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씨발! 이게 대체 무슨 꼴이야!"
강전이 외쳤다.
"조용히 좀 해."
"지금 조용히 하게 생겼어? 제기랄! 채민이가 죽었잖아!"
퍼억-
리현의 손이 강전의 머리를 아프게 때렸다.
"불길한 소리는 하지도 마. 아직 안 죽었어. 치료해야 하니까 조용히 좀 하고 있어."
죠니가 담아준 의료 기구와 약초를 꺼내 늘어놓고 사용법을 읽어보려고 했지만 다들 마음이 급했다.
가장 침착한 우준마저도 채민을 끌어안고 다른 조치를 취할 생각을 못하고 있었다.
이미 채민은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우준의 옷까지 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이 약초랑 이 약초를 씹어서 상처 부위에 얹어. 그리고 이 약초를 물에 넣어서 먹여야 돼."
소년이 죽었다는 것을 확인하고 온 브리엔이 늘어놓은 약초를 쓱 훑어보더니
약초 몇 개를 턱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일단 더 이상 피가 흐르는 건 막을 수 있겠지만 내장의 손상은 어떻게 할 수가 없어.
얼른 다음 마을로 가야할 거다."
일행이 브리엔이 말해준 대로 약초를 으깨는 것을 지켜보며 브리엔은 머리로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째서지? 그 애는 널 찔렀어. 널 죽이려고 했어. 그런데 어째서 넌 그 순간에도
그 애를 걱정한 거지? 그 애가 자살하려는 것을 막으려고 한 거지? 죽이고 싶지 않아?
당연히 죽이고 싶어야 하는 거잖아. 그런데 어째서 넌… 그 고통스러운 순간에도 그 애를
죽게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에게 보낸 채민의 간절한 눈빛이 그 애를 죽여달라는 부탁이라고 생각했다.
당연한 것이기에, 특별히 채민이 나쁜 기집애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을 찌른 사람을 죽이고 싶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런데 있었다.
그런 사람이 이 앞에 있다.
'제기랄! 난 정말 너의 생각을 이해할 수가 없다구.
넌 대체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살아가는 거야?'
"일단 출혈은 막았어! 이제 어떻게 해야하지?"
리현이 벌떡 일어나며 브리엔에게 물었다.
우준이 이성을 잃은 지금, 브리엔이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오만상을 찌푸리고 채민을 응시하던 브리엔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리현을 쳐다봤다.
"빌어먹을…"
화가 치밀었다.
옆에 있었는데도 채민을 지키지 못한 자신의 무능력함에 화가 났다.
지금껏 자기 자신이 이토록 무능력하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기다려. 내가 박쥐로 변해서……"
"내가 할게."
비인이 말했다.
"내 유체가 훨씬 빠를 거야. 브리엔이랑 조금 떨어져 있으면 할 수 있겠지."
브리엔은 비인을 한 번 쳐다보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시던지… 괜한 수고를 안 하게 되었군."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브리엔은 절망적인 기분을 맛봐야 했다.
지금 자신이 채민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비인은 유체 이탈로 몇 초도 안 되어 옆 마을이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했다.
"유체로 채민이를 옮길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비인이 안타깝게 말했다.
"어쨌든 빨리 출발하자. 우준아, 우리 얼른 옆 마을로 가야 돼."
"그래."
우준이 일어나 조심스레 채민을 안았다.
소중히 보듬어 안는 우준의 얼굴은 꼭 울 것만 같았다.
"얼마나 걸리지?"
우준이 브리엔을 쳐다봤다.
"빨리 걸으면 15시간 정도. 그 애를 안고 걸으면 더 늦어질지도…"
"아니, 최대한 빨리 갈 생각이다. 10시간 안에 가자."
우준이 먼저 걸음을 옮겼다.
"채민이가 그 때까지 버텨줘야 할 텐데…"
리현이 걱정스럽게 중얼거리며 우준의 뒤를 따랐다.
모두가 채민을 걱정했지만, 차희만은 시체 같이 하얗게 질린 채민을 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잘 된 거야, 이게…'
위험한 길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예상 시간보다 훨씬 빨리 다음 마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채민을 안아든 우준은 힘이 들 텐데도 조금도 쉬지 않고 걸음을 재촉했고,
열 시간이나 되는 강행군을 하면서도 일행 중의 누구도 불평을 하지 않았다.
마을을 발견했을 때, 그들은 기쁨보다는 불안감이 앞섰다.
10시간밖에 안 되는 시간이기는 하지만, 그 동안 도플갱어에 의해서 초토화가 되었을까 봐
걱정이 됐기 때문이다.
