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햇빛 한 바구니, 고양이 두 스푼-42화 (42/91)

-42-

숲에 들어간 청년 중의 두 명을 구한 소년, 소녀들이 왔다는 말을 들은 첸은

제대로 옷을 갖춰 입지도 못하고 죠니의 병원으로 한걸음에 달려갔다.

이미 병원 밖에는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소년, 소녀들을 만나고 싶어했지만 로민이 병원 문을 지키고 서서 그들을 들여보내주지 않았다.

마음이 조급한 중에도 로민의 표정이 굉장히 밝아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슬픔을 극복해냈군. 아이들이 무사한 건가?'

첸의 가슴에 희망의 불꽃이 화르륵 타오르기 시작했다.

한 번 타오르기 시작한 희망은 점점 거대해져서 수많은 행복한 상상들로 첸의 머리를 맑게 해주었다.

첸은 사람들을 비집고 앞으로 나아가 로민과 마주 섰다.

로민이 미소를 지었다.

"첸, 왔는가."

"아이들은?"

"지금 치료를 받고 있네."

"제이닐은?"

일순간 로민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것은 아주 찰나의 변화였지만 남의 표정을 읽는 재주가 뛰어난 첸은 단번에 그 표정의 의미를 읽어낼 수 있었다.

가슴속에서 타오르던 희망이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불길을 접었다.

희망은 새까만 재만 남기고 사라졌다.

첸은 후들거리는 다리로 간신히 버티고 서서 로민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그 눈동자에서 진실을 읽어내려 애썼다.

여전히 담겨 있는 슬픔은 로민의 아들 역시 살아있지 않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하지만 로민의 얼굴에 떠오른 이 평화는 무엇인가.

첸은 그것을 알고 싶었기 때문에 타는 듯한 가슴에 느껴지는 고통을 억누르며 물었다.

"안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보고 싶네."

로민이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안 돼. 크게 다친 아이가 하나 있네. 다른 아이들은 그 아이가 무사한 것을 확인한 후에

나오겠다고 버티고 있어."

"아이…들인가?"

"그래. 고작해야 열 일곱, 여덟 정도로 보이는 아이들이더군."

"내가 들은 대로라면… 여자도 있다고 하던데…"

"그래. 여자아이도 있더군. 세 명이 있었는데, 그 중에 한 명이 가장 많이 다쳤어.

대단한 게 뭔지 아나? 그렇게 다쳤는데도 그 아이는 우는 소리 한 번 안 하더군. 정말… 대단한 아이야."

"아무 것도 들은 것이 없나?"

"그 아이들이 그러더군."

로민은 잠시 눈을 감았다.

첸은 물론, 마을 사람들까지도 전부 긴장해서 로민의 입술이 벌어지기만을 기다렸다.

마을 사람들 역시, 자기의 아이들이 살아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기 때문이다.

로민의 입술이 서서히 벌어지기 시작했다.

"이 마을에 더 이상의 위험은 없습니다. 이제 이 마을은 과거의 아픔을 딛고 일어서서

새롭게 발전할 수 있을 겁니다. 여러분이 두려워하던 숲은 다시금 아이들의 즐거운 놀이터가 될 것이고,

행인들이 편안히 들어올 수 있는 길목이 될 것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많이 배우지는 못했지만 아주 바보들은 아니었기에,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있었다.

"과거의 아픔을 딛고 일어서야 한다"는 말은 아마도 그들의 자녀들이 모두 죽었으니

그 아픔을 견뎌내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그들 역시 첸과 마찬가지로 가슴에 희망의 불을 품고 있었기에 새까맣게 타는 기분을 느끼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지만, 몇몇은 뒤에 이어지는 희망적인 말에 약간이나마 기운을 차릴 수 있었다.

"그 아이들은…"

첸이 쓴웃음을 지으며 가까스로 말했다.

"아이들임에도 불구하고… 지혜롭군."

"그래."

