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햇빛 한 바구니, 고양이 두 스푼-56화 (56/91)

-56-

모두의 시선이 채민에게 쏟아졌다.

일행의 눈이 '어떻게 된 거냐?', '언제 거기까지 진도가 나간 거냐?', '니들 키스는 했냐?',

'우리 몰래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라는 질문들을 퍼부어 댔지만,

채민 역시 몹시 당황한 상태였기 때문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입만 뻐끔거렸다.

그 때, 우준의 늘어지는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채민이가 허락해주지 않는다면 보디가드라도 해야지."

"야, 그게 뭔 말이야? 왜 결혼하려다가 그렇게 깔끔쌈빡하게 관두고 보디가드를 하려는 건데?"

해윤이 우준의 어깨를 잡고 흔들며 물었다.

"평생 지켜주고 싶거든, 채민이를…"

"괘, 괘, 괜찮아!"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채민이 힘을 내어 대답했다.

"나, 난 괜찮아. 우리가 돌아가게 되면 저주가 풀린 다음일 거 아냐. 그럼 난 더 이상 불행하지 않아.

그러니까 난…"

"저주 때문에 오는 불행이 아니더라도, 소소한 사고는 닥치게 마련이야.

아주 작은 상처조차 입지 않도록 지켜주고 싶어서 하는 말이야."

"하, 하지만… 하지만 우준이 너는…"

'비가 있잖아.'

라는 말은 속으로 꿀꺽 삼켰다.

그 때였다.

부스럭-

시체가 움직였다!

다들 긴장하며 벌떡 일어났다.

잘못 본 건가.

부스럭-

아니, 잘못 본 것이 아니다.

미약하게나마 시체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좀비인가?'

같은 생각을 하며 각자 자신의 무기에 손을 얹었다.

누구든 공격을 해오면 확실하게 막아낼 수 있도록.

사실 조금은 기대감도 있었다.

첸에게 배운 무술을 써먹을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자신들의 능력이 어느 정도 되는지

시험해 보고 싶기도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곧 시체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시체를 밀치고 나온 것은 잔뜩 상처를 입고 있는 어린 소년이었다.

10살 남짓으로 보이는 소년은 공포와 허기에 지친 모습으로 주위를 둘러봤는데,

큰 충격 때문인지 우준 일행이 그곳에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듯 했다.

한참을 공허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던 소년은 이미 부패가 진행된 한 시체를 끌어안고 절규했다.

"엄마! 으아아아앙! 엄마아아아아!"

슬프고도 안타까운 모습에 우준 일행은 미간을 좁히며 서로를 쳐다봤다.

어떻게 아이를 위로해줘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곳에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저 소년의 엄마가 왜 죽은 건지 그들로서는

알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시체가 흩날리는 마을에 어린 남자아이의 울부짖음이 가득 찼다.

그것은 서글프고도 애절한, 가슴 아픈 한 가락 음악이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 이 마을엔…"

가인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브리엔이 곁에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만약 브리엔이 없었더라면 처참하게 죽임을 당한 영혼들의 한스러운 울부짖음과 원망과 저주가

가인의 고막을 찢을 듯이 들려왔을 것이다.

브리엔은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고 묵묵히 아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지쳐서인지 아이의 울음소리가 차츰 잦아들었다.

끅끅거리며 나오지도 않는 목소리로 서럽게 어깨를 떠는 아이의 안타까운 모습에

다들 어쩔 줄을 몰라했다.

악취가 심할 텐 데도, 아이는 시체에 얼굴을 묻고 한동안 어깨를 들썩였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이제 조금 이성을 되찾은 아이가 천천히 고개를 들고 일행을 쳐다봤다.

빛을 잃었던 아이의 눈동자에 초점이 생겼고,

산 사람이 있다는 것에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뜬 아이는 누군가와 눈이 마주치자,

"으아아악! 우리 엄마를 죽인 악마!"

라고 외치고 경련을 일으켰다.

