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햇빛 한 바구니, 고양이 두 스푼-46화 (46/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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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성안에는 차가운 공기가 가득 차 있었다.

불이 없기 때문에 어두운 것이 아니라 공기 자체에 어둠이 묻어있는 듯 하다.

아무리 불을 밝혀도 전혀 밝아지지 않을 것 같은 성안에는 두 명의 남자가 있었다.

한 명은 17, 18살로 보이는 소년, 한 명은 25살은 되어 보이는 청년.

어둠을 담은 머리카락을 가진 소년과 빛을 담은 머리카락을 가진 청년이 어둠 속에 서서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소년의 얼굴에 떠오른 차가운 미소는 공기보다 더 서늘한 듯이 느껴졌다.

아마도 공기에 서려있는 서늘함은 소년의 미소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청년은 인자한 눈빛으로 소년을 응시했지만 소년은 여전히 차가운 표정을 지은 채 청년을 쳐다봤다.

검은 눈동자가 청년에게 향하자 청년은 정중하게 눈을 아래로 깔았다.

붉은 입술이 벌어지며 낮고 매혹적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곧 손님이 도착할 거다. 손님 맞을 준비를 해라."

어린 소년이 자기보다 훨씬 나이가 많을 듯한 청년에게 명령조로 말했지만 청년의 얼굴에는

불쾌함이 드러나지 않았다.

청년은 살짝 허리를 굽히며 대답했다.

"네, 주인님."

그리고 청년이 불을 밝히자, 빛이 존재하기 힘들 것 같은 그곳에 빛이 가득 차게 되었다.

구불구불하고 닦이지 않은 거친 산길을 걸어가며 우준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행복은 내가 찾는 것.'

알고 있는 사실이다.

우준은 언제나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결국 자기 자신이 만들어내는 것.'

그것은 우준의 삶의 모토이기도 했다.

'내가 왜 잊고 있었지?'

우준은 생각했다.

'왜 난 반드시 신을 만나야만 이 애들이 행복해질 거라고 생각한 거지?

이 애들을 데리고 신에게 간다고 해서, 그가 이 애들에게 건 저주를 풀어 주리라는 보장이 있기는 한 건가?'

우준은 그것을 확신할 수 없었다.

자그마한 선물을 주고 그 대가로 자자손손에게 저주를 내린 신.

그런 신이라면 결코 인간을 사랑하는 신일 리가 없다.

아마도 악신(惡神)일 것이 분명하다.

당연한 사실임에도 우준은 잠시 그것을 깨닫지 못했던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마치 마법에라도 걸린 듯 그를 찾아가면 이 애들이 행복해질 거라는 생각만 하고 앞으로 나아갔다.

우준은 잠깐 고개를 돌려 자신을 따라오고 있는 동료들을 쳐다봤다.

그들의 표정은 어둡지 않았다.

처음 만났을 때 그들은 인생을 다 산 사람처럼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삶에서 행복이라고는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그런 괴로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떠한가.

그들의 표정이 그 때처럼 어두운가.

그렇지 않다. 그들의 표정은 충분히 밝아졌다. 오히려 행복해보일 정도다.

'난 이 애들을 신에게 데려가서 뭘 하려는 거지? 이 애들에게 걸린 저주는 결코 풀 수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이 애들에게 확신시켜주려는 건가?'

자신이 하는 일이 옳은 일인지 판단할 수 없었다.

그 때, 옆에 있던 채민이 뭔가에 걸려 휘청거렸고, 우준은 반사적으로 채민의 팔을 잡아

자기에게로 끌어당겼다.

따뜻한 체온이 우준에게 전해지자 우준은 채민을 쳐다봤다.

채민의 맑고 큰 눈동자는 우준을 향하고 있었다.

"괜찮아?"

채민의 질문에 의아했다.

"그건 내가 물을 질문 같은데…"

"아니, 난 원래 이러지만… 너 지금 표정이 많이 안 좋아 보여서…"

사실 일행은 우준을 걱정하고 있었다.

