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햇빛 한 바구니, 고양이 두 스푼-52화 (5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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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쥰은 원래 영특했기 때문에 가르치는 것을 빠르게 배웠다.

하나를 가르치면, 둘뿐만이 아니라 셋, 넷까지도 알았다.

헤쥰이 왕의 양자가 된지 1년이 지나자, 헤쥰은 자기가 그동안 배운 것들을 이용해 왕에게 충언을 했고,

헤쥰의 말을 듣고 그대로 실행에 옮긴 왕은 그 결과가 좋은 것을 보고는 일이 있을 때마다 헤쥰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3년이 지난 후, 헤쥰은 공식적으로 나라의 정사에 참여할 자격을 갖게 되었다.

헤쥰의 의견은 무게를 가지고 다루어졌고, 헤쥰이 낸 아이디어가 실패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더 강한 나라에 상납을 하며 나라의 평화를 지켜오던 오른쪽의 오른쪽 나라는

점점 강해져서 더 이상 다른 나라의 도움을 바라지 않게 되었다.

이 현상을 이상하게 생각한 다른 나라들은 이 나라의 왕이 소문의 그 "소년"을 데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소년을 빼앗기 위해 군대를 일으켰다.

그도 그럴 것이, 별반 강하지도 않던 나라가 금세 강해지고 부유해져서는 떵떵거리는 것을 직접 보았으니,

긴가민가했던 신의 계시가 사실이었다는 것을 믿게 된 것이다.

어느 정도의 희생은 필요악이라는 전제하에 그들은 군대를 이끌고 오른쪽의 오른쪽 나라로 쳐들어왔다.

하지만 결과는 참혹했다.

헤쥰은 직접 군대를 지휘하여 적들의 군대가 나라 근처에 오기도 전에 완전히 전멸시켰고,

다른 나라들이 연합을 하여 쳐들어와도 희생 없이 그들의 군대를 짓밟아놓았다.

사람들은 역시 "신의 가호"를 입은 소년이라며 헤쥰을 칭송했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는 걸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니, 딱 한 사람뿐이었다.

헤쥰을 만난 후, 그 일에 대해서 까맣게 잊고 있던 브리엔은 헤쥰에 대한 소문이 들려오기 시작하자

간신히 헤쥰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 때부터 종종 박쥐로 변해 그가 살고 있는 성을 찾아가 헤쥰이 하는 모습을 지켜보곤 해왔다.

"신의 가호라…"

브리엔은 성의 창틀에 앉아, 책상에 엎드려 잠이 든 헤쥰을 응시했다.

헤쥰의 얼굴 아래에는 병법(兵法)을 다룬 두꺼운 책이 펼쳐져 있었다.

"그거 그럴 듯한 말이군. 하지만 신은 저 녀석에게 해준 게 하나도 없다는 걸,

너희 무지한 인간들은 모르겠지. 저 녀석은 신의 가호 때문이 아니라

자기가 그만큼 노력을 했기 때문에 이만큼의 실력을 보일 수 있었던 거야."

브리엔은 밤하늘로 날아올랐다.

지금까지 보아온 어느 누구보다도 아름답게 자라난 헤쥰.

헤쥰이 많이 유명해지기는 했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좀 더 성장해라, 소년. 네 아름다움이 최고의 빛을 발하는 순간, 너의 그 하잘 것 없는 생을 마감하게 해주겠다."

나라가 변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변한 것은 왕이었다.

어느 나라도 감히 "신의 호의"를 입고 있는 소년이 살고 있는 이 나라에 쳐들어올 생각을 하지 못했다.

아무도 건드리지 못할 만큼 나라가 강해지자 왕은 점점 욕심이 많아졌다.

헤쥰은 나라를 지키는 데에 필요한 전쟁만을 하고 싶었지만,

사실 그 전쟁조차도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었지만,

왕은 불필요한 전쟁을 벌여서 다른 나라를 침략하고 영토를 넓혀갔다.

그저 헤쥰이 있는 나라에서 침략해왔다는 이유로, 침략 당한 나라는 저항하지 않고 백기를 내걸었지만,

왕은 하지 않아도 될 살인을 하며 사람들을 죽이고 금은보화를 빼앗았다.