정말 다행히도 마을은 평화로웠다.
피를 흠뻑 뒤집어쓴 우준이 나타나자, 거리에 나와있던 마을 사람들은 조금 놀란 듯 했지만,
마을의 의사로 보이는 사람이 앞장서서 우준 일행을 병원으로 안내했다.
의사는 아무 것도 묻지 않고 채민의 치료에 나섰다.
"채민이… 잘못되면 어쩌지?"
가인의 목소리가 불안하게 떨렸다.
"그럴 일 없을 거야."
비인이 대답했다.
"절대로 그럴 일 없을 거야."
하지만 비인의 일그러진 얼굴은 비인 역시 가인처럼 많이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우준은 멍하니 앉아서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가 하고 있었다.
"우준아, 너 괜찮은 거야?"
차희가 물었다.
"절대로… 이 손에 잡지 못하는 일이 일어나서는 안 돼."
우준의 목소리는 섬뜩할 만큼 단호했다.
만약 채민이 이대로 죽는다면 악마와의 거래라도 불사하겠다는 듯한 음성이었기에
다들 오싹함을 느끼며 우준을 쳐다봤다.
오랜 치료가 끝난 후, 의사가 피곤한 얼굴로 일행의 앞에 나왔다.
모두 벌떡 일어나 의사의 표정을 살폈다.
의사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응급조치를 잘 하기는 했지만 출혈이 너무 심했습니다. 상처도 너무 깊어서 쉽게 일어날 수 있는
상태가 아닙니다. 일단 경과를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제기랄!"
강전이 욕설을 내뱉으며 병원 밖으로 나갔다.
아무도 강전을 탓하지 않았다.
그들은 지금 자신들에게 일어난 일을 믿을 수가 없었다.
조금만 더 애를 쓰면 모든 것이 바로 잡힐 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채민이 큰 상처를 입고 말았다.
"여러분도 좀 쉬셔야 할 것 같습니다. 많이 지쳐 보이시는군요."
"우리는… 우리는 괜찮아요."
가인이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여기에 있을래요."
"가서 쉬어."
우준이 말했다.
"얼마나 더 걸릴지 모르는 여행이야. 채민이는 곧 일어날 테니까,
채민이가 회복하면 바로 떠날 수 있도록 좀 쉬어둬."
"그럼 너는? 네가 제일 지쳤잖아! 네가 제일 힘들었잖아! 우준이, 네가 쉬어야 하는 거 아냐?"
차희가 우준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우준은 조금 차갑다싶을 정도로 차희의 손을 뿌리쳤다.
"난 쉴 수 없어."
우준의 눈은 아까부터 채민이 있는 병실 안을 응시하고 있었다.
우준의 마음과 우준의 생각과 우준의 영혼은 이미 채민의 곁에 도달해 있었다.
"그러니까 먼저 가서 쉬어. 난 여기에 있을게."
우준의 말이 틀리지 않았기에, 그들은 의사를 따라 의사의 집으로 안내되었다.
마을 사람들이 호기심과 걱정이 섞인 얼굴로 일행을 흘끗흘끗 쳐다봤다.
"잘 알지도 못하는 여행객인데, 굉장히 친절하시네요. 정말 감사합니다."
비인이 예의바르게 인사하자, 의사가 희미한 미소를 띄었다.
"전 여러분을 잘 알고 있습니다."
"네?"
의사의 말을 듣는 순간, 일행은 혹시 이 의사도 자기들을 죽이려는 무리 중의 하나가 아닌지에
대한 의심이 먼저 들었다.
"검은 해적단을 기억하고 계시겠지요?"
"아, 네."
"제가 그 때, 여러분의 도움으로 풀려난 사람들 중의 한 명입니다.
여러분이 아니었다면 그대로 검은 해적단의 손에 죽었겠지요."
"아아…"
채민이 저런 상황만 아니라면 일행은 아마도 뛸 듯이 기뻤을 것이다.
자신들이 한 작은 선행이 생각지도 못한 때에 가장 좋은 모습으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아, 그랬군요."
"그 때는 경황이 없어서 제대로 인사도 하지 못했지만 언젠가 또 뵙게 되는 날이 온다면
반드시 보답하겠다고 결심하고 있었습니다."
의사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검은 해적단에 잡히기 전까지의 저는 사리사욕만 채울 줄 알고,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가족들까지도 등질 수 있는 악랄한 인간이었습니다.
하지만 해적단에게 잡혀갔을 때, 내가 살아온 인생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되짚어보게 되었습니다.
