든.
근데 많이 먹으면 이가 썩는다고 자주 해주시지는 않아. 난 밥 대신에 케이크를 먹고 싶은데…"
"바보. 밥 대신에 케이크만 먹었다가는 매일매일 아플 걸."
가인은 가슴이 저릿저릿한 것을 애써 감추며 대꾸했다.
"아빠는 가끔 집에 오시면 날 목마 태우고 되게 빠르게 달려서 산에 올라가셔.
진짜 완전히 빨라서 하늘을 나는 기분이 들 정도야."
"으응."
"집에 가면 엄마가 쿠키를 구워놓고 기다리겠지?
아빠가 와계셨으면 좋겠다. 그러면 재미있는 얘기도 해달라고 하고, 또 목마를 태워달라고 해야지.
엄마한테 도시락 싸서 같이 산에 놀러가자고 해야겠다. 헤헤."
"……"
"강아지 한 마리를 키우고 싶었는데 키우게 해주셨으면 좋겠어.
나 진짜로 잘 기를 자신이 있는데… 강아지는 작고 귀엽잖아.
하지만 큰 강아지도 좋을 것 같아. 등에 타고 다닐 수 있게… 집도 지켜주잖아."
"으응."
제이닐의 목소리는 가인에게만 들렸다.
그리고 제이닐의 미소 또한 가인에게만 보였기에,
가인의 앞으로 날아와 빙긋 미소를 짓는 제이닐을 보는 순간,
가인은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 표정 짓지 마, 오빠."
제이닐이 손을 들어 가인의 볼을 쓰다듬었다.
슬프도록 따스한 느낌이 가인의 볼을 살짝 스치고 지나갔다.
"나도 알고 있어. 이제 난 그런 것들을 할 수 없다는 거.
하지만 마지막으로… 꿈꿔보고 싶었어."
슬퍼하는 가인의 모습을 본 해윤이 침통한 표정으로 가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울음을 참고 흐느끼는 어깨를 힘을 주어 잡으며 해윤이 말했다.
"이 세상에서의 슬픔은 저 세상으로 가는 순간 사라질 거야.
이 세상에서의 이별은 저 세상에서 또 다른 만남이 될 거야.
가인이 너도 그건 잘 알잖아. 아파하지 마. 네가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어."
"난, 아프지 않아. 단지… 이 세상에서 너무 짧은 시간 동안만 행복했던 이 애가 안타까워."
"나도 그래. 하지만 어쩌면 이 세상에 계속 살면서 겪게 될 수많은 불행들을 겪느니
차라리 행복만을 알고 있던 어린 나이에 저곳으로 가는 것이 좋은 일일지도 몰라."
"아니야."
참고 있던 눈물이 방울방울 흘러내렸다.
"아니야. 아무리 괴로워도, 아무리 더러워도, 결국 사람은 행복을 찾게 되어있어.
괴로움 끝에 얻게 되는 행복이 얼마나 큰데…"
'내가 어둠 속에서 너희들을 만난 것처럼…'
"그걸 모르고 사라지는 거잖아."
"아마도…"
해윤이 걸음을 멈추자 가인 역시 걸음을 멈췄다.
해윤은 가인을 돌려세우고 가인의 눈에서 떨어지는 눈물을 조심스럽게 닦아냈다.
하지만 닦여진 눈물의 길을 또 다른 눈물이 채우고, 아무리 닦아도 젖은 볼이 마르지 않자
해윤은 가만히 가인을 끌어안았다.
넓은 가슴에 가인을 안고 낮게 속삭였다.
"저 세상에서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행복이 존재할 거야. 울지 마, 가인아.
네가 우니까, 정말… 되게 속상하다."
뒤따라서 걷다가 두 사람의 모습을 본 강전이 옆에 서 있던 리현에게 속삭이듯이 말했다.
"저거, 저거… 위험한 분위기 아니냐?"
"그러게."
"난 게이는 별로인데…"
"난 네가 더 별로다."
"소리현! 너 이 자식, 아주 그냥 내 전기의 힘으로 파지직 태워주겠어!"
"한 번 해봐. 난 태워지면서 네가 속에 감추고 싶었던 비밀들을 전부 까발리며 죽을 거니까."
