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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준 일행을 처치하기 위해 밖으로 나오던 마녀들은 앞에 서 있는 브리엔의 모습에 놀라 걸음을 멈췄다.
달빛 아래에 서 있는 브리엔은 모습만으로도 상대를 얼릴 만큼 차가운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싸늘함이 공기 안에 가득 찼다.
달빛은 브리엔의 편인 듯 그 주위를 감싸고 있었고,
내려앉은 공기 역시 브리엔에게만 응원을 보내주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다를 것 없는 어린 소년의 모습에 수 십, 수 백 년을 살아온 마녀들이 바짝 긴장해서 눈을 크게 떴다.
"니들의 속셈은 아주 잘 알았어."
매력적인 붉은 입술이 벌어지며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차가운 목소리였다.
"정말 흥미롭군."
흥미롭다 말하면서도 브리엔의 싸늘한 표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아주 아름답게 만들어진 훌륭한 조각상처럼 보일 정도로 브리엔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것이 마녀들을 질리게 만들었다.
대체 이 소년은 무엇이기에 이토록 아름답고 이토록 차갑단 말인가.
마녀들이 움직이지 못하고 있자, 이상히 생각한 마마가 마녀들을 밀치고 앞으로 나왔다.
마마의 눈이 브리엔과 마주치는 순간, 마마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200년을 살아왔지만 이런 눈빛을 가진 사람은 처음 봤다.
온몸이 얼어붙는 긴장을 느끼며 마마가 입을 열었다.
"어떻게… 깨어있는 거지?"
대부분의 인간들은 마마의 목소리만 듣고도 마마에게 홀린다.
아름답고 묘한 매력을 가진 어린 소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매혹적인 목소리는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마마에게 복종하도록 만든다.
하지만 브리엔은 여전히 서늘한 눈빛으로 마마를 응시하고 있었다.
"어떻게 깨어있느냐고? 그건 당연하잖아. 피에 몸을 적셔 젊음을 유지하는 하등한 마녀들 따위의
수작에 걸려들 것 같아? 인간들은 이기심 덩어리야. 아무 것도 묻지 않고 남에게 잘해주는 인간은 없지.
저 녀석들은 아직 순진하고 어려서 니들의 친절을 의심 없이 받아들였겠지만, 난 그렇지 않거든.
니들처럼 요상한 계집들이 베푸는 친절을 마음 놓고 받아들였을 리가 없잖아."
"그게 무슨 망언이냣!"
"망언이라니… 사실이잖아, 안 그래? 내가 그대로 잠들었으면 니들이 날 강간했을 거 아냐."
브리엔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지만 그건 아주 잠시였을 뿐, 금세 처음의 조각상 같은 표정으로 돌아갔다.
"흥. 네가 깨어있다고 해서 뭔가가 변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너 같은 평범한 인간 나부랭이는 우리들에게 아무 것도 아니야.
우리는 이 성지에서 마력을 가지고 태어난 선택 받은 마녀.
재주 좀 있고 머리 꽤나 쓰는 모양이지만 우리 손에서 벗어날 수는 없어."
마마의 의기양양한 말에 브리엔은 다시 웃었는데,
그 미소가 얼마나 차가운지, 다들 바짝 얼어붙었다.
브리엔은 한동안 키득키득 웃다가 고개를 살짝 치켜들고 말했다.
"그래? 그거 정말 흥미롭군. 그럼 어디 한 번 날 벗어나지 못하게 해봐."
"어차피 남자들은 많으니 저 한 놈 죽여도 상관없다!
저 놈을 죽이고 그 피를 즐겨라!"
마마가 표독스럽게 외치는 것을 신호로 마녀들이 일제히 브리엔을 공격했다.
태어날 때부터 마력을 지니고 있었고, 어릴 적부터 마력을 강하게 하기 위해 노력했던 마녀들은
아무리 훈련된 병사들이라도 단번에 죽일 수 있을 만한 큰 힘을 가지고 있었다.
