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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나라와 오른쪽 나라의 왕은 헤쥰을 찾기 위해 큰 군대를 일으켜 헤쥰이 살고 있는 가운데 나라로 진군했다.
왼쪽 나라와 오른쪽 나라에서 군대를 일으켰다는 말을 듣자 가운데 나라의 왕은
그 이유를 알기 위해 사방으로 사신을 보냈다.
그리고 그 이유가 나라에 재앙이 닥친 날 태어난 헤쥰이라는 소년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된 왕은
크게 노하여 헤쥰의 집으로 군사들을 보냈다.
왕은 일의 발단인 헤쥰을 죽여버리면 두 나라가 포기하고 각자의 나라로 돌아갈 거라는
짧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몰려오는 전쟁의 기운을 느낀 사람들은 다들 수군거리며,
헤쥰이 태어났을 때 빨리 죽였어야 했다고, 역시 헤쥰은 재앙을 몰고 오는 악마의 자식이었다고
욕을 해댔다.
헤쥰의 어머니는 왕이 군사를 보내 헤쥰을 죽이려 한다는 것을 알아채고는
헤쥰과 함께 도망을 치려고 했지만 한 발 늦었다.
집을 나서는 순간 마주친 왕의 군사들은 이 나라에서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공포심과
이 앞에 있는 작은 소년 때문에 자신들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분노 때문에,
두려움에 떨고 있는 모자에 대한 동정심 따위는 느끼지 못했다.
헤쥰의 어머니는 자신들이 그 어떤 말을 해도 저들이 자신들을 죽일 거라는 걸 깨달았다.
그들의 눈에 떠오른 공포와 분노가 형형한 불꽃이 되어 타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살려달라고 간청을 하는 대신, 헤쥰을 꼭 끌어안고 헤쥰에게 속삭였다.
"저기에 보이는 저 숲 깊은 곳으로 들어가면 커다란 성이 하나가 있다는 소문이 있단다.
얼마나 걸어 들어가야 찾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반드시 있을 거야.
그 성이 바로 널 구해준 흡혈귀가 사는 곳이라는 소문이 있어.
그곳에서 그분을 만나거라. 그리고 그분에게 도움을 요청하거라."
"엄마와 함께 갈 거예요."
"우리 앞을 둘러싼 이 사람들이 보이지 않니? 우리 두 사람 다 살기에는 저들의 살의가 너무나 강하구나.
난 이미 너를 낳고 너를 기르며 세상의 행복을 경험했으니, 이제는 네가 행복해질 차례야."
"싫어요. 엄마가 여기서 죽는다면 나도 여기서 죽겠어요!"
"헤쥰."
어머니가 부드럽게 헤쥰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꼭 행복해야 한다. 네가 행복하면 난 정말 기쁠 거야."
어머니는 말을 마치는 순간, 비어있는 공간을 향해 헤쥰을 확 밀쳤고,
군사들이 헤쥰에게 시선을 돌리기도 전에 앞에 있는 한 명의 군사에게 달려들어
그 군사의 귀를 물어뜯었다.
군사의 귀가 뜯기며 어머니의 얼굴에 피가 튀었다.
하지만 아무런 무기도, 갑옷도 없는 가녀린 중년의 여자 한 명이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군사들은 곧 여자를 떼어내고 무자비하게 칼로 여자를 찍어냈다.
여자의 약한 몸이 거친 무기에 의해 찢겨 나가고, 붉은 피가 땅을 적셨다.
소년이 자각하지도 못하는 새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소년은 어머니와 함께 죽고 싶었지만, 자기를 희생하면서까지 자신을 살린 어머니의 뜻을
무시하고 싶지 않았다.
어머니의 마지막 뜻이라면 그것을 반드시 이루어주고 싶었다.
그래서 군사들이 자신에게 눈을 돌리기 전, 이를 악물고 뒤돌아 숲을 향해 달음박질 치기 시작했다.
피비린내 나는 공기가 폐 속으로 스며 소년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심장이, 폐가 터질 것만 같이 고통스러웠지만 소년은 멈추지 않고 달렸다.
"아이가 없어졌다!"