헤쥰은 왕이 하는 모양새가 몹시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자신을 이렇게 성장하기까지 도와준 사람이기에 쉽게 져버릴 수 없었다.

왕이 변하자 신하들도 변하고, 윗사람들이 변하자 백성들도 변했다.

헤쥰이 처음 이 나라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사람들은 헤쥰에게 호의를 보이면서 이것저것 챙겨주곤 했다.

지금은 그 때보다 더 살기 좋아지고 가진 것도 많아졌는데,

사람들의 욕심은 과하게 증폭되어 남에게 자신의 것을 절대로 내주지 않으려고 하고,

좀 더 남의 것을 빼앗기 위해 사기와 살인을 서슴치 않았다.

길가는 행인에게 잘해주는 일 따위는 절대 일어나지 않았다.

모르는 얼굴이 보이면 우선 경계부터 했고, 성안에 들어오는 사람들도 신분이 확인되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쫓겨나거나 반항할 시에는 죽임을 당하기까지 했다.

헤쥰은 절망스러웠다.

좀 더 가치있는 인간이 되어 브리엔에게 복수를 하고자 했던 개인적인 열망으로 인해

한 나라를 완전히 망쳐버렸다는 자괴감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나이를 먹어갈수록 브리엔에 대한 생각이 바뀌어갔다.

그 때는 이해할 수 없었던 어머니의 말을 이제는 이해할 수 있었다.

브리엔은 외로웠던 것이다.

너무나 외롭고 고독하여 사람에게 다가가고 싶어도, 사람의 피를 먹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그에게

사람과 친해지는 것은 치명적인 독이었다.

어떻게 자신과 대화를 나누고 자신에게 영향을 끼치는 사람들의 피를 먹을 수 있겠는가.

때문에 그는 어쩔 수 없이 사람을 피해야만 했고, 사람의 체온을 기억에서 지워야만 했다.

그래서 그는 차가움으로 무장하고 다가오는 사람들을 밀쳐내며

그렇게 외롭고 고독하게, 손가락으로 꼽을 수 없을 만큼 오랜 세월을 살아야 했던 것이다.

헤쥰이 갓난아이였을 때 헤쥰을 도와주었던 브리엔은 소년의 모습이었고,

10년이 지나 다시 만났을 때의 브리엔의 모습도 소년이었다.

아마도 소년의 모습으로 계속해서 살아온 것이리라.

그것에 생각이 미치자, 브리엔의 외로움과 고독이 가슴에 사무치도록 느껴져,

그 검고 슬픈 눈동자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다가 잠드는 적이 많았다.

브리엔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보내왔던 나날들은 어느새 그를 한 번 더 만나서 그의 곁에 있기 위해

보내는 시간으로 바뀌었다.

헤쥰은 브리엔을 열망했고, 하루라도 빨리 브리엔이 찾아와 주기를 바랐지만,

5년이 지나고, 6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났는데도 브리엔은 찾아오지 않았다.

'고맙다고 말할 거야.'

전쟁의 포로로 잡혀와 목이 매달려 죽는 사람들을 보며 헤쥰은 생각했다.

'이 세상은 비록 참혹한 괴로움뿐이지만, 내게 한 가지 열정을 준 그에게 고맙다고 말할 거야.'

헤쥰은 벌떡 일어났다.

왕보다 먼저 일어나는 것은 대단한 실례였지만 헤쥰을 꾸짖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모든 것은 헤쥰이 이룩한 일.

혹시라도 헤쥰의 기분이 틀어져서 몰래 다른 나라로 가버리면 모든 것을 잃지 않겠는가.

헤쥰은 방으로 향하며 생각했다.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 간절하게 부탁할 거야. 부탁이니 나를 그의 곁에 있게 해달라고…'

헤쥰의 방은 왕의 방 이상으로 아름답게 꾸며져 있고, 기온 역시 적당하게 따뜻했지만

헤쥰은 서늘함을 느끼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브리엔이 더 이상 그런 외로운 눈빛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서늘하고 잔혹하다고만 느꼈던 그 암흑의 눈동자.

