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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준들은 말할 힘조차 잃고 망연자실하게 서서 눈 앞에 벌어진 끔찍한 참상을 응시했다.
너무나 끔찍했기에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게 도대체 몇 번째인지…
우준조차도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서 있는데, 브리엔이 앞으로 걸어나가며 중얼거렸다.
"아, 배고파."
마녀의 마을에서 벗어난 우준 일행은 그럭저럭 끼니를 때우며 어려움 없이 산길을 걸었다.
하루 정도는 노숙을 해야하지만 다음 날 오후쯤이면 마을에 도착할 수 있을 거라는 브리엔의 말에
더 힘을 냈다.
역시 길을 아는 사람이 함께 해주니 마음이 든든해서 평소보다 쾌활하게 장난을 치며 길을 갔다.
노숙을 하는 것도 그다지 힘들지 않았다.
끝을 알 수 없는 노숙은 힘들지만, 다음 날이면 마을에 들러서 푹 쉴 수 있다는 생각을 하니
노숙이라기보다는 뜻 맞는 친구들끼리 모여서 갖는 친목 여행 같아서 즐겁기까지 했다.
다음 날 오후가 되자, 브리엔의 말대로 마을이 나타났다.
하지만 그들은 마을에 도착하기 전부터 후각을 자극하는 역한 냄새에 제대로 걸을 수가 없었다.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스쳤고, 그들의 예감은 맞아떨어졌다.
그 역한 냄새는 마을 곳곳에 방치된지 오래 된 썩은 시체들로부터 나는 냄새였다.
전쟁이라도 일어난 듯 엉망으로 파괴된 건물들 사이에는 마을 사람으로 보이는 시체들이
곳곳에 널려 있었는데, 구더기가 득실거리는 것으로 보아 죽은 지 상당 기간 지난 것 같았다.
그들은 혹시 생존자가 있을까 해서 조금 왔다갔다했지만 도저히 생존자가 있을 법한 상황이 아니었기에
관두고 다음 마을을 향해 길을 떠났다.
하지만 다음 마을도, 그 다음 마을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적은 수도 아니고 100명 가까이나 되는 마을 사람들이 저항조차 제대로 못한 채 죽어버리다니…
이건 해도 너무하지 않은가.
다섯 번째 마을에서 그들은 힘을 잃고 주저앉았다.
"대체 뭐냐고!"
강전이 짜증스럽게 중얼거렸다.
시체들을 헤치고 앞으로 나간 브리엔은 가만 쭈그리고 앉아 시체의 팔에 손가락을 댔다.
"아, 진짜 배고프네."
브리엔은 인상을 찌푸렸다.
"삼 일 됐군."
"오오, 그런 거 어떻게 알아?"
"만져보면 알지."
브리엔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강전의 질문에 대꾸했다.
"너 진짜 배고프겠다. 대체 며칠을 못 먹은 거냐?"
"인간처럼 매일 먹어야만 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는 건 아니지만,
역시 일주일 이상 안 먹으면 배가 고프긴 하네."
"배고픔을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표현하는 네가 존경스러울 정도다."
"내 피라도 마실래?"
채민의 말에 다들 화들짝 놀라 채민을 쳐다봤다.
"쟨 왜 또 착한 척이야, 짜증나네."
차희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채민은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리자 씩 웃었다.
"왜들 그렇게 봐? 브리엔한테 피를 좀 준다고 해서 내가 죽는 건 아니잖아. 안 그래?"
채민의 말에 브리엔이 피식 웃었다.
"모르겠냐? 인간들이 왜 나를 두려워하는지? 난 일단 인간의 동맥에 이를 한 번 꽂으면
인간의 심장이 더 이상 피를 만들어내지 못할 때까지 절대 이를 뽑지 않아."
"응, 그렇다고 들었던 것 같아."
"넌 병신이냐?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 내가 네 피를 빨면, 넌 죽어."