"쳇…"
투덜대면서도 두 사람은 상당히 즐거운 표정이었다.
둘의 뒤로는 구해낸 남자를 업은 비인과 차희가 나란히 걷고 있었는데, 차희는 맨 앞에서 우준의 등에 업혀 있는
채민을 노려보고 있었다.
차희 쪽으로 눈도 돌리지 않은 채 걷던 비인이 입을 열었다.
낮고 현명한 목소리가 비인의 입에서 차희의 귀로 흘러 들어갔다.
"차희야."
"응?"
차희가 금세 표정을 바꾸고 비인을 쳐다봤다.
하지만 비인은 여전히 앞을 보고 있었다.
"나는 이 애들과 있는 이 시간이 정말 소중해."
"응, 알아. 나도 그런걸."
"미움이나 질투, 원망 없이 함께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건, 나에게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어.
그런데 지금 난 그럼 사람들과 함께 있어. 이 순간을 무너뜨리고 싶지 않아."
"으응. 나도…"
"너도 알고 있지? 이 중에서 너의 능력을 이상하게 보고 그 능력을 비난하는 사람이 없다는 거."
"응, 알아. 그래서 고마워."
"그렇다면… 더 이상 채민이를 괴롭히지 마."
"…내, 내가… 뭘?"
"우준이는 우리의 정신적인 지주야. 우준이가 없으면 우리는 갈피를 잡지 못하게 될 거야.
그리고 너도 눈치챘겠지만, 지금 우준이에게 정신적인 지주는 채민이야.
채민이가 사라지면 우준이는 괴로움으로 인해 자신을 잃게 될 거야."
차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난 그런 일이 생기기를 바라지 않아. 절대로 이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아."
"……"
"만약 네가 내 안락함과 평화를 방해하려고 한다면, 그 때는 나도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해서
내가 누리고 싶었던 것들을 지킬 거야."
"왜… 니들은 나만 미워하는 거야? 니들은 처음부터 만나서 친하잖아. 하지만 난 늦게 만났어.
그래서 얼마나 소외감 느껴지고 외로운 줄 알아?"
"우리가 널 미워하는 이유는, 네가 우리를 미워하기 때문이야. 네가 소외감을 느끼는 이유는
네가 다른 사람을 소외시키려고 하기 때문이야. 그 마음을 버려.
그러면 너도 우리들을 받아들이게 될 테니까."
우준은 채민은 업은 채로 조금 빠르게 걸었다.
얼른 채민을 의사에게 보여야만 했다.
업혀 있는 채민이 자신을 의식해서 고통을 감추려고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고통으로 인해 온몸의 근육이 바짝 긴장이 되었으면서도 신음을 흘리지 않으려고 이를 악다문
채민이 느껴져서 가슴이 아팠다.
"채민아."
"응?"
"많이 아프지?"
"아니, 아프긴… 넌 나보다 더 심하게 다쳤을 때도 있었잖아. 그거에 비하면…"
"하지만 난 이제 아프지 않아. 네가 아프니까… 기분이 안 좋다."
"……"
"네가 이렇게나 다쳤는데도 아무 것도 해줄 수가 없어서 화가 나."
"우준아…"
"어떻게 해서라도… 네가 느끼는 아픔을 내가 대신 느끼고 싶은데… 왜 난 그럴 수 없는 거지?
그게 화가 나서 미쳐버릴 것만 같아."
우준의 따뜻한 목소리가 채민의 가슴을 따뜻하게 해주었다.
우준이 온몸에 느껴져서 손가락 끝 부분부터 서서히 우준에게로 녹아드는 것만 같았다.
몸은 고통스럽지만 마음만큼은 편안해서 우준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고 눈을 감았다.
"좀 더 강해지고 싶다. 더 강해져서 누군가가 다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위험 속에서 너를 쉽게 구해낼 수 있도록, 강해지고 싶어."
"……"
"한 번도 이렇게 강하게 무언가를 원한 적이 없어. 소꿉친구였던 비를 원했던 것보다
널 무사히 지켜내기를 더 원해. 무서울 정도로 원하게 돼서, 이게 내가 맞긴 한가 두려울 정도야."