잠든 줄 알았던 브리엔이 깨어있었다는 사실과 브리엔의 차가운 외모에 긴장했던 마녀들이지만
죽여도 된다는 명령이 떨어지자 완전히 돌변해서 거침없이 브리엔에게 달려들었다.
처음에는 사로잡아서 괴롭히며 브리엔의 비명을 즐길 생각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온몸이 얼어붙는 마법 같은 것이 브리엔에게 통하지 않자,
그들은 단번에 죽일 수 있는 마법을 브리엔에게 날렸다.
공기를 날카로운 칼날처럼 만들어 브리엔의 몸을 꿰뚫게 했지만
브리엔의 주위에 방어막이라도 형성된 듯,
날카로운 공기는 브리엔의 몸에 닿기 전에 흩어지고 말았다.
처음에는 약간의 실수일 뿐이라고 생각하며 다시 마법을 날렸지만
수차례 계속되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태우자는 생각에 공기를 뜨겁게 만들어 브리엔의 몸을 향해 던졌지만
이번에도 역시 브리엔의 몸에 닿기 전 공기는 열기를 잃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브리엔은 별다른 힘도 사용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처음과 마찬가지로 냉정한 표정을 유지한 채, 마녀들이 하는 꼴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건 마치 커다란 어른이 자그마한 어린아이의 주먹질을 받고 있는 듯
여유 있는 모습이었다.
마녀들은 자신의 힘이 브리엔에게 통하지 않자 공포와 분노로 인해 점점 이성을 잃고 있는데 반해
브리엔은 점점 더 싸늘해지고 있었다.
마녀들이 아무리 큰 마법을 사용해도 자신에게는 절대 통할 리 없다는 것을 믿고 있는 듯이.
"어, 어째서…"
마력에도 한계가 있었기에, 한바탕 퍼부은 마녀들은 지쳐서 숨을 몰아쉬었다.
중간에 가세했던 마마까지도 마력을 전부 소진하고 거친 숨을 내쉬며 브리엔을 노려봤다.
"어째서 통하지 않는 거지?"
"통할 리 없잖아."
브리엔이 가볍게 응수했다.
"고작해야 이 백 년 정도 살아온 마녀 따위를 존경하는 마녀들의 마법이 나에게 통할 리 없는 건
당연한 거 아냐? 그걸 묻는 네가 이상한데?"
마마가 이를 으드득 갈았다.
감히 자신을 무시하는 발언을 하다니…
마녀들도 자신들이 추앙하는 마마님을 비웃는 브리엔에게 몹시 화가 났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기에 분노의 욕설만 내뱉을 뿐이었다.
마녀들의 마법은 브리엔의 옷자락조차 상하게 하지 못했지만
브리엔은 몹시 귀찮다는 듯 옷자락을 툭툭 털어냈다.
"어쨌든 니들이 피가 필요한 것처럼 나도 피가 필요해서 말이야.
최근에 통 못 먹었더니 배가 좀 고프거든."
그 순간, 마마는 벌어진 브리엔의 입술 사이로 보이는 날카로운 송곳니를 보았다.
그것을 본 마마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마치 앞으로 경험할 거라고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깊은 공포를 경험한 듯
공포로 일그러져 핏기가 가신 얼굴로 부들부들 떨던 마마가
갑자기 털썩 무릎을 꿇고 이마를 땅바닥에 찧었다.
"이럴 수가! 실례를 용서해주십시오."
자신들이 존경하는 마마가 갑자기 무릎을 꿇자 마녀들은 놀라서 웅성거렸지만
그 다음에 흘러나오는 단어에 주술이라도 걸린 듯 마마와 같은 모습으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모든 흡혈귀의 어버이시여."
브리엔이 인상을 찡그렸다.
"흡혈귀의 어버이라니… 난 그딴 거 길러낸 적 없어."
"몰라 봬서 정말 죄송합니다, 흡혈귀의 어버이시여. 제가 현명치가 못해서 고귀하신 신분을
알아볼 정도로 눈이 트이지 못하였나 봅니다. 실례를 용서해주십시오."