아아, 내가 죽으면 모두들 슬퍼하겠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문득 떠오르는 질문이 있더군요.
대체 누가 슬퍼해 주지?"
의사의 집은 다른 집들이 그렇듯 벽돌로 지은 나지막한 2층 집이었다.
집 앞에는 작은 정원이 있었는데, 손질한 사람의 애정이 물씬 느껴지는 예쁜 정원이었다.
"나의 죽음을 슬퍼해 줄 사람이 누구일지 떠올려 봤는데, 아무도 없더군요.
내 아내도, 내 아들도, 내 친지들과 이웃들도, 내가 지금껏 치료해준 환자들도…
어느 누구도 나를 위해 슬퍼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게 내가 만들어간 나의 인생이었던 거지요.
그 때에야 저는 깨달았지요. 제가 살아온 인생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이었는지를…
그리고 다짐했습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 기적이 일어나 살아서 돌아간다면,
나의 가족들을 내 몸 같이 아끼고, 내 이웃과 내 환자들을 가족처럼 생각하겠다고…
돈이 없어서 찾아오는 환자들이 있더라도 절대 내치지 않겠다고…"
집에는 의사의 아내와 아들이 있었다.
그들은 반갑게 일행을 맞이했다.
의사의 아내는 서둘러 일행을 위한 식사를 준비했고, 아들은 쉴 방을 준비하기 위해 2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각자 식탁에 자리를 잡고 앉자 의사는 말을 계속했다.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절대로 살아서 나가는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을 때, 여러분이 나타났고,
여러분은 우리를 구해줬습니다. 그래서 저는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가족들과도 이웃들과도, 그리고 환자들과도 아주 사이가 좋습니다."
의사가 미소를 지었다.
"여러분을 다시 만나게 되어서 정말 기쁩니다.
다친 분은 최선을 다해서 고치도록 하겠습니다. 모든 것은 그 분의 의지에 달리기는 했지만…
여러분의 일행이라면 반드시 살아날 수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우준은 채민의 침대 옆에 서서 채민을 응시했다.
하얀 침대보다 채민의 얼굴이 더 하얗게 질려 있었다.
마치 죽은 것만 같이 약한 숨을 쉬며 눈을 감고 있는 채민의 모습이 우준의 가슴을 철렁하게 만들었다.
공기의 작은 움직임에도 채민이 흩어져 버릴 것만 같아서,
우준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조심스레 침대 가까이 다가가 앉았다.
그리고 떨리는 손을 올려 채민의 손을 잡았다.
차갑다.
"죽지 마라, 현채민. 여기서 죽는 건 네 운명이 아니야. 아직은 아니야."
괴로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직 해야할 일이 많이 남아있어. 내가 네게 해주고 싶은 일이 많이 있어.
그러니까 넌 지금 죽어서는 안 돼."
검은 눈동자 가득 눈물이 차올랐다가 사라졌다.
"만약 이 자리에서 죽는 것이 너의 운명이라면… 한 번만 운명을 거역해라.
내가 널 이대로 보낼 수가 없어. 그러니까 제발…"
간절하게 떨리는 목소리가 공기를 타고 불안하게 흩어졌다.
"제발… 한 번만 더 기회를 줘. 이제 절대… 다치지 않게 해줄게."
작은 빛 한 조각 남아있지 않은 어두운 지구 위에 채민은 혼자 서 있었다.
그곳에는 공기가 없기에 바람도 없었고, 바람이 없기에 파도도 없었고, 파도가 없기에 사람도 없었다.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그곳은, 모든 것이 시작하기 전, 태초의 그곳 같았다.
불안하게 주위를 둘러보지만 보이는 것이 없다.
그저 어둠, 끝을 알 수 없는 짙은 어둠뿐이다.
눈앞에 검은 벽이 세워진 듯,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손을 쭉 뻗어보지만 잡히는 것이 없다.
빛을 찾기 위해 한 걸음 앞으로 내딛자 발에 느껴지는 것이 없었다.
그제야 채민은 자신이 허공에, 빛 한 조각 없는 검은 허공에 떠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두 팔로 몸을 감싸고 부르르 떨며 다시 한 번 꼼꼼히 주위를 살펴보는데,
희미한 빛 한 줄기가 눈에 들어왔다.
마치 실낱 같이 가늘고 약한 빛이었지만 채민에게는 구원과도 같았다.
아까부터 복부에 타는 듯한 통증이 느껴져서 서 있기 힘들 정도였지만,
채민은 힘겹게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