죠니와 이야기를 하고 떠나온 다음부터 우준은 계속 안 좋은 표정을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 난, 뭐…"

'아니, 난 원래 이러지만…'

채민의 목소리가 귓가에 사무쳤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안전한 곳이라도 채민에게는 위험 지대.

하루하루 죽을 고비를 넘기며 사는 채민은 그것을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한 팔에 다 들어오는 작은 몸으로 그런 불행을 안고 사는 채민의 목소리가, 눈동자가 가슴에 사무쳐서

우준은 채민을 안은 팔에 힘을 꽉 주며 생각했다.

'그래. 적어도 이 애를 둘러싼 불행으로부터는 해방시켜줄 거야. 평생 위험을 안고 살아가게 할 수는 없어.

그 신이, 악신이 아니기만을 바라야하겠지."

그리고 잠시 후, 그들은 거대한 성 앞에 도착하게 된다.

성을 발견하는 순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아프도록 세차게 비가 떨어졌고 천둥번개가 심하게 쳐서 금방이라도

하늘이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콰아아아앙!

"꺄아아악!"

하늘 한 부분이 떨어져 내린 것만 같은 천둥 소리에 차희가 낮게 비명을 질렀다.

"기집애. 네 비명소리 때문에 간 떨어지는 줄 알았다."

강전이 투덜댔다.

"아우. 난 정말 천둥에는 약하단 말이야. 비가 그칠 때까지만 어디 들어가 있을데 없을까?"

차희의 말에 다들 성으로 시선을 옮겼다.

일행이 있는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그 성은 아름답고 웅장하다기보다는

괴기스러움이 묻어 나오는 성이었다.

그들이 있었던 기묘한 섬보다 훨씬 더 끈적거리는 불쾌한 기운이 성 주위에 분산되어 있었다.

"사람이 살긴 할까?"

리현이 중얼거렸다.

담대한 리현까지도 질렸다는 표정이 절로 나올 정도로 음침한 성이었다.

난폭한 왕이 살던 나라에서 봤던 성보다 두 배는 더 크게 지어진 그 성은

하늘을 찌를 듯한 높은 탑이 두 개나 있었고

검은색의 지붕 아래에는 잿빛의 벽돌로 지은 견고한 성벽이 있었다.

비가 와서 물에 쓸려가는 한이 있더라도, 천둥에 조각한 하늘에 맞아죽는 일이 있더라도,

그다지 발을 딛고 싶은 성은 아니었기에 다들 망설이고 있었다.

콰아앙!

이번에는 가까운 곳에서 천둥 소리가 들렸다.

고막을 찢는 듯한 소리에 놀란 차희가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채민 역시 움찔하며 겁먹은 표정으로 먹구름이 까맣게 끼어 있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무서워?"

우준이 물었다.

우준의 눈은 성에 향하고 있었다.

"아, 아니야. 그냥…"

괜찮다고 말하려던 채민은 무서워서 바들바들 떠는 차희를 쳐다보고는 말을 바꿨다.

"응, 무서워. 어디에 가서 비 좀 피했으면 좋겠어."

어지간하면 우는 소리를 안 하는 채민이었기 때문에 다들 좀 의아해했지만 우준은 채민이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래, 그럼 저 성에 가서 도움을 청해볼까? 이대로 있으면 체력만 잔뜩 떨어질 것 같으니…"

"니들…"

이제껏 가만히 있던 가인이 입을 열었다.

"천둥은 무섭고, 귀신은 안 무섭냐?"

"응?"

"저 성 말이야. 저 성 주위에 귀신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다구. 우리들이 가까이 가지도 못할 정도로…"

"거, 거짓말…"

차희가 하얗게 질려서 가인을 쳐다봤다.

"난 귀신 보이는 거 가지고 거짓말 안 해. 그럴 여유 없거든."

"하, 하지만…"

간간이 들려오는 천둥소리는 차희를 견디기 힘들게 만들었다.

차희도 일행에게 미움을 받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어지간하면 참으려고 했지만

천둥에는 안 좋은 추억이 많았다.

