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햇빛 한 바구니, 고양이 두 스푼-44화 (44/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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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제이닐을 보내야 돼."

오랜만에 일행이 모두 병원에 모였을 때, 해윤이 말했다.

가인은 제이닐의 부모와 함께 있었기 때문에 그 자리에 없었다.

"벌써 그렇게 됐어?"

차희가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응, 그렇게 됐어. 아니, 오히려 늦었어. 서두르지 않으면 제이닐이 가인이의 몸에서 빠져나가지 않게 될 거야."

해윤은 평소답지 않게 서두르고 있었다.

멍하니 앉아서 창 밖을 응시하던 우준이 손가락으로 창 밖을 가리켰다.

"스토커 박쥐."

그 말에 다들 우준의 손가락을 따라 창문으로 시선을 옮겼더니,

과연 그곳에는 박쥐가 한 마리 앉아 있었다.

"앗! 나 저 녀석 알아. 며칠 전에도 아주 그냥 찐득찐득한 시선을 나한테 보내고 있었거든."

해윤이 외쳤다.

"나도 전에 봤던 것 같은데? 정말 조용한 새라고 생각했는데… 박쥐였구나."

"강전이 너의 바보스러움에는 정말 할 말이 없다."

"소리현! 넌 대체 왜 나한테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 건데?"

"시비가 아니라 할 말을 한 것 뿐이야. 오해하지 말아줘. 바보에게는 시비를 건다는 오명을

뒤집어 쓰고 싶지는 않거든."

"야, 야!"

"아무튼…"

우준이 일어났다.

"가인이를 데리러 가자."

일행은 무거운 표정으로 첸의 집에 찾아갔다.

밝은 표정으로 일행을 맞아주는 첸에게 말을 꺼내기가 쉽지 않았다.

다행히도 첸이 먼저 말을 꺼냈다.

"제이닐을 보내야 할 때가 온 것 같군."

"네, 그렇게 됐습니다."

해윤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첸을 보며 대답했다.

해윤을 쳐다본 첸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언제나 우리 가족의 주위를 맴돌던 친구로군."

"……"

"기척을 잘 숨기고 있기는 했지만 나도 나름대로의 실력을 갖추고 있다네. 자네의 기운은 늘 느끼고 있었지.

제이닐에게 몸을 빌려준 친구와 친한 사이인 모양이지?"

"그 애는… 앞으로 저의 삶이 될 사람입니다."

해윤의 대답에 놀란 것은 첸뿐이 아니었다.

일행도 놀라서 해윤을 한 번 쳐다봤다.

삶이라니…

가장 마지막으로 만난 해윤과 가인 사이에 그럴 만한 애정이 싹틀 시간이 있었단 말인가.

아니, 그건 둘째치고… 두 사람 다 남자이지 않은가.

하지만 우준만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가인을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

"나 있잖아."

가인, 아니, 가인의 몸에 들어간 제이닐이 입을 열었다.

"사실은 좀 더 엄마, 아빠랑 같이 있고 싶어. 아직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이 있거든.

하지만… 그러면 안 되는 거겠지?"

"응, 안 돼."

해윤이 조금 냉정하다시피 대답했다.

"응. 그럴 줄 알았어."

제이닐의 서글픈 미소에 일행의 마음은 착잡했다.

"날 걱정해주는 거지?"

"그래."

"계속 이상했어. 갈수록 자꾸만 나쁜 생각이 드는 거야. 이대로 엄마, 아빠랑 멀리 도망쳐버리면,

언니, 오빠들이 못 찾을 곳으로 도망쳐버리면, 난 이곳에 있을 수 있을 거라는…

자꾸만 욕심이 생겨서 이상했어. 사실은 지금도 욕심이 생겨. 하지만 내가 이대로 가인이 오빠의

몸을 가지고 도망치면… 우리 엄마, 아빠가 나를 잃고 슬퍼하는 것만큼, 언니, 오빠들도 슬퍼지겠지?"

"응."

"응, 그러면 됐어."

제이닐은 활짝 웃었지만 일행은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어린 아이가 저토록 기특한 생각을 한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리고 아주 많이 아팠다.

제이닐을 꼭 끌어안아주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도 움직이지 못하고 멀거니 제이닐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는데,

이제껏 가만히 있던 우준이 일어나 제이닐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팔을 뻗어 제이닐을 품에 꼭 안았다.

우준의 행동에, 제이닐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가 곧 미소를 지으며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이건 끝이 아니야. 조금만 기다리면 다시 만나게 될 거야.

그곳에 네 친구들이 있을 테니까, 재미있게 놀면서 기다려. 그러면 금방 만나게 될 거야."

"응, 오빠."

"넌 예쁘고 착한 아이니까… 괜찮을 거야."

