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첸의 수련 과정을 우습게 생각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건 정도가 너무 심했다.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고된 훈련으로 일주일을 보냈다.
아침을 먹고 나면 바로 수련을 했고, 점심 시간이 되어도 앉아서 밥을 먹지 못할 만큼 첸의 독촉은 심했다.
대충 끼니를 때우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계속 훈련을 받고 연습을 했고,
밤이 되면 녹초가 되어서 침대에 쓰러졌다가 다시 아침이 되면 훈련을 받는 생활이 일주일이나 지속됐다.
다리에 천근을 매달아놓은 듯 무거운 몸을 이끌고 여관에 가는 길에 마주친 마을 사람들은
그들의 심정을 이해한다는 듯 안타까운 표정으로 이것저것 선물해주곤 했다.
여행하면서 필요한 나침반이라던가, 옷가지, 오래 보관할 수 있는 말린 고기나 과일,
약초 등을 선물해주면서 그들은
"고마워요."
라던가,
"힘내세요."
라는 말을 남기고 가버렸다.
마을 사람들의 감사 인사는 일행에게 상당히 힘을 주는 것이어서
그들은 하루를 즐겁게 마감할 수 있었지만,
몸의 피곤함이 싹 풀리는 것은 아니었다.
첸은 무작정 무기를 들고 하는 무술만 훈련시키는 것이 아니었다.
강전이나 차희에게는 그들이 받은 저주의 특성을 이용해서 싸우는 방법을 가르쳐주었고,
그것은 강전과 차희의 힘을 두 배로 강하게 만들어주었다.
사흘쯤 지났을 때, 목이 말라서 잠깐 밖으로 나온 차희는 계단을 내려가는 우준의 뒷모습을 발견했다.
반가움에 달려가서 안아버릴까 하다가 조용히 우준의 뒤를 밟았다.
탈칵-
우준에 의해 닫힌 문을 소리 없이 열고 조용히 밖으로 나왔지만 우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가로등 하나 없이 짙은 어둠에 쌓인 마을은 조금 으스스해 보이기도 했다.
주위를 둘러싼 숲 때문에 더 그렇게 보이는 것일지도 몰랐다.
저벅-
가만히 서 있었더니 숲으로 가는 방향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약간의 무게가 실린 발소리는 우준의 것이 분명하다.
차희는 양손으로 몸을 감싸고 주위를 한 번 휘이 둘러본 후 서둘러 소리가 들린 쪽으로 향했다.
곧 우준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여관에서 봤을 때는 몰랐는데, 우준의 허리에는 스웨인이 걸려 있었다.
칼집에 박혀 있는 아름다운 보석들이 달빛을 받아 오묘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붉고 푸른빛이 우준의 주위를 감싸, 우준이 마치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처럼 보이게 했다.
지금 잡지 않으면 우준이 아주 먼 곳으로 가버릴 것만 같다는 불안한 생각에 들었다.
우준은 일행과 함께 있지만, 사실은 아주 먼 곳에 있는 존재 같이 느껴졌다.
우준의 눈동자도, 우준의 행동도 사실은 이곳에 있는 것이 아닌 것 같았다.
우준이 멈춘 곳은 언제나 그들이 훈련을 받는, 숲속의 넓은 공터였다.
주위에는 빽빽이 나무가 들어차 있지만 이상하게도 그곳만은 나무도, 바위도 없었다.
아이들의 놀이터로 쓰기 위해 일부러 닦아놓은 듯, 땅은 편평했고 깨끗했다.
연습을 하기에는 안성맞춤인 장소였다.
공터의 중간까지 걸어간 우준은 잠시 멈춰서 하늘을 올려다봤다.
우준의 세계에서는 볼 수 없었던 무수히 많은 별들이 아름다운 빛을 뿌리며 빛나고 있었다.
부서지듯이 떨어져 내리는 빛을 받으며 서 있는 우준의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서
차희는 자기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며 옆에 있는 나무를 손으로 꽉 잡았다.
