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햇빛 한 바구니, 고양이 두 스푼-49화 (4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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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쯤 지났을까?

폭우가 멈췄다.

폭우가 멈춘 것은 늦은 밤이었기 때문에 하루만 더 묵고 다음 날 길을 떠나기로 했다.

이미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기 때문에 우준은 마음이 좀 급해졌다.

이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1년.

얼마나 지났는지 확실히는 알 수 없지만 상당히 오랜 시간이 지난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앞으로의 여정이 얼마나 남았는지 확실히 알지 못하니

서둘러서 길을 떠나도 시간 안에 도착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길지도 모르겠다.

"신을 찾아간다고 했지?"

우준과 채민에게 "거짓말쟁이"라는 말을 들은 이후, 브리엔은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어딘가로 모습을 감추고 있다가 식사 시간이 되면 식당에 와서 그들이 식사를 하는 동안

묵묵히 앉아 있었고, 식사가 끝나고 나면 조용히 일어나 사라졌다.

아무도 그런 브리엔에게 말을 걸지 않았고, 특별히 분위기가 무겁거나 하지도 않았다.

브리엔이 입을 열자 다들 브리엔을 쳐다봤다.

브리엔의 앞에는 음식이 놓여있기는 했지만 브리엔은 그것에 조금도 손을 대지 않았다.

최근 며칠 동안 계속 그래왔는데도 일행이 브리엔에게 아무 것도 묻지 않았기에

브리엔은 아마 저들은 자신이 흡혈귀라는 사실에 대해 알고 있는가 보다고 생각했다.

'현채민이나 강우준이 이미 말했겠지.'

"응, 신을 찾아가. 혹시 가는 길 알아?"

해윤이 물었다.

"당연하지. 난 모르는 게 없어."

"좋겠다. 난 모르는 거 조낸 많은데…"

해윤이 진심으로 부럽다는 듯 말했다.

'진짜 이상한 놈들.'

브리엔은 놈들이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럼 우리랑 같이 가지 않을래?"

가인의 질문에 해윤이 울먹이며 물었다.

"가인이 너, 나 한 명으로는 부족한 거냐? 다른 남자가 또 필요한 거야?"

"리현아."

"응, 내가 저 놈의 주둥이를 아주 그냥 본드로 붙여 놔주지."

"아아, 리현이는 너무 과격해."

그러면서도 해윤은 전혀 싫은 표정이 아니었다.

브리엔은 이해할 수 없는, 그러나 어쩐지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은 그들의 장난을 지켜보면서 말했다.

"난 영원의 시간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시간에 쫓기는 일은 없어.

니들과 함께 해줄 수도 있지. 그런데 니들이야말로 괜찮겠냐?

난 흡혈귀야. 언제 니들 피를 빨아먹지 않을까 긴장되지 않겠냐?"

브리엔의 말에 다들 놀란 듯 눈을 휘둥그레 뜨고 한 목소리로 외쳤다.

"뭐어? 너 흡혈귀였어?"

그들의 반응에 당황한 것은 브리엔이었다.

당연히 채민이나 우준이 일행에게 이야기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몰랐냐?"

"당연히 몰랐지! 잊었는가 본데… 넌 우리한테 그런 이야기를 해준 적 없어."

"하지만… 그렇다면 왜 내가 밥을 먹지 않는데도 왜 안 먹냐고 안 물어본 거지?

내가 피를 마신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묻지 않는 거 아냐?"

"아, 그거야… 네가 우준이 때문에 밥맛 떨어져서 안 먹는 줄 알았거든."

"맞아, 맞아."

강전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것은 우준도 마찬가지였기에 브리엔이 인상을 찌푸렸다.

"강우준, 넌 뭐가 좋다고 고개를 끄덕여대는 거냐?"

"맞는 말이기 때문이지."

우준이 대답했다.

"제길…"

브리엔은 이 일행을 감당하기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에게는 데려가 주겠다고 쉽게 약속했지만 생각했던 것처럼 쉬운 일이 아닐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지금 이들은 자신이 흡혈귀라는 사실을 알고도 아무도 무서워하지 않고 있다.

어째서 자기들의 피를 빨아먹을지도 모르는 흡혈귀인데 아무도 무서워하지 않느냔 말이다.

기억하지도 못할 만큼 긴 세월을 살면서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브리엔은 자신의 혼란스러운 감정을 감추기 위해 입술을 씰룩거리며 물었다.