게다가 온몸에 전기가 흐르는 강전은 번개가 칠 때마다 몸에서 빠직빠직 전기가 튀어서

상당히 아파하고 있었다.

땅속에 박힌 번개의 전기가 강전에게 전달이 되는 듯 했다.

"아파?"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지만 가까이에 있던 비인은 번개가 칠 때마다 강전의 얼굴이

일그러진다는 것을 알아채고는 조심스레 물었다.

강전이 씩 웃으며 대답했다.

"응, 졸라 아프다. 기절하겠어. 내 전기로는 안 아픈데, 남의 전기로는 겁나게 아프네."

그 말에 우준은 결정했다.

"그럼 저 성에 들어가서 비를 피하자. 이대로 최강전이 기절해버리기라도 하면 번거로워지니까."

"야, 야. 그게 내 존재 가치냐? 앙? 내가 아픈 것보다 니들 번거로울 게 더 걱정돼? 앙?"

"응. 넌 전기가 흐르니까 업으면 아프잖아."

단호한 우준의 대답에 강전은 상처 받은 표정을 지었지만 그것이 장난이라는 것을 아는 일행은

아무도 강전에게 신경써주지 않았다.

단지 귀신이 가득하다는 저 성에 들어가는 것이 이곳에서 비를 맞고 천둥번개를 견디는 것보다

나은 일일지에 대해서 고민했을 뿐이다.

"귀신에 대해서라면 걱정 마."

해윤의 목소리는 밝았다.

그 어떤 것도 해윤을 어둡게 만들지는 못할 것 같았다.

"귀신은 내 주위로 오지도 못하니까."

씩 웃으며 말하는 해윤은 상당히 믿음직했기 때문에 그들은 조금 안심하고 성으로 향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들어가야 하지? 전기로 확 지져버릴까?"

거대하고 단단한 성문 앞에 멈춰선 강전이 호기롭게 말하자 우준이 고개를 저으며 앞으로 한 발 나섰다.

"남의 집에 들어갈 때는 노크를 하는 게 예의다."

똑똑-

그리고 손등으로 문을 두드린다.

"야, 야. 그렇게 한다고 이렇게 큰 성안에 사는 사람이 듣겠냐? 그럴 때는 그냥 화아……"

끼이이이익-

성문이 열렸다.

이렇게 쉽게 열릴 거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다들 벙찐 표정으로 성문을 쳐다봤지만

우준만은 역시 이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서 있었다.

문이 열리고 그들을 맞이해 주는 사람은 분명 굉장히 괴기스럽게 생긴 늙은 노인이거나,

또는 아무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흔히 이런 성문이 끼긱거리는 소음과 함께 열리면 귀신같은 노인이 맞이해 주거나

아무도 없어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지 않는가.

그럴 거라고 예상했기 때문에 문 앞에 서 있는 블론드 머리카락을 가진 단정한 청년의 모습은

일행을 다시 한 번 벙찌게 만들었다.

흉터나 잡티 하나 없는 깨끗한 우윳빛 피부, 잘 빗어 넘긴 황금빛 머리카락 아래에 있는 반듯한 이마,

아래로 쭉 뻗은 날카로운 콧날과 푸른 하늘을 담은 지적으로 보이는 파란 눈동자, 발그레한 입술을 가진 청년은

다른 곳에서 봤다면 모델이나 영화배우일 거라고 생각될 만큼 아름다운 외모를 뽐내고 있었다.

검은색의 슈트는 청년의 단단해 보이는 근육질의 몸에 착 달라붙어서

긴 다리와 늘씬한 허리, 넓은 어깨를 돋보이게 해주었다.

"어서 오십시오."

게다가 나직하게 울리는 바리톤의 목소리는 듣는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능력이 있었다.

목소리만 듣고도 그들은 피로가 싹 가지는 느낌을 받았다.

"비가 와서 묵을 곳을 찾다가 이곳에 오게 됐습니다. 하루 묵어가도 괜찮겠습니까?"

단지 우준만이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은 듯 감정이 실리지 않은 목소리로 물었다.

청년의 푸른 눈동자가 우준에게 향했다.