"응. 하지만 넌 나 안 죽을 때까지만 빨 거잖아."
채민은 단호했다.
그런 채민을 응시하던 브리엔이 검지로 채민의 턱을 살짝 치켜 올리며 물었다.
"왜 내가 널 특별 취급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몇 번 도와준 걸 가지고 내가 네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고
오해하는 건 아니겠지?"
"응, 그런 건 아니야. 내가 생각해도 난 별로 매력이 없거든.
게다가 넌 너무 아름다워서 나 같은 여자 애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것 같아."
'채민이도 예쁜데…'
채민이 말하는 순간, 일행은 전부 똑같은 생각을 했다.
"그런데 왜 내가 널 안 죽일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나에게 있어서 인간들은 다 똑같아."
"하지만 난 너의 동료잖아."
"……!"
"우리는 이미 한 배를 탔으니까, 내가 죽으면 네가 곤란해지는 거 아냐?"
"흥…"
할 말이 없어진 브리엔은 괜히 콧방귀를 뀌며 채민의 턱을 받치고 있던 손을 내렸다.
"하나도 안 예쁜 기집애. 하나도 마음에 안 드는 기집애."
"그러니까 내 피를 나눠줄 수 있어."
채민이 브리엔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브리엔의 체온은 아직도 많이 차가웠기 때문에, 브리엔은 채민이 동상에 걸리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채민은 차가움을 조금도 느끼지 못했다.
채민이 지니고 있는 인어의 검이 브리엔의 차가움을 완화시켜주었기 때문이다.
채민이 손을 떼지 않는 것에, 브리엔은 적잖은 감동을 느꼈지만
이제까지 그랬던 것처럼 콧등이 시큰거리는 그 감정이 감동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뭐, 나도 상당히 배가 고팠으니…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사양하지 않겠어.
하지만 명심해 둬. 나에게 있어서 인간이라는 건 똑같이 하등한 생물일 뿐이야.
지금은 필요에 의해서 함께 여행을 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특별 취급을 받을 생각은 하지 마."
"응."
채민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채민의 다갈색 눈동자에는 공포가 조금도 담겨 있지 않았다.
브리엔은 괜히 심술이 났다.
겁을 줘도 겁을 먹지 않으니 어찌 심술이 안 나겠는가.
사실 채민의 피를 빨아야 할 정도로 배가 고파서 쓰러질 것 같은 건 아니었지만
채민이나 다른 일행들이 겁에 질리는 모습이나 우왕좌왕하는 것을 보고 싶어서
일부러 더 겁나는 말들을 해댔다.
그런데 겁을 먹기는커녕, 신뢰가 가득 찬 눈동자로 쳐다보면서 "동료"라는 둥, 어떻다는 둥 하는 소리나 하다니.
'아, 짜증나.'
브리엔은 채민의 하얀 목덜미에 송곳니 자국을 남기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그래서 채민의 목까지 입술을 가져가기는 했지만 어쩌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는데,
채민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게 느껴졌다.
'역시 인간은 인간. 겁을 먹었나 보군.'
이라는 브리엔의 생각이 끝나자마자, 갑자기 들려오는 채민의 웃음 소리.
"아하하하하하. 너무 간지러워, 브리엔."
브리엔은 그만 다리에서 쭉 힘이 빠지고 말았다.
"아, 너무 간지럽다. 빨리 끝내면 안 돼? 나 정말 간지럼에 약하단 말이야. 참을 수가 없어. 하하하하."
"대체…"
브리엔은 똑바로 서서 주먹을 꽉 쥐고 채민을 노려봤다.
"넌 생각이 있는 기집애야, 없는 기집애야! 지금 상황에서 웃음이 나와?
넌 나한테 피가 빨리려고 하는 거야!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라구! 그런데 왜 웃고 지랄이야, 지랄이!"
브리엔이 버럭버럭 화를 내자, 채민은 웃음을 뚝 그치고 시무룩한 표정으로 말했다.