"젠장…"
브리엔이 귀찮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잘 들어둬. 난 흡혈귀를 만들어내지 않아. 니들이 알고 있는 흡혈귀들은 자칭 신이란 작자가
괜히 한 번 만들어본 생물에 지나지 않는다구. 난 나 이외의 생물에는 관심 없어."
"소문으로만 들어서 알고 있었습니다. 이 늙은이가 죽기 전에 꼭 한 번 만나 뵈는 게 소원이었는데…
소원성취를 하고 죽으려나 봅니다. 영광입니다."
마마는 브리엔의 말 따위는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듯
자기만의 세계에 푹 빠져 있었다.
브리엔은 한숨을 내쉬었다.
"영광이라고? 니들은 곧 내 손에 죽임을 당할 텐데?"
마녀들의 몸이 움찔했다.
마마가 고개도 들지 못한 채 물었다.
"어, 어째서… 저희를 죽이시려는 겁니까? 흡혈귀님의 식량으로는 저들로도 충분치 않습니까?
오래 산 저희 마녀들의 피보다는 저들의 피가 훨씬 더 신선할 겁니다."
"쟤들은…"
브리엔은 적당한 표현을 찾았지만 뭐라고 말을 해야할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 동료거든."
"그, 그게 무슨? 그렇다면 저들도 흡혈귀?"
"아니, 쟤들은 인간이야."
"하지만 고귀하신 흡혈귀님께서는 인간들과 절대 어울리시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어찌하여 저런 미천한 것들과…"
브리엔은 어쩐지 기분이 나빠졌다.
"쟤들 욕하지 마. 니들이 욕할 만큼 약해빠진 놈들은 아니거든.
아, 쟤들은 푹 잠재운 것에 대해서는 고맙다고 말하고 싶군."
말을 하면서도 브리엔은 자기가 무슨 소리를 짓껄이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고맙다니…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고맙다"라는 말을 하다니…
브리엔의 심정이야 어찌되었든, 입은 제멋대로 움직였다.
"쟤들은 너무 오랫동안 긴장을 하고 지내서 휴식이 필요하거든.
내일쯤이면 피로가 싹 풀려있겠지?"
"어째서 흡혈귀의 왕께서 인간 따위에게 그렇게 마음을 쓰시는 겁니까?"
참지 못하고 고개를 쳐든 마마의 눈에 빙그레 미소를 띄고 우준 일행이 잠들어 있는 곳을
응시하고 있는 브리엔의 얼굴이 보였다.
그 순간 마마는 앞에 있는 이 소년이 흡혈귀이기는 하지만 더 이상은 냉정하고 고귀하다고
소문이 난 흡혈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소년은 이제 인간에게 섞여 인간의 마음을 가져버린 평범한 "인간"일 뿐이다.
평범한 인간 따위에게 무릎을 꿇을 이유는 없었다.
마마는 벌떡 일어났다.
고개를 조아리고 있던 마녀들은 그토록 정중하던 마마의 태도가 변하자 의아해했지만
브리엔은 아무래도 상관없는 표정이었다.
"네가 인간의 마음을 가지고 인간과 어울린다면 우리가 널 섬겨야 할 이유가 없지!
인간의 나약한 마음 따위를 가지고 있다니! 그러고도 우리에게 섬김 받기를 바란 거냐?"
"글쎄… 난 섬겨달라는 부탁을 한 적 없는데… 뭔가 오해하고 있나 보네."
브리엔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대꾸했다.
마마는 인상을 찡그렸다.
자신이 믿고 경외하던 모든 흡혈귀의 어버이가 인간들과 어울리다니.
그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았지만, 아까 브리엔이 우준 일행이 있는 곳을 향하며 지었던 그 미소와
그 눈빛은 쉬이 넘길 수 없는 것이었다.
검은 눈동자 가득 담겨 있는 애정은 단순히 희생양을 향한 애정이 아니었다.
"내가 경외하던 분이 고작해야 이따위였다니! 정말 믿고 싶지 않군!
더 이상 내 안에 있던 믿음이 무너지기 전에 차라리 널 죽여주겠다!"