우준도 180cm가 넘는 큰 키였지만 청년은 우준보다 조금 더 컸다.

자신을 향하는 푸른 눈동자를 보며 우준은 뭔가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뭐지?'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반듯하고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청년이 이런 음침한 성에 산다는 걸 이상하게 생각하는 건지,

나지막한 목소리가 얼굴과 너무 잘 어울려서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건지,

그것도 아니라면 대체 무엇을 보고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곧 청년이 살짝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주인님께서는 길 가다가 도움을 요청하는 객(客;손님)이 있으면 언제든 안으로 들이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어서 들어오십시오."

정중하게 말한 청년이 살짝 옆으로 몸을 피하며 우준들이 안으로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우준은 잠시 인상을 찌푸렸지만 오들오들 떨고 있는 차희를 보고는 얼른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청년은 그들을 응접실로 안내했다.

응접실에는 그들이 올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라도 했다는 듯이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었다.

젖은 몸을 닦을 커다란 타월과 갈아입을 옷, 그리고 따뜻하게 불타고 있는 벽난로까지…

"일단 타월로 젖은 몸을 닦고 몸을 녹이고 계시면 제가 가서 손님들이 묵을 방을 마련해두겠습니다."

청년이 사라지자 우준들은 서둘러 타월을 가져다가 몸을 감쌌다.

뽀송뽀송하고 좋은 냄새가 나던 타월은 금세 축축하게 젖어 들었지만 타월은 충분히 마련되어 있었다.

그들은 벽난로 가까이에서 차갑게 얼어붙은 몸을 녹였다.

"저 사람이 이 성의 집사인가 보지?"

"주인은 어떤 사람이지? 곤란한 사람을 대접하라고 한 것 보면 좋은 사람인 것 같긴 한데…"

"이상하지 않아? 마치 우리가 올 거라는 걸 전부 알고 있었던 것 같잖아.

모든 게 다 준비되어 있어."

가인이 의심스럽다는 듯이 말하자 차희가 볼에 새 수건을 대고 기분 좋은 듯 웃으며 말했다.

"에이, 설마… 손님을 대접하기 좋아하는 주인이니까, 이런 날에 찾아올 여행객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준비를 해둔 거겠지."

"이렇게 넓은 성에 일하는 사람은 오직 한 명. 난 너무나 의심스러운데?"

리현이 수건으로 머리를 툭툭 털어내며 말했다.

상당히 남성스러운 거친 행동이었지만 섹시하게 보일 정도로 리현과 잘 어울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비인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이젠 의심스러워도 어쩔 수 없잖아. 이미 들어와 버렸으니까."

"맞아, 맞아. 어쨌든 밖에 있으나 안에 있으나 위험한 건 마찬가지야.

이왕 위험할 거라면 좀 더 따뜻하고 평화로운 곳에서 위험한 게 낫지 않겠냐?"

강전의 말에 리현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다.

"평화로운 곳에 위험이 있을 리가 있냐? 뇌까지 뼈로 만들어진 바보."

"야, 야."

그들이 툭탁툭탁하고 있을 때 청년이 다시 돌아왔다.

"방이 마련되었습니다."

청년은 그들에게 방을 안내해주었다.

방으로 향하는 2층 계단의 난간은 옅은 갈색의 아름다운 무늬를 가진 나무로 만들어져 있었고

계단에는 푹신한 양탄자가 깔려 있었다.

계단을 올라가면 복도가 양쪽으로 넓게 펼쳐져 있는데 짙은 벽지가 발라진 벽에는 어느 시대의 것인지 모를,

금박으로 장식된 액자 안에 들어가 있는 그림이 걸려 있었고,

그림의 양옆에는 역시나 금으로 만든 듯한 촛대 위에 두꺼운 붉은색의 양초가 타오르고 있었다.

아름다운 조각상이 놓인 탁자도 몇 개 눈에 띄었다.

방문은 튼튼해 보이는 짙은 갈색 나무로 만들어졌는데 손잡이라던가 문의 가장자리 부분의 장식은 전부 금으로

되어 있어서 척 보기에도 얼마나 공을 들여서(라기보다는 얼마나 많은 돈을 투자했는지) 만들었는지 알 수 있었다.

