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햇빛 한 바구니, 고양이 두 스푼-50화 (50/91)

-50-

[번외] 당신의 곁에 서기 위하여 (브리엔-헤쥰의 만남)

헤쥰이 태어나던 날, 나라에는 기이한 현상이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이 일어났다.

농작물이 한꺼번에 말라죽었고, 곳곳에서 불이 났으며, 흐르는 물이 핏빛으로 변하고,

이유 없이 가축들이 쓰러져 죽었다.

수많은 괴현상들이 일어나는 데다가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구름이 하늘을 뒤덮어서

햇빛이 한 조각도 들어오지 않아 나라는 어둠에 잠겼다.

사람들이 이 괴이한 현상에 두려움을 느끼며 부들부들 떨고 있을 때,

오래 살아온 만큼 아는 것이 많은 한 현자가 탄성을 내질렀다.

"불운한 아이가 이 나라에 태어나겠구나!"

말과 더불어 어느 집에서 아이의 우렁찬 울음소리가 들렸으니,

사람들이 그 집에서 태어난 아이에게 주목할 수밖에 없었다.

어둠 속에서도 힘을 다해 아이를 낳은 여자는 축하를 받아야 할 순간에

무서운 기세로 몰려든 사람들을 보며 공포에 질렸다.

하지만 막 아이를 낳아서 힘이 다한 여자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사람들은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죽일 듯이 갓난아이에게 다가갔다.

아직 수건으로 감싸지도 못해 군데군데 피가 묻어 있는, 작고 쭈글쭈글한 아이는 다른 아이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자신을 향한 사람들의 살의를 느꼈는지, 조금 전보다 더 자지러져라 울어대는 아이를

한 남자가 덥썩 낚아챘다.

"왜, 왜 이러세요?"

여자는 겁에 질려있었지만 아이를 지켜야 한다는 모성애에 힘입어 크게 외쳤다.

사람들은 여자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이 나라에 혼란을 가지고 올, 저주받은 아이를 바닥에 던져 죽여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공포에 사로잡힌 그들은 이성을 잃었기에, 자신들이 하려는 일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대의명분.

그들은 그렇게 자신들의 행위에 명분을 세웠다.

남자가 아이를 번쩍 치켜들었다가 바닥을 향해 세게 내던졌다.

곧 일어날 끔찍한 사건이 두려워 눈을 감은 사람은 아이의 엄마밖에 없었다.

여자들도, 남자들도 저주받은 아이를 죽이는 것이 신성한 행위라도 된다는 듯이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지켜보고 있었다.

아이의 엄마는 아이가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아이의 울음소리는 계속해서 들려왔다.

실낱같은 희망을 가지고 조심스럽게 눈을 떴을 때, 여자의 눈에는 아이를 안고 서 있는 한 소년이 보였다.

몸에 착 달라붙는 검은 슈트를 입은 소년의 하얀 얼굴은 괴기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아름다워서,

여자는 아이를 바닥에 던질 때보다 더 커다란 공포에 휩싸였다.

그것은 광기에 사로잡힌 사람들도 마찬가지인지, 공포에 질린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이를 안아든 소년은 자신의 품에 안겨 있는 아이를 흘끗 내려다보았다.

아이는 사태의 심각성도 깨닫지 못하고 계속해서 울어대며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있었다.

소년이 살짝 눈을 들어 사람들을 쳐다봤는데, 그 눈빛이 얼마나 차가운지

사람들은 자신들이 얼어붙고 있다는 착각에 빠졌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건지 모르겠군."

소년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내가 왜 이 짓을 한 거지?"

소년은 꽁꽁 얼어붙어 있는 사람들을 밀치고 지나가 아이의 엄마에게 아이를 돌려주었다.

아이를 받아든 여자는 다시는 빼앗기지 않겠다는 듯이 아이를 품에 꼭 안았고,

익숙한 체온, 익숙한 체취, 익숙한 심장 박동을 느낀 아이는 울음을 멈추고 꼬물거리며

엄마의 품으로 파고 들었다.