마마의 몸에서 검은 기운이 번져 나와 공기를 물들였지만 브리엔의 눈동자는 참으로 고요해서
날씨 좋은 날 혼자 벤치에 앉아 차를 한 잔 마시는 것 같아 보이기까지 했다.
"그래, 어디 한 번 죽일 수 있으면 죽여봐라. 내가 원하는 바니까."
브리엔이 차갑게 말하며 한 손을 들었다.
"하지만 날 죽일 수도 없으면서 그따위 말로 헛된 희망을 심어주는 거라면,
그 땐 내가 널 죽이겠다."
브리엔의 손 끝에 차가운 공기가 맺혔다.
마마는 움찔했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다들 내게 남은 힘을 보내라. 내가 내 몸을 불태우는 한이 있더라도 저놈을 죽이고 말리라!"
마마의 외침에 마녀들은 눈을 감고 마마에게 힘을 보내기 시작했다.
마력이 뭉쳐 마마의 몸으로 흘러들어갔다.
마마의 얼굴이 점점 더 젊어지고 있었다.
안 그래도 어린 소녀의 모습이었던 마마는 이제 8살 난 어린아이와 같은 정도로 어린 외모를 갖게 되었지만,
그 몸에서 풍겨나오는 마력은 대단한 것이어서
마을 안의 사물이 전부 마마에게 공명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죽어랏!"
마마는 손을 뻗어 브리엔을 향해 검은 기운을 쏘았다.
검은 기운이 끔찍한 괴물의 형상이 되어 아가리를 벌리고 브리엔을 향해 덮쳐왔다.
브리엔은 한 손을 살짝 들어올린 채, 무표정하게 자신을 덮쳐오는 검은 기운을 응시하고 있었다.
피하려는 생각도, 맞서려는 생각도 없이 초연하게 죽음을 받아들이려고 하는 듯 했다.
마마의 입꼬리가 싸늘한 원을 그리며 올라갔다.
"절대로 피할 수 없을 거다."
마마가 지친 듯 휘청이자 주위에 있던 마녀들이 마마를 부축했다.
검은 기운이 브리엔의 주위를 온통 덮었다.
검은 기운 때문에 브리엔의 모습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마녀들은 자신들이 브리엔을 이겼다고 생각했다.
검은 기운은 아주 오랫동안 한 곳에 머물러 있었고, 브리엔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감히… 우리의 마을에서 우리에게 맞서다니…"
마마의 얼굴에 승리의 기쁨이 떠올랐다.
"흡혈귀의 어버이도 별거 아니군. 괜히 흡혈귀를 숭배한 것 같다.
이제는 우리가 숭배할 다른 대상을……"
마마는 미처 말을 마칠 수 없었다.
점점 희미하게 사라지는 검은 기운의 사이로 브리엔이 아까와 같은 모습으로
꼿꼿이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원래 검은 기운은 한 나라도 집어삼켜 깨끗하게 소멸시킬 수 있을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는
무시무시한 마법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브리엔에게 조금도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브리엔은 아까처럼 옷자락 하나 찢기지 않은 담담한 모습으로
무표정하게 마녀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검은 기운이 모두 걷힐 때까지, 마녀들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눈앞에 벌어진 상황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닐 거야. 분명 죽은 걸 거야.'
마녀들은 그렇게 믿고 싶었다.
하지만 검은 기운이 사라졌을 때, 브리엔의 입술이 서서히 벌어졌다.
"실망이야."
"어, 어떻게 살아있을 수가…"
"죽여준다더니… 내심 기대했는데…"
침통한 어조로 브리엔은 중얼거렸다.
"내게 희망을 심어주고, 그 희망을 처참하게 무너뜨린 대가는 아주 커."
"으으…"
마녀들의 얼굴에 보기 안타까울 정도의 공포가 떠올랐지만
브리엔은 약간의 인정도 내비치지 않았다.
브리엔의 손 끝에 맺혀있던 차가운 기운이 서서히 커지기 시작했다.