이제 헤쥰은 그 눈동자 안에 담겨 있던 무한한 슬픔과 고독의 그림자를 되짚어낼 수 있었다.

그의 곁에 있고 싶었다.

헤쥰은 22살의 건장한 청년이 되었다.

그 아름다운 외모와 선량한 마음, 기품 있는 자태와 지적인 눈동자에 반하지 않는 여인네는 없었다.

각 나라에서 자신의 딸과 헤쥰의 혼례를 성사시키기 위해 사신을 보냈다.

각 나라의 왕들은 강대국인 오른쪽의 오른쪽 나라와 혼례가 성사될 경우,

자신의 나라에 가지고 올 막대한 이익을 꿈꾸고 있었다.

하지만 헤쥰은 어느 누구에게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수많은 아름다운 여인들이 헤쥰에게 접근했지만 헤쥰은 그들에게 미소조차 보여주지 않았다.

브리엔을 꿈꾸게 된 순간부터 헤쥰은 웃음을 잃었다.

예의상 보이는 작은 미소조차도 헤쥰에게는 남아있지 않았다.

왕은 가장 괜찮은 나라를 골라잡아 헤쥰에게 결혼할 것을 제안했지만 헤쥰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 아직 해야할 일이 있습니다."

왕은 헤쥰의 말을 납득할 수 없었다.

납득하기 힘든 것은 헤쥰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시간이 지나고 아무리 소문이 자자한 젊은이가 되었어도 브리엔이 찾아주지 않는데

더 이상 무슨 할 일이 남았단 말인가.

시간이 가면 갈수록 이 나라만 점점 망치고 있는 꼴이 아닌가.

"나 따위는 잊어버린 겁니까?"

헤쥰은 밤마다 괴롭게 한숨을 토해냈다.

"나 따위는 당신의 기억 속에 존재하지도 않기에 저를 찾지 않으시는 겁니까?

제가 얼마나 더 나아져야 당신은 나를 돌아봐주실 겁니까?"

그런 헤쥰을 지켜보는 브리엔은 헤쥰을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브리엔이 만나온 인간들은 아무리 가진 것이 없는 자라고 할지라도 더 살고 싶어했다.

그들은 짧은 생을 가진 만큼 자신들의 삶을 소중히 여겼다.

길가의 거렁뱅이라도 죽을 때가 되면 죽지 않기 위해 발버둥을 쳤다.

지금 헤쥰은 어떠한가.

많은 것을 가지고 있고 충분히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그럼에도 왜 자신을 원하는가.

어찌하여 자신의 손에 죽게 될 날을 기다리고 있는가.

브리엔으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감정의 원인을 알기 위해 헤쥰의 목에 송곳니를 찔러 넣는 것을 미루고 미루었다.

"진짜 모르겠네."

브리엔은 중얼거렸다.

"더 오래 지나도 역시 모를 것 같네. 차라리 젊을 때 피를 접수하는 게 낫겠어."

그래서 브리엔은 헤쥰이 22번째의 생일을 맞이한 날 늦은 밤, 헤쥰의 앞에 나타났다.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브리엔은 여전히 소년인 채 남아있었다.

헤쥰보다 훨씬 어려 보이는 소년의 모습이었지만, 헤쥰은 브리엔의 앞에 정중하게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감히 브리엔을 올려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드디어 찾아주셨군요."

한숨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래. 가치 있는 인간이 되면 온다고 했잖아. 명성이 자자하더군.

아름답고 현명하며 성격까지 좋다고 말이야. 대단한데? 이 정도까지는 기대도 안 했는데 말이야."

"당신의 곁에 있고 싶었습니다."

"잘 모르나 본데, 내가 네 피를 빨면 넌 죽어. 내 곁에 있을 수 없다구."

"그래도 좋습니다. 당신의 피가 되어 당신의 몸 안에 영원히 흐르는 거니까요."

헤쥰은 감격스러웠다.