흰자가 보일 정도로 눈을 까뒤집고 무서울 정도로 온몸을 떠는 아이의 모습에 다들 당황했지만,

우준은 빠르게 달려가 사시나무 떨리듯 떨고 있는 아이를 품에 안고 주먹을 아이의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혹시라도 경련 때문에 흔들리는 아이의 이가 혀를 깨물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경련을 일으킨 아이가 턱에 힘을 줘서 우준의 주먹으로 아이의 이가 파고들었다.

주르륵 피가 흘렀지만 우준은 손을 빼지 않았다.

리현이 얼른 주머니에 있던 손수건을 꺼내 둥글게 뭉치고 외쳤다.

"빨리 저 애 입이 우준이랑 떨어지게 해봐. 이 손수건을 넣게!"

당황하고 있던 비인이 얼른 아이의 팔을 잡았고, 해윤이 아이의 턱을 잡아 입이 벌어지도록 했다.

약간 벌어진 틈에 우준이 손을 빼내자 리현은 얼른 손수건을 아이의 입안에 넣었다.

"으그그그…"

아이의 턱으로 침이 질질 새어나오는 것을, 일행은 침통한 표정으로 지켜봤다.

한동안 경련을 일으키던 아이는 곧 정신을 잃고 쓰러졌고,

사태가 진정되자 차희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이 애가 악마라고 그런 사람 말이야. 채민이한테 그런 거 맞지?"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자, 채민은 몹시 당황하여 입술을 깨물었다.

"아…"

"갑자기 왜 채민이한테 악마라고 한 거지? 사실 브리엔한테 해야할 말인데 잘못한 거 아냐?"

강전이 말했다.

"응. 그럴 듯 해. 브리엔이 채민이 옆에 서 있었잖아. 브리엔까지 쳐다보기에는 힘이 부족했던 거겠지."

해윤이 수긍했다.

"닥쳐."

브리엔이 화냈다.

"이 세상에 살며 진실을 말하기가 이렇게 힘들다니. 진실을 말해도 욕을 먹는 세상이라니."

강전이 침통해했다.

"그러게 말이다. 정말 세상 살기 힘들다. 옳은 말을 할 수가 없어."

해윤도 절망했다.

"멍청이들."

브리엔은 싸늘했다.

"다들 장난은 관두고…"

리현이 중재에 나섰다.

"아마도 이 애가 충격을 받은 후라서 혼란스러운 중에 잘못 말한 것 같네.

그리고 우리 중에 한 마을을 초토화시킬 만큼 강한 사람은 없잖아."

"난 한 나라를 초토화시킬 만큼의 힘 정도는 가지고 있어."

브리엔이 당당하게 말했다.

"범인이 자백했다. 사로잡아!"

해윤이 손가락으로 브리엔을 가리키며 외쳤다.

"장난 좀 그만 쳐. 으휴…"

가인이 한숨을 내쉬며 해윤의 팔을 잡자, 해윤이 금세 빙그레 웃으며 가인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우리 자기가, 내가 딴 사람한테만 신경 써서 삐졌구나?"

"리현아. 해윤이를 죽을 때까지 때려줘."

"오케이."

아이가 눈을 뜬 것은 그들의 장난질이 쉴 새 없이 계속 되고 있을 때였다.

죽은 사람 같은 공허한 검은 눈동자가 깜빡이며 하늘을 응시하다가 일행을 향해 돌아갔다.

"이봐, 너… 괜찮은 거냐?"

강전의 질문이 들리지 않는 듯, 아이는 눈을 꿈뻑이다가 다른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한 명, 한 명.

일행을 살펴보던 아이의 눈동자는 채민에게 향하는 순간 공포로 가득 찼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강한 공포가 아이의 눈동자에 담겨있었다.

"으아아아악! 이 악마! 우리 엄마, 아빠를 죽인 악마! 으아아아! 저리 가! 저리 비켜!

나까지 죽일 셈이야! 으악!"

공포에 사무친 절규가 마을을 뒤흔들었다.

"야, 야! 진정해, 진정해!"

해윤이 아이의 팔을 붙들었지만 아이는 온몸을 흔들며 비명을 질렀다.

당황한 것은 채민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하얗게 질린 얼굴로 뒤로 물러섰다.

"으아아아아아!"

철썩-

브리엔의 손이 아이의 뺨을 사정없이 치고 지나갔다.

아이도 놀라고, 일행도 놀랐다.