먼 곳에서 군사들이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년은 눈을 질끈 감았다.
숲으로 들어서자 피비린내는 더 이상 나지 않았지만, 선명한 붉은 색의 피는 여전히 가슴에 남아있었다.
눈을 떠도, 눈을 감아도 보이는 것이 그것이었기에 소년은 몇 번이나 커다란 나무에 몸을 부딪혔다.
여러 번 넘어지고, 여기저기 상처가 났지만 소년은 멈추지 않았다.
얼마나 달렸을까.
소년의 의지와 상관없이, 몸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풀썩 쓰러졌다.
다리의 근육도, 심장과 폐의 근육도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질렀다.
"하악… 하악…"
소년은 거친 숨을 토해내며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어느새 밤이 되었는지 검은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별들이 인간사와는 관계없다는 듯, 여느 때와 같이 아름다운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 빛이 부드러운 물결처럼 움직이며 어머니의 얼굴을 그려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보았던, 언제나 자신을 향해 웃어주던 그 아름다운 형상을 보는 순간,
소년은 주먹으로 바닥의 풀을 쥐어뜯으며 절규했다.
"엄마! 아아아… 엄마…"
소년의 작은 세계가 무너졌다.
그리고 소년만 없애면 무사할 줄 알았던, 소년의 작은 나라도 무너졌다.
양쪽에서 쳐들어온, 왼쪽 나라와 오른쪽 나라의 어마어마한 군대에 짓밟혀 죽어가며 사람들은 헤쥰을 원망했다.
"그 아이 때문에 모든 것이 박살났어.",
"우리가 죽는 것은 그 아이 때문이야.",
"그 애만 우리 나라에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그 때, 그 아이를 죽였더라면…."
그렇게 원망을 하는 사람들 중에, 헤쥰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양쪽 나라로부터 헤쥰을 지켜주었더라면,
헤쥰이 장성하여 그 나라를 세계에서 가장 부강한 나라로 만들어주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하고, 남의 행복을 무시하는 무지한 사람들만 모여서 살았기에,
그 나라는 그 자리에서 멸망하고 말았다.
그리고 곧 사람들의 기억에서 깨끗하게 잊혀질 정도로, 역사서의 한 구석에도 그 이름을 남기지 못할 정도로,
아무 것도 아닌, 존재조차 하지 않았던 그런 나라가 되고 말았다.
자신이 태어난 나라에 무슨 일이 생기게 될지도 모른 채, 헤쥰은 계속 걸었다.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숲의 깊은 곳으로 계속 걸어 들어가는 헤쥰은
자신을 쫓아오는 군사들이 없는 이유가 포기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지,
사실은 다른 나라의 침략 때문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너무 배가 고파서 주위의 과일이나 풀, 버섯을 뜯어먹으며 목숨을 연명했다.
한 번은 독버섯을 먹어서 하루 종일 설사와 구토를 하다가 기절했던 적도 있었다.
깨어났을 때는 살아서 다행이라는 생각보다는, 왜 이러면서까지 살아야 하나 싶은 생각에
쓰러져 누운 채로 오열을 토해내기도 했다.
물이 보이지 않을 때는 나무 뿌리를 캐내서 씹어먹고,
아무 풀이나 뜯어서 배를 채우며 숲을 헤맨지 며칠이나 지났을까.
제대로 옷도 갖춰 입지 못했기 때문에 밤에 자다가 동상에 걸려 죽기 십상이었지만 죽지도 않았다.
'아마 어릴 적에 날 구해준 사람은 흡혈귀가 아니었을지도 몰라.
어느 나라의 아름다운 귀족이었을 뿐일지도 몰라.
난 엄마의 환상만 믿고 숲으로 들어온 거야.
난 그를 찾지 못하고 죽을지도 몰라. 그런 아름다운 사람이 이런 곳에서 살 리가 없으니까.'
회의적인 생각을 하며 땅만 보고 걷던 헤쥰은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남자를 보지 못했다.
앞에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숙이고 있던 헤쥰의 머리가
남자의 배에 탁 부딪혔을 때였다.
