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햇빛 한 바구니, 고양이 두 스푼-43화 (43/91)

-43-

제이닐은 가인의 육체를 차지했다.

모습은 가인이었지만 영혼은 제이닐이었다.

처음에 제이닐의 부모는 그 사실을 믿지 못했다.

자신들을 불쌍히 여긴 가인이 자기들을 위한 연극을 펼치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밤새도록 제이닐과 이야기를 하는 동안, 제이닐이 아니면 모를 가족사라던가,

제이닐만의 버릇을 보면서 가인의 몸에 제이닐이 들어가 있다는 것을 믿게 되었다.

비록 모습은 가인이었지만 제이닐과 함께 있는 그들은 행복했고

제이닐이 그토록 원했던 즐거운 시간들을 갖게 되었다.

채민이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기운을 차린 것은 사흘이 지난 후였다.

뛸 수 있을 정도로 회복이 된 것은 아니었지만 다리의 상처도 많이 나아서

죠니가 겉보기와는 달리 실력 있는 의사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을 수 있었다.

채민이 누워있는 사흘 간, 채민의 곁에 껌딱지마냥 붙어있는 우준을 제외하고는 다들 나름대로 바빴다.

해윤은 인기척을 숨기고 가인을 따라다니느라고 힘을 뺐고,

다른 일행들은 마을 사람들과 함께 숲에 들어가 시체들을 찾고 유품들을 가지고 오느라고 바빴다.

눈코 뜰 새 없이 분주한 마을에는 비록 슬픔이 남아있기는 했지만 어둠이 많이 걷혔다.

아이나 연인을 잃은 사람들은 삶의 의지를 잃은 듯이 절규했지만

옆에서 격려해주는 사람이 있었기에 슬픔을 견뎌낼 수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슬픔 가운데서도 서로를 격려하고 위해주는 모습은 참으로 보기 좋았다.

다들 바쁜 가운데 한 사람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이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차희였다.

차희는 마을의 분위기도, 진행되어 가는 상황도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인상을 찌푸린 채로 병원 앞에 앉아 있었다.

몇 번 병원 안에 들어가려고 했지만 창문으로 보이는 우준이 걱정스레 채민을

지켜보는 모습을 보면, 가슴에서 화르륵 불이 올라 온몸이 뜨거워서

힘을 다 써버리고는 기절을 했다가 한참 후에 깨어나기 일쑤였다.

숲에서 시체들을 찾다가 채민의 상태가 궁금해져서 병원에 온 리현이

병원 앞에 기절해 있는 차희를 발견했다.

흘끗 병원 안을 쳐다본 리현은 차희가 왜 기절을 했는지 알 것 같았다.

불편한 모습으로 쓰러져 있는 차희가 불쌍하기는 했지만 리현은 인상을 찌푸리고 병원 안으로 들어갔다.

"채민아. 나 왔어."

리현은 우준을 좀 밀어내고 의자를 가져다가 옆에 앉았다.

"좀 어때?"

"좋아."

"다리는? 아프지 않고?"

"응, 이제 괜찮아. 힘도 나고… 나도 나가서 도와야 할 텐데…"

"그런 바보 같은 소리 좀 하지 마."

중얼거리며 흘끗 옆을 쳐다보니 우준은 채민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원하지 않아도 읽히는 것이 아니면 일행의 마음을 읽으려고 노력하지 않겠다 결심했기 때문에,

우준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채민을 응시하던 눈동자에는 따뜻함이 가득 담겨 있어서 리현은 미소를 지었다.

"둘만의 시간을 내가 방해한 건가?"

농담조로 말하자 채민이 얼굴을 붉혔다.

우준의 얼굴에는 변화가 없었기 때문에 조금 뻔뻔해 보이기까지 했다.

"바, 방해라니… 그런 거 아냐."

"하지만 둘만 있는 게 더 좋았던 거 아니야?"

"아냐, 아냐. 그런 거 아냐."

리현은 채민을 놀리는 게 재미있었지만 슬슬 차희가 깨어나겠다 싶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희가 두 사람의 시간을 방해하는 걸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병원 밖으로 나왔더니 강전과 비인이 있었다.

"채민이 보려고 왔는데 차희가 쓰러져 있네. 네가 죽였냐?"

"멍청이."

강전의 말에 가볍게 대꾸해주며 쓰러진 차희를 일으키려고 하자, 비인이 대신 차희를 번쩍 안았다.

"심각한 것 같은데? 많이 말랐어. 밥도 잘 못 먹나 보다."

"먹은 에너지를 쓸데없는 곳에 낭비하니까 그렇지."

리현이 냉정하다 싶을 정도로 차갑게 말했다.

"채민이는 어때?"

"우준이랑 러브러브한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까 들어가지 않는 게 좋아."

"서, 설마… 벌써… 그 단계까지?"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너처럼 불순한 관계를 갖지는 않아, 최강전."

리현이 피식 웃으며 먼저 걸음을 옮겼다.

그들은 병원 옆에 있는 여관에서 묵고 있었다.

나무로 지어진 여관은 꽤 오래되어 보이지만 깨끗하고 실용적으로 지어져 있었다.