무서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더 강해져야 돼.'
우준은 눈을 감았다.
눈을 감았는데도 별이 보였다.
검은 하늘에 새겨진 아름다운 별들은 천천히 움직여 형상을 만들어냈다.
우준은 그 형상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예전에는 눈을 감으면 빛이 움직여 비의 형상을 만들었다.
비의 곧고 아름다운 얼굴을 만들어내서 눈을 감아도 비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눈을 감아도 비의 얼굴을 볼 수 없다.
이 세상의 빛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다른 얼굴을 그려낸다.
비만큼 아름다운 얼굴은 아니지만 그 이상으로 아름다운 성격을 가진,
누구보다도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해주는 마음과 연약한 듯 하면서도 강한 마음을 가진,
약간 동그란 선의 얼굴을 가진 채민의 얼굴을 그려낸다.
'그 애를 지켜주고 싶어.'
스웨인의 칼자루를 잡은 우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비야. 난 그 애를 지켜주고 싶어.'
스웨인의 주인인 우준의 마음을 알아들은 듯, 우준의 손안에서 부드럽게 요동쳤다.
'이보다 훨씬 더 강해져서 그 애가 다치는 일이 없도록 해주고 싶어.
당연시 되어버린 자잘한 상처들조차 그 애의 몸에서 지워주고 싶어.'
천천히 스웨인을 빼들었다.
스웨인은 달빛을 받아 서늘한 빛을 뿌리며 허공을 갈랐다.
날카롭게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차희의 귀에까지 선명하게 들려왔다.
스웨인을 자유자재로 휘두르며 공기를 가르는 우준의 모습은
흡사 검무(劍舞;검을 들고 추는 춤)를 보는 듯 아름다웠다.
정확하고도 부드러운 그 동작에 차희는 넋을 잃고 빠져들었다.
시간의 흐름조차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묘한 기분에 흠뻑 젖어든 채로 우준의 동작을 하나하나 지켜보던 차희는
갑자기 우준이 동작을 멈추자 흠칫 놀라며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스웨인을 다시 칼집에 꽂아 넣은 우준은 그 자리에 벌러덩 대자로 드러누워 버렸다.
'뭐, 뭐 하는 거지?'
우준의 행동을 의아하게 생각하던 차희는 우준이 움직임 없이 누워있자,
그 옆으로 가서 팔을 베고 눕고 싶다는 강한 충동을 느꼈다.
우연인 척 나가봐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을 하고 있는 차희의 귀에
우준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달빛 한 바구니… 별빛 세 바구니… 그리고 날 지켜보는 박쥐가 한 스푼…
이것도 나름대로 행복하구나."
의미불명의 말에 차희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것과는 달리,
나뭇가지에 몸을 숨기고 우준을 지켜보던 소년은 흠칫 놀라며 날개를 움추렸다.
'뭐야, 저 이상한 놈은… 내가 있다는 걸 느낀 건 둘째치고… 내가 왜 한 스푼인데!
난 먹는 거 아니야, 이 미친놈아!'
버럭 외쳐주고 싶은 것을 참으며, 소년은 날개를 펴고 어두운 밤하늘로 날아올랐다.
우준 같은 타입의 인간은, 정말로 상대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며.
소년은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남자에게 오늘 하루 있었던 일에 대해 주저리주저리 떠들었다.
금빛 머리카락이 아름다운 남자는 정중한 자세로 서서 소년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진짜 이상한 놈들이야. 상종하고 싶지도 않은 놈들이지.
내가 빌어먹을 거래만 안 했어도 그런 놈들은 안중에도 없었어."
남자는 소년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옅은 미소를 지었다.
행동이나 자세는 윗사람을 대하는 듯 정중했지만, 소년을 응시하는 남자의 눈동자에는
친동생을 보는 듯한 애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렇게 말씀하면서도 주인님이 그들을 지켜보는 시간은 점점 길어지고,
그들에 대한 이야기 역시 점점 길어지는군요.
최근 주인님은 종일 그들에 대한 생각뿐이라는 걸 아십니까?'