"사실은…"

제이닐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난 하나도 착하지 않아. 난 자꾸만 욕심이 생겨. 도망치고 싶어."

"그래. 그건 다 마찬가지야. 나도 가지고 싶은 게 있으면 남들을 상처 입혀서라도 도망치고 싶어.

그런 마음은 누구나 가지고 있어. 중요한 건, 그걸 행동으로 옮기지 않고 자제하는 거야.

넌 참았잖아. 도망치고 싶지만 참았잖아. 그게 중요한 거야. 넌 내가 지금까지 만난 그 누구보다 착하고 예뻐.

그러니까… 넌 분명히 그곳에서도 사랑을 받을 거야."

그 모습을 지켜보는 첸과 리야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렀다.

그리고 일행도 눈물을 흘리며 둘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어둡고 무겁고 슬픈 공기가 집안을 가득 채우고 사라지지 않을 듯 무겁게 내려앉았다.

몇 번이고 제이닐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우준이 천천히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제이닐. 부모님께 인사를 드려."

제이닐은 손등으로 눈물을 쓱 닦으며 첸과 리야의 앞에 섰다.

그리고 활짝 웃었다.

"아빠! 나 부탁이 있어. 마지막 부탁이니까 꼭 들어줘."

"아아, 제이닐…"

첸이 괴로운 신음을 토하며 제이닐을 올려다봤다.

품에 쏙 들어올 정도로 작았던 제이닐이지만 가인의 몸에 들어가 있기 때문에 올려다 봐야만 할 정도로 컸다.

하지만 첸의 눈에 보이는 모습은 제이닐, 그 자체의 모습이었다.

작고 사랑스럽던 제이닐.

"언니, 오빠들 덕분에 나는 아빠, 엄마랑 즐거운 시간을 한 번 더 가져볼 수 있었어.

언니, 오빠들은 우리 마을도 유괴범으로부터 구해줬어. 정말 고마운 사람들이야. 알지?"

"그래, 당연히 알지."

"그러니까 아빠. 언니, 오빠들을 도와줘. 언니, 오빠들은 이제 먼 곳으로 여행을 가잖아.

그러면 많이 힘들어질 거야. 나쁜 사람들이 언니, 오빠를 괴롭히려고 할지도 몰라.

그러니까 아빠가 언니, 오빠들에게 무술을 가르쳐 줘. 언니, 오빠의 여행이 무사히 끝날 수 있도록."

제이닐의 마음씀씀이에 놀라서 다들 제이닐을 쳐다봤다.

일행은 제이닐이 쉽게 떠나지 않을까봐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제이닐은 떠나지 않기는커녕,

그들의 여행길까지 걱정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잠시나마 제이닐을 의심했던 자신들의 옹졸한 마음이 부끄러워서 제대로 제이닐을 쳐다볼 수 없었다.

제이닐이 웃었다.

"약속해줄 거지, 아빠?"

첸은 흔쾌히 대답하기 힘들었다.

제이닐의 말대로 그들은 정말 고마운 사람들이고, 그들을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는 기분이었지만

싸움만큼은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았다.

강함만을 추구했기 때문에 제이닐을 잃었고 행복을 잃었다.

그런데 그것을 다시 한 번 해야한다니…

첸이 망설이는 것을 깨달은 제이닐이 첸에게 다가갔다.

"아빠."

"제이닐…"

제이닐이 팔을 뻗어 첸을 끌어안았다.

원래의 몸이었다면 첸을 한 품에 다 안을 수 없었겠지만 가인의 몸은 첸보다 컸기 때문에

첸은 가인의 품에 꽉 들어찼다.

제이닐은 첸을 안은 채로 부드럽게 말했다.

"원망한 적 없어. 미운 적도 없고… 아빠가 강해서 늘 자랑스러웠어. 엄마도, 나도 아빠를 자랑스러워했어.

유괴범에게 잡혀갔을 때도 아빠를 원망한 적은 없어. 그냥… 아빠가 옆에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쉬웠을 뿐이지, 아빠가 밉거나 원망스럽지 않았어. 강하고 멋있는 아빠가 얼마나 자랑스러운데…

그러니까 아빠. 도와줘. 언니, 오빠들을 도와주면, 난 아빠가 더 많이 자랑스러워질 거야."

"제이닐… 나는, 나는…"

"아빠는 멋진 사람이잖아."

첸의 목소리가 젖어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는 일행의 눈가 역시 젖기 시작했다.

다만 우준은 첸과 제이닐이 아닌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첸의 뒤쪽으로 난 창문이 우준의 시선이 향하는 곳이었다.

그곳에는 꽤나 오래 전부터 그들을 따라다니던 박쥐가 앉아있었다.