방마다 욕실이 딸려 있었고, 밥을 먹을 수 있는 식탁이 있었으며

푹신한 침대가 두 개씩 놓여 있었다.

일단 방은 세 개를 빌렸는데 한 방에서는 차희와 리현이 묶었고 나머지 방에서

남자들이 대충 자리를 잡고 잤다.

아침 식사는 늘 방으로 배달이 되었는데, 그건 마을을 구해준 일행에 대한 여관 주인의

감사 인사 같은 것으로, 다른 때는 여관 전체의 식당에서 먹거나 자기들이 사서 들어와 먹어야 한다.

여관 주인의 배려는 식사 배달뿐이 아니었다.

깨끗하고 편한 곳에서 묶게 해주면서도 돈을 하나도 받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에게 이 마을은 여러모로 감사한 마을이었다.

여자들 방에 들어온 비인이 차희를 침대에 눕히며 말했다.

"역시 여자들 방은 깨끗하구나."

"있은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엉망이 될 이유가 있나?"

"우리 방에 와보면 내가 왜 이런 말을 했는지 알게 될 거야. 가볼래?"

"아니, 사양할게."

딱 잘라 대답한 리현이 의자에 앉으며 물었다.

"어떻게 생각해?"

"응? 뭐가?"

방을 둘러보던 강전이 리현을 쳐다보자, 리현은 눈짓으로 차희를 가리켰다.

"아아…"

둘 다 리현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 수 있었기에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난 별로야."

리현이 가차없이 말했다.

"분명 무슨 일이든 생길 거야."

"나도 그렇게 생각해."

비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비인은 일곱 명 모두 행복해졌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그건 아마 우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알잖아, 그 녀석 성격."

"응, 그렇지."

강전이 고개를 끄덕였다.

"절대로 수긍하지 않을걸. 책임감이 강한 녀석이니까…"

"채민이가 위험해진다고 말해도 그럴까?"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 하는 거잖아. 우리가 아는 걸, 그 녀석이 모르겠어?"

"하긴…"

리현은 한숨을 내쉬며 차희를 흘끗 쳐다봤다.

아직 아무 것도 먹이지 않았으니 깨어나려면 한참이 걸릴 줄 알았는데

쓰러진지 오래 되었던지 차희는 깨어나 있었다.

깨어나지 않은 듯이 보이려고 눈을 감고 있기는 했지만 숨소리가 아까와는 많이 달라졌다.

"우리 얘기 듣고 있었지?"

리현이 툭 내뱉자 차희의 어깨가 움찔했다.

"너희들은 날 이해하려고 하지 않아."

옆으로 돌아누우며 차희가 말했다.

리현이 인상을 찌푸렸다.

"이해 받고 싶으면 이해 받을 만 하게 행동을 해야하는 거 아니야?

지금 네 행동이 우리에게 이해 받을 수 있는 행동이라고 생각해?"

"너네는 정말 이상해."

차희가 벌떡 일어났다.

"정말 이상하다구!"

"뭐가 그렇게 이상한데?"

"웃기잖아. 우리 행복해지려고 여행을 떠난 거 아니야? 저주를 풀어버리려고 여행을 떠난 거 아니냐구!

힘도 별로 없는 우리가 목표를 달성하려면 우리 여행에 방해가 되는 요소가 없어야 돼.

물론 일곱 명 다같이 저주를 풀고 돌아가면 좋겠지. 하지만 채민이는… 그 애는 불행을 가지고 오잖아.

그 애 때문에 우리가 자꾸 이상한 일에 휘말리게 되고, 우준이도 많이 위험하잖아.

유괴범 사건도 그래. 채민이가 아니었으면 겪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일이야. 그 애 때문에 위험한 일들에

자꾸만 끼게 되는 걸지도 모른다구! 그 애는 우리 여행에 있어서 쓸모 없어! 오히려 우리를 위험하게

만들 뿐이야. 그 애 때문에 누군가 목숨이라도 잃어야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거야?

강전이, 너도 나랑 같은 생각 아니야? 저번에 가인이 목에 갑자기 불이 붙었을 때,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채민이를 쳐다봤잖아!"

"응? 나?"

리현이 강전을 확 쏘아보자 강전은 두 손을 살짝 위로 올리며 웃었다.

"어이어이, 그렇게 죽일 듯이 째려보지 말라구. 네 눈은 그렇게 째려보지 않아도 무시무시하니까."

"정말 그렇게 생각했어, 최강전?"

리현이 으르렁거리듯이 물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

"거짓말 마! 감추고 있는 거잖아! 사실은 채민이가 아주 번거롭고 귀찮다고 생각하는 거잖아!"

"진짜 그런 거 아니야, 이 성격 나쁜 기집애야."

강전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그 때 채민이를 쳐다본 건, 걔가 그 순간 하고 있을 게 분명한 그 생각이 마음에 안 들어서였어.

그 불이 채민이 때문에 붙은 거든, 다른 이유로 붙은 거든 간에 채민이는 생각했겠지.

불이 붙은 건 자기 때문이라고… 실제로 그 녀석, 우리랑 완전히 떨어져서 걸었잖아.

난 그게 진짜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구."

"대체 왜? 걔가 불행을 불러오는 건 사실이잖아!"