소년은 말없이 그 모습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여자는 소년에게 고맙다는 말을 해야한다고 생각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여자는 소년이 휙 돌아서 집을 나가는 순간까지도 한 마디 하지 못한 채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어야 했다.

소년이 사라지자, 이성을 되찾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려고 했던 일의 잔인함을 깨닫고는

한 명, 한 명 집을 빠져나갔다.

단지 불운한 아이의 탄생을 예고했던 현자만이 마지막까지 남아 한 마디 했을 뿐이다.

"그 아이는 우리 모두의 생명을 앗아갈 거야."

집 밖으로 나오며 브리엔은 인상을 찌푸렸다.

먹잇감을 구하기 위해 이 나라를 찾아왔다.

성의 공주를 꼬셔서 피를 마실까 하고 박쥐로 변해 성으로 향하던 중에

어둠이 닥치는 것을 보고 생각했다.

'신이 또 뭔가를 꾸미는 모양이군.'

어둠 따위는 브리엔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그래서 개의치 않고 날아가던 중에, 사람들이 살의를 가지고 어느 집으로 몰려가는 것을 보았다.

살의.

그것은 아주 흥미로운 것이었기에, 브리엔은 잠시 그들이 하는 것을 구경하기로 했다.

아이가 있었고 사람들은 그 아이를 죽이려고 했다.

인간의 아이 따위는 브리엔에게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했다.

인간의 아이 하나가 죽는다고 해서, 브리엔이 느낄 감정의 변화는 조금도 없었다.

인간의 아이 몇 십 명이 이 자리에서 잔혹하게 살해를 당한다고 해도 브리엔은 전혀 상관없었다.

그런데 몸이 제멋대로 움직여서 떨어지려는 아이를 받아내고 말았다.

아무 것도 아닌 인간의 아이를 살린 브리엔은 자기 자신이 해낸 좋은 일에 대한 기쁨의 감정 따위는

조금도 느끼지 못했다.

그저 이유 없이 몸을 움직인 자신의 행동이 의아했을 뿐이다.

'내가 대체 무슨 짓을 한 걸까?'

브리엔은 도무지 자신이 해낸 일의 의미를 알 수 없었다.

방금 전 아이를 받았던 손에 여전히 아이의 체온이 남아 있었다.

남들보다 십 수 배는 낮은 브리엔의 체온이 아이에게 닿았는데도 아이가 무사할 수 있었던 것도 의문이었다.

다른 사람이었더라면 브리엔이 만진 것만으로도 심한 동상에 걸렸을지 모른다.

브리엔은 따뜻한 감촉이 남아있는 손을 한 번 내려다본 후에 다시 박쥐로 변했다.

원래 목표였던 성을 향해 날아가, 그곳의 아름다운 공주를 꼬여내 피를 마시는 브리엔의 머릿속에

방금 전에 일어났던 일 따위는 조금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건 그냥 그렇고 그런 인간의 일이었을 뿐이니까.

신은 브리엔이 아이를 구해냈다는 것을 알았다.

무료한 표정으로 앉아서 인간들의 하는 모양을 지켜보던 신은 브리엔이 자신의 일을 망친 것에

적잖은 불쾌감을 느꼈다.

아이는 불운을 가지고 오는 아이가 아니었다.

그저 남들보다 조금 더 아름다운 얼굴로 자라날, 평범한 아이였을 뿐이다.

하지만 신은 너무도 무료했기에 인간들이 자신의 힘에 의해 우왕좌왕하는 것을 보고 싶었다.

그래서 아이가 태어날 나라에 약간의 재앙을 내리고, 약간의 먹구름이 몰려들게 했다.

그것만으로도 인간들은 공포에 질려, 죄 없는 한 아이를 죽이기 위해 단합했다.