우준의 목에 두른 팔에 살짝 힘을 줬다.
"난……"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어. 정말 행복해.'
뒷말은 하지 않았다. 우준 역시 무슨 말을 하려고 한 거냐고 묻지 않았다.
둘은 그저 서로를 업고, 업힌 채 묵묵히 걸어갈 뿐이었다.
서서히 지는 태양이 숲을 붉게 물들여 갈 때쯤, 그들은 마을을 발견했다.
숲을 통해서 외부인이 들어온 것은 실로 오랜만에 있는 일이었기 때문에,
우준들이 도착하자 마을 사람들은 놀라움과 의심이 담긴 경계의 눈으로 그들을 쳐다봤다.
하지만 본성이 착한지라 대놓고 우준들에게 막말을 퍼붓는 사람은 없었다.
단지 그들을 슬금슬금 피하며 대화를 하지 않으려고 몸을 움츠렸을 뿐이다.
그토록 슬픈 일이 연속되어 일어났음에도, 마을의 외관은 평화로웠다.
우준 일행이 들어온, 숲으로 된 곳만 빼면 다른 곳은 나지막한 산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둘러싸고 있는 산만큼이나 나지막하고 깨끗한 외관의 집들이 마을 안에 자리잡고 있었다.
특이하게도 집 앞에 있는 울타리에는 검은 손수건이 하나씩 묶여 있었는데,
묶어놓지 않은 집들도 한 두 개씩 보이기는 했다.
우준들은 잠시 길가에 서서 마을을 쭉 둘러봤다.
마을에는 전기가 통하지 않는 듯, 높은 곳에 걸린 흔들리는 등불이 마을 안을 밝혀주고 있었다.
가운데로 크게 뚫린 길의 가장자리에 자리잡은 낮은 건물은 분명 상점일 것이다.
그리고 그 뒤쪽에 세워져 있는 것들이 사람이 사는 집으로 보였다.
큰길은 상당히 고르게 닦여 있는 편이었지만 그 양쪽으로는 전혀 닦이지 않은 흙으로 되어있었다.
하지만 맨발로 걸어다니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보면 흙에 날카로운 돌이 섞여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건물의 가장자리에 촘촘하게 돋아있는 풀에는 노란색이나 빨간색의 작은 꽃이 달려 있었고,
아이들이 쉽게 올라갈 수 있을 정도로 가지를 늘어뜨린 나무도 보였다.
나무 위에는 누가 만들었는지 모를 작은 나무집이 하나 있었는데
오랫동안 그대로 방치된 듯, 사랑스러운 외관과 달리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아이들이 건강하게 놀기에 딱 좋은 마을.
마을을 꾸미고 있는 모든 것들이 아이들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우준의 등에 업힌 채로 마을을 둘러보던 채민은 가슴이 아파서 한숨을 내쉬었다.
제이닐은 이런 곳에서 자랐다.
어른들이 아이들을 몹시 아껴주고 사랑해주던, 아이들이 걸어다니는 길, 아이들이 놀만한 나무,
아이들이 볼만한 풀꽃들 하나하나에까지 세심하게 신경을 써주던,
그런 마을에서 제이닐은 행복한 나날을 보내왔던 것이다.
세상의 아픔 따위 하나도 모른 채로, 자신을 아껴주는 사람들과 행복하게 지내던 제이닐과
그녀의 친구들에게 일어난 아프고도 슬픈 사건이 이 평화로워 보이는 마을과 겹쳐져서 괴로웠다.
우준의 목에 얼굴을 파묻은 채로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참으려고 노력했지만 흐르는 눈물은 잡히지 않았다.
"괜찮아."
우준이 낮게 말했다.
"더 이상의 희생은 없을 거야."
저주에 얽매여서 자기 아들 또래의 아이들을 괴롭히며 죽여야했던 유괴범이 불쌍했고,
그런 유괴범에게 희생된 아이들이 불쌍했다.
"너무 불쌍해."
"응, 알아. 나도 그 애들이 안타까워. 이런 곳에서 행복하게 지냈을 텐데…
괴로움 따위 모르고 웃으면서 지냈을 텐데…
하지만 이미 일어난 일은 어쩔 수 없어. 앞으로가 중요해.