"난 흡혈귀야. 배가 고프면 니들의 피를 빨아먹을지도 몰라. 그래도 같이 가는 거 괜찮겠냐?"

브리엔의 말을 듣던 차희가 뭘 그런 걸 물어보냐는 듯 브리엔을 쳐다보며 대답했다.

"난 얼굴만 잘 생긴 남자면 어떤 체질을 가졌든 상관없어.

너 정도 되는 남자라면 내 피를 빨아먹어도 화가 안 날 것 같은데?"

"하긴… 브리엔 너는 좀 잘 생기기는 했어."

"솔직히 나는 지금까지 본 남자들 중에 우준이가 제일 잘 생긴 것 같았는데

지금은 생각이 바뀔 것 같아. 네가 제일 잘 생긴 것 같아. 조낸 매력적이잖아."

"브리엔, 너야말로 위험하겠네. 우리 일행 중에는 게이가 좀 많아서 말이야.

최강전이랑 조해윤을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쟤들은 남자를 좀 밝히거든."

"무슨 소리!"

"우리는 남자를 밝히는 게 아니라 얼굴이 예쁘면 아무나 좋아하는 것뿐이다!"

"지랄 났네."

아마도 이런 경우에 인간들은 웃을 것이 분명하다.

짧은 시간을 살기 때문에 그만큼 감정에 자유로운 인간들은 이런 경우에 크게 웃으며

그들의 호의를 받아들일 것이다.

하지만 너무도 오랜 세월을 혼자 살아왔기에 감정이라는 것을 잘 알지 못하는 브리엔은

인상을 찌푸린 채로 그들을 쳐다보다가 조용히 일어나며 말했다.

"폭우는 한동안 다시 몰아치지 않을 테니, 내일 아침에 일찍 출발하자."

창문 밖으로 보이는 새까만 밤하늘에는 반짝이는 보석이 수없이 많이 박혀있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보석들도 감히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빛을 지상에 뿌리고 있었다.

아름다운 별빛을 좀 더 가까이에서 느끼고 싶어서 혼자 성 밖으로 나갔다.

성문 앞에는 먼저 온 사람이 있었다.

문 앞에 길게 이어진 대리석 난간에 위태롭게 몸을 걸치고 앉아

고개를 뒤로 한껏 젖히고 하늘을 보고 있는 사람은 우준이었다.

우준의 머리카락에도, 얼굴에도 별빛이 내려앉았다.

그 몽환적인 분위기는 넋이 나갈 정도로 아름다워서, 채민은 말없이 우준을 응시했다.

떨어지는 별빛도, 흐르는 별빛도 우준보다 더 아름다울 수는 없었다.

애초의 목적이었던 밤하늘 구경은 미뤄두고 우준만 구경하고 있는데 우준의 낮은 목소리가

별빛에 섞여 들려왔다.

"별 구경하러 나왔어?"

"아, 콜록… 으응."

채민은 당황해서 살짝 기침을 하며 대답했다.

"그럼 옆에 와서 앉아. 여기 잘 보인다."

우준의 말에 채민은 마법에라도 걸린 듯 천천히 걸어갔다.

우준은 채민이 옆에 앉으려고 하자 갑자기 채민의 팔을 잡아당겼다.

"으응?"

"여기 앉아."

그러면서 우준이 끌어다 앉힌 곳은 우준의 허벅지.

생각지도 못한 우준의 배려(?)에 당황한 채민이 어쩔 줄을 몰라하자 우준이 말했다.

"난간은 아직 차가워. 여자는 엉덩이 차가우면 안 되잖아."

"아, 그렇긴 한데…"

"그냥 앉아있어."

우준은 채민의 배 쪽에 양손을 깍지끼고 다시 하늘을 올려다봤다.

우준의 손이 배에 닿아있자 채민은 몹시 신경이 쓰였다.

뱃살이 잡히는 것은 아닐까 싶어 배에 한껏 힘을 주고 있는데,

우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냥 힘 빼. 여자 뱃살은 부드러워서 기분 좋으니까…"

그런 말을 듣고 정말로 배에서 힘을 뺄 수 있는 여자가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채민은 어색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지만 배에서 힘을 뺄 수는 없었다.

우준은 아무래도 좋다는 듯이 계속 하늘을 보고 있었고,

우준의 허벅지에 앉은 채민은 불편함보다는 심장이 터질 것 같은 두근거림을 느끼며

제대로 별 구경도 못 한 채, 배에 힘만 잔뜩 주고 있었다.

'이러다가 배에 복근이 생길 것 같아.'