다시는 볼 수 없을 거라고 포기한 순간, 브리엔이 나타났다.

공포스러울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도, 눈동자 깊이 담긴 외로움도 여전했다.

허락만 해준다면 그를 끌어안고 싶었다.

간절히 원했노라고, 너무나 보고 싶었노라고 말하고 싶었다.

어쩌면 그의 곁에 있기를 원했던 마음은 그를 위해서가 아닌 자신을 위해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곁에 있고 싶었다.

"너… 뭔가 좀 이상한 거 아니냐? 대체 네가 뭐가 아쉬울 것이 있어서 나한테 피를 빨리려는 거지?

넌 모든 것을 가졌잖아. 사람들이 원하는 아름다운 외모, 부, 권력… 너에게는 모든 게 있다구.

그런데 왜 죽고 싶어하는 거야?"

"죽고 싶은 게 아닙니다."

헤쥰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감히 브리엔의 얼굴을 쳐다보는 자신을 용서해달라는 듯 간절한 빛을 띠고 말을 이었다.

"전 당신의 곁에 있고 싶은 겁니다."

브리엔이 인상을 찌푸렸다.

"내 곁에? 왜? 내 곁에 있으면 너에게 콩고물이라도 떨어질 것 같아?

너에게 영생을 줄 것 같아? 그래서 영원히 이 권력과 아름다움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아?"

"권력도, 아름다움도, 부유함도 필요 없습니다. 그것이 의심스러우시다면

제 얼굴에 흉한 상처를 내고, 제가 가진 모든 것을 가져가셔도 좋습니다.

제 평생의 염원은 단 하나, 당신의 곁에 있고 싶다는 것뿐입니다."

헤쥰의 열정에 찬 눈동자가 브리엔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브리엔은 처음으로 일어난 마음의 동요를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 잠시 입을 다물고

헤쥰을 노려봤다.

고작해야 인간 주제에, 20년 정도밖에 못 산 인간 주제에

자신의 감정을 혼란스럽게 만든 헤쥰을 한 대 때려주고 싶은 한편,

그를 옆에 두는 것도 꽤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브리엔은 헤쥰이 더욱 더 빛나기 위해 밤을 새워 노력하는 것을 지켜본 순간부터

헤쥰에게 커다란 흥미를 느끼고 있던 터였다.

브리엔이 손을 내밀었다.

헤쥰은 감개무량한 듯 얼굴을 붉히고 그 손을 잡았다.

동상이 걸릴 듯한 차가움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차가운가? 내 손을 뿌리치고 싶겠지?"

브리엔이 차갑게 말했다.

헤쥰은 손을 떼지 않았다.

얼마나 간절히 원하고 원했는데 이 정도 차가움으로 포기한단 말인가.

헤쥰의 얼굴에는 고통스러운 표정조차 없었다.

"날 만나기 위해 평생토록 노력한 너의 열의는 인정해주지.

원래는 상대가 고통을 느끼지 못하도록 최면을 걸고 그 피를 빨지만,

너에 대한 예우로 너는 네 몸이 받는 고통과 죽음의 순간을 고스란히 맛볼 수 있게 해주겠어.

어때? 괜찮겠어?"

"물론입니다."

헤쥰이 말했다.

"이 모든 것을 포기할 자신이 있는 건가? 피가 뽑혀나가는 건 정말 괴로울 거야.

마지막 순간에 살려달라고 몸부림치지 않을 자신 있어?"

"당신의 피가 되어 영원히 살게 되겠지요."

"젠장!"

브리엔은 헤쥰을 잡은 손에 힘을 줘, 헤쥰을 확 끌어당겼다.

브리엔보다 조금 작은 키의 헤쥰은 브리엔의 몸에 바짝 밀착이 되었다.

브리엔의 온몸에서 흘러나오는 냉기에 혈관까지도 얼어붙을 것 같았지만

떨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눈을 감았다.

브리엔의 손가락이 헤쥰의 얼굴을 살짝 스쳤다.

차갑다.

"들어라, 소년. 아니, 이제는 나보다 더 늙어 보이니까 인간이라고 해야겠지.