"걔는 조금 운이 없을 뿐이야. 그리고 우리는 이미 그 사실을 알고 그 애를 받아들였고…

사실 우리들 전부 저주를 받았잖아. 나는 흥분하면 전기가 흘러. 그래서 무거운 짐이 있는 상황에서도

들어주지 못하고 뒤로 빠지기만 하지. 내가 무심코 건드려서 찌릿한 통증을 겪은 녀석들도 있을 거야.

그런데 그 중에 아무도 불만을 토로하지 않아. 난 그거 진짜 미안하거든.

근데 애들은 아무 말도 안 해. 왜일까? 응?"

"……"

"우리가 일행이 된 이유는 다른 사람이 받은 저주를 이해하겠다는 마음가짐이 있었기 때문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난 채민이로 인해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상관 안 해."

"그러다 네가 죽으면!"

"여행 전부터 죽음은 각오하고 있었어."

피식 웃으며 말하는 강전의 어깨를, 리현이 툭 쳤다.

"멍청하다고 생각했는데 가끔은 옳은 말도 하는구나, 너?"

"닥쳐, 이 성격 나쁜 기집애야! 넌 인간적으로 진짜 마음에 안 들어."

"네 마음에 들 생각이 없었으니 고마워해야 할 일이네. 인간적으로 굉장히 땡큐야."

차희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그들을 노려봤다.

"미움 받지 않으려면…"

차희가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해야하는 건지 모르겠어. 난 다들 채민이를 싫어한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결국 니들이 싫어하는 건 나야."

"미움 받지 않으려면…"

비인이 차희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네가 먼저 미워하지 마."

"조금씩 산책을 하는 게 좋을 거야."

죠니의 말에 우준과 채민이 한 시간 가량 마을을 산책하고 돌아왔을 때는 죠니가 채민과 우준을 위한

식사를 준비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채민이 병원에서 머무는 동안, 우준 역시 그곳을 떠나지 않았기에 식사는 늘 3인분이 준비되었다.

죠니는 채민과 우준의 맞은편에 앉아서 그들이 식사를 하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입을 열었다.

"다른 사람들이야 숲에서의 일이 가장 걱정이 되니 자네들에 대해서 물어보지 않았겠지만…

난 굉장히 궁금하더군. 자네들은 왜 여행을 하는 거지?"

수프를 먹던 우준이 슬쩍 죠니를 올려다봤다.

"뭐, 말하기 곤란하면 이야기하지 않아도 괜찮지만… 난 호기심이 강해서 말이야.

병원비 대신으로 자네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는 게 어때?"

처음에는 어린 아이들을 대하듯이 말했던 죠니지만 우준과 술에 대한 이야기를 한 후로

그들을 향한 말투가 바뀌어 있었다.

"꼭 병원비 대신이 아니어도 말씀해 드릴 수 있습니다."

우준의 말에 죠니가 씩 웃었다.

"그거 고맙군. 하지만 처음부터 병원비를 받을 생각은 없었어."

호쾌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하는 죠니를 보며 채민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우준은 그런 채민을 한 번 쳐다보고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준의 앞에 나타난 거울의 정령과 저주를 받은 7명의 아이들, 그들의 저주를 풀기 위한 여행.

낯선 세계에서의 모험에 대해서 한참 이야기를 하는 동안,

죠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만 있었다.

이야기 중에 한 번도 끼어 들지 않는 죠니의 참을성이 대단하게 생각될 정도였다.

우준의 이야기가 끝난 후 죠니는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한동안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고,

우준은 이미 식어버린 수프를 떠서 입에 넣었다.

짭짤한 수프는 이미 식었음에도 상당히 맛있었다.

"확실히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지."

우준이 수프와 닭고기 요리, 그리고 채민이 남긴 음식까지 다 먹고 식기를 내려놓았을 때 죠니가 중얼거렸다.

"어떤 이야기요?"

채민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자 죠니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난 아가씨가 참 마음에 들어."

단박에 우준의 표정이 변했다.

"뭐… 걱정하지 말라구. 나이 어린 아가씨를 꼬실 만큼 무례한 남자는 아니니까."

우준의 표정을 본 죠니가 장난처럼 말하자 우준이 표정을 풀었다.

"소원을 들어주는 어떤 신에 대한 이야기 말이야. 오래 전에 할머니한테 들은 적이 있었던 것 같아."

"할머니…"

우준이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런 표정이야?"

"그렇군요. 아저씨에게도 할머니가 있었겠군요."

"당연하지. 이래봬도 꽤나 풋풋하고 사랑스러운 소년이었다구, 난!"

"상상이 안 돼요. 절대로 상상할 수 없어요. 상상하기 무서워요."

"자네는 상처 받을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습관이 있군."

하지만 죠니의 표정은 전혀 불쾌해 보이지 않았다.

"아무튼 할머니가 말씀하시기를, 이 세계 대륙의 끝 부분에 커다란 성이 하나 있는데,

그곳은 신이 살고 있다고 했어. 아무도 알 수 없을 만큼 오래 전부터 존재한 그 신은

원하는 것이라면 뭐든지 들어주지만 그것을 위해서는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고 했지."

"흐음…"

"그곳까지 가는 길은 꽤 험할 텐데… 많이 힘든 길이 되겠군."