아이를 죽인 후, 인간들이 자신의 죄에 대해서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신으로서는

브리엔이 자신의 계획을 망친 것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브리엔은 어떻게 손을 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였으므로.

그래서 신은 잠시 사태를 두고 보기로 했다.

지금은 비록 살아났지만 조만간 저 아이를 가지고 다른 일을 꾸밀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영원이라는 시간을 가지고 있는 신에게는 10, 20년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 정도는 쉽게 기다릴 수 있었다.

그렇게 10년이 흘렀고, 신은 그 아이를 가지고 또 다른 재미를 볼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냈다.

그리하여 신은 사이가 좋은 두 나라의 왕의 꿈에 찾아갔다.

왼쪽 나라의 왕은 어느 날 밤 꿈에 권위 있는 신을 마주하게 되었다.

그 권위 있는 생김새의 신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왕에게 말했다.

"그대의 소원은 무엇인가?"

정의로운 왕은 대답했다.

"내가 다스리는 백성들이 편안히 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들고 싶습니다.

강하고 부유해서 백성들이 배를 곯거나 다른 나라의 침략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신이 말했다.

"그렇다면 어느어느 나라로 찾아가도록 하라. 그 나라를 가면 어둠이 내리던 날 태어난,

푸른 눈동자와 금발의 머리칼을 가진 한 아이를 만나게 될 것이다.

그 아이를 데려와 양자로 삼으면 그대의 소원이 이루어지리라."

오른쪽 나라의 왕은 어느 날 밤 꿈에 권위 있는 신을 마주하게 되었다.

그 권위 있는 생김새의 신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왕에게 말했다.

"그대의 소원은 무엇인가?"

현명한 왕은 대답했다.

"백성들이 언제나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언제나 행복해할 수 있는 그런 나라를 만들고 싶습니다.

다른 나라의 침략을 걱정하지 않고, 흉년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나라가 되기를 바랍니다."

신이 말했다.

"그렇다면 어느어느 나라로 찾아가도록 하라. 그 나라를 가면 어둠이 내리던 날 태어난,

푸른 눈동자와 금발의 머리칼을 가진 한 아이를 만나게 될 것이다.

그 아이를 데려와 양자로 삼으면 그대의 소원이 이루어지리라."

그리하여 전쟁이 일어났다.

사이가 좋았던 두 명의 왕은 서로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서로에게 칼을 겨누었다.

양보는 없었다.

강하고 부유한 나라.

그것을 위해서라면 좋았던 관계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전쟁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치게 되겠지만, 많은 건물이 부서지거나 불태워지겠지만,

그 정도의 희생은 감수할 수 있었다.

강하고 부유한 나라.

그것은 각 나라들의 평생 염원이 아닌가.

작은 희생으로 큰 것을 얻을 수 있다면 작은 것을 포기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아이만 얻을 수 있다면 사람 몇 백 명 죽는 것 따위는 아무 것도 아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싸움을 시작했다.

싸움이 시작된 것은 아이가 살고 있는, 바로 그 마을에서였다.

태어나는 날, 나라에 재앙이 내리고 하늘에 먹구름이 끼었다는 이유만으로 죽임을 당할 뻔했던 아이는

"헤쥰"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하늘과 같은 색의 푸른 눈동자에, 태양과 같은 금빛 머리카락을 가지고 태어난 헤쥰은

흔히 찾아볼 수 없는 아름다운 아이로 자라게 되었다.

게다가 헤쥰은 영특하였기 때문에 어릴 적부터 많은 재주를 익힐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마을의 사람들은 헤쥰을 슬슬 피했다.

자신의 자식들에게도 헤쥰을 가까이 하지 말라고 경고했기 때문에

헤쥰에게는 친구가 없었다.

아무리 어른스럽고 영특하다고 해도 한창 친구와 놀 나이의 헤쥰은

또래의 아이들이 자신을 피하고, 때때로 돌을 던지며

"악마의 자식!"

이라고 외치는 것을 견디기가 힘들었다.