로민이 미소를 지었다.

"그 아이들이었다면 사태를 이 정도로까지 몰고가지 않았겠지?"

"그건 모를 일이지요."

낯선 목소리가 끼어 들었다.

해윤이었다.

죠니는 기대 이상으로(기대도 안 했지만) 능력이 뛰어난 의사였기 때문에

치료가 끝나자 채민의 상태는 한결 좋아졌다.

하지만 아직 여기저기 움직일 만큼 기운을 차린 상태가 아니었다.

적어도 채민이 깨어나서 미소를 보여줄 때까지는 옆에 있고 싶었던 우준은 동료들에게 말했다.

"마을 사람들이 많이 궁금해하고 있을 거야. 나가 봐."

"네가 없으면… 우리들이 제대로 말하지 못할 지도 몰라."

가인이 조심스레 말하자 우준이 피식 웃었다.

"난 니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강하지도, 지혜롭지도 못해. 그래야만 하는 상황이기에 그렇게 행동했을 뿐이야.

내가 한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너희들도 할 수 있어. 걱정하지 말고 나가서 이야기해 줘.

숲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서… 아마 그들은 이제 받아들일 수 있을 거야. 아마도…"

그래서 가장 먼저 벌떡 일어나 나온 것이 해윤이었다.

거침없이 쾌활한 성격은 해윤은 번쩍번쩍 빛나 보일 정도로 밝은 표정으로 로민의 옆에 와서 섰다.

그리고 그 옆에 가인이 다가와서 섰고, 강전과 리현, 비인, 차희는 그 뒤에 섰다.

해윤이 씩 웃었다.

"우리가 이 마을에 사는 사람이었다면 우리들도 역시 속수무책으로 당했을지도 몰라요.

우리는 그저 숲을 지나야만 하는 상황에 놓여서 어쩔 수 없이 숲을 지나오다가,

얼떨결에 위험한 상황에 처했고, 내 목숨 하나 구하기 위해서 싸웠던 거예요.

결국 싸우는 건 내가 아닌, 저 안에 치료받고 있는 채민이라는 애가 다 했지만…"

"채민이라는 애가… 많이 다쳤다는 그 아이?"

첸의 질문에 해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걔, 정말 많이 다쳤어요."

"여자라고 들었는데… 강한 거냐?"

해윤이 웃었다.

"강하다라… 장난 없어요. 정말 무시무시할 정도로 강해요. 굉장히 강한 녀석이기 때문에…

힘도 약하고 싸움도 못하는 주제에 우리들과 이름도 모를 아이들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치려고 했어요. 진짜 무서울 정도로 강한 녀석이라서요."

해윤의 말에 첸은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 들었다.

힘도 약하고 싸움도 못하는데 강하다. 무시무시할 정도로 강하다.

그런 말은 모순이었지만 해윤이 그를 조롱하는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해윤은 진심으로 채민을 "강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를 가장 강하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숲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더 자세히 듣고 싶어했다.

그들은 일행을 음식점으로 안내했고, 음식점은 오랜만에 찾아온 손님을 대접하기 위한 음식 냄새로 가득했다.

음식점 주인 역시 숲의 일을 듣고 싶어하는 것은 마찬가지였기에 요리가 다 될 때까지는

아무도 묻지 않았고 일행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앉아있었다.

그동안 서로를 살피면서 그들은 서로가 신뢰할만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해윤들의 눈빛은 정직했고 꾸밈이 없었으며 마을 사람들은 순수한 눈빛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에게 악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듯 했다.

이윽고 식탁 위에 요리가 차려지자 해윤은 음식을 먹으며 숲에서의 일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자신들이 여행을 하는 목적이나 지나온 길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그것은 너무나 긴 이야기였고, 그 긴 이야기를 듣기에는 마을 사람들에게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유괴범의 이야기를 들으며 어떤 사람들은 자식이 느꼈을 고통에 대한 괴로운 눈물을 흘렸고

어떤 사람들은 분노해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해윤의 입술만 응시하고 있는 사람은 로민과 첸, 두 사람밖에 없었다.