"각오했던 일입니다."

"그래서 생각해본 건데 말이야. 이 마을에 좀 더 머무는 게 어떻겠어?"

"이 마을에 좀 더 머물면 아저씨가 의학의 힘으로 우리의 몸을 강하게 개조시켜주실 생각입니까?"

"하하하하하. 그것도 좋은 방법이겠지만 나에게는 그 정도의 실력이 없어서 말이야.

자네들이 길을 떠나기 전에 어느 정도의 힘을 키워서 가는 게 어떨까 싶어서 그런다네."

"힘을?"

우준은 더 강해지고 싶은 마음이 절실했기 때문에 큰 관심을 보였다.

우준의 관심이 마음에 드는 듯이 죠니가 씩 웃었다.

"우리 마을에 누가 있는지 아직 모르나 보군. 우리 마을에 사는 첸이라는 녀석은 말이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강한 녀석이야. 그 녀석에게 며칠만 배우면 분명 지금보다는 훨씬 나아질 거야."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첸이라면… 제이닐의 아버지?"

"그래. 지금은 자네들 친구의 몸에 들어간 제이닐과 좋은 시간을 보내는 것 같으니 방해할 수 없지만,

그것이 끝나고 나면 한 번 부탁해 보게. 물론… 쉽지 않겠지만…"

죠니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제이닐은 죠니도 잘 알고 있었다.

아주 사랑스럽고 착한 아이였기 때문에 죠니도 제이닐을 딸처럼 귀여워하던 터였다.

그런 제이닐을 떠나보내는 첸의 마음은 어떻겠는가.

아마 한동안은 다른 사람을 만나고 싶어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겠죠. 하지만 그렇다면 별 수 없는 일이겠죠."

우준이 미련 없이 대답하자 죠니는 좀 의아했다.

좀 전에 힘에 대한 이야기를 했을 때의 우준은 평소의 멍한 표정과는 달리 큰 관심을 보였기 때문이다.

분명 힘에 대한 욕심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쉽게 포기를 하다니…

"강해지고 싶은 게 아니었나?"

"물론 강해지고 싶습니다. 채민이를, 그리고 함께 가는 동료들을 잃고 싶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첸을 괴롭히면서까지 힘을 얻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우리 여행에서 힘은 부수적인 것일 뿐, 그것에 얽매여서 더 중요한 사실을 잊고 싶지는 않거든요."

"더 중요한 게 뭐지?"

"사람이요."

우준의 단호한 대답에 죠니는 말문이 막혔다.

사람.

그래, 모든 것은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

첸이 그것을 미리 알았더라도 가족들을 놔두고 힘을 찾아 여기저기 방황을 했을 것인가.

아마도 아니겠지.

그랬더라면 첸은 지금과 같은 죄책감에 빠져서 괴로워하고 있지 않겠지.

죠니는 쓰게 웃었다.

어째서 이 앞에 앉아 있는 우준이란 소년은 이토록 강하고 자신에 차 있을 수 있는 걸까.

"그 섬에 갔었다고 했지?"

죠니는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남들에게 말하고 싶지 않았던 치부.

우준에게라면 말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네."

"그 섬에 대해서 듣고 싶은 것이 있어."

가인을 지켜보던 해윤은 인상을 찌푸리고 휙 뒤를 돌아봤다.

아까부터 목덜미에 따끔따끔한 시선이 느껴지는 것이, 누군가가 자기를 쳐다보고 있는 게 분명한데도

돌아보면 아무도 없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주위를 살피던 해윤의 눈에 거꾸로 매달려 있는 박쥐의 모습이 보였다.

유난히 까만 박쥐는 해윤을 쳐다보고 있었다.

"뭐야? 박쥐가 쳐다본 건가? 왜 이 대낮에 박쥐가 밖에 나와서 돌아다니는 거지?"

중얼거리며 다시 가인에게로 눈을 돌린 해윤은 자꾸만 느껴지는 시선에 인상을 찌푸리고 다시 휙 돌아봤다.

하지만 그곳에 있는 것은 시간도 모르고 밖에 나와서 놀고 있는 미친 박쥐 한 마리 뿐이었다.

"야, 야. 너무 그렇게 뜨겁게 쳐다보지 마라. 미안하지만 난 동물에게는 취미가 없거든.

저 녀석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아주 벅차단 말이다. 저리로 가버려."

해윤이 휙휙 손을 휘젖자 해윤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 박쥐를 날개를 펴고 다른 곳으로 날아갔다.

"신기한 녀석이네. 애완동물로 삼으면 재미있기는 하겠군."

해윤이 중얼거리면서 가인 지켜보기에 열중하는 동안 하늘로 날아오른 박쥐는 병원 창문에 날개를 접고 앉았다.

병원 안에서는 죠니의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었다.

"난 아주 어릴 적부터 생명의 신비에 매료되어 있었어. 물질로 이루어진 육체가 살아서 숨쉬고 번식하고

생존을 위해서 움직인다는 게 굉장히 매혹적인 일이지 않아? 그래서 어릴 적부터 생물을 관찰하는 것에

많은 시간을 보냈지. 7살에 의사가 되기로 결심을 했고 그 때부터 공부를 했어. 하지만 이 좁은 마을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굉장히 한정되어 있었지. 나는 좀 더 넓은 곳으로 떠나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고,

깨닫는 순간 지체 없이 마을을 떠났지. 그 때의 내 나이가 10살이었어.

