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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 한 바구니, 고양이 두 스푼-47화 (47/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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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도록 이야기를 하던 리현이 잠든 것을 확인한 채민은 조용히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리현과 같이 자는 것은 좋지만, 괜히 같이 자다가 안 좋은 일이라도 생겨서 리현이 다치는 일은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같은 방에 있는 것만으로도 리현이 위험해질 것 같아서, 날이 샐 때까지 다른 곳에 있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었다.

리현과 함께 있을 때는 몰랐는데, 무서울 정도로 짙은 어둠이 깔려있는 복도는

감히 발을 내딛기 힘들 정도로 무거운 침묵에 잠겨 있었다.

잘못했다가는 그 어둠에 삼켜질 것 같아서 채민은 잠시 망설였지만

곤히 잠든 리현의 얼굴을 한 번 쳐다보고는 결심을 굳혔다.

'괜히 나랑 같이 있으면 무슨 일이 분명 생길 거야. 많이 피곤할 텐데 그런 일은 없게 해야지.'

살그머니 밖으로 나와서 조용히 문을 닫았다.

발끝을 들고 걸어도 그 소리가 크게 울릴 정도로 복도는 조용했다.

2층 계단에 잠시 서서 어디로 가야할지 고민을 하다가 처음에 들어갔던 응접실을 떠올렸다.

아직도 벽난로에 불이 붙어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상당히 따뜻한 곳이고 편해 보이는 소파도 있었으니

밤을 보내기에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어둠 속을 더듬으며 조심조심 아래로 내려갔다.

응접실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다행히 벽난로에 여전히 불이 붙어 있어서 무척 따뜻했다.

채민은 푹신한 붉은 소파에 깊숙이 몸을 묻고 눈을 감았다.

'아, 평화롭다…'

혼자서 생활하는 데는 이골이 나 있었기 때문에 전혀 무섭지 않았다.

'내일은 비가 그쳤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채민은 잠이 들었다.

우준 일행이 머무는 곳의 반대쪽에 위치한 성의 깊숙한 곳에서 한 여인을 만찬에 초대해 식사를 하고

그녀의 피로 끼니를 때운 소년은 입가에 묻은 피를 손가락으로 살짝 닦으며 우준 일행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잠시 응접실에 앉아서 일행을 어떻게 요리해야 좋을지 생각하려고 했는데

응접실에는 이미 먼저 온 사람이 소파를 차지하고 있었다.

기분 좋은 표정으로 잠든 채민을 보며 소년은 인상을 찌푸렸다.

자신의 안락한 소파를 전부 차지한 무례한 행동에 대한 불쾌감보다는

편안하게 쉴 수 있는 방을 줬는데도 이런 좁은 소파에 누워있는 채민이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채민은 그 일행 중에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사람 1순위였다.

소년으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인어의 검을 다룰 줄 알게 된 채민이 당당한 표정으로 물을 부릴 때의 모습을 보며

눈을 뗄 수 없었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자 찌푸려진 인상을 펼 수가 없었다.

여자들 앞에서는 자유자재로 표정을 바꿀 수 있는데 채민에게는 그게 되지 않는 것 같다.

채민에게 조금 가까이 다가갔다.

"야, 현채민."

"우웅…"

낮게 불렀는데도 채민이 알아듣고 대답하자 소년은 흠칫 놀라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그리고 곧 쓴웃음을 지었다.

"빌어먹을. 내가 한낱 계집애 따위에게 쫄다니…"

잠결에 대답한 것인지 채민은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몹시 피곤했던 모양이다.

"야, 현채민. 넌 왜 좋은 방 놔두고 이런 데서 쭈그리고 자는 거냐? 앙?"

기품 있는 차림새와는 달리 경박한 어조로 소년이 중얼대자 채민은 잠결에 웅웅거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우우… 리현이가 같이 자자고 해서… 나도 같이 자고 싶은데… 우…"

"그럼 같이 자면 될 거 아냐. 침대도 넓은데… 왜 남의 소파를 다 차지하고 누운 거야?"

"내가 같이 있으면… 리현이가 위험해지니까…"

그 때, 소파 옆에 있던 탁자에 놓인 꽃병이 채민의 머리 위로 휘청 떨어지려고 했다.

소년은 얼떨결에 손을 뻗어 꽃병을 잡아 바로 세워놓았다.

그리고 인상을 찌푸렸다.

꽃병이 떨어질 이유는 전혀 없었다.

집사는 모든 것에 철두철미한 완벽한 집사였고, 때문에 소년이 즐겨 찾는 응접실에 있는 물건 중의 하나도

함부로 놓여있는 것은 없을 게 분명하다.