다행인 것은 아이의 비명이 멈추었다는 것이다.

"시끄러, 소년."

브리엔의 입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공포스러울 정도로 아름다운 브리엔의 외모는 겁에 질린 아이에게도 영향을 끼쳤는지,

아이는 정신 없이 브리엔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눈이 마주치자 얼른 고개를 숙였다.

"대체 이 마을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는 모르지만,

다짜고짜 소리를 질러대는 건 좋지 않아."

브리엔은 아이에게 이성적인 판단을 요구하고 있었지만,

끔찍하게 가족과 사람들의 죽음을 목격한 소년에게 그 말이 통할 리 없었다.

소년은 고개를 숙인 채 안쓰러울 정도로 떨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우리는 나쁜 사람 아니야."

차희가 아이의 손을 다정하게 잡으며 묻자, 아이는 거세게 차희의 손을 뿌리쳤다.

"건드리지 마! 니들도 악마의 무리인 거 다 알아! 내가 속을 것 같아?"

"이 마을을 이렇게 만든 악마가 이제 와서 널 속일 리가 없잖아."

차희는 마음이 상하지도 않는지 다시 아이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아이는 부들부들 떨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차희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대체 무슨 일이야? 얘기해줄 수 없어?"

"저 여자야."

아이가 고개도 들지 않고 팔을 올려 채민을 가리켰다.

채민은 아이의 검지가 자신에게 향하자 움찔하며 한 걸음 더 물러섰다.

"저 여자가 그랬어! 저 여자가 갑자기 우리 마을에 나타나서… 으으…"

아이는 떠올리기 괴로운 듯 입술을 깨물었다.

"저 여자가… 으흑… 저 여자가 그랬어. 우리 엄마, 아빠… 전부 다…

아저씨, 아주머니들… 내 친구들… 우리 형… 으으… 전부 다 죽였어.

칼 하나로… 저 파란색 칼… 저거 하나로… 우리 마을 사람들을 전부… 전부 죽였어.

살려달라고 하는데도… 계속 웃으면서… 모두 다 죽였어.

난 엄마가 쓰러지면서 내 위를 막아줘서… 난 죽지 않았어. 하지만… 하지만 우리 엄마는…

으아아아앙!"

모두 채민을 쳐다봤다.

채민은 이 당황스러운 상황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 눈만 휘둥그레 뜨고 서 있었다.

"아, 난… 나는…"

"잘못 본 거 아냐? 채민이는 계속 우리랑 같이 있었어."

리현이 물었다.

아이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내가 어떻게 잘못 봐? 저 여자야. 저 머리카락, 저 얼굴… 그리고 저 칼…

우리 엄마의 목을 베어버린… 저 칼… 차가운 기운이 뿜어져 나오던…"

모두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인어의 검에서 나오는 차가운 기운.

그걸 다른 칼이 따라할 수 있을까?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래도 채민이는 아니야."

해윤이 단호하게 말했다.

"채민이는 절대로 아니야."

"그럼 내가 거짓말을 한다는 거얏?"

아이가 벌떡 일어나서 외쳤다.

"둘 중의 하나겠지. 네가 거짓말을 하고 있던가, 네가 본 그 여자가 채민이가 아니던가."

"하지만 저 여자라구! 저 여자란 말이야! 왜 내 말을 못 믿냐구!"

"네 말이 사실이라면, 그 여자는 채민이랑 아주 많이 닮은 다른 여자일 거야."

해윤의 믿음에 채민은 안심이 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잊고 있었는데 불현 듯 어떤 일이 떠올랐던 것이다.

"나…"

채민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나일지도 몰라…"

"야, 야. 그게 무슨 소리야. 너 일리가 없잖아. 넌 이런 일마저 네가 덮어쓰려는 거냐?

아무리 착하다지만 이쯤 되면 그냥 바보인 거다."

강전이 두 손을 휘휘 저었다.

"아냐, 아냐. 내가 착해서 남의 죄를 덮어쓰려고 이러는 게 아니라… 정말 나일지도 몰라."

채민의 목소리가 불안하게 떨렸다.

우준이 멍하니 채민을 쳐다봤다.