남자는 소년이 신경질적으로 움직이다가 떨어뜨린 유리컵의 파편을 조용히 치우며 생각했다.
'저는 그것이… 조금 서글프기도, 조금 기쁘기도 하군요.'
일주일이 지나자 그들은 몰라볼 정도로 달라져 있었다.
어째서 첸이 그토록 자신했던 것인지 일주일이 지난 후에야 알 수 있었다.
몇 십 명이 덤벼와도 이길 수 있을 정도로 강해진 것은 아니었다.
자기가 선택한 무기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을 정도로 강해진 것이다.
자신의 무기를 마음대로 다룰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충분히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다.
어떤 적을 만나게 될지 두렵기만 하던 여행길이 조금 환하게 빛나는 것처럼 느껴졌다.
가장 놀라운 것은 채민이 인어의 검을 다룰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처음에 인어의 검을 본 첸은 난색을 표했다.
듣기만 했을 뿐,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검일 뿐만 아니라, 섣불리 만졌다가는 얼어붙기 십상이니
만질 수도 없어서 검에 대해 연구를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첸은 포기하지 않고 채민에게 인어의 검을 휘둘러보도록 시켰다.
채민은 첸이 시키는 대로 했고 채민의 움직임과 검의 움직임을 관찰하던 첸은 인어의 검에 대해서
어느 정도 파악할 수가 있었다.
게다가 여기저기 소리새(소식을 전하는 새(鳥)로 학습 능력이 있어서 말을 하면 그것을 외우고
주인이 원하는 곳으로 빠르게 날아가 주인의 말을 전한다. 그리고 상대의 전언을 외워서 돌아온다.)를
보내서 인어의 검에 대한 정보를 수집해, 채민에게 인어의 검을 다루는 방법까지 알려주기에 이르렀다.
첸은 인어의 검이 물과 접촉해 있으면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양동이에 물을 길어와서 채민에게 훈련을 시켰다.
채민이 하는 훈련은 다른 누구의 훈련보다도 고되었지만 채민은 쓴소리 한 번 하지 않았고,
힘들다는 넋두리조차 입에 담지 않았다.
다친 다리가 완전히 나은 상태가 아니라서 쓰러질 듯이 힘들 텐 데도,
채민은 묵묵히 자기에게 주어진 훈련을 해냈다.
아니, 그 이상으로 훈련을 해서 첸조차도 놀라게 만들었다.
첸은 채민의 건강을 염려해서 몇 번이나 채민에게 쉴 것을 권했지만 채민은 고개를 저으며 말하곤 했다.
"전 좀 더 강해지고 싶어요. 그래서… 적어도 내 몸은 내가 지키고 싶어요."
그들에 대해서 죠니에게 들어 알고 있는 첸은 채민이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우준이가 다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은 거구나, 너는…"
그 말에 채민은 옅은 미소를 지었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그 미소는 특별히 슬픈 미소가 아니었음에도, 첸은 어쩐지 가슴이 아파져서 자기도 모르게 채민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말았다.
움찔하며 채민이 뒤로 물러서자 첸은 황급히 변명했다.
"아, 그러니까 이건 말이다…"
"저랑 너무 가까이 있으면 안 좋아요. 아저씨한테도 안 좋은 일이 생길 거예요."
채민이 뒤로 물러선 이유가 자기가 생각했던 이유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 첸은
안타까운 마음에 채민에게 다가갔지만, 채민은 다시 뒤로 물러났다.
그 때까지는 깊이 생각한 적이 없어서 몰랐는데,
지금까지 채민은 언제나 일행과 조금 떨어져 있었고,
자신에게 뭔가를 배울 때도 의식적으로 뒤로 물러나 있어왔다.
약간의 홍조를 띤 동그란 얼굴을 보니 생전의 제이닐이 떠올라서 첸은 채민은 무척 안타깝게 여겨졌다.
그래서 채민이 또 물러나기 전에 얼른 다가가 채민의 팔을 붙잡았다.