"미안해, 내가 주책 맞게 웃어서… 근데 너무 간지러워서…
너 정말 배고플 텐데, 내가 그거 신경도 못 쓰고… 배고프면 신경이 예민해지게 마련인데…"
"지금 누가 그거 때문에 그렇대? 내가 뭐, 걸신 들린 흡혈귀인 줄 알아? 빌어먹을!"
"하지만 배가 고프긴 하잖아."
"아, 됐어! 그놈의 배고프다는 소리 좀 관둬! 나 졸라 배 안 고프니까 다 관두라고!"
브리엔이 빽 소리를 치고 돌아서자 상황을 지켜보고만 있던 우준이 나섰다.
"그렇다면 이렇게 하자."
"이렇게고, 저렇게고! 난 할 생각 없으니까 소꿉장난은 니들끼리 해!"
"내 피를 주지."
"됐다고!"
"자아."
우준은 머뭇거리지 않았다.
말을 마치자마자 스웨인을 빼들어 날카로운 칼날로 자신의 팔뚝을 길게 그었다.
누구도 말릴 새가 없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으앗! 이 자식아, 너 뭐하는 거야?"
브리엔이 당황해서 달려들어 피가 흐르는 우준의 팔을 감쌌다.
"아, 젠장! 도대체 뭘 하는 거야? 피 겁나게 많이 나잖아!"
"네 양식을 가지고 겁을 내다니… 너 흡혈귀 맞냐?"
리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중얼거렸지만 당황한 브리엔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우준의 상처는 꽤 깊었기 때문에, 붉은 피는 브리엔의 손을 흠뻑 적실 정도로 흘러내렸다.
"야, 이거 치료해야지! 뭐 없어? 지혈해야 하는 거 아냐?"
"마셔."
우준이 브리엔의 손에서 자신의 팔을 빼내며 말했다.
"방금 나온 따끈따끈한 피니까 맛없지는 않겠지. 게다가 난 잘 생겼으니까 더 맛있게 느껴질 거다."
"저 흡혈귀보다 잘난 척 한다고 느껴지지 않게 잘난 척을 하는 우준이가 더 무섭다, 난."
해윤이 중얼거렸다.
브리엔은 고개를 들고 우준을 쳐다봤다.
우준의 검은 눈동자는 아무 것도 담지 않고 있었다.
뜨거운 피는 여전히 브리엔의 손을 타고 흘러 바닥에 뚜욱뚜욱 떨어져, 검붉은 자국을 남겼다.
"야…"
브리엔의 목소리가 애원하듯 흘러나왔다.
"인간들은 피 많이 흘리면 죽잖아. 너 죽는다, 이러다. 치료해야 돼, 너.
야, 니들 동료잖아. 왜 치료 안 해?"
브리엔은 몹시 당황한 상태였기에, 자신이 무슨 행동을 하는지도 알지 못했다.
자신의 행동이 얼마나 인간에 가까운지조차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브리엔이 피를 마실 생각이 없는 것 같자, 우준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욱신거리는 팔을 들어
억지로 브리엔의 입에 가져갔다.
피가 브리엔의 입안으로 흘러 들어왔다.
브리엔은 붉은 피가 입가를 적시자 잠깐 눈을 크게 떴지만, 본능은 어찌할 수 없는 법.
서둘러 피를 빨기 시작했고, 붉은 생명의 근원은 브리엔의 식도를 타고 아래로 흘러 내려갔다.
'많이 먹으면 안 돼, 많이 먹으면 안 돼.'
브리엔이 이성을 되찾으려고 노력하며 피를 빨고 있을 때, 우준의 나직한 목소리가
피보다도 더 진한 향내를 풍기며 브리엔의 가슴에 흡수되었다.
"네가 스스럼없이 나를 만질 수 있게 되어서 정말 기쁘다."