라고 생각하면서.

아침 일찍 일어나 떠날 준비를 했다.

길을 알고 있는 브리엔이 함께 간다는 사실에 어느 정도 마음이 놓였다.

다들 이제부터의 여행길은 순탄할 거라는 생각에 들떠서 떠날 채비를 갖추는 동안,

집사는 브리엔의 여행을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딴 거 없어도 난 살아남아. 여차하면 박쥐로 변해서 날면 되고…

많은 준비를 해야만 떠날 수 있는 하등한 인간들과 같은 취급 하지 마."

브리엔은 연신 투덜댔지만 집사는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브리엔을 떠나보내는 마음이 편할 것 같지 않아서

일부러 더 분주한 척 움직였다.

"그런데 말이야, 너…"

집사가 평소와 다르게 행동하는 것을 본 브리엔이 침대 끝에 걸터앉을 채로 집사를 불렀다.

"괜찮겠냐? 내가 여행을 떠나도? 저 놈들이랑 얼마나 오래 같이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라구."

집사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괜찮습니다, 저는… 주인님이 살아 계시는 한, 저 역시도 살아있을 테니까요."

"널 그런 몸으로 만든 나를 원망하지 않아?

이 지루한 세상에서 영원을 살도록 만들어버린 내가 원망스럽지 않아?"

집사가 들고 있던 옷을 의자에 걸쳐놓고 브리엔의 앞으로 가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브리엔의 손등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제 평생에 주인님을 만나고 주인님을 모시게 되어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단 한 순간도 빼놓지 않고…"

브리엔이 미간을 좁혔다.

가슴 한 구석 어딘가에 어느 느낌이 있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것이 고통이라는 것을 브리엔은 알 수 있었다.

어째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그런 고통이 심장 근처의 그곳에서 느껴지는지 모르는 채로,

아직도 집사의 손에 잡혀 있는 자신의 손을 빼내며 말했다.

"네가 원한다면 이 자리에서 널 죽여주지.

난 언젠가 돌아오겠지만, 어쩌면 돌아오지 않을지도 몰라.

저들을 신에게 인도하고 나면, 계약대로 난 죽게 될 거야."

"그렇게 된다면 저 역시 죽게 되겠지요. 내게 새로운 생명을 주신 주인님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면

저 역시 당연히 사라지지 않겠습니까?"

"만약 내가 살아있는 채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영원이라도 기다리겠습니다."

"……"

찌푸려진 인상이 도무지 풀리지 않았다.

조금은 애틋한 어조로 말하는 집사의 모습을 보는 게 고통스러웠다.

"같이… 가겠어? 그래, 넌 내 집사니까 같이 가면 되겠다."

브리엔의 제안이 놀라운 듯, 집사는 잠깐 눈을 크게 떴다가 곧 원래의 표정으로 돌아왔다.

"이곳에서 주인님의 성을 지키며 기다리겠습니다."

"이런 성 따위는 아무래도 좋잖아. 어차피 건드리는 사람도 없을걸."

브리엔은 집사가 자꾸만 자신의 제안을 거절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약간 격해진 어조로 외쳤다.

집사가 외로울까봐 데려가려는 것처럼 말하고는 있지만,

사실은 브리엔 자신이 집사를 떨어뜨려 놓고 싶지 않았다.

집사가 영원히 사는 몸이 되어 자신을 섬기게 된 후부터 집사와 오랫동안 떨어져본 적이 없었다.

길어봐야 2, 3일.

언제나 집사는 세상에 존재하는 공기처럼 브리엔의 곁에서 브리엔을 챙겨주곤 했다.

그것에 익숙해져버린 쪽은 브리엔, 집사가 필요한 쪽 역시 브리엔이었다.

"주인님은 기억해주시면 됩니다. 제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째서 집사가 이런 낡아빠진 성 따위를 지키려고 하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성 같은 건 나중에도 얼마든지 다른 놈들에게서 빼앗을 수 있는 거고,

성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살만한 곳은 어디에든 널려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집사는 이 성에 이토록 집착을 하는 것일까?

"너…"

브리엔이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이름이 뭐지?"

브리엔의 질문에 집사는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저는 주인님의 충실한 종이자, 하인, 집사입니다. 주인님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내놓을 수 있는

그런 충실한 시종일 뿐입니다. 주인님은 저를 그렇게 기억해주시면 됩니다."

브리엔은 짜증이 확 올라왔다.

"네 이름이 그렇게 대단해? 왜 이름을 안 가르쳐 주는데?"

