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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엔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자, 다들 놀라서 브리엔을 쳐다봤다.
"그래…"
브리엔은 큰 깨달음을 얻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모닥불로 인해 생긴 그림자가 브리엔의 하얀 얼굴 위에서 현란하게 움직여댔다.
"그래, 헤쥰… 헤쥰이었어."
"응? 뭐가? 헤쥰이 뭐야?"
브리엔은 고개를 저으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헤쥰. 왜 그 이름을 잊고 있었지?'
브리엔은 먼 곳에 보이는 성을 응시했다.
어두운 밤하늘보다도 더 새까만 성은 언제나 그래왔듯이 굳건하게 그곳을 지키고 있었다.
그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브리엔은 크게 안심이 되었다.
늦은 시간이었기에 다들 잠이 들었다.
옆에 누운 사람이랑 소곤거리는 소리도 잦아들고 새근거리는 숨소리만이 그곳에 가득찼다.
하지만 브리엔은 잠자지 않고 나무의 두꺼운 가지에 올라가 앉아 성을 보고 있었다.
평소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던 커다란 성에 의미가 생겼다.
"헤쥰. 반드시 돌아올게. 네 이름을 부르면서 해주고 싶은 말이 있어.
그러니까, 반드시 돌아올게. 기다려라."
그 시각, 헤쥰이 브리엔과 일행이 떠난 곳을 향해 난 창가에 서서 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주인님. 그들과의 여행에서 주인님 역시 행복을 찾아오시기 바랍니다.
저는 주인님이 있었기에 살아온 시간이 길게 느껴지지 않았고 무료하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주인님께는 일부러 죽고 싶어 신을 찾을 만큼 무료한 시간이었는가 봅니다.
난 주인님께 아무런 의미가 되지 못했으니, 그들에게서 주인님이 의미를 찾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부디… 조금만 더 제 곁에 있어주십시오. 제게 주인님의 곁에 있을 수 있는 행복을
좀 더 누릴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시체의 바람이 몰아쳤다.
곳곳에 시체가 나뒹굴었다.
피를 뒤집어쓴 한 소녀만이 시체들의 사이에 서 있었다.
지독한 피비린내 가운데 선 소녀의 얼굴에 싸늘한 미소가 떠올랐다.
소녀의 손에 들려있는 칼에서 피가 뚝뚝 흘러내렸다.
한 소녀에 의해 한 마을이 파괴되었고, 그 소녀에 의해 또 다른 마을이 파괴되었다.
소녀가 지나간 마을에 생존자는 없었다.
처참하게 짓이겨진 시체들만이 나뒹굴며 고통을 바람에 실었을 뿐이다.
우준들은 기분이 좋았다.
너무나 친절한 마을에 도착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마을은 젊은 여자들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마을의 여자들은 아름답고 고운 피부, 탱탱한 몸매를 가진 매력적인 여자들이었다.
그런 아름다운 여자들이 친절하게 맞아주는데 불만을 가질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딱 두 사람, 차희와 브리엔을 빼고는 전부 싱글벙글이었다.
"인마, 너 표정 좀 풀어."
여자들의 성대한 접대에 기분이 좋아진 강전이 브리엔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브리엔에게는 저주로 인한 힘이 통하지 않았기에 강전은 스스럼없이 브리엔을 만질 수 있었다.
모든 것을 얼려버릴 듯 차가운 브리엔의 체온도 예전보다는 나아져서 만지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됐네, 멍청이들…"
브리엔은 중얼거리며 팔짱을 끼고 앉아, 앞에 차려진 음식들을 쳐다봤다.
이 세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음식들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만든 재료는 고급일 것이 분명했다.
음식에서 풍겨 나오는 향긋한 향기가 얼마나 정성을 쏟아 만들었는지 알려주고 있었다.
"넌 안 먹어?"
차희의 질문에 브리엔이 어깨를 으쓱했다.
"아, 원래 이런 건 안 먹나?"
"간혹 입이 심심할 때는 먹기도 하지."
먹든 안 먹든 상관없었다.
먹어도 배가 채워지지 않고 맛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피 이외의 다른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서 역겹거나 하지도 않았다.
누군가 대접을 해야할 때는 맛있는 음식이라도 먹는 양 표정 연기를 하며 먹을 수도 있었다.
"그럼 좀 먹어볼까?"
브리엔은 상냥하게 웃으며 새로운 음식들을 계속 날라다 주는 여자들을 흘끗 쳐다본 후
앞에 놓인 포크와 나이프를 들었다.
황홀할 정도로 맛있는 식사가 끝난 후에는 안마 타임이 시작되었다.
여자들은 커다란 방으로 그들을 인도해 푹신한 침대에 눕히고,
오랜 여행으로 지친 그들의 근육을 풀어주기 시작했다.
섬세하고 부드러운 손놀림과 방안에 가득한 향기로운 약초의 향이
그들의 신경을 부드럽게 풀어주었다.