하지만 제이닐의 오르골을 발견하고 제이닐의 유령이 쓰인 이야기에 이르자 첸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마을 사람들과 일행이 첸을 쳐다보자 첸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난 상관하지 말고 계속 이야기하게."

해윤은 이야기를 이어가기 시작했지만 가인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첸을 쳐다봤다.

척 보기에도 강해 보이는 그 남자가 아마도 제이닐이 말하던 아버지임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제이닐의 마음이 절실하게 느껴져서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오르골은 병원에 두고 왔기 때문에 제이닐의 영혼은 이곳에 없지만

잠시나마 제이닐의 영혼이 몸안에 들어온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 감정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가인의 눈에서도 눈물이 떨어졌다.

눈물을 흘리며 첸과 가인은 서로와 눈이 마주쳤고 첸은 괴로운 한숨을 내쉬며 한 손으로 눈을 가렸다.

건장한 강한 어깨가 견디지 못하고 떨리는 모습은 가녀린 여성이 서럽게 우는 모습보다 더 안타까웠다.

한참에 걸려 해윤의 이야기가 끝나자 정적이 찾아왔다.

다들 숨을 죽이고 앉아서 자신의 아이들이, 자신이 알던 아이들이 겪었을 고통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되새기고 있었다.

그것은 마냥 조용히 앉아서 되새길 아름다운 추억이 아니었기에,

정적은 한숨으로 변하고, 곧 통곡이 되었다.

자식을 잃은 부모의 마음을 어떤 말로 달랠 수 있을까?

없었다.

때문에 일행은 묵묵히 앉아 그들의 통곡이 잦아들기만을 기다렸다.

가장 먼저 울음을 그치고 입을 연 것은 로민이었다.

"오늘 하루는 실컷 슬퍼합시다. 그리고 내일은 다같이 아이들의 유품이라도 찾으러 숲에 들어갑시다.

그리고 내일 하루도 슬퍼합시다. 하지만 이 슬픔을 평생토록 이어가지는 맙시다.

우리가 아이들의 눈물을 원치 않는 것처럼, 아이들 역시 우리들이 마냥 슬퍼하는 것을 원하지 않을 겁니다.

우리는 다시 일어날 수 있고 다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 오늘 하루 실컷 슬퍼합시다."

로민이 말하는 동안, 가인은 슬그머니 일어나서 첸에게 다가갔다.

첸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지 않았지만 그가 온몸으로 슬픔의 눈물을 흘린다는 것을 가인은 알고 있었다.

조심스레 첸의 어깨에 손을 얹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제이닐의 아버지시죠?"

첸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이닐은… 아버지를 참 좋아했어요."

축 늘어진 첸의 어깨가 움찔했다.

"자랑을 많이 했어요. 굉장히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다고… 아주 강하다고…"

"난… 가족을 버렸어. 내 힘을 키우기 위해서…"

가인이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쓸쓸한 미소였다.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르지요. 아마 나도 제이닐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생각했을 거구요.

하지만 난 제이닐을 만났고, 제이닐이 아저씨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아저씨를 아버지로 둔 것을 얼마나 자랑스럽게

여겼는지 알고 있어요. 그렇다는 건, 아저씨가 좋은 아버지였다는 거예요."

첸은 미소를 지으려고 했지만 굳어버린 근육이 움직이질 않았다.

이내 포기하고 다시 괴롭게 일그러진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제이닐을 만나게 해드릴 수 있어요."

그 말에 첸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첸의 눈동자가 희망으로 빛나는 것을 본 가인이 서글픈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주 잠깐뿐이지만… 영혼이 지상에 너무 오래 머물러 있으면 악령이 되어버려요.

아무리 고운 마음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도 영혼인 채로 너무 오래 지상에 있으면 변해버리죠.