"주인님은 이미 제 이름을 알고 계십니다."

"뭐? 모르니까 묻잖아. 난 아는 거 묻는 취미 없어!"

"하지만 주인님은 이미 제 이름을 알고 계십니다. 하지만 주인님께서 제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신다면

주인님께 저의 가치는 그 정도에서 끝나는 것이겠지요. 그러니까 그냥 집사로 기억해주시면 됩니다.

미천한 저의 이름 따위, 들으셔서 무엇하시겠습니까?"

집사가 하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가슴을 콕콕 찔러댔다.

"빌어먹을! 그 이상한 새끼들이랑 같이 지내니까 나까지 이상해지는 것 같잖아!"

브리엔은 괜한 우준 일행에게 화풀이를 하며 벌떡 일어났다.

집사는 조용히 브리엔의 뒤를 따랐다.

언제나 그렇듯 브리엔의 그림자라도 되는 것처럼 당연하게 브리엔의 뒤에 위치했다.

'그림자가 없어도 살 수는 있겠지.'

브리엔은 조금 감상적인 기분이 되었다.

참으로 생소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건 정말 이상한 일일 거야.'

앞으로의 여행이 기대가 되는 한편, 가슴이 텅 빈 기분이 들어서 다시 한 번 집사에게

함께 가지 않겠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관뒀다.

식당에서는 일행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올 때와 마찬가지로 간소한 차림을 하고 있었다.

여행길에 드레스나 정장은 불편했고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브리엔 역시 검은 바지에, 검은 셔츠의 편한 차림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서 풍겨 나오는 고귀한 분위기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브리엔이 들어오는 것을 본 해윤이 말했다.

"입만 다물고 있으면 진짜 왕족 같아 보이는데…"

"닥쳐."

브리엔이 가볍게 대꾸하며 자기 자리에 앉았다.

곧 간소한 아침 식사가 차려졌고, 그들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식사를 했다.

앞으로의 여행에 대한 흥분이 담긴 들뜬 대화가 오가지 않았기 때문인지

브리엔은 곧 자신이 이 성을 떠나게 되리라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 문득 우준을 쳐다봤는데, 우준은 집사를 응시하고 있었다.

말없이 브리엔의 옆에 서 있던 집사는 우준이 자신을 쳐다보는 것을 알고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고,

우준 역시 빙긋 미소를 지었다.

브리엔은 기분이 이상해지는 것을 느꼈다.

여행 중에 아주 간혹 보이던 우준의 미소를 가까이에서 보자

그 미소가 참으로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꼬셔왔던 수많은 여인들의 미소보다

우준의 옅은 미소가 훨씬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자꾸만 알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표현을 해야할지 몰라

브리엔은 그냥 인상을 찌푸렸다.

우준은 브리엔의 기분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계속 집사를 응시하고 있었고,

브리엔은 우준에게 "집사를 쳐다보지 마!"라고 외치고 싶었는데,

그것이 "우준"의 시선이 집사에게 닿아있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서인지,

우준의 시선을 "집사"가 받고 있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인지는 자신도 알지 못했다.

그리고 그들은 성을 떠났다.

오래도록 살아왔던,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오랜 시간을 머물렀던 성을 뒤로 하고 걸으면서

브리엔은 애써 뒤돌아보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커다란 성보다는, 그곳에 혼자 남아 자신을 기다릴 집사가 마음에 걸려

몇 번이고 돌아보고 싶은 것을 입술을 꽉 깨물고 참아내야 했다.

길은 험하지 않았다.

브리엔이 길 안내를 잘 했으니 그것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일행은 계속 뭔가가 허전하다고 생각하면서

길을 걸었다.

당연히 벌어져야 할 일이 벌어지지 않는 것에 대한 허전함이었는데,

그것을 가장 먼저 깨달은 것은 차희였다.

"이상하다? 오늘 하루 내내 걷는 동안 채민이한테 위험이 하나도 없었어."

차희에 말에 다들 "그렇구나."하는 표정으로 채민을 쳐다봤다.

채민 역시 자신에게 위험한 일(적어도 아무 것도 없는 땅에서 발을 헛디뎌 넘어진다든지)이

전혀 없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터라 고개를 갸웃했다.

"응, 정말 이상하네. 나 오늘 하나도 안 위험했어."

경이롭다는 듯이 중얼거리는 채민을 보며 브리엔이 피식 웃었다.

주위는 이미 어둑어둑해지고 있었기에 슬슬 쉴만한 곳을 찾아야 했다.