우준조차도 편안함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먼 곳으로 여행을 가시나 봐요. 젊으신 분들이…"
리현의 어깨를 주물러주던 여자가 말했다.
"뭐, 그냥…"
브리엔이 옆에 있기 때문일까?
여자들의 마음이 읽히지 않아서 편안했다.
이런 친절한 여자들이 무슨 꿍꿍이를 가지고 있겠냐마는,
설령 꿍꿍이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 생각을 읽어내서 이 편안한 시간을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어머!"
강전의 팔을 주물러주던 여자가 강전의 몸에서 파직하고 일어난 전기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손을 떼었다.
"에고고…"
강전이 중얼거렸다.
"아프죠? 제 체질이 이래놔서… 이제 안 주물러줘도 돼요."
강전은 여자가 뭐라고 말하기 전에 얼른 일어나서 벗어두었던 겉옷을 챙겨 입었다.
강전이 서둘러 집 밖으로 나가는 것을 지켜보던 비인이 빙그레 웃으며,
손가락을 꼼꼼히 마사지해주는 어린 여자에게 말했다.
"저도 이제 그만… 친구랑 잠깐 할 이야기가 있어서요."
비인은 부드럽게 손을 빼내고 강전의 뒤를 따라나갔다.
강전은 일행이 있는 집 앞에 있는 낮은 벤치에 허리를 구부리고 앉아있었다.
어쩐지 그 모습이 처량하게 느껴져서 비인은 조심스레 강전의 뒤로 다가가
강전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파지직-
강전의 감정이 혼란스러운 탓인지, 조금 강한 전기가 튀었다.
"손 치워, 초비인."
강전이 중얼거렸다.
"괜찮아."
"니들이 이딴 전기 정도로 날 피하지 않는 거 아니까, 손 저리 치우라고, 병신아.
조낸 아프잖아."
"그러게 괜찮다니까…"
"아, 씨발!"
강전이 벌떡 일어나서 비인을 노려봤다.
강전과 비슷한 키의 비인은 강전의 눈을 똑바로 마주 봤다.
강전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많은 것을 경험하여 지치고 고독한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자신을 향하자, 강전은 인상을 찌푸리고 눈을 비켰다.
"그냥 이런 건… 종종 있는 일이라구. 진짜 조낸 자주 있는 일인데…
그래도 지금은 니들이 곁에 있어주니까 훨씬 기분 괜찮다구.
그냥 좀… 그냥 나도 인간이고, 아직 어리니까… 이런 일이 생기면 조금 섭섭해서 그렇지…
아, 씨발… 진짜 나 아무렇지도 않다구. 그러니까 일부러 아픈 짓 할 필요 없어!"
비인의 입가에 서글픈 미소가 떠올랐다.
비인이 한 발자국 강전에게 다가서자, 강전은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그래서 비인은 한 발자국 더 앞으로 다가가 강전이 물러나기 전, 강전을 꽉 끌어안았다.
파직-
강전의 몸과 맞닿은 곳에 강한 스파크가 일어났다.
어두운 공기가 순간적으로 밝아질 정도의 스파크였다.
강전은 당황하며 비인을 밀어내려고 했지만, 손이 닿는 순간 또 다른 스파크가 일어나서
어쩌지도 못하고 양 손을 번쩍 치켜든 채 외쳤다.
"아아, 씨바… 이 멍청한 새끼야. 이러지 않아도 된다니까!"
"난 그냥…"
비인이 강전을 안은 팔에 힘을 풀지 않고 말했다.
"네 어깨가 서글프게 움츠러든 모습을 보는 것이 더 아파."
"아, 빌어먹을…"
강전은 아주 곤란했다.
어떤 말을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아아, 씨바… 빌어먹을…"
그래서 할 말이 없을 때는 습관처럼 내뱉던 욕지거리만 하염없이 내뱉었다.
"졸리다, 그치?"
한참 후에 비인이 말했다.
"그래, 졸라 졸리네."
강전이 고개를 끄덕였다.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눈꺼풀이 무거워서 그들은 옆에 있는 벤치에 아무렇게나 앉았다.
그리고 서로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순식간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안에서 안마를 받고 있는 일행들도 마찬가지의 증상이 일어났다.
비인과 강전이 잠들기 바로 직전, 그들 역시 견딜 수 없는 졸음을 느꼈던 것이다.
순간, 우준은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너무나 피곤해서 더 이상의 생각을 이어나갈 수가 없었다.
눈을 뜨고 있는 것이 지구를 떠받들고 있는 것보다 더 힘들게 느껴졌다.
아무리 의지가 강한 우준이라지만 잠의 유혹을 벗어나기는 무리였는지
얇은 눈꺼풀이 서서히 감기며, 검은 눈동자를 가리우고 말았다.
일행이 모두 잠든 것을 확인한 여자들은 서로에게 눈짓을 보냈고,
동시에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일제히 밖으로 몰려나갔다.