공기들이 몰려가 브리엔의 손가락 끝을 감쌌다.
"다시는 이딴 재미없는 장난을 치지 못하도록…"
손 끝에 맺혀있던 차가운 기운이 둥글게 공모양을 갖추고 공기 중으로 떠올랐다.
"모두 다 죽여주겠다."
날카로운 공기에 찢겨나간 마녀들의 시체에서 피가 흘렀다.
"죽어버린 피는 맛없어."
브리엔은 중얼거리며 마녀들의 시체를 밟고 우준들이 잠들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집 앞에는 강전과 비인이 서로에게 기대어 잠들어 있었는데,
그걸 물끄러미 응시하던 브리엔은 한 사람씩 번쩍 들어 어깨에 둘러매고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강전과 비인을 조심스레 침대에 눕혀주었다.
새근거리는 숨소리만이 고요한 집 안에 가득 찼다.
아직도 피어오르는 수면제 섞인 향초를 집 밖으로 내던진 브리엔은
의자에 털썩 앉아 잠들어 있는 일행을 쳐다봤다.
세상 모르고 잠들어 있는 일행의 모습에 입꼬리가 간질간질했다.
자꾸만 말려 올라가려는 입가의 근육을 가까스로 저지하며 생각했다.
'그 마녀는 내가 어딜 봐서 이 애들에게 마음을 쓴다고 생각하는 거지?
난 그저 그 마녀들이 하는 꼴이 마음에 안 들어서 그런 것뿐인데…
내가 이 녀석들에게 마음을 쓸 리가 없잖아.'
그러다가 문득 어느 생각에 미쳐 한숨을 내쉬었다.
'내일이 되면 이 녀석들, 내가 마녀들을 죽인 것 가지고 한바탕 난리를 치겠군.
날 나쁜놈이라고 몰아세울지도 모르겠어. 뭐, 사실이 그렇긴 하지만…'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는 일은 늘 있어왔던 일이고, 그것에 대해 크게 마음을 쓴 적이 없었다.
지금 브리엔은 우준 일행이 자신을 싫어하게 될까봐 깊은 고민에 빠졌지만,
그것이 우준 일행에게 마음을 쓰기 때문이라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날 많이 싫어하게 될까? 날 보는 눈빛이 달라지겠지.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 녀석들은 사람을 좋아하는 녀석들이니까…'
밤을 새워 고민을 해도 해답이 나지 않았다.
마녀들의 시체를 전부 치워버리고 마녀들이 갑자기 사라졌다고 말할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그건 번거로워서 별로 하고 싶지도 않았을뿐더러, 녀석들이 믿어줄 것 같지도 않았다.
'제기랄! 그러니까 내가 왜 이런 일로 고민을 해야하는 거냐구!'
잠을 자지 않아도 살 수 있는 브리엔에게 밤은 너무나 길었다.
마을의 참상을 처음 목격한 우준 일행은 입을 쩍 벌린 채 굳어버렸다.
어제까지만 해도 밝게 웃으며 자신들에게 친절하게 대해주던 마녀들이
처참한 꼴로 죽어있는 것이 믿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신들은 무사했다.
"이거… 대체 왜…"
가인이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중얼거렸다.
"내가 그랬다."
브리엔이 말했다.
생각과 달리 우준 일행은 브리엔이 했다고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듯 했지만,
그 일로 밤새워 고민을 했던 브리엔은 괜히 기분이 꼬장해져서 우준 일행을 좀 괴롭혀주고 싶었다.
"네가 그랬다구? 이 여자들은 전부 다?"
다들 경악에 찬 얼굴로 브리엔을 쳐다봤다.
"그래, 내가 그랬다. 왜?"
투덜대듯이 대답하며 브리엔은 생각했다.
'자, 이제 어쩔 거냐? 나에게 나쁜 놈이라고 욕을 하며 같이 갈 수 없다고 외칠 거냐?
아니면 아예 나를 무시하고 모르는 척 할거냐?'