그냥 그곳에 앉아 있는 것뿐이겠지만 우준이 보기에 그 박쥐는 앉아서 쉬는 것이 아니라

안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박쥐의 까만 눈동자도 질새라 우준을 향했다.

우준은 말없이 박쥐를 노려보다가 다시 첸과 제이닐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넓은 어깨를 한껏 움츠러뜨리고 대답을 찾지 못하는 첸에게 우준은 말했다.

"괜찮아요, 우리는. 도와주지 않아도 돼요."

첸이 고개를 들었다.

제이닐도 놀란 듯이 우준을 쳐다봤다.

"하지만 오빠. 오빠네는 아직도 긴 여행을 해야하는 거 아니야? 그러려면 힘이 필요해."

우준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맞아. 힘이 있으면 정말 좋지. 강해져서 동료들을 지킬 수 있으면 정말 행복할 거야.

하지만 내가 강해지는 길이 첸 아저씨가 힘들어지는 길밖에 없다면 그건 관두는 게 좋을 것 같다.

남을 괴롭게 만들면서까지 힘을 키우려는 생각은 없으니까."

"맞아, 맞아."

해윤이 웃으며 끼어들었다.

"우리의 여행 모토는 처음부터 '행복 찾기'였잖아. 우리의 행복을 찾기 위해 하는 여행인데,

남을 불행하게 한다는 건 말도 안 되지. 안 그래?"

"맞아, 그래."

일행은 한 명도 서운한 기색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들을 지켜보던 제이닐이 활짝 웃었다.

"언니, 오빠들은 정말 좋은 사람들인 것 같아. 내가 힘이 있으면 꼭 도와주고 싶어지는 사람들이야.

고마워. 난 언니, 오빠들 덕분에 정말 행복했어. 내 행복을 찾아줘서 고마워."

해윤이 앞으로 나와서 제이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제 가야 돼. 알지?"

"응, 알아."

"무섭지 않을 거야. 가인이의 몸에서 나오면 하늘을 올려다봐. 태양보다 더 밝게 빛나는 빛이 보일 거야.

그곳으로 가면 돼."

"태양보다 더 밝아?"

"응. 굉장히 밝아. 눈이 부실 정도로…"

제이닐이 씩 웃으며 첸을 돌아봤다.

"들었지, 아빠? 나 그렇게 밝은 곳에 가는 거야. 분명 그곳은 굉장히 멋있을 거야."

"…제이닐…"

"그러니까 울지 마, 아빠, 엄마. 속상해하지도 마. 내가 가는 곳은 굉장히 멋진 곳이니까 미안해하지도 마.

그냥… 날 기억해줘. 난 그거면 돼. 내가 사라져도 영원히 나를 사랑해줘."

"아아, 제이닐."

이제껏 구석에 앉아 입술을 깨물고 울음을 삼키던 리야가 결국 오열을 터뜨리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첸은 서둘러 일어나 리야를 보듬어 안았다.

그런 두 사람을 모습을 지켜본 제이닐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사랑해, 엄마, 아빠. 날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해줘서 고마워. 이제 갈게."

"제이닐! 아아, 제이닐. 잠깐만…"

"엄마. 그렇게 우는 얼굴로 날 보내주지 마. 저 하늘에서 기억하는 엄마의 마지막 모습이 우는 얼굴인 거 싫어."

제이닐이 입술을 삐죽 내밀고 말하자, 리야는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도 애써 미소를 지었다.

괴롭게 일그러진 미소지만 그래도 리야의 얼굴을 굉장히 아름다웠다.

제이닐은 손을 조금 올려 손바닥을 응시했다.

"이 손으로 한 번만 더 엄마랑 아빠를 만지고 싶은데… 그러면 정말 떠나지 못할 것 같아.

죽은 다음에도 엄마, 아빠랑 이렇게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니… 난 정말 행운아야."

"제이닐…"

채민이 침통한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우준이 채민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진짜로 안녕!"

제이닐이 한 손을 번쩍 들어서 인사함과 동시에 가인의 몸에서 스르륵 힘이 빠졌다.

균형을 잃은 가인의 육체가 바닥에 쓰러지려고 했지만 그 전에 해윤이 가인을 번쩍 안아들었다.

아무도 제이닐의 영혼을 볼 수 없었지만, 그녀가 분명 편안하게 떠났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집안에 감도는 영혼의 기운이 서늘하고 공포스러운 것이 아닌, 아름답고 따뜻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리야와 첸이 괴롭게 흐느끼는 소리가 서서히 집안을 채우자, 우준이 채민의 어깨를 감싼 손에 힘을 주며 말했다.

"일단… 나가자."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 의논을 하고 있을 때, 여관으로 첸이 찾아왔다.

첸의 표정은 아까보다 많이 나아져 있었다.