"아앗! 죄, 죄송합니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놀라, 이런 숲에서 사람을 만난 것이 이상한 일이라는 생각도 못하고
다급히 사과를 하며 고개를 들던 헤쥰은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소년의 얼굴을 보고는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도무지 인간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 밤하늘 같은 검은 머리카락,
그리고 무엇보다, 아무 것도 담기지 않은, 그리하여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한없는 공포에 빠져들게 만드는
그 검고 검은 암흑의 눈동자.
헤쥰은 이 앞에 있는, 나이가 많이 보이지 않는 이 소년이 바로 어머니가 말했던,
자기의 생명의 은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어 소년의 옷자락을 잡으며 말했다.
"고마워요."
갑작스러운 감사 인사에 브리엔은 인상을 찌푸렸다.
누군지 알지도 못하는 인간의 소년 하나가 감히 옷자락을 잡고 자기와 눈을 맞추다니…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지만 헤쥰은 두렵지도 않은지 계속 브리엔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쯤 되면 다른 인간들은 사색이 되어 고개를 숙이거나 무릎을 꿇을 법도 한데…
헤쥰 역시 브리엔의 생각대로 고개를 숙이기는 했지만,
"정말 고마워요."
라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고는 다시 고개를 들고 브리엔을 쳐다봤다.
때묻지 않은 새파란 눈동자는, 언젠가 하늘을 날다가 본 드넓은 바다의 빛깔과 비슷했다.
"뭐가 고맙다는 거냐?"
브리엔이 툭 던지듯 묻자, 헤쥰은 활짝 웃으며 말했다.
"내가 태어나자마자 사람들에 의해서 죽을 뻔했는데, 당신이 날 구해줬대요.
그래서 꼭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었어요. 우리 엄마도 당신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해달라고 했어요."
브리엔은 헤쥰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내가 널 구했다고?"
"네. 사람들이 날 바닥에 던지려는 순간, 당신이 날 받아들었대요. 정말 고마워요."
"웃기는군."
브리엔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하며 이제껏 자신의 옷자락을 잡고 있는 헤쥰의 손을 차갑게 뿌리쳤다.
"이 내가, 인간의 일 따위에 관여할 것 같아? 하등한 인간의 갓난아기 따위, 바닥에 떨어져서 죽던
짓밟혀서 죽던,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지. 그리고 설령 내가 정말로 널 구한 적이 있다고 해도,
그건 어느 날 문득 감상적인 기분이 되어,
바닥을 기어다니는 개미 한 마리 죽이지 않고 넘어간 것에 불과한 일이야.
이제껏 그런 별 것 아닌 일을 내가 기억할 리 없잖아."
헤쥰은 브리엔의 반응에 크게 상처를 입었다.
브리엔은 헤쥰이 생각하고 있던, 그런 정의의 사자의 모습이 아니었다.
외모는 아름답지만 속은 악마와도 같은, 지독할 정도로 차가운 사내였을 뿐이다.
어머니는 이 남자가 홀로 오랜 세월을 살았기 때문에 많이 외로울 것이라고 말했지만,
아직 어린 헤쥰은 자신을 대하는 브리엔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브리엔에 대한 감사함은 곧 증오로 바뀌었다.
"그렇다면… 왜 살려줬어요!"
헤쥰이 주먹을 쥐고 브리엔의 가슴을 때리며 외쳤다.
"그럼 그 때 죽게 만들지, 날 왜 살려준 거냐구요! 차라리 날 그 때 죽게 놔뒀으면,
우리 엄마가 군사들의 칼에 맞아서 죽는 일은 없었을 거예요!
내가 친구들과 마을 사람들이 던지는 돌에 맞아서 피를 흘리고 매일 울면서 잠드는 일도 없었을 거예요!"
"흥. 네가 어떻게 살아왔던, 네 어미가 어찌 되었던, 그건 나와 관계없어.
네 일 따위에는 관심 없으니, 내 앞에서 주절주절 지껄이지 말아라."
"당신은 피를 먹는다면서요! 그럼 차라리 이 자리에서 내 피를 빨아먹어요! 날 죽여요!
그 때, 당신이 날 살려서 새로운 생명을 줬으니, 이제 당신이 날 죽이라구요!