"이 마을을 지나면 마을이 하나 더 있어.
그리고 나서는 한동안 아무 것도 없는 산길이 계속될 거야.
인간인 너희들의 속도로 가면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꽤 오래 걸리겠지.
니들은 잠도 자야하고, 간간이 휴식도 취해야 하니까…
그 산길을 벗어나면 너희들이 그리도 원하던 신이 사는 곳이 나와."
"하아…"
폐허가 된 마을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브리엔의 설명을 듣던 비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왜 한숨이냐? 막막하냐?"
"아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다행?"
"응. 다음 마을, 그 후에 이어지는 산길이라면 여정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건데,
우리들 중에 아무도 죽지 않았잖아. 정말 다행이야."
"쳇…"
브리엔은 투덜댔다.
'신에게 가면 자기들의 저주가 전부 해결될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지?
그러지 않을지도 몰라. 니들, 신을 찾아가면 오히려 죽을 수도 있어.'
브리엔은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말할 수 없는 것은, 브리엔 자신이 죽음을 간절히 원하기 때문이다.
무료할 정도로 긴 인생에 지쳤기에 이제 그만 쉬고 싶었다.
죽을 수만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었다.
신은 자신에게 죽음을 선물해주겠다고 했고, 신이 그 죽음을 정말로 줄 수 있을지는 반신반의하지만
그것에라도 희망을 걸어보고 싶은 브리엔이었다.
그러는 한편, 우준 일행이 무사히 여행을 마치고 자신들이 살던 세계로 살아서 돌아갔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들이 이렇게 시시덕거리며 노는 모습을 보는 것 역시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의 삶은 짧아. 나에게 있어서는 찰나도 안 될 정도로 짧은 시간이지.
너희들의 노는 모습을 보는 것이 좋아서 나의 죽음을 포기하면,
너희들이 죽은 후 나는 또 다시 길고 무료한 시간을 보내야만 해.
난 선택해야겠지. 너희의 죽음, 그리고 나의 죽음. 둘 중의 하나를…'
브리엔의 얼굴이 괴롭게 일그러졌지만, 그걸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얼른 이 저주가 풀렸으면 좋겠다. 그러면 원래 세계로 돌아가서 예쁘게 차려입고
예전에 사귀었던 놈들 다 만나서 변화한 내 모습을 보여줄 거야.
아마도 그 애들은 날 놓친 걸 후회하겠지."
차희가 기지개를 켜며 나른한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해윤이 킬킬 웃으며 말했다.
"야, 야. 예쁜 것만 가지고 여자 사귀었던 놈들이라면 이미 후회하고 있을걸.
넌 정말 예쁘거든. 물론 성격은 진짜 엿 같지만 말이야."
"엿 같다니! 요새 시대에 이 정도 악랄함을 가져야 살아남을 수 있어.
결국 잘난 남자를 사로잡는 건 악녀들이라는 거 몰라?
난 세계사에 길이 남을 정도의 악녀가 되고 싶어."
"그래, 그래. 그게 네 인생 목표라면 그것도 괜찮겠지. 아주 잘하고 있는 거야, 넌."
해윤이 엄지를 번쩍 들어 보이며 웃었다.
차희는 별로 싫지 않은 표정이었다.
처음에는 차희를 싫어했던 리현이지만, 차희가 특별히 채민에게 해를 가하려는 기색이 없자
리현은 차희에게 드러내놓고 적의를 보이지 않았다.
단지 조금 주의를 기울이고 지켜볼 뿐이었다.
아직은 속단할 수 없는 것이, 브리엔이 옆에 있는 한 남의 마음을 읽는 리현의 저주가 발휘되지 않았기 때문에
차희가 웃는 얼굴 뒤에 어떤 속마음을 감추고 있는지 알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현채민, 넌? 넌 저주가 풀리면 뭐 할거냐?"