저 멀리에서 연습하고 있던 우준이 문득 스웨인 휘두르는 것을 멈추고 이쪽을 쳐다봤다.
"난 강해. 네 불운에 지지 않아."
"……"
"네 동료들도 강하니까 절대로 네 불운에 지는 일은 없을 게다. 그러니 그렇게 네 자신을 움츠릴 필요 없어.
네가 그렇게 움츠리는 것은 네 동료들이 네 불운에 질만큼 약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인 거겠지."
"그런 게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라, 난…"
"네가 네 동료들을 소중하게 여기는 만큼, 네 동료들도 널 소중하게 여기고 있어.
너희들을 본지 얼마 안 된 나조차도 이렇게 확실하게 알겠는데, 왜 네가 모르고 있는 게냐?
좀 더 네 동료들을 믿어봐."
우준은 다시 고개를 돌리고 스웨인은 휘둘렀다.
채민의 눈에 살짝 눈물이 맺혔다가 사라졌다.
어느 곳에서나 우는 여자애가 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애써 눈물을 참았지만,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첸의 손길이 너무나 따뜻해서 자꾸만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고마워요, 아저씨."
그 후로도 채민은 묵묵히 자기가 해야할 훈련 이상의 것을 해냈다.
자그마한 체구에 운동과는 인연이 없을 듯이 하얀 피부를 가진 채민이 이렇게까지 해낸다는 사실이
첸을 놀라게 만들었다.
그리고 6일째 되던 날, 채민은 인어의 검에게 명령을 내려 물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게 되었다.
채민이 팔을 뻗자 네 개의 양동이 안에 담겨 있던 물은 용솟음치듯 소용돌이 모양을 이루며
공중으로 솟아올랐고, 정확하게 채민이 목표한 지점에 있는 커다란 바위를 산산조각 낸 후에도
다음 명령을 기다리는 듯이 위협적으로 일렁였다.
채민이 다시 팔을 휘두르자 물은 방향을 틀어 반대쪽에 있는 나무의 이파리를 사정없이 베어냈고,
그 나무의 아래에 서있던 강전과 비인은 우수수 떨어지는 나뭇잎에 푹 파묻히는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무서운 위력이었기에
다들 입을 쩍 벌리고 채민과 인어의 검과 산산조각 난 바위를 번갈아 쳐다봤다.
채민은 그들의 시선이 쑥스러운 듯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검을 허리춤에 있는 칼집에 꽂아 넣었고,
그와 동시에 무섭게 일렁이던 물줄기는 힘을 잃고 촤르륵 땅으로 쏟아져 짙은 자국을 남기며
금세 흙으로 스며들었다.
방금 전까지 무서운 기세로 일렁이던 물이라고는 생각할 수도 없었다.
짙은 흑갈색으로 젖어든 땅을 한 번 쳐다보고 다시 채민에게로 시선을 옮긴 일행은 저도 모르게
"이야…"
하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진짜 대단하다!"
해윤이 엄지를 척 들었다.
"정말 진짜 대단해! 완전 멋있는데? 심장이 두근두근거릴 정도로 멋있어!"
"고마워."
채민이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채민은 감히 우준쪽으로는 고개도 돌리지 못했다.
우준의 시선을 마주하기가 쑥스러울 뿐만 아니라, 어떤 말을 할지 두려웠기 때문이다.
다들 다가와서 한 마디씩 하는 동안 채민은 애써 우준을 외면하고 있었는데,
어깨를 꾸욱 누르는 강한 손길에 자기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고 말았다.
어깨에 느껴지는 익숙한 따뜻함은 우준의 것.
채민과 눈이 마주친 우준은 나뭇잎 사이로 부서져 들어오는 햇살보다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주었고
채민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은 기분을 느끼며 얼른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눈에 띨 정도로 빨갛게 달아오른 채민의 얼굴은 다른 아이들에게
채민의 감정에 대해서 낱낱이 고해바치고 있었다.