더 이상 괴로워할 사람이 없으니까 이제 괜찮을 거야.
이제 그 아이들도 평안을 되찾을 거야."
한 남자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위 아래로 전부 검은 옷을 입고 있어서, 마치 상을 당한 듯한 분위기였다.
게다가 그의 얼굴에도 역시 짙은 슬픔의 그림자가 뒤덮고 있어서
가까운 날에 가족 중의 한 명을 잃은 것만 같아 보였다.
우준들은 그도 아마 죽임을 당한 아이들 중의 한 명의 부모일 거라고 짐작했다.
"우리 마을에는 무슨 일이십니까?"
그가 조심스레 물어왔다.
약간의 공포와 약간의 의심, 그리고 아주 약간의 희망이 묻어있는 목소리였다.
"여행객입니다."
우준이 대답했다.
"숲을 지나서 오신 겁니까?"
"네."
"오는 길에… 아무 일도 없었습니까?"
그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어떻게 대답을 해줘야 할까.
우준은 잠시 입을 다물고 생각했다.
아마도 이 사람은 자신의 아이가 살아있을지도 모른다고 기대할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살아남은 아이들이 없다는 대답은 그에게 너무나 잔혹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될 수 있도록 그의 충격이 적은 말을 골라 하고 싶은데, 마땅히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당신의 아이는 이미 세상에 없습니다. 유괴범이 이 마을에서 잡아간 아이들을 전부 죽였지요.
그리고 그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들어갔던 젊은이들도 모두 죽였을 겁니다.
살아남은 사람은 우리가 데리고 온 두 사람뿐입니다. 이 두 사람의 상태도 상당히 위독해서
어쩌면 오늘 밤을 넘기지 못하고 죽을지도 모릅니다. 살아남는다고 하더라도 후유증이 너무 심해서
미쳐버리던가, 몸을 제대로 사용할 수 없게 될 겁니다.'
그런 절망적인 말들만 떠올라서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눈을 질끈 감았다.
'비야.'
이렇게 두꺼운 벽으로 앞이 가로막혔을 때는 어김없이 비를 의지하게 된다.
비는 옆에 없지만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위안을 얻게 된다.
'너라면… 너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대답했을까?'
일행은 모두 우준의 입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도 따로이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준이 생각하는 것과 같은 말들만 떠올라서 주먹을 꽉 쥐며 우준을 쳐다봤다.
곧 우준의 입술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안정을 되찾았다.
우준은 서서히 눈을 뜨고 앞에 서 있는 어두운 분위기의 남자를 응시했다.
그리고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유괴범은 죽었습니다."
"아…"
"이 마을에 더 이상의 위험은 없습니다. 이제 이 마을은 과거의 아픔을 딛고 일어서서
새롭게 발전할 수 있을 겁니다. 여러분이 두려워하던 숲은 다시금 아이들의 즐거운 놀이터가 될 것이고,
행인들이 편안히 들어올 수 있는 길목이 될 것입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해드리겠습니다. 지금은 부상자의 치료가 급합니다.
우리들이 데리고 온 저 두 사람, 이 마을의 사람들이 아닌가요?"
우준의 말에 남자가 서둘러 해윤과 비인에게 업힌 남자들의 얼굴을 살폈다.
우준들에게만 신경을 쓰느라 그들이 업고 있는 사람에게는 신경을 못 썼던 것이다.
반쯤 죽은 것처럼 핏기 없는 얼굴로 업혀 있는 두 사람은 분명 그가 알고 있는 청년들이었다.
얼마 전에 숲에 살고 있는 빌어먹을 살인마를 죽여버리겠다며 몇 명의 젊은이들을 이끌고
의기양양하게 숲으로 들어갔던 그 젊은이들 중의 두 명이었던 것이다.
기대하지 않겠다고 생각하면서도 기대했던 것이 사실이다.
지푸라기에라도 매달리고 싶은 심정이었기에 이 젊은이들이 정말로 숲의 빌어먹을 살인마를 없애고
아이들을 무사히 데리고 와주기를 얼마나 간절히 소망했던가.