각자에게 방이 하나씩 주어졌다.

이토록 환대해 줄지는 몰랐기 때문에 다들 황망해하며 방안으로 들어갔고,

방의 인테리어에 다시 한 번 놀라워했다.

방마다 벽난로가 하나씩 있었고, 오래 되기는 했지만 깨끗하게 손질되어 있는 옷장이 있었고,

옷장 안에는 아름다운 옷들이 가득했다.

침대는 커튼을 칠 수 있게 만든 커다란 침대였는데 한 침대에 4, 5명은 잘 수 있을 정도로 넓었고,

매트릭스와 이불 역시 푹신하고 깨끗한 것으로 준비되어 있었다.

그리고 좋은 것은 방마다 깨끗한 욕실이 하나씩 마련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욕실 안에는 하얀빛을 희미하게 내는 돌로 만든 욕조가 있었는데, 청년이 말하기를,

"이 욕조를 만든 돌은 특이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돌입니다.

물을 담으면 사람이 들어가기에 적당한 온도로 따뜻하게 데워주고

그 물에 몸을 담그면 피로가 빨리 풀리고 근육 뭉친 것 역시 금방 풀리게 되지요.

아픈 곳이 있으신 분은 두 세 번만 욕조에 몸을 담그면 깨끗하게 완치되는 효과를 보실 수 있습니다."

라고 했다.

정중하면서도 깔끔하게 설명을 하는 모습을 보니,

어쩐지 돌의 효능을 설명하며 욕조를 팔려고 하는 외판원 같기도 해서

채민은 남몰래 키득키득 웃었다.

"두 시간 후에 식당에 저녁 식사를 마련해두도록 하겠습니다.

천천히 씻으시고 피로가 풀리시면 내려오시면 됩니다.

옷장 안에 있는 옷은 마음껏 입으셔도 괜찮습니다. 그럼 전 이만…"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한 청년은 아래로 내려갔다.

청년이 내려가는 길목에는 분명 양초가 환하게 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모두 청년이 어둠 속에 묻혀버린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서로 그 느낌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 혼자서 착각한 거겠지. 나 되게 피곤한가 보네.'

라는 생각을 하며 방으로 들어갔지만,

우준만은 좀 더 오래 남아서 청년이 사라져간 어둠을 응시했다.

"식당"이라는 두 단어로 표현을 하기에는 너무나 아름다운 곳이었다.

100평은 족히 넘을 듯한 그곳은 온갖 아름다운 장식품으로 호화롭게 꾸며져 있었다.

장식품은 대부분 돌로 만들어진 것으로 공상 속에나 나올 법한 동물을 조각해놓았는데

고유의 독특한 색깔의 빛을 은은하게 뿜어내고 있어서 특별히 불을 밝히지 않아도

"식당" 안을 밝게 비춰줄 것 같았다.

장식품에서 나오는 여러 가지의 빛 덕분에 "식당" 안은 오묘한 빛깔을 가득 담고 있었다.

눈이 아프지 않을 정도의 부드러운 빛의 일렁임 속에서 그들은 연신 감탄을 내뱉으며 식탁에 앉았다.

식탁은 생각보다 작은 크기로 열 명 정도가 앉기에 적당한, 가로로 긴 식탁이었다.

원탁형 식탁에 자리를 잡고 둘러앉은 그들은 그제야 서로의 차림을 살펴볼 수 있었다.

옷장에 마련되어 있던 옷들은 의아하게 생각될 정도로 그들의 몸에 딱 맞았기에

그들은 멋진 옷을 차려입고 나올 수 있었다.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옷도 갈아입지 못하는 여행길이었는데

깨끗이 씻고 좋은 옷으로 갈아입으니 다들 출중한 외모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근데 말이야. 강전이 너, 노란 머리에 그 차림은 정말 아니올시다야."

몸에 착 달라붙는 검은 슈트를 입고 나온 강전을 보며 리현이 말했다.