이 마을에서 꽤나 떨어진 곳에 의술로 유명한 나라가 하나 있었지. 어린 아이들조차도 메스만 손에 쥐어주면

병자를 살린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의술이 뛰어난 사람들이 많은 곳이었어.

난 그곳에 짐을 풀었어.

배우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어. 소문만큼이나 의술에 대해서 뛰어난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심지어는

음식점 주인까지도 의술을 알고 있을 정도였거든) 상당한 실력을 갖추기까지는 특별한 돈이 필요치 않았지.

그저 먹고 잠자는데 쓸 돈만 필요했을 뿐이야.

난 이런저런 잡일을 하면서 돈을 벌었는데, 그곳에서 친구를 만나게 됐지.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찾아온 친구였는데, 나보다 2살 위였고, 그곳에 온 것도 나보다 1년이 빨랐어.

당연히 실력도, 그곳에서의 생활도 나보다 나았지. 그래서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어."

죠니는 과거를 회상하는 듯 잠시 말을 멈추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

죠니가 평생의 업으로 삼을 즐거운 추억을 되새기는 것이 분명할 텐 데도,

죠니의 표정은 전혀 즐거워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잊고 싶은 기억을 떠올리기라도 하는 듯,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어서 채민은 고개를 갸웃했다.

"몇 년이 지나자 우리는 의술을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어.

입학은 아무 때나 가능하지만 상당히 비쌌기 때문에 돈을 모을 시간이 필요했거든.

아마 그 때 내 나이가 15살이었을 거야. 녀석은 17살이었지.

다들 녀석을 좋아했어. 멋진 성격이었거든. 남을 돕는 일에 자만하지 않고 나섰고,

사람들이랑도 자연스럽게 어울렸어. 누구에게나 친절했지만 잘못된 일에 대한 지적도 따끔하게 했지.

자기 일에 열심히 하면서도 노는 일에 빠지지도 않았어. 모두에게 칭찬을 받았지만 그 일로

거만해지지도 않았지. 버릴 것이 하나도 없는 성격이었어. 난 그를 동경했고, 좋아했고, 사랑했지.

녀석이 나를 가장 좋아하는 친구로 삼아줬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울 정도였어.

그가 부족한 돈을 모아서 산 우리의 우정 반지는 금도, 은도 아닌, 쇠로 만든 무거운 반지였지만

난 자랑스럽게 그걸 끼고 다녔어. 녀석의 손에도 나와 똑같은 반지가 끼어져 있다는 게 기뻤지.

그곳에서 의술을 배우며 친구들을 사귀고 조금씩 사람들에 대한 것을 알게 됐지.

사람은 상처받기 쉽고, 감정적으로 약한 동물이라는 것을… 하지만 난 생각했어.

이 친구를 배신하는 일만큼은 절대로 내 인생에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고.

난 이 친구를 위해서 내 목숨까지도 내어주겠다고."

창문 밖에 내려앉은 박쥐에게 신경을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죠니는 자신의 이야기에 열중해 있었고, 우준과 채민은 죠니의 이야기를 열심히 듣고 있었다.

그래서 박쥐는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죠니의 이야기를 들었다.

흥미진진하게 눈을 빛내는 모습이 호기심 많은 박쥐같았다.

"그런데 내가 하나 간과하고 있었던 것이 있었어."

죠니가 쓰게 웃으며 눈을 떴다.

"인간은 사랑에 지배되는 동물이라는 사실이었지."

"사랑…"

채민이 의미 없이 따라서 중얼거렸다.

"그래, 사랑. 그 때까지만 해도 난 어렸고 사랑을 경험할 만한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사랑이 주는 행복함과 깊은 절망, 그리고 고통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했던 거야.

나는… 사랑 때문에 녀석을 배신했어. 절대로 배신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주제에…"

괴로운 표정의 죠니는 자신의 그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 듯

두 주먹을 탁자에 올리고 고개를 깊이 숙였지만,

넓고 강해 보이는 어깨가 어쩌지 못할 슬픔으로 가늘게 떨리는 것은

훨씬 더 안타까운 모습이었기에,

채민의 표정도 덩달아서 괴롭게 일그러졌다.

"그녀를 만나게 된 것은 처음으로 인체 해부를 하게 된 날이었지.

우리들은 처음으로 사람의 몸을 직접 탐구할 수 있다는 사실에 몹시 흥분해 있었어.

설레면서도 긴장된 마음으로 각자의 해부대를 보며 강사가 들어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어.

해부를 할 수 있는 단계까지 올라가는 학생들은 많지 않았어.

많은 사람들이 입학하지만 적당히 배웠다고 생각하면 그만 뒀거든.

학비가 비싸기도 하거니와 시험을 통과하는 것도 어려웠으니까.

내가 해부할 수 있는 단계에까지 올라갈 수 있었던 것은 친구의 도움이 컸어.

우리는 서로 격려하면서 일과 공부를 함께 했으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서 문이 열리고 그 날의 수업을 맡은 강사가 들어왔지.