'아아. 채민이가 우준이를 되게 좋아하는구나.'
훈련을 마친 다음 날, 떠날 채비를 하는 그들에게 죠니가 찾아왔다.
친구의 놋쇠 반지를 찾게 된 후, 죠니는 완전히 술을 끊었다.
수염을 깨끗이 깎고, 머리를 단정하게 빗어 넘기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은 죠니의 모습은
전에 봤을 때보다 10살 이상 젊어 보이는 상큼한 모습이었기 때문에,
일행은 처음에 죠니를 알아보지 못했다.
"왜들 이래? 나 죠니라구."
그렇게 말했을 때에야, 뒤통수를 치는 듯한 충격의 표정이 일행의 얼굴에 떠올랐다.
"어이, 어이. 그렇게까지 심하게 놀랄 것은 없지 않은가."
죠니가 킬킬 웃으며 말했다.
웃을 때마다 강해 보이는 넓은 어깨에 부드럽게 흔들렸다.
"줄 것도 있고, 한 가지 부탁할 것도 있어서 찾아왔네."
죠니의 손에는 직경 30cm정도 되는 허름한 갈색 자루가 하나 들려 있었다.
아무도 들어오라고 하지 않았지만 당당하게 방 한가운데로 걸어들어온 죠니는 탁자 위에
그 지저분한 자루를 턱 올려놓으며 말했다.
"유괴범의 오두막에서 찾은 거네."
"에엑? 뭐야? 속에 사람 머리라도 들어있었던 거 아니에요?"
강전이 정색을 하고 묻자 죠니가 씩 웃으며 고개를 젓고는 자루를 열었다.
죠니는 안에 들어있는 것을 보여주겠다는 듯 자루를 반대로 뒤집어 안에 든 것들을 탈탈 털어 내기 시작했는데,
탁자 위에 자꾸만자꾸만 쌓여 가는 내용물은, 그것이 얻기 힘든 약초라던가, 간단한 의료 도구라던가 해서
너무나 유용하게 쓰일 것 같아 다행이라는 생각보다는,
'어떻게 저 작은 자루에 저렇게 많은 게 들어가 있는 거지?'
라는 생각이 들게 만들 정도로 많았다.
쏟아지고, 쏟아지고, 또 쏟아져서 탁자 위에 쌓인 물건들이 옆으로 몇 개 더 떨어졌을 때에야
자루 안에서는 더 이상 물건이 나오지 않았다.
휘둥그런 눈으로 그것을 지켜보던 해윤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아저씨… 의사가 아니라 마술사였어요?"
"하하하하하. 내가 그걸 말 안 했나 보군."
"굉장한 마술이었어요! 근데… 그걸 보여주려고 여기까지 일부러 찾아오신 거예요?
참 할 일 없는 의사 선생님이시네. 아니, 마술사인가?"
죠니가 빙긋 웃었다.
"자, 마술의 비밀은 바로 이 자루에 있지."
다들 별 볼 일 없을 것 같은 허름한 자루로 눈을 돌렸다.
죠니는 자루의 끈을 손가락에 걸고 빙빙 돌리며 말했다.
"이 자루는 세계에 몇 개 없는 건데… 아무리 물건을 많이 담아도 무게가 올라가지 않고 넘치지도 않는다네.
이 마을에 죽치고 앉아있는 나보다는 자네들에게 더 필요할 것 같아서 선물해 주려고 가지고 왔어.
그리고 여행하는 중에 간단하게 치료할 수 있을 정도의 약초랑 도구도 함께…
사용법을 적은 책을 같이 넣어뒀으니까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걸세."
"간단하게… 이상일 것 같은데요."
수북히 쌓인 약초와 도구를 보며 가인이 중얼거렸다.
"정말 이렇게 많은 걸 그냥 주셔도 되는 거예요? 진짜 많다."
차희의 말에 죠니가 씩 웃었다.
"뭐, 굳이 보답하고 싶다면…"
"아뇨. 보답할 생각 없습니다. 무료로 감사하게 받죠."