내게 준 생명을 거두어 가란 말이에요! 난… 난 이제 아무 것도 남지 않았어요!
엄마도 내 앞에서 피를 흘리며 죽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제발… 내 피를 마셔요…"
마지막 말은 흐느낌에 가까웠다.
10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 소년이 자신을 죽여달라며 절규하는 모습은, 누가 보아도 눈물을 자아낼
안타까운 모습이었지만, 브리엔의 얼굴에는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네 피를 마시라고? 웃기고 있군."
브리엔이 입술을 씰룩거렸다.
"이름도 없는 여자에게서 난, 별 볼 일 없는 어린애 따위의 피를 마시라는 거냐, 지금?"
브리엔의 옷자락에 얼굴을 묻고 있던 헤쥰이 고개를 들어 브리엔을 쳐다봤다.
아무 것도 담기지 않은 검은 눈동자가 너무나 서늘해서,
헤쥰은 처음으로 오싹함을 느꼈다.
"난 어린애, 그것도 별 볼 일 없는 어린애의 피 따위는 좋아하지 않아.
네게 그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그럼… 당신에게 가치가 있는 피는 어떤 피죠?"
브리엔이 손등으로 헤쥰의 얼굴을 탁 쳤다.
싸늘한 통증을 느끼며 헤쥰은 브리엔에게서 떨어졌다.
아까는 많이 흥분해서 몰랐는데, 이제껏 브리엔을 잡고 있던 손이 얼얼할 정도로 시렸다.
그러고 보니, 브리엔 주위의 공기도 이상할 정도로 차가웠다.
하지만 가장 차가운 것은 브리엔의 눈동자였다.
"정말 내가 네 생명을 거두어주기를 바란다면 그만한 가치를 지닌 인간이 되어라.
외모뿐만이 아니라, 그 능력도 외모 이상으로 출중하여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아라.
그 소문이 내 귀에 닿아, 내가 널 찾아갈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라.
그러면 그 때에 내가 널 찾아가, 너의 생명을 다시 거두어가겠다."
"가치를 지닌 인간…"
"그래, 어리석은 어린 소년.
나, 브리엔은 꼬질꼬질하게 때가 낀 어린 소년의 피 따위에 손을 댈 만큼 궁색하지 않아."
브리엔을 몸을 돌리자 헤쥰이 얼른 브리엔의 옷자락을 잡았다.
브리엔은 뿌리치지 않고 잠시 걸음을 멈췄다.
"내가… 내가 가치를 지니면… 당신의 귀에 들어갈 만큼 가치가 있는 인간이 되면…
그러면 정말 날 찾아와 내 생명을 거둘 건가요?"
"내가 찾아갈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 봐. 그 때 가서 네가 살고 싶다고 울부짖어도
네 온몸의 피를 깨끗하게 먹어줄 테니까…"
브리엔은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다는 듯이 걸음을 옮겼고
헤쥰은 더 이상 브리엔을 잡지 않았다.
단지 멀어지는 브리엔의 등뒤에 대고 큰소리로 외쳤을 뿐이다.
"내 이름은 헤쥰! 헤쥰이에요! 날 기억해주세요! 반드시 날 죽이러 와주세요!"
걸어가는 브리엔은 헤쥰의 귀에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낮게 중얼거렸다.
"그래, 네 가치가 그만큼 빛나게 되면 죽이러 가주지."
헤쥰에게는 살아야 하는 의미가 생겼다.
헤쥰은 자신에게 생명을 준 이의 손에 죽기 위해서 살기로 했다.
그것이 브리엔에 대한 복수라고 생각했다.
브리엔은 헤쥰을 구하고, 자신이 구한 헤쥰을 죽인다.
어린 헤쥰은 자신의 손이 조금도 미치지 못하는 곳에 있는 브리엔에게 복수를 할 방법을
그것밖에 찾지 못했다.
헤쥰은 빛나는 가치를 지닌 사람이 되기로 했다.
자신의 명성이 브리엔의 귀까지 닿아 브리엔이 자신을 찾아와 유혹하면,
그에게 피가 빨리는 순간 귓가에 대고 속삭여주고 싶었다.