"내가… 자네들에게 싸우는 법을 알려주겠네."

첸의 말에 다들 놀랐다.

첸이 다시는 싸움이라는 것에 손을 대지 않을 줄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싸우는 기술을 가르치고, 그것을 배우러 다니다가 제이닐을 잃지 않았는가.

"아… 꼭 그렇게 괴로운 일을 하실 필요는 없는데…"

가인이 조심스레 말하자 첸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제 괜찮네. 중요한 건 내가 무술에 손을 대지 않는 게 아니야.

단지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잊지 않는 것이지.

내가 다시금 무술을 한다고 해서 소중한 것을 잃게 되는 일은 없을 걸세.

그리고 자네들은 우리 마을의 은인이니, 뭐든 해줘야만 내 마음이 편할 것 같네."

다들 우준을 쳐다봤다.

그들은 우준을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준은 뭘 생각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첸을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괜찮습니다. 우리는 갈 길이 멀고 시간이 없습니다. 무술을 배우려면 오랜 시간이 걸리니,

뜻은 감사하지만 어쩔 수가 없습니다."

"오래 걸리지 않아."

첸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무술의 모든 것을 가르쳐주려는 것이 아니네. 내 입으로 이런 말을 하기는 쑥스럽지만,

난 최고의 무도가였어. 나에게 배우면 일주일이면 되네. 그동안 적어도 자네들이 몸을 지킬 수 있을 정도의

무술을 알려주겠네. 그 정도도 시간을 못 내겠는가?"

고민하는 우준 대신에 해윤이 말했다.

"배우자, 우리. 우준이 너 혼자서 우리들 모두를 지키는 것에도 한계가 있어.

적어도 우리가 우리 몸을 지킬 정도가 되면 오히려 시간이 더 단축될 거야. 안 그래?"

시원한 대답에 우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지도…"

"그러니까 우리, 배우자. 일주일이잖아. 일주일간 빡세게 배우고 좀 더 강해져서 여행을 떠나자."

첸의 미소가 좀 더 선명해졌다.

"잘 됐군. 일주일동안 해야할 것이 아주 많아. 나도 바빠지겠는걸.

어서 식사를 하고 마을 입구로 오게. 숲으로 들어가면 연습하기에 아주 좋은 곳이 있어.

일주일동안 자네들을 내가 책임지겠네."

첸이 서둘러 나간 후, 채민이 밝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저씨가 할 일이 생겨서 다행이야."

"응?"

"아저씨가 우리에게 뭔가를 가르쳐주다 보면 제이닐을 생각하면서 괴로워하는 시간도 많이 줄어들 거 아냐.

정말 다행이다."

우준은 말없이 채민을 응시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오후의 햇빛이 부드럽게 채민의 머리 위에 내려앉고 있었다.

그런 채민을 말없이 응시하는 눈이 하나 더 있었다.

그들이 여행하는 동안 그들을 따라다녔던 박쥐, 아니, 박쥐로 변한 소년의 눈이었다.

그 어떤 암흑보다도 어두운 소년의 검은 눈동자는 채민에게서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왜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지?'

소년은 이해할 수 없었다.

'넌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이야. 네 일행 중에서도 네가 가장 이상해.'

기억할 수도 없는 영겁의 세월을 살아오면서 채민과 같은 종류의 인간은 만나보지 못했다.

인간과 섞여서 살아간 적이 없는 것도 하나의 이유이기는 하지만,

간혹 인간들의 세상에 나아가 구경을 할 때마다 보게 되는 것은 이기적인 모습들뿐이었다.

내 가족, 내 몸, 내 이익만을 챙기는 인간들의 모습을 보며 소년은 언제나 만족스러웠다.

'하등동물.'

소년은 인간을 그렇게 정의 내렸다.

'자기만을 위해 살지 않으면 결국은 산산조각이 나버리는 하등동물.'

하지만 채민을 달랐다.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치고, 다른 사람의 기분을 먼저 생각한다.

'정말 이상해, 넌…'

그 때, 채민을 향하고 있던 우준의 눈동자가 천천히 움직여 소년을 향했다.

소년은 우준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온몸에 전율을 느꼈다.

오랜 세월을 살았고, 때문에 인간의 눈을 보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속속들이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우준의 눈동자만큼은 읽을 수가 없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알 수 없고, 어떤 행동을 할지도 예측할 수 없다.

게다가 이상할 정도로 강한 책임감.

자기의 일이 아닌데도 다른 일행을 구하기 위해 자기의 몸을 아끼지 않는 과감한 행동과

지나치리만큼 단호한 결단력.

슬금슬금 우준의 눈동자를 피해 움직이며 소년은 생각했다.

'너도 이상해. 저 기집애 이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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