"이 녀석!"
강전이 딱 잘라서 말하자 죠니가 웃으며 장난스레 강전의 목을 졸랐다.
하지만 강전의 얼굴보다 두꺼운 죠니의 팔뚝이 목을 조르고 있으니, 얼핏 보기에는 죠니가 진심으로 강전을
죽이려고 하는 것 같기도 했다.
강전의 목을 조른 채로 죠니가 말을 이었다.
"아마도 찾기 힘든 거겠지만, 어쩌면 황금뱀을 만나게 될 수도 있을 거야.
뭐, 일부러 찾을 필요는 없고… 이것도 자네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 그러는 거니까…
만약 황금뱀을 찾게 되면 귀찮더라도 꼭 죽여서 껍질을 벗겨 나에게 좀 보내주게.
숲에 들어가면 간간이 소리새가 눈에 띌 테니, 소리새를 이용해서 보내면 될 걸세.
소리새 이용 방법은 알지?"
묵묵히 듣고 있던 우준이 자기의 배낭을 뒤적거려 황금 뱀껍질 다섯 개를 꺼냈다.
"이걸 말하는 겁니까?"
"그래, 바로 그거…… 앗! 황금 뱀껍질이 있었잖아! 진작 좀 말해주지!"
"우리는 진작에 아저씨가 그걸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몰랐걸랑요."
겨우 죠니의 팔에서 풀려난 강전이 중얼거렸다.
"하하하. 정말 잘 됐는걸. 이게 자네들의 여행에 도움이 될 거야. 조금만 기다려주게.
내가 좋은 걸 만들어다 주지."
서둘러 나간 죠니가 다시 돌아온 것은 점심 식사를 하고 조금 지났을 때였다.
죠니의 손에는 약병이 하나 들려 있었는데, 약병 안에는 붉은 빛을 띈 황금색의 동그란 알약 같은 것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죠니는 그것을 흔들며 말했다.
"이걸 가져가게. 싸움이 벌어졌을 때 큰 도움이 될 거야."
"이게 뭔데요?"
"이걸 한 알 먹으면 일정 시간 동안이기는 하지만 힘이 강해지고 빨라지지.
아마 평소보다 두 배 정도는 강한 힘을 낼 수 있을 거야.
한 알을 먹으면 약효가 30분 정도 지속될 거야.
아아, 그렇게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을 것 없어.
이미 보증된 약이니까… 단지 황금 뱀껍질을 얻으려면 멀리 나가야 하고, 이걸 필요로 할 만한
여행객이 병원에 찾아오는 게 아니라서 만들지 않았던 것뿐이거든."
"감사합니다."
우준이 병을 받아들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무엇보다 힘이 필요했다.
좀 더 강해야만 같이 가는 동료를 지킬 수 있었다.
심각한 표정으로 감사 인사를 하는 우준을 지켜보던 죠니가 우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키가 큰 우준이지만 덩치가 큰 죠니의 앞에서는 자그마한 어린 아이로 보였다.
"이걸 잊지 말게. 물론 저주를 건 신을 만나 그 저주를 푸는 것은 좋은 일이지. 하지만…
결국 행복이라는 건 자기 자신이 만들 수밖에 없는 거야.
아무리 저주가 풀려도 그게 꼭 행복해지는 길은 아닐 거야.
행복을 만드는 것은 결국 나 자신이네. 그걸 꼭 기억해."
"아…"
그 말을 듣는 순간 우준은 뒤통수를 세게 치는 충격을 받았다.
어지간해서는 얼굴에 마음을 드러내지 않는 우준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죠니를 올려다봤다.
죠니는 아버지와 같은 모습으로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우준의 눈동자는 혼란에 빠져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죠니가 한 말에 이렇게까지 반응을 하는 우준이 이상하기는 했지만 다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물끄러미 우준과 죠니를 쳐다봤다.
한동안 흔들리는 눈으로 죠니를 쳐다보던 우준은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반드시 기억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마을 사람들의 전송을 받으며 마을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