잠을 자면서 몇 번씩 아이들이 돌아오는 행복한 꿈과 아이들이 죽임을 당하는 괴로운 꿈을 반복해서 꿔왔다.
며칠이 지나도 젊은이들에게서는 소식이 없었다.
한 줄기의 신음소리도, 목소리도 들려오지 않는 숲의 입구에 몇 시간이고 서서
그들이 살아있다는 증거가 보이기를 바랐다.
하지만 보고 싶은 것을 볼 수 없었고 듣고 싶은 것을 들을 수 없었다.
인적 없는 숲을 응시하며 절망의 눈물을 흘리고 또 다른 죄 없는 젊은 청년들이 죽어간 것을 애도했다.
그런데 그 젊은이들 중의 두 명이나 살아서 돌아왔다.
곧 죽을지도 모를 상태이기는 하지만 분명히 살아서 돌아왔다.
지금껏 숲에 들어갔다가 살아서 돌아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유해는 물론이거니와 남기고 간 흔적조차 그들은 손에 넣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마을로 찾아온 이상한 느낌의 소년소녀들은 두 명이나 데리고 돌아왔고,
가장 앞에 서 있던 믿음직스러워 보이는 소년은 말했다.
마을을 다시 발전시킬 때라고…
그 말의 의미는 알고 있다.
아마도 아이들은 전부 숲에 먹혀버렸을 것이다.
그토록 기다리고 기다리던 아이들은 다시는 그들의 품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소년은 괴로움과 절망이 아닌 희망의 소식을 전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겁니다…
그 단호하고 굳센 말이 그의 마음에 평안을 가져다주었다.
아이의 죽음은 잠시 미뤄두고 해야할 일이 생겼다.
"병원은 세 번째 건물입니다. 얼른 갑시다. 당신 등에 업힌 소녀도 상당히 위험해 보이는군요."
남자는 먼저 걸음을 옮겼고 우준들은 서둘러 그의 뒤를 따랐다.
마을 사람들은 여전히 그들을 향해 의심의 눈빛을 보내고 있었지만
지금 우준들에게는 남들의 시선을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채민이 많이 다쳤고 그들은 많이 지쳐 있었다.
병원은 하얀색 건물이었는데 다른 건물과는 달리 2층으로 지어져 있었다.
마을에 단 하나뿐인 병원이지만 마을 사람들도 적은 데다가 위험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 곳이기 때문에
병원을 찾는 사람은 아주 드물었다.
병원으로 들어가자 약초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들이 살던 세계에서 맡던 화학 약품의 냄새보다는 훨씬 나은 냄새라고 생각하며 접수처를 찾았지만
그런 것은 전혀 보이지 않았고, 가정집의 내부처럼 만들어놓은 인테리어만 보일 뿐이었다.
한쪽에는 부엌, 한쪽에는 깨끗한 천으로 덮인 몇 개의 침대, 그리고 편해 보이는 소파.
그 소파에서 한 남자가 길게 누워 자고 있었다.
헝클어진 짙은 갈색 고수머리가 씻지 않은 듯한 남자의 얼굴에 늘어 붙어 있었고,
한 팔은 소파 옆으로 늘어뜨리고 있었는데 손가락에는 다 타버린 담배가 위태롭게 걸려 있었다.
신발은 소파 아래에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고 소파 주위에는 남자가 마신 것으로 보이는
갈색의 술병 몇 개가 굴러다녔다.
남자가 입은 구깃구깃한 가운이 아니었더라면 그가 의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준들은 그에 대한 불신감이 대번에 피어올랐다.
'저 남자에게 맡겼다가는 채민이가 죽을지도 몰라!'
그래서 우준은 망설임없이 돌아섰다.
"잊고 있었는데… 여관방을 구하는 게 우선인 것 같습니다. 잠을 좀 자야할 것 같아서요."
"네, 네. 맞아요."
가인이 생글생글 웃으며 끼어 들었다.
'저런 의사에게 채민이를 맡길 바에야 내가 치료하는 게 낫지.'