들어라, 인간. 넌 지금까지 내가 만난 인간들 중에 가장 이해할 수 없고, 가장 이상하고,

가장 특이한 인간이었다. 아마 앞으로도 너처럼 특이한 인간은 만나지 못할 테지.

그리고 아마 앞으로도 평생 너만큼 아름다운 인간도 난 만나지 못할 거야.

그러니 기억하도록 하지. 너의 아름다움을…"

브리엔의 숨결이 귓가에 느껴졌다.

나직하면서도 거친 목소리는 마법처럼 헤쥰의 몸 안으로 미끄러져 내려왔다.

브리엔의 입술이 헤쥰의 코에 닿았고, 입술에 닿았다.

브리엔이 느껴질 때마다 헤쥰은 움찔했다.

헤쥰의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헤쥰의 입술에서 조금 오래 머물던 브리엔의 입술은 헤쥰의 날카로운 턱선을 지나 아래로 내려가

헤쥰의 길고 미끈한 목덜미에 닿았다.

헤쥰의 향취가 부드럽게 코끝을 간질이는 걸 느끼며, 브리엔은 헤쥰의 목에 날카로운 송곳니를

깊이 찔러 넣었다.

송곳니가 들어가는 순간, 고통 때문에 딱딱하게 굳어있던 헤쥰의 근육이

조금씩 부드럽게 풀려 브리엔에게 고스란히 자신의 몸을 맡겼다.

브리엔은 약간의 무게감을 느끼며 헤쥰을 한 팔로 안고 피를 마셨다.

목안으로 넘어 들어오는 피는 그 누구의 피보다 달콤하고 뜨거웠다.

정신 없이 피를 탐닉했다.

헤쥰은 이를 악 깨물고 고통의 신음을 흘리지 않으려 애썼다.

점점 의식이 멀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 순간 아쉬운 것은 자신이 남기고 가는 물질이나 자신의 삶이 아니라,

조금 더 브리엔을 보고 싶은데 볼 수 없음 때문이었다.

헤쥰이 완전히 의식을 잃기 전, 브리엔은 헤쥰의 목에서 입술을 떼어냈다.

작은 두 개의 구멍으로 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피는 가느다란 선을 그리며 하얀 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브리엔은 헤쥰을 번쩍 안아들고 침대 옆으로 걸어가 조심스레 헤쥰을 뉘였다.

침대 위에 헤쥰의 아름다운 금발 머리가 태양처럼 흐트러졌다.

브리엔은 말없이 헤쥰을 내려다봤고, 헤쥰 역시 말없이 브리엔을 올려다봤다.

언젠가 봤던 바다와 같은 그 눈동자가 원망도, 저주도 없이 브리엔을 향하고 있었다.

"만족스러운가?"

"……"

"이제 곧 너는 죽게 될 거야. 남아있는 피가 전부 흘러나가면 너의 영혼은 네 몸을 빠져나가게 되겠지.

이제 만족스러워?"

헤쥰은 대답 없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를 보는 순간, 브리엔은 이 앞에 누워있는 이상한 녀석을 반드시 살려서 자신의 곁에 두고 싶다는

강한 충동에 휩싸였다.

그 충동은 브리엔의 냉철한 이성을 마비시킬 정도로 강한 것이어서,

브리엔은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는 채 송곳니로 자신의 팔뚝을 꽉 깨물었다.

고통조차 느끼지 못하고 침대 위에 걸터앉아 손가락을 헤쥰의 입술에 댔다.

헤쥰은 눈꺼풀이 무거웠지만 조금이라도 더 오래 브리엔의 모습을 담기 위해

억지로 눈을 들어올렸다.

브리엔의 손등을 타고 흐르는 피가 헤쥰의 입술을 적셨다.

비릿한, 약간은 쓴 피가 헤쥰의 혀를 지나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그 순간, 얼어붙는 듯한 고통이 헤쥰을 휘감았다.

"으윽…"

피가 빨리는 고통, 브리엔의 차가운 몸에 닿는 고통까지도 감내할 수 있었던 헤쥰이지만

그 고통까지 견딜 수는 없었는지 괴로운 신음을 토해냈다.