"당신은 내 생명을 구했지요. 그리고 지금은 내 생명을 가지고 가는군요.
이건 당신이 한 가장 무의미하고도 무가치한 행동이에요. 당신은 바보 같아요."
그렇게 그를 경멸해주고 싶었다.
자신을 살려서 세상의 냉혹함을 전부 맛보도록 한 주제에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그 냉정하고 차가운 흡혈귀를 한껏 비웃어주고 싶었다.
자신에게 피가 빨려서 죽어가는 먹잇감 따위에게 경멸을 당하는 브리엔의 기분은 어떠할 것인가.
오만하고도 차가운 얼굴이 불쾌함으로 일그러질 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헤쥰은 의욕에 불타올랐다.
온몸의 근육이 쉬게 해달라고 비명을 질러댔지만 헤쥰은 계속해서 숲을 걸어나갔다.
이제는 배고픔 따위에 지지 않는다.
독버섯, 독풀에 중독이 되어서 토악질을 하고 며칠이고 쓰러지는 일이 생기더라도 울지 않는다.
좌절해서 오열하며 왜 이 세상에 태어난 거냐고 부르짖지 않는다.
반드시 명성을 떨치리라.
지금은 이 손에 가진 것 하나 없이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는 어린 아이일 뿐이지만,
언젠가 모든 사람들이 우러러볼 최고의 남자가 되어서,
브리엔을 면전에서 비웃어주리라.
며칠이나 숲을 헤맨 끝에 거의 죽을 지경이 되었지만 이를 악물고 걸음을 내딛는 헤쥰의 눈에
하늘로 높이 치솟은 성의 지붕이 보였다.
"그래, 저기서 시작하겠어!"
파란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을 찌르고 올라간 성 꼭대기의 영상을 마지막으로
헤쥰은 투욱 쓰러지고 말았다.
실컷 자고 일어난 헤쥰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성을 찾아가는 일이었다.
커다란 성이 한가운데에 위치한 그 나라는 오른쪽 나라의 오른쪽에 위치한 나라로,
헤쥰이 살던 나라와는 오른쪽 나라를 사이에 두고 있었다.
오른쪽 나라가 꽤나 큰 나라였기 때문에 헤쥰이 살던 가운데 나라와 상당한 거리가 있었음에도,
이 나라 사람들은 왼쪽 나라와 오른쪽 나라의 전쟁, 그리고 가운데 나라의 멸망에 대한 소문을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커다란 전쟁이 신의 호의를 입고 태어난 한 소년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오른쪽의 오른쪽 나라.
이 오른쪽의 오른쪽 나라는 오른쪽 나라보다는 작았지만 헤쥰이 살던 가운데 나라보다는 컸다.
날씨가 상당히 좋아서 농사가 잘 지어졌기에 농부가 절대적으로 많았고,
그 다음으로는 철 생산이 많았기 때문에 광부와 대장장이가 많았다.
산에서 잔뜩 구르다가 온, 허름한 행색의 헤쥰이 성문 안으로 들어갈 때, 헤쥰을 막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느 집에 사는 아이가 산에 가서 신나게 놀다가 왔나 보구나.
다들 그렇게 생각할 뿐이었다.
사람이 많이 몰려 있는 시장 가운데를 걸어갈 때에도 헤쥰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호의적이었다.
"산에서 놀다 오는 거니?"
"며칠 길이라도 잃었었나 보구나. 배고플 텐데 과일이라도 좀 먹거라."
"남는 빵이 있는데 좀 먹고 갈래?"
"신발이 헤져서 발이 아프겠구나. 버리려던 신이 있으니 그걸 신고 가렴."
사람들은 헤쥰의 초라한 모습이 안 되었던지, 이것저것 헤쥰에게 건네주었고,
시장을 벗어날 무렵, 헤쥰의 얼굴에는 다시 혈색이 돌았고, 헤쥰의 차림새도 그럴듯하게 변해있었다.
하지만 헤쥰은 얼굴에 묻은 흙과 머리카락에 들러붙은 진흙을 씻어내지 않았다.
사람들이 원한다면 집에 들러서 씻고 가도 좋다고 했지만,
헤쥰은 자신의 생김새가 얼마나 특이한지 알고 있었다.