마음을 잃게 돼요. 그러니까… 절대로 오래 붙잡아 두시면 안 돼요. 그 애가 편안히 안식을 취할 수 있도록,

미련 없이 그 애를 보내주셔야 해요. 그럴 자신이 있으시다면, 제이닐을 만나게 해드릴게요."

"잠시…뿐이라고?"

"네. 길어봐야 며칠… 아마 그 이상 있으면 그 애도 이곳에 집착이 생겨서 자기 의지로는

떠나려고 하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까…"

가인은 차마 말을 잊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사랑하는 가족을 두고 떠나라는 것은 너무나 가혹한 말이었다.

사랑하는 딸을 며칠만 보고 미련 없이 보내야 한다는 것은 잔인한 현실이었다.

첸은 눈을 감고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아내에게 이야기할게. 그래야만 한다고… 단 며칠이라도 그 애를 볼 수 있으면 그걸로 된 거겠지.

전혀 보지 못하고 떠나보내는 것보다 낫겠지."

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같이 나가요. 나도 잠깐 병원에 들려서 가지고 나올 것이 있거든요."

우준은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고 침대 옆에 앉아 있었다.

죠니가 보기에는 우준 역시 곳곳에 크고 작은 상처가 있고 심하게 지쳐 있는 것이 분명한데도

우준은 처음의 자세에서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놀라운 정신력이라고 생각하며 침대에 누워있는 채민을 쳐다봤다.

자칫 잘못하면 채민은 한 쪽 다리를 잃을 뻔했다.

날카로운 덫에 걸렸던 가느다란 발목은 평범한 의사에게 보였더라면 복구하기 힘들다고 했을 만큼

심각하게 손상되어 있었고, 이미 감염도 진행되고 있었다.

하지만 죠니는 평범한 의사 이상의 실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고치는 것이 불가능해 보이는 그녀의 다리를 고칠 수 있었다.

끊어진 신경과 인대를 이을 때는 땀이 뚝뚝 떨어질 정도로 신경을 곤두세웠다.

오랜만의 수술이라서 손가락이 잘 움직일지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다행히 손은 생각대로 움직여주었다.

죠니는 천재적인 의사였다.

과거의 그 사건이 있기 전까지는 더욱 그랬다.

커다란 나라의 의사들도 조언을 구하기 위해 죠니를 찾아올 정도였다.

그 사건 이후에는 모든 것이 형편없을 정도로 무너져 버렸지만…

평온한 표정으로 잠들어 있는 채민의 얼굴을 보며 죠니는 미소를 지었다.

실로 간만에 짓는 미소였다.

그는 호쾌한 성격이었지만 과거의 사건은 지우지 못할 상처를 남기고 그에게서 웃음을 앗아갔다.

그 일 이후로 그는 진심으로 웃어본 적이 없었다.

"너도 쉬지 않으면 곧 쓰러질 거야. 네 몸이 버티고 있는 게 신기할 정도다. 어서 누워서 잠 좀 자!"

죠니가 강경한 어조로 말해보았지만 우준은 시선도 돌리지 않고 그대로 앉아 있었다.

앉은 채로 잠이 들어버린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당장 누워서 쉬지 않으면 억지로라도 눕힐 테다."

죠니가 반쯤 장난이 섞인 말투로 말하자 우준이 입을 열었다.

"채민이가 눈을 뜰 때까지만 앉아 있겠습니다. 그 전에는 누워도 쉬지 못할 겁니다."

우준의 말에서 채민을 향한 깊은 애정이 느껴졌다.

아마도 그저 "동료"로 묶인 것만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준의 모습을 보자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강하고 정직한 눈빛을 가졌던, 그가 몹시도 사랑했던 한 친구.

그가 떠오르자 가슴이 아파져서 죠니는 인상을 찌푸렸다.

술을 마시고 싶었다.

병원 구석에 저장해놓은 독한 술 중에 하나를 꺼내들었다.