술에 취해 소파에 너부러져 있는 남자에 대한 가인의 신용도는 0%를 지나 마이너스에 치닫고 있었다.
그들의 마음을 알아챈 남자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이런… 저 친구의 겉모습을 보고 그러는가 보군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난 저 친구가 이 세계에서 제일로 칠 수 있는 의사라고 자부합니다.
알콜중독자라서 수시로 술을 마시지 않으면 손이 많이 떨리기는 하지만…"
"그, 그게 뭐예요!"
"믿을 만한 친구입니다. 지금 당신들 일행의 상태가 많이 안 좋아 보이는데…
다른 곳으로 데리고 가봤자 조금도 나아지지 않을 겁니다.
우리 마을이 비록 수많은 피해를 입기는 했지만 의사마저도 실력이 검증 안 된 어중이떠중이를
데려다놓지는 않습니다. 한 번 믿어보십시오. 내가 당신들을 믿은 것처럼…"
남자의 눈동자가 흔들리지 않고 우준을 응시했다.
우준은 그의 눈동자에 담겨 있는 걱정을 읽었다.
그는 자신의 마을 젊은이 두 명뿐만이 아니라 채민의 상태 또한 무척 염려하고 있었다.
"우준아… 설마… 저 술주정뱅이에게 맡길 생각은 아니겠지?"
가인이 조심스레 물었다.
"하지만 맡기는 수밖에 없잖아."
해윤이 끼어 들었다.
"술주정뱅이던 아니던 어쨌든 의사야.
우리가 채민이를 고쳐줄 수 있는 게 아니라면 저 사람을 믿어보는 수밖에 없어."
"하지만…"
가인은 못내 못 미더운 표정이었다.
그건 강전도 마찬가지인지 인상을 팍 찌푸린 채로 의사라는 남자를 쏘아보고 있었다.
"여보게!"
우준 일행의 말을 무시하고 남자가 목소리를 높여 의사를 불렀다.
"여보게, 죠니! 언제까지 그렇게 퍼질러져 잠만 잘 생각인가? 환자가 있네!"
죠니라고 불린 의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 목소리는…"
자다 일어나서 잔뜩 잠겨 걸걸한 목소리가 수염이 더부룩한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로민 아닌가. 만날 죽은 사람 같은 목소리를 들려줘서 사람 술 맛 떨어지게 만들더니,
오늘은 목소리에 생기가 있군. 드디어 살아난 건가?"
"내가 언제 죽기나 했던가! 어서 일어나게! 위독한 환자가 있어!"
"그래, 환자가 있다는데… 내가 이렇게 누워있을 수만은 없지."
그래도 의사라는 직업 정신은 남아있었는지, 천천히 소파에서 내려왔다.
"읏챠! 환자가 찾아오다니… 정말 오랜만이군."
기지개를 켜는 그는 누워있을 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건장한 체구였다.
운동에 힘을 쓰는 것처럼 떡 벌어진 어깨와 2m는 족히 됨직한 큰 키를 가지고 있었다.
의사라기보다는 운동선수에 가까운 그의 모습을 보며 일행은 생각했다.
'진짜, 채민이 죽는 거 아냐?'
"믿을 만한 사람이야, 오빠."
제이닐의 목소리에 넋을 잃고 죠니를 쳐다보던 가인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저 선생님, 정말 대단해. 내가 예전에 너무 아파서 갔을 때도 한 번에 낫게 해줬어.
술을 많이 마시기는 하지만 정말 좋은 사람이야."
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래.'
"믿어 봐. 분명히 저 언니랑 오빠들을 살려줄 거야.'
'응.'
가인이 말했다.
"우리 일행이 많이 다쳤어요. 그리고 우리가 데리고 온 사람들도… 얼른 고쳐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지금껏 반대하던 가인이 먼저 나서서 부탁하자 일행은 이상한 듯 가인을 쳐다봤지만,
가인은 똑바로 죠니를 응시하고 있었다.
기지개 켜던 몸을 바로 한 죠니가 씩 웃으며 말했다.
"좋아. 자, 자. 어서 침대에 환자들을 눕혀. 모두 낫게 해줄 테니까."
하나님을 빽으로 세상과 맞짱 뜬다...by백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