'이 근처 어딘가에 쉬기 좋은 곳이 있었던 것 같은데…'

브리엔은 주위를 한 번 둘러보며 아무렇지도 않은 어조로 말했다.

"당연하잖아. 내가 같이 있으니까…"

브리엔의 말에 우준이 움찔하며 브리엔을 쳐다봤다.

"뭐야, 너. 너무 자신만만한 거 아냐? 앙?"

강전이 키득거리며 브리엔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가 화들짝 놀라 다시 팔을 치웠는데,

브리엔이 말했다.

"걱정할 거 없어. 네가 날 건드려도 내게는 전기가 통하지 않으니까…"

"에? 왜?"

강전은 의아한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브리엔은 금방 대답하지 않고 쉴만한 곳으로 먼저 걸음을 옮겼고,

일행은 브리엔의 대답을 기다리며 브리엔을 따랐다.

브리엔이 걸음을 멈춘 곳은, 나무로 둘러싸인 평지였다.

평평한 땅은 파란 잔디로 뒤덮여 있어서 누우면 무척 푹신할 것 같았고,

주위를 둘러싼 나무 덕분에 아늑하게 느껴졌다.

나무들은 섬에서나 보았던 징그럽고 끈적끈적할 것 같은 나무들이 아니라

깨끗하고 곧게 위로 뻗은 나무들이어서 일행은 고향에 돌아온 듯 편안한 기분을 느끼며

그곳에 짐을 내려놓았다.

"니들이 날 뭐라고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평지 중앙에 있는 커다란 바위에 불량스러운 자세로 걸터앉은 브리엔은

꽤나 반항아적인 이미지였음에도, 얼굴만큼은 여전히 기품이 넘쳤다.

그것은 아마도 오랜 세월을 살아온 브리엔의 눈동자 때문이리라.

"난 니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강해. 니들의 저주 따위가 내게 영향을 미칠 거라고 생각해?

소리현, 넌 지금껏 내 마음을 한 번도 못 읽었을걸. 안 그래?"

"아…"

브리엔의 말에 리현은 놀란 듯 탄성을 내질렀다.

일행의 마음은 읽지 않기 위해 계속 노력하고 있기는 했지만 가끔씩 방심할 때는 일행의

마음이 읽히는 적이 있었다.

하지만 브리엔의 마음은 단 한 번도 읽지 못한 것이 사실이었다.

"걱정하지 마, 현채민. 넌 불행이라는 더러운 저주를 받았지만 내가 함께 있으면

절대로 위험하지 않을 테니까."

그것은 정말로 다행한 일이었다.

적어도 앞으로는 채민의 저주 때문에 더 위험한 길로 들어서게 되고,

일행이 더 다치는 일은 없게 되지 않겠는가.

그것은 정말 다행한 일이고, 때문에 일행의 표정이 무척 밝아졌음에도

우준은 여전히 인상을 찌푸리고 브리엔을 노려보며,

왜 이렇게 자신의 기분이 나쁜 건지 알 수 없다고 생각했다.

모아놓은 나뭇가지에서 피어나는 불꽃이 공기 중에 번졌다.

황금빛 밤공기 속에서 그들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브리엔은 아까 자리잡았던 바위 위에 길게 누워 있었는데,

문득 차희가 브리엔을 쳐다보며 물었다.

"그런데 브리엔. 넌 어떻게 집사랑 만나게 된 거야?"

차희의 질문에 브리엔은 생각지 못했다는 듯 잠깐 인상을 찌푸렸다가 바위에서 내려와

모닥불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차희가 엉덩이를 움직여 옆에 앉을 곳을 만들어주었다.

브리엔은 자리에 앉아 멀거니 모닥불을 응시했다.

상당히 오랜 시간 그렇게 있었지만 아무도 브리엔을 재촉하지 않았다.

피를 먹어야 살 수 있는 브리엔과 그를 충실하게 떠받드는 집사 사이에는

분명 그들이 짐작할 수도 없는 사정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한껏 인상을 찌푸리고 앉아서 고뇌하던 브리엔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나직한 목소리가 바닥에 깔려 약간의 진동까지도 느껴지는 듯 했다.

"아마도 그를 처음 만난 것은 왕궁에서였던가? 그는 왕의 양자였으니까…"

브리엔은 이렇게 말을 시작했지만 사실 브리엔은 잘못 알고 있었다.

브리엔이 집사를 처음 만난 것은 왕궁에서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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