어머니가 걱정을 할까봐 꾹꾹 참기는 했지만, 밤마다 서러운 눈물을 흘리는 것을

어머니가 모를 리 없었다.

어느 날, 헤쥰이 동네 아이들이 던진 돌에 이마를 맞아서 피를 흘리고 돌아왔을 때,

말없이 그것을 치료해준 어머니는 헤쥰을 무릎에 앉히고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헤쥰이 가졌을 때의 일, 불의의 사고로 죽게 된 아버지, 그리고 나라에 닥친 재앙, 그 날 태어난 헤쥰,

그런 헤쥰을 불길하다며 죽이러 온 마을 사람들과 헤쥰을 구한 한 소년의 이야기까지.

가만히 앉아서 믿기 힘든 이야기를 전부 들은 헤쥰이 물었다.

"날 구해준 은인은 대체 누구였을까요? 난 그 사람을 만나고 싶어요."

어머니는 헤쥰의 부드러운 금발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 세계에는 흡혈귀가 살고 있다는 전설이 있단다. 그 흡혈귀는 잔혹하고 강해서 사람들이 감히 죽일 수 없지.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는 흡혈귀는 밤마다 아름다운 처녀, 혹은 총각을 찾아내어 그 피를 빨아내지.

흡혈귀에게 피가 빨린 희생자는 온몸의 피가 하나도 없이 바싹 말라서 죽게 돼.

그 잔인한 흡혈귀는 인간을 그저 먹기 좋은 먹잇감으로 생각할 뿐, 동정 따위는 가지고 있지 않단다.

희생자는 하나, 둘씩 늘어가지만 희생자의 가족들은 사실을 이야기하지 않고,

사고로 죽었다고만 말하지. 흡혈귀에게 피가 빨려서 죽으면 그 사람 역시 흡혈귀가 된다는 말이 있어서,

시체를 불태우거나 심장에 말뚝을 박아 넣어야 하니까.

그렇기 때문에 흡혈귀에 대한 것은 전설로 남아있을 뿐, 확실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없단다."

헤쥰은 어머니가 갑자기 왜 잘 알고 있는 흡혈귀 전설을 다시 끄집어내는지 알 수 없었지만,

착한 아이였기 때문에 잠자코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었다.

"사람들은 흡혈귀가 잔인하고 혼자 있기 좋아한다고 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흡혈귀는 아마도 아주 외롭고 고독해서, 누구보다도 사람과 함께 하기를 원할 거야.

단지 혼자 지낸 시간이 너무 길어서 다른 사람에게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능숙하지 못할 뿐.

나는 너를 구해준 소년이 바로 그 흡혈귀였다고 생각한단다.

검은 머리카락과 얼어붙은 싸늘한 눈동자, 하얀 얼굴과 붉은 입술,

그리고 무서울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 평범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어."

"그렇다면… 왜 날 구해줬을까요?"

"아마도… 아주 많이 외로웠기 때문일 거야. 그래서 널 구해낸 거겠지."

"그렇다면… 난 그를 만나서 고맙다고 말하고 싶어요. 그가 외롭지 않도록 함께 해주고 싶어요."

어머니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자기 자식이기는 하지만 참 잘 생기고 착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 그를 다시 만나게 되는 것은 쉽지 않겠지만, 언젠가 만나게 된다면 꼭 말하렴.

그리고 내 이야기도 전해주렴. 내가 아주 많이 고마워하고 있다고…"

아무리 사람들이 두려워하며 피하고 괴롭혀도 모자(母子)는 외롭지 않았다.

둘은 너무나 서로를 신뢰하고 의지하고 사랑했기 때문에 더 많은 것을 필요로 하지는 않았다.

사람들이 상대를 해주지 않아도, 서로 얼굴을 맞대고 앉아 흡혈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평온하게 지낼 수 있었다.

하지만 평온함은 길지 않았다.

곧 전쟁이 시작되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