허리를 쭉 펴고 여유 있게 강단 앞까지 걸어와 서는 그녀의 모습에 난 넋을 잃고 말았어.

그녀 외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지. 마치 그녀에게로만 모든 빛이 쏠려 있는 것처럼.

그녀를 제외한 곳은 전부 암흑이었어. 그녀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처럼 보일 정도로 아름다웠지.

그리고 당당함과 풍부한 지성미가 그 아름다움을 더 빛나게 해주었어.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해부실에 모인 학생들을 전부 기억하겠다는 듯이 한 명, 한 명 지나

나에게 도달했을 때, 나는 마치 숨이 멎는 듯한 느낌을 받았어. 아니, 아마도 숨이 멈췄을 거야.

그 순간에는… 귀가 먹먹할 정도로 큰 충격이 심장을 때리고 있었거든.

'여러분에게 해부에 대한 설명을 하기 위해 초청을 받았습니다.'

그녀가 입을 열었을 때에야 나는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볼 수 있었어.

그녀의 모습에 큰 충격을 받은 것은 나뿐만이 아닌 것 같더군.

모든 학생이 얼이 빠진 표정으로 그녀의 붉은 입술만 쳐다보고 있었어.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은 듯이 보이는 학생은 내 친구 녀석, 한 명뿐이었지.

난 그런 모습에서까지 존경심을 느꼈어.

'모두가 빠져드는 미모의 여인에게도 이 친구는 아랑곳하지 않는구나.'

그런 생각을 했지.

여자가 우리를 가르치러 오는 일은 빈번했지만, 이렇게까지 젊은 여자인 적은 없었어.

그녀는 나와 비슷한 나이로 보였거든. 그녀가 나보다 4살이나 많다는 것은 뒤늦게 알았지만,

그래도 그곳에서 학생을 가르치기에는 어린 나이였지. 그만큼 그녀의 능력이 뛰어났던 거야."

죠니는 목이 마른지 잠시 말을 멈추고 물을 한 잔 벌컥벌컥 들이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우리들의 정신적인 지주이자 마음의 연인이 되었지.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상냥함을 잃지 않는 그녀의 모습은 천사와 다름없었어.

나의 마음 속에서 그녀는 점점 자라났지. 한순간도 그녀를 생각하지 않는 날이 없었어.

학생들은 감히 그녀에게 접근하지 못하고 주위에서 맴돌았지만 난 과감히 그녀에게 접근했고

사적으로 그녀와 만나서 데이트를 즐기는 사이가 되었어. 행복했지, 그 때는…

내 친구 녀석을 쫓고 있는 그녀의 시선을 깨닫지 못할 만큼 그녀에게 푹 빠져 있었으니까.

그녀와 내 친구 녀석이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우리의 졸업을 며칠 앞두고였어.

들려오는 소문도 있었고, 옆에서 보기에도 사랑한다는 것이 티가 났기 때문에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던 일이기는 했지만, 결혼 소식을 직접 전해듣는 것은

생각보다 더 충격적인 일이었어.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지. 괴로웠어.

친구가 미웠지. 그녀의 손을 잡고 행복한 듯 웃고 있는 친구 녀석이,

나와의 우정 반지가 아닌 그녀와의 약혼 반지를 끼고 있는 친구 녀석이 미웠지. 그래서 난…"

죠니는 더 이상 말할 수 없는 듯 입을 꾹 다물었다.

우준은 묵묵히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죠니와 자신의 모습이 겹쳐졌다.

어릴 적부터 사랑했던 비, 당연히 자신의 것이 될 거라고 믿었던 비가 다른 남자를 사랑한다는 걸

깨닫는 순간, 정말이지 하늘이 무너지는 것과 같은 기분을 느꼈다.

세상이 변해버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나도 원하리가 그렇게 미웠던가? 비를 나에게서 앗아간 그 녀석이 그리도 미웠던가?'

대답은 아니다.

밉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단지 비가 당연히 자기에게 올 거라고 생각했던 자신의 자만심이 부끄러웠을 뿐이다.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은 채 그녀를 원했다.

'행복했으면 좋겠어.'

우준은 생각했다.

비를 사랑하니까, 비가 사랑하는 하리 역시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왕이면 두 사람이 행복하게 웃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친구를 죽였네."

죠니가 고개를 들지 못하고 말했다.

채민은 움찔했지만 우준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죽이다니요…"

채민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죠니를 쳐다봤다.

술을 많이 마시기는 하지만 사람 좋은 인상의 죠니가 그런 짓을 저질렀다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고개를 들다가 채민과 눈이 마주친 죠니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자네들이 가장 처음에 도착했었다는 섬. 그 섬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었지만 아무도

자세한 내막은 알지 못했지. 단 하나 알 수 있는 건, 그 섬에 들어간 사람은 아무도 살아서

돌아오지 못했다는 거였어. 때문에 그 섬에는 무엇이 있는지, 어떤 곳인지조차 아무도 알지 못했지.

난 친구에게 말했어. 소문에 의하면 우리들이 꼭 손에 넣고 싶어하는 환상의 약초가 그 섬에서

자란다는 말이 있다고, 결혼 전에 그 약초를 가지고 와서 그녀를 기쁘게 해주는 건 어떻겠느냐고.