한동안 말문이 막혀 브리엔을 한 번, 죽은 마녀들을 한 번 쳐다보는 일행을
브리엔은 싸늘하게 응시하며 대답을 기다렸다.
침을 꿀꺽 삼킨 강전이 브리엔에게 다가와 브리엔의 어깨에 손을 척 올리며 말했다.
"너… 무진장 배고팠구나?"
"뭐?"
예상치 못한 말에 브리엔은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찡그렸다.
"아, 몰라줘서 미안하다. 넌 피를 먹어야 하는데, 그걸 생각도 못 했네.
그래도 네가 이렇게 대식가인 줄은 몰랐다. 어마어마하게 먹어댔구만."
'뭐, 뭐야…'
브리엔은 상당히 당황했다.
지난 밤새도록 떠올렸던 우준 일행의 반응 중에 이런 것은 없었기 때문이다.
'뭐야, 이 놈들은…'
브리엔이 강전의 손을 탁 쳐냈다.
"어제 니들한테 그렇게 친절하게 대해준 여자들이야. 그런데 그렇게 쉽게 말을 하냐?"
"푸하하하하하."
강전이 웃었다.
"그건 사람 피를 빨아먹고 사는 네놈한테 들을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안 어울려, 안 어울려."
"……"
"어쨌든 이유가 있었던 거 아냐?"
차희가 말했다.
"브리엔, 네가 이 여자들을 이렇게 잔인하게 죽인 건, 그만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겠지.
어딜 봐도 넌 이유 없이 사람을 죽일 것처럼 보이지는 않으니까. 안 그래?"
"맞아, 그래. 안 그래도 어제 이 여자들이 너무 잘해줘서 뭔가 이상하다고는 생각했거든.
브리엔이 옆에 있어서인지 여자들의 마음이 잘 읽히지는 않았지만…
이 여자들, 혹시… 우릴 죽이려고 했던 거 아냐?"
브리엔의 입술 끝이 씰룩거렸다.
이 감정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브리엔은 알지 못했다.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으면서, 한편으로는 콧등이 찡했다.
기분이 너무 묘해서 그걸 뭐라고 해석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어 버럭 화를 내며 돌아섰다.
"빌어먹을! 멍청한 놈들! 니들의 그런 멍청함이 정말 마음에 안 들어!"
해윤이 키득거리며 브리엔에게 팔짱을 꼈다.
"짜식. 너 지금 쑥스러워하고 있는 거지? 아하하하. 귀여운 놈.
첫인상은 무서울 정도로 아름다워서 건드리기 힘들었는데, 지금 보니까 완전히 귀여운 놈이잖아."
"닥쳐, 이 자식아!"
브리엔은 신경질적으로 팔을 빼내려 했지만 해윤은 놔주지 않았다.
"마음에 들었어. 물론 나는 가인이가 있어서 너에게 더 큰 관심을 보여줄 수는 없지만…"
"보여줘도 돼, 보여줘도 돼. 난 상관 마."
가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에잉.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질투하는 거 다 알아, 차가인."
"됐거든? 나 정말 상관없으니까 나한테 돌리는 관심을 전부 브리엔에게 쏟아줘."
"사양한다."
브리엔은 딱딱하게 말하고 조금 빠른 걸음으로 앞서 나아갔다.
이 애들과 있으면, 정말이지 때로는 울고 싶은 기분이 든다고 느끼며.
마을을 벗어나 20분 정도 걸었을 때, 우준이 옆으로 다가왔다.
조용히 브리엔의 옆에서 걸으며 우준은 예의 그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죽이는 건 피해."
"왜? 역시 마음에 걸리냐?"
"응, 마음에 걸려."
"빌어먹을 놈."
"네가 마음에 걸려."
우뚝.
브리엔은 멈춰 서서 우준을 노려봤다.
아까부터 속에서 끌어 오르는 그 감정을 도무지 견디기 힘들어 화가 치밀었다.
모든 것은 이 놈에게서 비롯되었다.