채민은 자신을 믿고 있는 우준을 배신하는 것이 무엇보다 괴로워서

차마 우준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부드러운 갈색 머리가 흘러내려 얼굴을 간질였다.

채민은 울컥 눈물이 나올 것 같았지만 꾹 참고 말했다.

"나… 아무래도 몽유병이 있는 것 같아."

다들 벙찐 표정으로 채민을 쳐다보다가 곧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채민이가 또 헛소리하기 시작했다."

"일단 마을을 벗어나자. 시체들이 썩고 있어서 전염병이 생길지도 모르겠어."

"다음 마을은 이런 일이 벌어지지 말았어야 할 텐데…"

"아, 푹신한 침대에서 자고 싶어."

"꼬마야. 너도 일단 우리랑 같이 가자."

"정말이야, 얘들아!"

모두가 자기의 말을 깨끗하게 무시하자 채민이 애원하듯 말했다.

"그래, 그래. 채민아. 너 몽유병이야. 그래, 알겠어."

가인이 채민을 토닥토닥 다독여줬다.

"진짜라니까… 나 저번에… 브리엔의 성에 있을 때 일인데…

밤에 잠이 안 와서 응접실에 갔었거든. 거기 소파에 누워서 잠이 들었는데,

다음 날 되니까 내 방에 와서 누워있었어. 그런 일이 두 번이나 있었어.

나 진짜로 밤에 나도 모르는 새에 돌아다니는 거 같아.

그러니까 이번 일도…"

"아, 그거."

우준이 입을 열었다.

"내가 옮겨준 거다."

"……"

"소파에서 자고 있길래… 하지만 난 널 이 마을까지 옮겨준 기억은 없는데…"

"그것 봐라, 현채민. 저 바보."

"하지만…"

"난 밤에 잠을 자지 않아."

브리엔이 입을 열었다.

"네가 밤중에 혼자 돌아다니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러니 이 마을의 일도 네가 한 것일 리가 없지."

"……"

"자, 지금까지… 관심 받고 싶었던 현채민의 헛소리였습니다. 짝짝짝."

해윤이 박수를 쳐주었다.

"나… 집에 갔다올래."

가만히 그들을 지켜보던 아이가 말했다.

"집에 가서 가져올 게 있어."

"그래? 그럼 가지고 와라. 빨리 와야 된다. 얼른 길을 떠나야 다음 마을에 도착할 테니까…"

폐허가 된 마을이지만 아직 집이랄 게 남아있긴 한 건지, 아이는 후다닥 달려갔다.

아이가 간 후, 일행은 모여서 이 사태에 대해 의논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채민이의 도플갱어인 것 같지?"

강전이 말했다.

"응, 그런 것 같네. 저번에 그냥 사라져 버렸잖아."

"이런 곳에서 이런 끔찍한 일을 하고 있을 줄이야… 그 때 확실하게 없앴어야 했는데…"

"채민이 도플갱어?"

처음 들어보는 말이기에 차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끼어 들었다.

"아, 니들은 모르겠구나? 우리들, 원래 세계에서 모인 멤버가 우준이랑 나랑 강전이랑 비인이잖아.

마지막 한 명을 찾고 있었는데 그게 채민이었거든. 우리가 도착했을 때, 도플갱어한테 죽을 뻔했었어.

일단 도플갱어를 떼어놓긴 했었는데, 이야기하다가 보니까 사라졌더라구."

"도플갱어라는 게 정말로 있기는 하구나."

"어쨌든 나 때문이네."

채민이 한숨을 내쉬었다.

"내 도플갱어 때문에…"

"아…"

"아니, 너 때문이 아니지."

우준이 아니라고 말하려는데, 브리엔이 말을 가로챘다.

우준은 기분 나쁜 듯 인상을 찡그리고 브리엔을 노려봤지만 브리엔은 우준 따위 안중에도 없는 듯

계속해서 말했다.

"이건 너에게 저주를 건 신의 탓이다. 그 신은 모든 것을 파괴하는 재주를 가지고 있으니까…"

"고마워, 브리엔."

"그딴 말 들으려고 이런 말을 한 건 아냐!"

브리엔이 버럭 화를 냈지만 채민은 그냥 웃기만 했다.