챙-

병끼리 부딪혀서 맑은 소리를 냈다.

그 소리만으로도 죠니는 충분한 위안을 얻었다.

독한 술이 진한 알코올 향을 풍기며 타는 듯한 고통을 식도에 남긴 채 위로 들어가면

위는 움직여 알코올을 흡수하고 흡수된 알코올은 혈액을 타고 온몸으로 퍼질 것이다.

알코올이 뇌에 이르러 뇌의 감각을 무디게 만들면 아직도 가슴을 두드리는 듯한 아픈 고통은 잊혀질 것이다.

하지만…

"후우…"

술을 마셔서 잊은 적이 있었던가?

죠니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술병의 마개를 땄다.

독한 알코올 냄새가 코를 확 찔렀다.

"술을 아무리 마셔도 잊혀지지 않을 겁니다."

우준의 목소리에 죠니는 술병을 향하고 있던 눈을 우준에게로 돌렸다.

우준은 여전히 채민을 향한 채, 죠니에게서는 등을 돌리고 있었다.

오랫동안 운동을 해온, 탄탄한 우준의 어깨와 등이 보였다.

"술은 결국 아무 것도 잊게 해주지 않아요."

죠니가 피식 웃었다.

이제는 저런 어린 녀석에게도 충고를 들을 정도가 된 건가?

"어린 녀석이 뭘 안다고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우준에 대한 악의는 없었지만 한참 어린 녀석에게 충고를 듣는 것은 좋은 기분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간혹…"

죠니의 비난 섞인 말에도 우준의 목소리는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술을 마시면 그 순간만이라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아저씨처럼 독한 술을 많이 마시면

어느 순간 의식을 잃게 되죠. 다음 날 일어나면 의식을 잃었을 때의 일이 생각나지 않으니까

술을 마시는 동안만큼은 괴로움을 잊을 수 있는 거라고 생각들 하게 되는 거죠.

그런데, 아저씨는 본 적이 있나요? 괴로움을 잊으려고 술을 마시는 사람의 얼굴을?"

"……"

채민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던 우준이 서서히 고개를 돌렸다.

나이 어린 소년답지 않은 깊고 신중한 눈동자가 죠니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금방이라도 죽을 것만 같아서 보는 사람마저도 괴로움이 전염되어 가슴이 찢어지는…

세상의 모든 괴로움에 짓이겨져 다시는 그 괴로움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것 같은…

그런 표정이에요. 괴로움을 잊기 위해 술을 마시는 사람의 얼굴은…"

"……"

"다음 날 깨어나면 그 때의 괴로움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뇌의 깊은 곳에서는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어요.

자신이 자각하지 못하는 고통이 깊은 곳에 쌓이고 쌓여서 결국은 자살에 이르게 되는 거죠."

"어린놈이…"

"나이가 많은 사람이라고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은 아니듯이, 때로는 어린놈도 아는 게 있는 법입니다."

우준이 다시 채민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이미 겪은 슬픔에서 도망치려고 발버둥치는 건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그물에 걸렸을 때 빠져나가려고 몸을 움직이면 빠져나올 수 없을 정도로 얽혀버리는 것처럼,

도망치려고 발버둥을 치면 더욱 더 그 슬픔에 발이 묶이게 되어있어요.

계속 술 마시고 피하려고 해도 결국은 그것으로부터 완전히 도망칠 수 없다는 거,

아저씨도 잘 알고 계실 텐 데요."

우준의 말은 시시콜콜 옳은 말이었기에 죠니는 아무런 변명도 할 수 없었다.

어린놈이, 어쩌고 하는 말은 비겁한 방어수단일 뿐이다.

겉모습으로만 봤을 때는 우준이 한참 어리지만 눈빛만큼은 그 나이 또래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깊었고, 강했고, 흔들림이 없었다.

죠니가 인상을 찡그리고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채민이 가위에 눌린 듯 괴로운 신음을 내기 시작했다.