게다가 지금은 약간의 지진조차 느껴지지 않았는데 갑자기 꽃병이 채민의 머리를 가격하려고 한 것이다.

그러다가 문득 채민이 받은 저주를 떠올렸다.

불행.

언제나 불행한 일이 일어나는 소녀.

"이런…"

자기도 모르게 탄식을 내뱉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 아이 같은 표정으로 잠든 채민은 평화로워 보였다.

그런 위험을 안고 살면서도 이토록 평화로워 보이는 채민을 이해할 수 없었다.

게다가 남이 다칠까봐 자기가 이런 불편을 감수하다니…

이런 감정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는데, 채민이 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리현과 같이 자고 싶으면서도 같이 자지 못하고 남몰래 빠져나와 이 불편한 응접실에 누웠을 채민의 모습이

눈 앞에서 본 듯 선명하게 그려졌다.

그건 아마도 오랜 시간 이들의 여행을 따라다니며 이들의 행동을 관찰한 결과일 것이다.

"넌… 정말 이상해. 그거 아냐?"

"으응…"

"멍청이."

소년은 다시 채민의 머리 위로 떨어지려는 꽃병을 잡아 아래에 내려놓으며 중얼거렸다.

"네가 알긴 뭘 아냐?"

이마로, 코로 흘러내린 채민의 머리카락을 쓸어주고 싶었다.

의도하지 않았는데 손이 멋대로 채민의 머리카락으로 향했다.

하지만 소년의 긴 손가락 끝이 채민의 머리카락에 닿기 전, 소년은 인기척을 느끼며 벌떡 일어났다.

응접실 문 앞에 서서 이쪽을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는 사람은 우준이었다.

소년은 채민에게 닿을 뻔한 손을 꽉 움켜쥐며 우준을 노려봤다.

우준은 소년 따위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천천히 걸어 들어와 채민이 누워있는 소파 아래에 털썩 앉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소년은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정중하고 매너 있는 미소를 보이며 우준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이 성의 주인인 브리엔이라고 합니다. 집사에게 손님이 오셨다는 말을 듣고 서둘러 왔는데,

이렇게 늦은 시간에 도착하게 되어서 내일 인사드리려고 했습니다.

늦은 밤에 저 때문에 깬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

'이 새끼가 왜 대답을 안 해?'

라고 생각하면서도 소년, 아니, 브리엔은 꾸욱 참고 정중하게 말했다.

"실례지만… 여행자님을 어떻게 부르는 것이 좋겠습니까?"

우준은 말없이 채민의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겨주었다.

자신은 섣불리 손대지 못한 채민의 머리카락을 쉽게 넘겨주는 우준을 한 대 때려주고 싶다는,

알 수 없는 감정을 느끼며 브리엔은 인상을 찌푸렸다.

우준이 천천히 눈을 들어 브리엔을 응시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검고 깊은 눈동자가 자신에게 향하자,

브리엔은 당장 그곳에서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주먹을 꽉 쥐고

애써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하지만 긴장된 입가의 근육이 부들부들 떨렸다.

한참 브리엔을 응시하던 우준이 입을 열었다.

"뭐라고 불러야 하는지는 잘 알고 있잖아."

예상치 못한 대답에 브리엔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우준이 브리엔에게서 시선을 돌려 채민을 향했다.

브리엔은 우준의 눈동자에서 풀려난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우준의 눈동자에 채민이 담긴다는 사실이

굉장히 불쾌해서, 채민을 우준에게서 빼앗아 버리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해졌는데,

왜 자기가 이런 기분을 느끼는지 그 이유를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우준은 소파 밖으로 떨어진 채민의 팔을 살며시 들어 소파 위에 놓아주며

단조로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박쥐 한 스푼."

"……!"

브리엔의 눈이 커졌다.

우준이 자신을 주시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자신의 정체를 이렇게 단번에 알아채리라고는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렇게까지 일이 생각대로 안 풀리는 경우는 처음이거니와, 우준의 손이 채민의 손 위에 겹쳐져 있는

모습에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복잡한 기분을 느끼게 된 브리엔은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우왕좌왕하면서도 겉으로는 억지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집사가 와서 이 상황에서 좀 끄집어 내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지만

언제나 필요할 때면 바람 같이 나타나던 집사는 보이지도 않았다.

'이 쓸모 없는 자식!'

브리엔은 애꿎은 집사를 속으로 욕하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하지만 브리엔이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우준이 먼저 경고하듯이 말했다.

"채민이는 내가 지켜. 우리를 따라오고 싶으면 따라와도 상관없지만 이 애한테는 손대지 마."

빠직-

우준의 나직하고 단호한 목소리에 브리엔은 그만 이성을 잃고 말았다.