내가 자신을 미워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녀석은 평소처럼 환하게 웃으며 말했지.

'그거 좋은 생각인 걸! 시간 좀 걸리겠지만 후다닥 다녀오겠어.'

아마 그 때, 내 안에는 악마가 숨어 있었을 거야. 녀석이 나를 신뢰하며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갈 때까지,

난 녀석을 말릴 생각을 하지 못했어. 하지만 해안에서 점점 멀어진 녀석의 배가 아주 보이지 않게 되자,

나를 둘러싸고 있던 어둠이 깨어지고 정신을 차릴 수 있었지.

절망했어. 내가 한 짓이 무슨 짓인지 그제야 깨달은 거야. 그래서 녀석을 소리쳐 불렀지만

녀석의 배는 돌아오지 않았지. 난 급하게 배를 구해 녀석을 찾으러 바다로 나갔지만 찾을 수 없었어.

그 섬으로 보낸 건 나인데, 두려워서, 무서워서 그 섬 근처에도 가지 못했어.

그저 먼 곳을 돌며 녀석의 이름을 불렀을 뿐이야. 그리고 깨달았지. 내가 녀석을 죽였다는 사실을…

난… 살인자야."

"……"

"그녀를 볼 수 없었어. 그녀를 달래줘야 했지만 어떻게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있겠나.

죄책감 때문에 먼발치에서도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없었어. 그래서 난 그곳으로 돌아오지 않고

내가 태어나고 자란 이 마을로 돌아왔지.

그 때의 기억을 잊기 위해 매일매일 술을 마셨지만 잊혀지지 않았어.

매일 밤, 녀석이 내 꿈에 나타나서 나를 원망하고, 그녀가 나를 저주해. 나는… 나는 살인자니까.

내 욕심 때문에 가장 친한 친구를 죽이고, 한 여자의 인생을 망쳤으니까…"

죠니의 이야기가 끝났다.

마음의 상처를 끄집어낸 죠니의 얼굴은 파랗게 질려 있었다.

숨을 쉬는 것이 괴로운 듯 천천히 숨을 고르며 눈을 감았다.

얼굴에 짙은 음영이 드리웠다.

우준은 말없이 죠니의 손을 응시했다.

죠니의 손가락에는 낯설지 않은 반지가 하나 끼워져 있었다.

아마도 친구와의 우정 반지일 것이다.

우준은 무심코 주머니를 만졌다.

작고 딱딱한 것이 만져졌다.

"혹시… 그곳에서 살아있는 사람을 보지는 못 했나?"

죠니가 아주 작은 희망을 품고 물었다.

채민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고 우준을 쳐다봤다.

"우리가 그 섬의 전부를 돌아본 것은 아니지만, 아마도 살아있는 사람은 없었을 겁니다.

그 섬은 사람이 살기에 적당한 섬이 아니니까요."

"아아…"

"하지만 하나 발견한 것이 있습니다."

"이제 아무 것도 필요 없어. 그 섬에만 존재한다는 환상의 약초도, 그 섬의 신기한 식물들도…

난 필요 없네. 관심 없어."

"나도 그 섬에 존재한다는 환상의 약초나 신기한 식물에는 별로 관심 없습니다. 단지…

제가 그 섬에서 가지고 온 물건의 주인을 찾았다는 사실이 좀 기쁘군요."

"응?"

그제야 죠니는 관심을 보이며 고개를 들었다.

우준은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놋쇠 반지를 꺼냈다.

녹슬기는 했지만 죠니의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반지와 똑같은 모양이었다.

우준의 손바닥에 놓인 반지를 본 죠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죠니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반지를 응시하고만 있었다.

감히 손을 뻗어 잡으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죠니가 가져가려는 생각이 없어 보이자, 우준은 반지를 식탁 위에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한 가지 생각밖에 안 듭니다."

죠니는 반지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아저씨는 아저씨의 친구를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군요."

"그게 무슨…"

"아무도 살아서 돌아오지 못하는 섬. 아저씨가 그 섬에 대한 것을 운운할 때부터 아저씨의 친구는

아저씨가 어떤 마음으로 자기에게 그런 말을 하는지 알고 있었을 겁니다.

그곳에 가면 살아서 돌아오지 못한다는 건, 아이들도 다 아는 사실인데

현명하고 지혜로웠다는 아저씨의 친구는 그 섬으로 떠났습니다. 약혼녀를 놔두고…

왜 그랬을까요? 아저씨의 친구는 아저씨의 생각과는 달리 바보였던 걸까요?"

"설마…"

죠니의 눈동자가 금방이라도 깨어질 듯이 흔들렸다.

죠니는 믿고 싶지 않다는 듯 주먹을 꽉 쥐었다.

"설마…"

"시체의 손가락에 끼워져 있던 반지는 약혼 반지가 아닌, 아저씨와의 우정 반지였습니다.

그 분은… 아저씨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아저씨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 섬으로 간 것도 그런 이유에서겠지요. 아저씨에게 그녀를 양보하기 위해…"

"아아…"

"그런 그 분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아저씨는 바보입니다.

그 분이 아저씨에게 그녀를 양보하고 떠났는데 아저씨는 그녀를 놔두고 도망쳤습니다.