앞에 있는, 이 멍한 눈빛을 가진 놈이 자신의 손을 놓지 않고 따뜻한 체온을 나누어준 순간부터
모든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내가 왜 마음에 걸려, 이 새끼야! 내가 누군지 몰라? 나는 브리엔. 영원을 살며 신의 저주조차
통하지 않는 위대한 존재라구! 한갓 인간 따위가 마음에 걸려할 만큼 나약한 존재가 아니란 말이야!
그런데 왜 내가 마음에 걸리냐고!"
"그래도 역시 누군가를 죽이는 건, 마음이 무거워지는 일이니까."
우준의 고요한 눈동자가 브리엔의 가슴에 내려앉았다.
평소에는 이성적이고 냉철한데, 어째서 이 놈만 마주보면 이렇게 쉬이 흥분하게 되는 건지 알 수 없다.
"안 무거워! 난 수 십, 수 백 명을 이 손으로 죽여왔어. 그런 내가 저딴 마녀들 몇 명 죽였다고
눈 하나 꿈쩍할 것 같아? 전혀 안 무거우니까 걱정할 거 없어!"
우준은 대답하지 않고 걸음을 옮겼기에, 방방 날뛰던 브리엔은 괜히 쑥스러워져서
발로 땅을 몇 번 탁탁 치고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래서 어느새 옆에는 채민이 서 있게 되었는데, 채민 또한 브리엔으로서는 대하기 힘든 상대였기에,
아주 그냥 요새 일진이 참 엿 같다고 생각하며 채민을 모르는 채 했다.
채민 역시 말없이 걸었는데, 우준이 문득 뒤를 돌아보고
"채민아, 같이 걸어가자."
라고 말하자, 브리엔은 괜히 울컥해서 채민에게 말을 시키기 시작했다.
"야, 넌 이 여행이 재미있냐?"
갑자기 브리엔이 말을 걸자 채민은 웃으며 대답했다.
"응, 재미있어."
"뭐가 재미있냐? 니들 죽을지도 몰라."
"응, 처음부터 그럴지도 모른다는 말 들었어."
"그런데도 재미있냐?"
"뭐랄까. 재미있다기보다는 즐거워."
"사람 죽는 꼴 보는 게?"
"아니, 그건 정말 가슴 아프고 속상한 일이지만… 나 저주에 걸린 것 때문에 친구가 없었어.
내 주위에 오면 그 애들이 위험해지니까 날 피했거든. 당연한 거지.
친구가 없는 거, 가족들까지도 내 옆에 오는 걸 꺼리는 거, 그걸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 살았어.
앞으로도 내 인생에는 다른 사람이 거리낌없이 다가오는 일 같은 건 절대로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예상치도 못했던 순간에 이 애들을 만난 거야.
이 애들은 내가 저주에 걸렸고 나 때문에 자기들이 다치고 힘든 데도
내 곁에 있어줘. 이 애들이 날 욕하고 비난하면서 떠난다고 해도 당연하게 받아들일 텐데,
오히려 그게 당연한 건데… 그런데 이 애들은 그 당연한 것을 당연한 것이 아니게 만들어.
그래서 난 때때로 내가 저주에 걸렸다는 사실조차 잊게 돼."
빛나 보였다.
평온한 표정으로 조용조용 자신의 즐거움을 이야기하는 채민이 눈이 부실 정도로 빛나 보여서
브리엔은 살짝 눈살을 찌푸리고 채민의 얼굴을 바로 보려 애썼다.
"그리고 있잖아, 너한테도 정말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어."
"나한테는 왜?"
"네 덕분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나 때문에 남들에게 닥칠 불행에 대해서 걱정하지 않고 있을 수 있었어.
난 정말 이런 건 상상도 못 해봐서… 정말 너한테 너무 고마워. 고마워, 브리엔."
"멍청한 기집애. 이런 건 나한테 아무 것도 아니야. 고맙긴 뭐가 고맙냐?"
브리엔은 투덜댔고 채민은 그런 브리엔을 보며 그저 웃기만 했다.
그들이 그 때 웃을 수 있었던 건, 앞으로 며칠 동안 그들이 경험하게 될 끔찍한 참상을
미처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