감정 표현에 서투른 브리엔이기에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 생겨나면 화를 낸다는 것을,

여행을 함께 하는 중에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성질머리하고는…"

강전이 중얼거렸다.

"나 왔어요."

아이가 돌아왔다.

아이는 집에 다녀와서인지 많이 초연해진 얼굴이었다.

눈동자 가득 담겨 있던 공포도, 슬픔도 많이 잦아들었다.

좋은 현상이었기에 일행은 안심했다.

공포에 질린 아이를 데리고 여행하는 것은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 그럼 출발하자. 힘든 여행이겠지만 견딜 수 있겠지?"

비인의 말에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일어나서 옷을 탁탁 털고 몇 걸음 옮겼을 때였다.

채민의 바로 앞, 그러니까 우준의 옆에 서서 걷던 아이가 갑자기 몸을 휙 돌려 채민을 향해 달려들었다.

"죽어라, 이 악마!"

그것은 너무나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기에, 브리엔도, 우준도 아이를 막지 못했다.

아이의 손에는 그들이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부엌칼이 들려 있었고,

번쩍이는 칼은 일행이 미처 그 형태를 짐작하기도 전에

채민의 연약한 복부를 뚫고 안으로 푸욱 박혀버렸다.

채민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눈을 크게 떴다.

아이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채민의 배에 깊이 박힌 부엌칼을 빼냈다.

그 순간 막혀 있던 공간이 뚫리며 붉은 피가 뿜어져 나왔다.

"안 돼!"

우준이 달려들어 아이의 팔을 잡아 옆으로 밀쳤다.

"채민아!"

그제야 사태 파악을 한 일행이 채민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채민은 눈을 크게 뜬 채, 두 손으로 피가 뿜어져 나오는 배를 감쌌지만

피는 손가락 사이로 비집고 흘러나왔다.

"채민아, 채민아!"

언제나 차분한 우준이지만 이 순간만큼은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어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채민을 부축하려고 했다.

비틀거리는 채민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지만

억지로 버티고 서서 한 곳을 노려보고 있었다.

할 말이 있는 듯 입을 벌리자 피가 왈칵 쏟아져 나왔다.

"채민아! 가만히 있어! 아무 말도 안 해도 돼!"

우준이 떨리는 손으로 채민의 입가를 닦아주며 외쳤다.

브리엔은 순간 커다란 돌이 폐를 콱 짓누르는 느낌을 받아서 숨도 쉬지 못하고 멍하니 서 있었다.

채민이 찔린 부위를 자신이 찔리기라도 한 듯, 배가 너무나 아파왔다.

'어디를… 보고 있는 거지?'

브리엔은 이런 기분을 느끼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고개를 돌려 채민의 시선을 따라갔다.

그곳에는 아이가 있었다.

아이는 한 번 더 찌르지 못한 것이 분하다는 듯, 피 묻은 칼을 들고 씩씩대며 서 있었다.

'저 애를 죽여달라는 건가?'

브리엔은 죽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사실 채민의 부탁이 아니더라도, 자신이 화가 나서 그 아이를 죽일 생각이었다.

"아… 안… 돼…"

채민의 입에서 가느다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저 애…"

"아무 말도 하지 마, 채민아."

리현이 다급하게 외쳤지만 채민은 배를 막고 있던 손을 힘겹게 들어올려 아이를 가리켰다.

"죽으려고… 하고… 있……어… 자…살… 안…돼… 안 돼…"

그 순간, 아이는 칼을 치켜 올려 자신의 목을 세게 찔렀고,

찢겨나간 연약한 살을 뚫고 피가 분수 같이 터져 나왔다.

아이의 몸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풀썩 쓰러졌고,

그걸 본 채민의 눈에서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나옴과 동시에

눈꺼풀은 고통을 감당하지 못하고 서서히 감기기 시작했다.

채민의 배에서는 생명의 근원인 선명한 붉은 색의 액체가 쉴 새 없이 쏟아져 내렸는데,

브리엔이 그 순간 정말 이상하게 여긴 것은,

피 냄새가 이렇게 진동을 하는데도, 조금도 입맛이 땡기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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