만약 이 나라의 사람들이 가운데 나라에서 벌어진 전쟁에 대해 알고 있다면
헤쥰이 바로 그 전쟁을 일으킨 소년이라는 것도 알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일대의 혼란이 찾아올 것은 말하지 않아도 뻔한 일이었다.
헤쥰은 그렇게까지 깊이 생각한 것은 아니었지만,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룰 때까지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존재가 드러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얼굴과 머리카락은 지저분한 채로 그냥 두었고, 그것은 아주 현명한 행동이었다.
나라 안에 들어오는 것이 쉬웠던 만큼 성에 들어가는 것 또한 쉬웠다.
이 나라를 다스리는 왕은 무척이나 인자했기 때문에 왕을 만나고자 하는 사람들은
어렵지 않게 왕의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문지기에게 왕을 만나고 싶다고 했더니 문지기는 헤쥰의 행색을 한 번 쓱 훑어본 후,
지나가는 여자를 불러 헤쥰을 맡겼다.
헤쥰의 어머니 또래의 여자였다.
헤쥰은 문득 어머니가 보고 싶어져서 눈물이 나려고 했지만 꾹 참으며 여자를 따라갔다.
여자는 말없이 헤쥰을 씻겨주었다.
헤쥰의 얼굴과 머리에 붙어있던 지저분한 것들이 씻겨나가자,
백옥 같은 피부, 아름다운 황금빛 머리카락이 드러났다.
흡사 천사와도 같은 헤쥰의 모습에 여자는 조금 놀란 듯 했지만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좋은 옷을 입혀서 왕실로 안내했을 뿐이다.
그렇게 헤쥰은 왕 앞으로 나아갔다.
왕의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린 헤쥰을 보며, 모여있던 신하들이 수군거렸다.
"혹시 저 아이가…"
"그 전쟁의…"
"그 멸망한…"
"그렇다면 저 애는…"
여러 가지 소리들이 들려왔지만 정확하게 헤쥰의 귀에 내려앉는 목소리는 없었다.
헤쥰은 띄엄띄엄 들리는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왕이 물었다.
"어째서 짐을 보자고 했는가."
헤쥰이 대답했다.
"저는 오른쪽 나라와 왼쪽 나라의 전쟁의 원인이 된 헤쥰이라고 합니다."
그 말에 주위가 좀 더 소란스러워졌다.
왕은 소란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가 물었다.
"어째서 이 나라를 찾아온 거지?"
"저를 거두어주십시오. 제게 교육을 시켜주신다면
머지 않아 이 나라를 최고로 부강한 나라로 만들어드릴 수 있습니다."
다른 나라의 왕들이 그렇듯이 이 나라의 왕 또한 자신의 나라가 부강하게 되어
다른 나라의 침략을 받지 않고 평화롭게 살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은 같았기에,
헤쥰의 제안이 구미에 당겼다.
신의 호의를 입은 소년.
이 소년을 양자로 삼으면 나라가 부강해진다는 신의 계시 때문에
강대국인 오른쪽 나라와 왼쪽 나라의 전쟁이 있지 않았는가.
그 두 나라는 전쟁으로 인해 커다란 손실을 입어 당분간은 전쟁 생각을 하지 못할 것이다.
지금 이 소년을 몰래 양자로 삼아 데리고 있으면 나라는 부강해질 것이고,
다른 나라가 이 소년의 존재를 알게 될 때쯤이면 그들이 감히 넘보지 못할 만큼
강대국이 되어 있을 것이다.
왕은 더 생각할 것도 없었다.
이처럼 좋은 일을 더 생각해 볼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이 소년을 나의 양자로 정하겠다. 모든 것은 조용히 치러질 것이며,
이 이야기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입 단속을 시키라."
한 나라에서 태어나 죽임을 당할 뻔하다가 흡혈귀로 인해 목숨을 구하고,
사람들의 괄시와 천대를 받으며 자라다가 어머니까지 잔혹하게 잃은 채 숲을 떠돌던 도망자 소년은
한 나라 왕의 양자가 되었다.
그렇게 10년이 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