"훗. 이게 또 나만이 가진 하나의 매력 아니겠냐? 조낸 멋있지?"

"아니. 눈이 썩고 있어."

강전은 어깨를 으쓱했다.

"나한테 반해버린 거 다 알거덩?"

"웃기고 앉아있네."

리현은 흠잡을 데 없이 예뻤기 때문에 강전은 리현의 차림을 가지고 할 말을 찾지 못해서

구시렁거리기만 했다.

어깨가 훤히 드러나는 빨간색 드레스는 리현의 군살 없는 몸매를 돋보이게 해주었다.

예쁜 것은 차희 역시 마찬가지였다.

화려한 레이스 장식이 돋보이는 연보라색 드레스는 차희의 하얀 얼굴과 아주 잘 어울려서

연예인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차희의 모습을 빛나게 했다.

소년들이 입은 옷이 비슷한 모양새의 검은 슈트인 것에 반해,

소녀들은 각자 가장 예쁜 옷을 꺼내 입어서 무척이나 눈이 즐거웠다.

원래 패션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무슨 옷을 입어야 할지 몰라

가장 단조로운 하늘색 원피스를 입고 나온 채민은 자신의 모습이 상당히 초라하다고 생각하며

차희와 리현의 모습에 감탄하고 있었다.

어깨가 드러나지도, 몸매가 드러나지도 않는 하늘색 원피스는 어린 소녀가 입을 법한

단조롭고 평범한 의상이었기에, 채민은 이렇게 평범하게 입고 나온 것이 조금 후회가 되기도 했다.

그 때, 옆에 앉은 우준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채민을 즐겁게 해주었다.

"예쁘다, 채민아."

퍼뜩 놀라서 우준을 돌아봤지만 우준은 더 이상 채민을 보고 있지 않았다.

곧 청년이 식당에 들어왔다.

"저는 이곳의 집사입니다. 여러분의 편안한 시간을 위하여 노력하겠으니

필요하신 것이 있으면 언제든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집사의 목소리는 낮고 단조로웠지만 그만큼 믿음이 가는 목소리이기도 했다.

이 사람이라면 정말 믿어도 될 것 같다는 신뢰감이 그의 목소리에 묻어 나왔다.

"감사해요. 갑자기 들어 닥친 불청객인데 이렇게까지 신경을 써주시다니…"

차희가 애교 섞인 목소리로 감사의 인사를 전하자 집사가 미소를 지었다.

"감사 인사는 제가 아닌 저희 주인님께 하셔야지요. 전 단지 그분의 명령을 따르는 것뿐입니다."

"그러고 보니… 이 성의 주인님은 어디에 계시는 거죠?"

비인이 물었다.

"아, 주인님께서는 잠시 자리를 비우셔서 오늘은 손님들을 맞이하기 힘드실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집사가 정말 죄송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하자 해윤이 두 손을 휘휘 저었다.

"죄송하긴요. 이렇게까지 해주시는데… 오히려 우리가 죄송하죠."

집사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묻었다.

"다들 좋으신 분들인 것 같아서 다행입니다. 가끔 어떤 손님들은 정중하게 대하면 대할수록 안하무인해져서

아주 난감하거든요. 아, 많이 배가 고프실 텐데 제가 말이 많았군요. 곧 음식을 대령하도록 하겠습니다."

저녁 식사는 정말 굉장했다.

주인이 자리를 비운 데다가 갑자기 들이 닥쳤기 때문에 저녁 식사는 아주 조촐하게 차려질 줄 알았던 그들로서는

쉴 새 없이 나오는 정식 코스 요리에 놀라는 수밖에 없었다.

보아하니 딱히 요리사가 있는 것 같지도 않은데 집사가 언제 이런 음식을 다 준비했는지 의아할 정도였다.

처음 먹어보는 맛있는 요리들을, 집사는 귀찮은 기색 없이 조용히 식탁 위에 늘어놓았고

우준들은 연신 감사의 인사를 하며 음식을 맛보았다.

처음에는 너무나 허기졌기 때문에 음식 맛을 볼 새도 없었지만

배가 좀 채워지고 나자 그들은 요리의 수준에 다시 한 번 놀랐다.