신음 소리를 들은 브리엔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헤쥰의 입가에 있던 자신의 손을 거두었다.

하지만 브리엔의 피는 이미 헤쥰의 목을 넘어간 상태였다.

헤쥰의 몸이 브리엔의 피를 받아들여 변화를 일으키고 있었다.

"제기랄! 내가 지금 뭘 한 거지?"

브리엔은 아직까지도 상처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닦아내려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고통스러움에 몸부림치는 헤쥰을 노려봤다.

"으으으…"

"빌어먹을!"

브리엔은 헤쥰이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한 팔로 헤쥰의 팔을 꽉 잡고 그 귀에 속삭였다.

"걱정마라. 금방 끝날 거야. 이 고통이 끝나면 넌 영원한 생을 얻게 되겠지.

내가 죽지 않는 한, 너 역시 죽지 않을 거다.

그러니 이 고통을 견뎌내고 새로운 생을 얻어 내 곁에 있어라. 넌 그럴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으니까…"

고통 중이지만 브리엔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 헤쥰의 입에서는 신음이 흘러나오지 않았다.

브리엔은 헤쥰보다 더 괴로운 표정으로 헤쥰을 응시했다.

어쩐 일인지, 헤쥰이 느끼는 고통이 그대로 자신에게 전해지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똑같은 표정으로 서로를 응시하며 고통을 견뎌내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헤쥰의 표정이 점점 평온해지기 시작했다.

고통이 끝난 것이다.

헤쥰은 거친 숨을 고르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약간 비틀거리며 침대를 내려오는 헤쥰을, 브리엔은 말없이 응시하고 있었다.

헤쥰이 브리엔의 앞에 섰을 때, 브리엔은 물었다.

"후회하나? 나와 함께 영원한 삶을 살게 된 것을…

내가 죽어야만 죽게 되는 삶을 살게 된 것을…"

헤쥰은 빙긋 미소를 지었다.

마치 나이 많은 형이 어린 동생을 안심시키려는 듯한 다정한 미소였다.

헤쥰은 브리엔의 앞에 무릎을 꿇고 브리엔의 차가운 손등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앞으로 주인님을 모시게 된 헤쥰입니다. 주인님이 세상을 떠나시는 그 날까지

주인님의 곁에서 주인님을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헤쥰을 성으로 데려다 놓은 브리엔은 곧바로 신을 찾아갔다.

그리고 신에게 말했다.

"다시는 내 종의 운명에 관여하려고 하지 마. 그 애는 내 것이야.

다시 한 번 그 애에게 손을 대면, 당신의 소소한 즐거움조차 사라지도록 해주겠어.

내 소유에 다른 놈이 손 대는 건 딱 질색이니까."

그리하여 신은 헤쥰에게 더 이상 신경을 쓰지 않았다.

헤쥰이 브리엔과 함께 떠난 후,

헤쥰의 힘만 믿고 안하무인으로 행동하던 오른쪽의 오른쪽 나라는

다른 나라들에게 짓밟히는 운명을 맞이했다.

그 나라는 수 십 대의 왕을 거칠 때까지 다른 나라의 종속국이 되어,

강대국의 눈치를 보고 살아야만 했지만,

어느 영특한 왕이 왕위에 올라 나라를 일으키게 되었고 다시 주권을 되찾게 되었다.

그리고 또 몇 대의 왕이 지나간 후에는

역사에서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난폭한 왕이 그 나라를 다스리게 된다.

나라의 백성들은 왕의 눈치를 보느라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언제나 어두운 잿빛 옷만을 입어야 했으며,

왕이 원할 때는 언제든 딸을 바쳐야 하는 그런 삶을 살아야 했다.

하지만 돌아가는 세상사야 어찌되었든,

브리엔과 헤쥰은 깊은 숲 어딘가에 존재하는 커다란 성에서

다른 것에 관심을 두지 않고 둘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신을 찾아가기 위한 여덟 명의 소년, 소녀들이 그들의 성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번외] 당신의 곁에 서기 위하여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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