마을의 여자들은 모두 마을의 중간에 위치한 커다란 건물 안에 모여있었다.
건물의 외관은 산뜻하고 깨끗한, 밝은 회색빛의 벽돌로 지어져 있었지만
내부는 겉에서 보는 것과는 너무도 달랐다.
내부를 둘러싼 검붉은 색의 벽돌은 처음부터 검붉은 색이 아니었던 것 같다.
아마도 회색빛의 벽돌에 피가 스며들어 이렇게 음침하고도 불쾌한 빛을 띄고 있는 것이리라.
눅눅한 곰팡이 냄새와 썩은 피비린내가 섞여 불쾌한 냄새를 풍겼지만
여자들은 그런 것에 조금도 영향을 받지 않은 듯
얼굴에 홍조를 띄고 한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이 머무는 곳에는 검은 날개를 양쪽으로 펼친 싸늘한 악마의 형상이
검은 대리석으로 조각되어 놓여있었다.
곧 악마의 조각 앞부분이 둥근 원을 그리며 갈라졌고
나직한 소음과 함께 아래에서 한 여자가 천천히 위로 올라왔다.
고작해야 15살 정도로 보이는 어린 여자였지만
이 안에 모인 다른 여자들보다 훨씬 위엄이 있었고, 가장 아름다운 옷을 입고 있었다.
그녀가 등장하자 소란스럽던 실내가 조용해졌다.
그녀는 좌중을 한 번 둘러보며 말했다.
"실로 오랜만에 희생양이 우리 마을로 들어왔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감격에 차 있었다.
이 마을은 마녀들이 모여서 살고 있는 마을이었다.
모두가 아름다운 여성이었지만 사실은 100살을 훌쩍 넘긴 여자들이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20대의 뽀얀 살결과 아름다운 외모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이 마을에 들어오는 여행객들을 붙잡아
그들의 피로 목욕을 하고, 펄떡펄떡 뛰는 그들의 심장을 생으로 먹기 때문이었다.
마녀들은 마법을 부릴 줄 알았고, 온갖 약초에 대한 지식이 풍부했기에
여행객들을 대접하는 음식과 피워놓은 향초에 수면제를 섞어
여행객들을 깊이 잠재우고 자신들의 일을 계획했다.
젊은 여자들의 피는 자신들의 젊음을 유지하는데 쓰였고
남자들은 자신들의 자손을 생산하는데 쓰였다.
남자를 고르는데도 나름의 기준이 정해져 있어서, 건강하고 잘 생기지 않은 남자들은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해 쓰레기처럼 버려졌다.
이 길로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자꾸 실종이 되고, 그 원인도 알 수 없게 되자
사람들은 점점 마녀의 마을이 있는 길로 다니는 것을 관두었기 때문에
최근 몇 년 동안 그들이 설치해놓은 올가미에 걸려든 사람이 없어서 곤란하던 차였다.
마법의 힘으로 둘러싸인 마을 밖으로 나가면 몸에 서려있던 마력이 사라져서 마법을 사용할 수
없는 데다가, 죽을 나이가 지난 마녀들은 그 자리에서 죽게 되기 때문에
먹잇감을 찾으러 밖에 나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때문에 이번에 우준 일행의 방문은 그들에게 있어서 무척이나 반가운 방문이었다.
"게다가 이번에 들어온 희생양들은 모두 상태가 아주 좋습니다.
한 명도 버릴 것이 없어요."
말하는 15살 가량의 어린 마녀는 사실은 이 마을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마녀로
이미 200살의 생일을 넘긴지 오래였다.
마녀들이라고 전부 200살이 넘도록 사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오래 산 그녀는 마녀들에게 "마마"라고 불리며 대우를 받고 있었다.
"남자들은 전부 건강한가요?"
"네, 마마님. 아주 건장하고 군살 하나 없이 탄탄한 몸매를 지니고 있습니다.
얼굴도 전부 잘 생겼구요."
"여자들은 어떤가요? 몸에 이상이 있는 사람은 없습니까?"
"네, 마마님. 아까 마사지를 하면서 검사를 해봤는데 조금도 이상이 없었습니다."
마마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 미소는 15세의 소녀에게서 나올 수 없는 요염하고도 잔혹한 미소였다.
"잘 됐군요. 그렇다면 슬슬 의식을 거행하도록 하지요.
우선 여자들부터 처리하도록 해요. 너무 오랫동안 젊은 여인의 피를 받지 못해서
몸이 늙어가고 있는 것이 느껴져요. 서둘러 진행합시다."
"네, 마마님."
마녀들은 마마에게 깊이 고개를 숙여 존경의 뜻을 표현한 후에 집 밖으로 나갔다.
마녀들이 자신들을 두고 무엇을 계획하는지 알 리 없는 우준 일행은
깊은 잠에 빠져, 모든 저주가 풀려 행복한 삶을 살게 되는 즐거운 꿈을 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