"따라가고 싶긴 누가 따라가고 싶어한다는 거얏! 난 니들 같이 이상한 놈들 따라갈 생각 없으니까

그딴 멍청한 생각은 하지도 마! 당장 이 집에서 나가버려!"

"싫어."

"뭐, 뭐얏!"

"지금은 밖에 비가 와. 추우니까 싫어. 비가 그치면 나가도록 하지."

"이게… 지금 뭐라는 거야! 이 성의 주인이 누군지 몰라서 그래? 이 성의 주인은 나야!

내가 나가라면 나가는 거지,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

"그렇다면 너는…"

우준이 심각하게 말했다.

"자기 기분 상한다고 사람을 쫓아내는 쫌생이였던 건가."

"뭐라고!"

"후…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쫌생이는 누가 쫌생이라는 거야!"

"기분 좀 상한다고 이랬다저랬다… 딱 너 같은 놈을 쫌생이라고 하는 거다. 채민이를 깨워서 알려줘야겠군.

이 성의 주인이 사실은 쫌생이였다는 사실을…"

우준이 깊은 잠에 빠져있는 채민에게 손을 뻗으려고 하자 브리엔은 자기도 모르게 우준의 팔을 덥썩 잡았다.

브리엔의 손은 무척 차가웠지만 우준은 내색하지 않고 브리엔을 쳐다봤다.

브리엔은 자신의 차가운 체온이 우준에게 전해졌다는 것을 깨닫고는 다급히 손을 떼며 말했다.

"안 쫓아낼 테니까 걘 그냥 놔둬."

"괜찮아."

"밖에 비 와서 나가기 싫다면서 뭐가 괜찮다는 건데, 넌!"

"난 차가운 거 좋아하니까… 그냥 만져도 괜찮아."

우준의 말에 브리엔이 얼굴을 붉혔다.

"뭐, 뭐라고… 지금… 뭐라는 거야, 이 변태 새끼! 난 남자를 만지는 취미 따위는 없어!"

우준은 브리엔을 쳐다보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난 정말 차가운 거 좋아해. 시원하잖아."

"빌어먹을! 무슨 헛소리를 지껄여대는 건지 모르겠군! 닥치고 잠이나 자! 젠장!"

브리엔은 거칠게 외치고는 응접실을 나갔지만 소리나지 않게 살며시 문을 닫았다.

문틈으로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오는 응접실을 뒤로하고 신경질적으로 걸으며

조금 전, 우준의 팔을 잡았던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남들보다 훨씬 차가운 체온, 아니, 사람의 팔에 동상을 입힐지도 모르는 차가운 체온.

그 손에 닿은 우준의 따뜻한 팔의 느낌이 아직도 남아있었다.

"빌어먹을… 만지고 싶긴… 누가 만지고 싶다는 거야…"

브리엔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차가운 게 좋긴, 뭐가 차가운 게 좋다는 거야… 이건… 차가운 게 아니라 얼어붙을 정도라고…

최면에 걸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차가움이란 말이야."

하지만 우준의 목소리는 너무나 뜨거워서, 브리엔은 우준의 곁에 있다가는 도리어 자신이 화상을 입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바보 같은 생각을 했다.

브리엔이 나간 후, 우준은 브리엔이 사라진 응접실 문을 응시하며 가만히 앉아있었다.

언제부터였는지 확실히 기억은 안 나지만 꽤 오래 전부터 우준 일행을 따라다니던 이상한 박쥐.

브리엔이 그 박쥐라는 것을 알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평범한 박쥐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던 깊고 검은 눈동자가 브리엔의 그것과 꼭 닮아있었기 때문이다.

팔에 닿은 브리엔의 손은 아플 정도로 차가웠다.

브리엔 역시 그것을 알고 있었는지 당황하며 손을 떼었는데,

그 모습이 이상할 정도로 깊이 뇌리에 박혀버렸다.

"으응… 우준이…?"

그 때, 채민이 잠에서 깼는지 가늘게 눈을 뜨고 우준을 쳐다봤다.

"흐응… 꿈인가?"

한 손을 들어 눈을 비비적대는 채민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주며 우준은 나직하게 말했다.

"응, 이건 꿈이야. 그러니까 아무런 걱정하지 말고 편하게 자.

오늘 밤 내내, 너에게 닥칠 위험으로부터 내가 널 지켜줄 테니까…"

다음 날 조금 이른 아침.

채민이 눈을 떴을 때 채민은 자신의 방 침대에 누워있었고, 옆에는 리현이 깊이 잠들어 있었다.

응접실에 가서 잔 것이 꿈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하게 알고 있는 채민은

자신에게 밤중에 돌아다니는 몽유병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심각한 걱정거리가 하나 생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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