굉장히 맛있었다!

환상적인 식사를 마친 후, 그들은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다.

많이 피곤했었는데 깨끗이 씻고 맛있는 식사까지 하고 나니 온몸의 긴장이 풀려서

참을 수 없이 졸음이 쏟아졌기 때문이다.

"같이 잘래?"

2층으로 올라가며 해윤이 가인에게 물었다.

가인은 무슨 말이냐는 듯 해윤을 쳐다 봤다.

해윤은 입고 있던 블라우스의 단추를 풀며 말했다.

"무섭잖아."

"무섭다고 남자한테 앵겨 잘 만큼 나약하진 않아."

가인이 톡 쏘듯이 말하자 해윤이 씩 웃으며 가인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가인이 해윤보다 좀 더 큰 키였기 때문에 불편한 자세로 보였지만 해윤은 팔을 풀지 않았다.

"나한테까지 감출 것 없어. 나랑 같이 있으면 여러 모로 편할 거야.

적어도 귀신들이 남몰래 너를 덮치는 일은 없을 테니까…"

"귀신은 둘째치고… 내가 보기엔 네가 더 위험한데? 가인이 잠든 틈에 네가 덮치려는 거 아냐?"

강전의 말에 해윤이 인상을 팍 찌푸리며 외쳤다.

"그런 건 좀 모르는 척 해줄 수 없냐?"

"가인이는 내가 찍었거덩."

"제길! 웃기지 마. 가인이와 나는 천생연분이다. 눈독 들이지 마셔!"

두 사람의 말다툼을 들으며 천천히 계단을 올라가던 가인은 옆에 있는 리현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리현아. 두 사람 다 깨끗이 해치워줘."

"오케이."

리현은 두 남자의 뒤통수를 한 대씩 후려갈겼다.

"니들 여기서 게이짓 할거면 당장 사라져. 하나도 재미없으니까."

"게이짓이라니! 이건 내 진심이라구!"

"지랄한다."

"아, 리현이는 너무 차가워."

"닥쳐."

리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채민의 팔짱을 꼈다.

그리고 빙긋 웃으며 말했다.

"채민아, 같이 자자."

방에 들어온 가인은 아까 해윤의 같이 자자는 제의를 받아들일 걸 그랬다고 후회했다.

창문 밖에서 기웃거리는 여자들의 영혼이 몸서리쳐질 정도로 오싹했기 때문이다.

해윤 때문인지, 이 성에 가인은 알지 못하는 방어막이 쳐져있기 때문인지,

영혼들이 안으로 들어오지는 못하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무심코 고개를 돌릴 때마다 보이는 영혼들은 가인을 두렵게 만들었다.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 파고들어 눈을 감았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지만 들려오는 귀곡성은 고막이 찢어질 듯 날카로워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딴 생각을 해보자.'

가인은 즐거운 생각을 하려고 노력했다.

사람이 무섭고 귀신이 무서워서 아예 아무도 살지 않는 폐건물에 들어가 벌벌 떨고 있을 때

그곳에 빛처럼 나타난 우준, 함께 가자는 우준의 제의, 그리고 만나게 된 동료들,

그들과의 즐거운 여행…

아무리 다른 생각을 하려고 해도 무서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똑똑-

마침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가인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대답하지 않았더니 다시 노크 소리가 들린다.

"누구…세요?"

"가인아, 서방님 오셨다."

문 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해윤의 것.

그 밝은 목소리가 너무도 반가워서 가인은 넘어질 듯이 방문으로 달려갔다.

"서방님은 무슨 놈의 서방님."

사실은 해윤이 찾아온 게 뛸 듯이 기쁜데도 괜히 한 마디 툭 내뱉으며 문을 열어주었다.

해윤은 큼지막한 베개를 안고 있었다.

"뭐야, 그 베개는?"

"무섭잖아. 같이 자자."

더 이상 귀곡성은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창 밖을 기웃거리던 귀신들도 언제 있었냐는 듯이 사라졌다.

그래서 가인은 진심으로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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