강전이 채민에게 묻자, 채민은 잠깐 눈을 감았다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엄마, 아빠 사이에 누워서 같이 자고 싶어."
"엄마, 아빠가 싫어할걸."
"하하하하. 그러려나?"
"두 분만의 오붓한 러브 나이트를 방해하는 건, 하루로 끝내라. 매일 그러면 미움 받아."
이미 저주가 풀린 듯 들떠있는 일행의 모습을 보는 것이, 브리엔은 썩 기분 좋진 않았다.
그래서 찌푸려진 인상이 쉬이 풀리지 않았다.
"우준아, 넌? 넌 뭐할 거야?"
가인의 질문에 다들 우준을 쳐다봤다.
눈동자들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가장 궁금했던 일이기 때문이다.
"나…"
우준은 말꼬리를 길게 늘이며 잠시 하늘을 쳐다봤다.
하늘이 약간 찌뿌둥한 것이 비가 올 것 같았다.
어두운 회색 구름이 웅클거리며 몰려들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 내가 원하지 않는 한, 비는 내리지 않아."
브리엔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자, 리현이 물었다.
"뭐? 정말? 너 비도 안 내리게 할 수 있어?"
"응. 난 니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오래 살았고, 니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강한 존재야.
이곳에 존재하는 것들 중에 나의 명을 따르지 않는 것은 없지.
날 거역했다가는 존재조차 할 수 없게 될 테니…"
"우와! 그거 상당히 재수 없는 발언이지만, 왠지 되게 멋있는데?
나도 써먹어야겠다."
해윤이 신명나게 말했다.
"그렇다면… 네가 우리의 저주를 풀어줄 수 있는 건 아냐?"
"그건… 내가 할 수 없어. 저주는 저주를 건 사람만이 풀 수 있는 거야.
또는 저주를 건 사람이 죽었을 때에 풀리게 되지.
니들이 저주를 풀고 싶으면 저주 건 자를 찾아가서 풀어달라고 담판을 짓거나
그를 죽이는 수밖에 없어.
하지만 니들이라면 죽이는 것 대신에 담판 짓는 걸 택할 테지."
"아니."
우준이 단호하게 말하며 자신의 손바닥이 내려다봤다.
지금껏 죽인 수많은 사람들.
아무리 다른 세계의 사람들이라지만 그래도 살아있는 인간.
손에 묻은 붉은 피가 조금도 지워지지 않는 듯 느껴졌다.
온몸에서 피비린내가 묻어 나오는 듯 했다.
"죽여야만 저주가 풀린다면 죽일 거다. 내가 죽일 수 있는 상대라면."
"단호해서 좋군. 그런 태도, 아주 마음에 들어."
"그 땐, 내가 죽일 거야."
채민이 우준의 손바닥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쳐놓으며 말했다.
"내 운명을 바꾸기 위한 일이야. 그 기회를 너에게 넘겨주지 않아. 내가 죽일 거야."
"……"
"그러니까 넌 그런 상황이 닥치면 뒤로 물러나 있어. 반드시 내가 죽일 테니까."
우준이 빙긋 웃었다.
"그래, 고맙다."
하지만 일행은, 그리고 채민은, 우준이 그렇게 말은 해도 결국은 자신의 손을 더럽히게 될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강우준, 넌 돌아가면 뭐할 건데?"
우준의 대답을 듣지 못했다는 걸 깨달은 강전의 질문에 우준은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햇빛 한 바구니, 고양이 두 스푼 양쪽에 끼고 누워 평화를 만끽하겠지.
그리고 혼란스러운 감정의 소용돌이가 잦아들어 잔잔한 물결을 이루면 결혼할 거야."
"뭐어? 결혼?"
"누구랑? 누구랑?"
예상치 못한 우준의 말에 다들 우준을 잡아먹을 듯이 달려들며 물었다.
우준이 피식 웃으며 당연한 걸 왜 묻냐는 어조로 대답했다.
"채민이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