아저씨가 지은 죄로부터 눈을 돌리고 도망친 거지요. 비겁해요, 그건."

"하지만… 하지만 내가 어떻게…"

죠니는 억지로 눈물을 참고 있는 듯 했다.

"내가 어떻게 그녀를 볼 수 있겠나."

"아저씨도, 그녀도 목숨만큼 사랑했기 때문에 떠난 거겠죠. 두 사람 중의 한쪽을 선택할 수 없을 만큼

사랑했기 때문에 두 사람의 행복을 빌면서 떠난 거겠지요.

만약 남아 있다가는 두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불안함 때문에,

두 사람의 행복을 비는 깨끗한 마음이 남아 있을 때 먼곳으로 떠난 거겠지요.

그러니까… 아저씨가 정말로 그분에게 미안하다면, 그녀를 행복하게 해주셨어야지요."

죠니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저씨와 그녀는 둘 다 그 분의 소중한 사람이니까요. 둘 다 행복해야지요."

떨리는 손으로 식탁 위의 반지를 집어든 죠니는 반지에 입을 맞추며 절규했다.

"아아! 아아아아!"

죠니의 울음소리를 듣던 박쥐는 날개를 펴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이미 뉘엿뉘엿 해가 지고 있었기에, 붉은 하늘에 묻힌 박쥐의 모습은 괴기스러운 한 폭의 그림 같았다.

박쥐가 내려앉은 곳은 커다란 성의 높은 탑 안이었다.

어두침침한 그곳에 내려앉은 박쥐의 모습이 순식간에 사람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마치 처음부터 사람이었던 것처럼 능숙하게 바닥에 발을 붙이고 서는 그 모습은

입이 쩍 벌어질 만큼 놀라운 일이었지만,

슈트를 입고 탑 안에 서 있던 남자는 전혀 놀라지 않고 살짝 고개를 숙인 정중한 표정으로

그를 맞이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달빛에 보이는 남자는 상당히 앳되어 보이는 얼굴로

고작해야 17, 18살로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깊고 진한 검은 눈동자는 그의 나이를 가늠할 수 없게 만들었다.

어떻게 보면 수 백 년을 살아온 것처럼 나이가 들어 보이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어린 소년으로 보이기도 하는 묘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달빛보다 하얀 그의 얼굴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핏빛의 붉은 입술.

피에 젖은 듯한 가느다란 붉은 입술은 몸서리쳐지도록 오싹하면서도

입맞추고 싶게 만드는 매력이 있었다.

소년이 암흑이라면 그를 기다리고 있던 남자는 빛을 상징하는 듯 했다.

하얀 얼굴, 단정하게 빗어 넘긴 블론드 머리칼, 푸른 눈동자의 그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나직하고도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다녀오셨습니까, 주인님."

"앞으로 내가 상대해줄 녀석들, 정말 웃겨."

소년은 걸치고 있던 검은 코트를 거칠게 벗어 남자를 향해 휙 던지며 말했다.

버릇없는 행동이었지만 종종 있는 일인 듯, 남자는 능숙하게 코트를 받아 팔에 걸쳤다.

"꽤 오래 전부터 따라다녔는데 말이지. 지금까지 봐온 인간들이랑 뭔가가 달라."

"……"

남자는 잠자코 소년의 이야기를 들었다.

소년은 문을 향해 걸어가자 남자가 얼른 문을 열고 소년이 나가기를 기다렸다.

탑의 길고 어두운 계단을 내려가며 소년은 계속해서 말했다.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을 하더군. 자기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남을 구하려고 하고,

다른 사람 때문에 다쳤는데도 화를 내지 않아. 오히려 감싸주고 격려를 해주지.

오히려 자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겼다고 자책하면 다른 녀석들은 그보다 더 괴로운 표정을 지어.

나 같으면 여행에 방해가 되는 녀석은 그냥 버릴 텐데, 그 놈들은 안 그래.

아, 딱 하나 있더군. 나랑 사는 방식이 비슷한 기집애가. 그 기집애의 행동만큼은 이해할 수 있어."

소년이 싸늘하게 웃었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빛이 사라져서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워졌지만

소년과 남자는 전혀 개의치 않고 담담하게 내려가고 있었다.

"그 기집애는 아주 유용할 것 같아, 마음에 들어."

"……"

"이봐, 저녁은 준비되어 있겠지?"

"이웃 나라에서 가장 아름답고 고귀한 피를 가진 처녀를 초대했습니다."

"그래. 오늘은 피곤해서 식사를 찾아다니기 힘든 밤이었는데, 잘 됐군."

남자는 묵묵히 소년을 응시했다.

다른 사람에게 보이는 소년의 눈동자에는, 그 날 목숨을 잃게 될 처녀에 대한 한 조각의 동정심도

담겨있지 않은 듯 보일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남자는 소년의 검은 눈동자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권태와 슬픔, 고독과 미안함을 볼 수 있었다.

단지 소년 자신이 깨닫고 있지 못할 뿐이다.

"정말이야, 그 놈들…"

잘 꾸며진 화려하고 깨끗한 방으로 들어가기 전, 소년은 중얼거렸다.

"진짜 이상한 놈들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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