"으으… 으으윽…"

"채민아…"

우준이 낮게 채민의 이름을 부르며 채민의 손을 잡았다.

"채민아, 괜찮아. 괜찮아."

나직한 음성은 채민에게뿐만 아니라 죠니에게도 위로가 되었다.

찡그리고 있던 채민도, 죠니도 얼굴에 드리워져 있던 어둠을 걷어내기 시작했다.

채민은 다시 안정적인 표정이 되었고 죠니는 긴장을 풀고 지저분한 소파에 털썩 앉았다.

항상 술을 마시던 소파였기 때문에 술냄새가 풀풀 올라왔지만 술이 마시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 때, 똑똑- 노크소리와 함께 가인이 들어왔다.

"채민이는 일어났어?"

"아직…"

"나, 오르골을 가지러 왔어."

채민의 손을 잡은 채로, 우준은 가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하려고?'

우준은 입 밖으로 소리를 내지는 않았지만 눈으로 묻고 있었다.

가인이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괜찮아."

마을에 도착할 때까지 해윤이 들고 온 가방을 뒤적여 오르골을 찾으며 가인이 말했다.

"정말 괜찮아. 며칠 간은 괜찮을 거야. 그동안 내 마음 깊은 곳에 들어가서 조용히 생각할 시간을

가지면 되니까, 나는 괜찮아. 위험도 없을 거야."

"보고 싶을 거야."

들려오는 채민의 목소리에 다들 화들짝 놀랐다.

잠들어 있는 줄만 알았던 채민이 눈을 가늘게 뜨고 가인을 쳐다보고 있었다.

"채민아. 일어났구나? 괜찮아? 몸은 좀 어때?"

채민이 힘없이 웃었다.

"아주 좋아. 잘 잤더니 개운해. 아픈 것도 사라졌고…"

"아, 다행이다. 그래도 더 누워있는 게 좋을 것 같아."

"가인아."

"응?"

"보고 싶을 거야."

가인이 웃었다.

"난 너희들이 너무 좋으니까… 절대로 내 몸을 다른 사람에게 내어주거나 하는 일은 없어.

꼭 다시 돌아와서 너희들이랑 함께 여행할 거야. 난 지금 굉장히 행복하거든."

"응."

채민은 힘이 드는지 다시 눈을 감았지만 입가에 머무른 미소는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정말 꼭 그랬으면 좋겠어. 나도 네가 참 좋으니까."

가인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오르골을 한 손에 들고 활짝 웃으며 병원에서 나왔지만,

병원 문이 닫히자마자 가인의 얼굴에는 짙은 걱정이 서렸다.

제이닐은 착한 아이였지만 결국은 "아이"였다.

"아이"는 남을 배려하기보다는 자기를 우선 생각하는 법이다.

제이닐이 살아서 하고 싶었던 것들을 한 번 더 경험하게 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제이닐에게 육체를 내어주고 가족들과 즐거운 한 때를 보내게 해주려는 게 가인의 계획이었다.

하지만 행복에 젖은 제이닐이 육체를 차지하려고 들면 그 때는 가인도 어쩔 수 없었다.

무언가를 독점하려는 어린 아이의 소유욕처럼 무서운 것은 없다.

'아마도 그렇게 되면 결국 난 사라지게 되는 거겠지…'

서글프게 미소를 짓는 가인을 누군가 뒤에서 끌어안았다.

따뜻하고 단단한 느낌이 낯설지 않아서 가만히 있었다.

"걱정하지 마."

들려오는 목소리는 해윤의 것이었다.

가인이 첸과 단둘이서 이야기를 하다가 몰래 빠져나가는 것을 본 해윤이 뒤따라 온 것이었다.

"난 반드시 너와 함께 여행할 거니까."

"……"

"넌 내가 지켜. 그러니까 걱정할 거 없어."

가인은 진심으로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해윤에게 몸을 기댔다.

"응, 걱정 안 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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