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햇빛 한 바구니, 고양이 두 스푼-58화 (58/91)

-58-

그것은 문이었다.

차갑고 두꺼운 문이 빛과 채민의 사이를 막고 있었다.

밀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잠시 망설이던 채민은 문의 저편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었다.

어둡고 짙은 고독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채민은 문 저편에 누군가 있다는 것이 반가워,

더 이상 생각할 겨를도 없이 손을 뻗었다.

잘 열리지 않을 줄 알았던 문은 소리도 없이, 저항도 없이 채민의 손길을 따라

조용히 열려 채민에게 빛이 있는 세상을 보여주었다.

그곳은 빛이 있었지만 사실은 빛이 없는 것과도 같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한 여인을 둘러싸고 욕을 내뱉고 돌을 던졌다.

여인은 갓 태어난 듯한 아이를 품에 꼭 안고 그들의 돌팔매질을 견디고 있었다.

갓난아기를 다치게 하지 않으려고 고통을 참으며 아이를 안고 있는 여인의 안쓰러운 모습을 보면서도,

어느 누구도 여인을 위해 군중을 막아내지 않았다.

갓난아기는 상황도 모르고 엄마의 품에 안겨 자지러져라 울어댔다.

어찌나 우는지 저러다 숨이 막혀 질식사하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채민은 자신도 모르게 달려가 그들의 앞을 막아섰다.

양팔을 양쪽으로 넓게 벌리고 그들을 향해 외쳤다.

"그만 해요! 그만하세요! 이러다가 정말 죽겠어요!"

하지만 그들은 채민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무리 중의 한 명이 돌을 던졌다.

주먹만한 돌은 곧장 채민을 향해 날아들었다.

질끈-

퍽-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다가올 고통을 예감하며 눈을 감았지만 아무런 통증도 없다.

채민은 조심스레 눈을 떴다.

돌은 채민이 아닌 여자의 머리에 상처를 내고 떨어졌다.

여자의 머리에서 피가 흘렀다.

채민은 달려가 여자를 잡아주려고 했지만 채민의 몸은 그대로 여자의 몸을 통과했다.

그제야 채민은 자신이 이들에게 아무런 영향도 끼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안 돼, 안 돼!"

이 여자가 어떤 죄를 저질렀기에 사람들이 이토록 성을 내며 죽이려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 것도 모르는 갓난아이가 이대로 죽는 것을 도무지 봐줄 수가 없었다.

여자의 머리에서 흐르는 피가 볼을 타고 아이의 얼굴로 떨어졌다.

피는 붉은 선을 그리며 흘러 아이의 입가에 스며들었다.

배고픔에 지친 아기는 입안으로 흘러 들어오는 액체를 맛있다는 듯이 빨아들였다.

아이의 작은 입술이 오물거리며 움직이는 것을 보며 채민은 눈물을 흘렸다.

무엇이든 하고 싶은데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이토록 견디기 힘든 것이라는 걸,

채민은 이제야 할게 되었다.

"누구의 아이인지도 모르는 애를 낳다니! 이 방탕한 계집!

그러고도 살기를 바랐단 말이냐!"

한 남자가 위엄있게 외쳤다.

"그게 아니에요! 나는… 나는…"

"시끄럽다!"

남자는, 그리고 사람들은 진실을 듣는 것을 거부했지만, 채민에게는 과거에 있었던 여자의 생각이

절실하게 흘러들어왔다.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던 여자는 어느 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한 무리의 남자들에게 붙잡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가혹한 일을 당했다.

그리고 여자의 임신.

아무 것도 모르던 어린 여자는 부모님께도 털어놓지 못하고 쩔쩔맸다.

하지만 부모는 곧 여자의 임신을 눈치챘고, 뱃속의 아이를 죽일 것을 권했다.

하지만 여자는 죄없는 생명을 죽이고 싶지 않았다. 죽일 수 없었다.

그래서 부모를 피해 멀리 떠났다가 아이를 낳게 되자 배고픔과 추위를 견디다 못해 집으로 돌아왔다.

부모의 환대를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 부모가 자신을 매정하게 내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부모는 여자를 외면했고, 사람들은 결혼도 하지 않은 처녀가 임신을 했다는 것에 분노했다.

여자의 행실을 문제삼아 그녀를 죽이려는 무리들 가운데는

그 날 여자에게 가혹한 행위를 했던 남자도 몇 명 끼어 있었다.

채민은 이를 악물고 그들을 노려봤다.

"나쁜 사람들! 당신들은 인간도 아니야!"

너무나 잔인했다.

"정말 인간도 아냐! 당신들 같은 사람들은 다 없어져야 돼!"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그들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채민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여자에게 돌아섰다.

아이가 채민을 쳐다보고 있었다.

맑고 커다란, 순수한 눈망울이 똑바로 채민을 응시하고 있었다.

"넌… 넌 내가 보이니?"

아이가 웃었다.

"내가 보이는구나? 그렇지?"

고사리 같은 작은 손이 채민을 향해 쭉 뻗어졌다.

채민은 만질 수 없지만 아이의 손에 자신의 손가락을 가져갔다.

아이는 꺄륵꺄륵 웃으며 채민의 손을 잡기 위해 노력했다.

"저 방탕한 계집을 돌로 쳐 죽여라!"

남자가 외쳤다.

퍼억- 퍽-

갑자기 여자의 몸과 머리에 커다란 돌덩어리가 던져졌다.

채민은 막고 싶어서 몸을 펼쳐 여자의 몸 위에 덮으려고 했지만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돌은 채민을 뚫고 들어가, 여자의 가냘프고 지친 몸에 상처를 냈다.

온몸에서 피가 흘렀다.

여자는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아이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어떻게든 아이에게 돌이 맞지 않게 하기 위해 온몸을 움츠렸다.

"절대로… 사람을 원망해서는 안 돼."

곧 숨이 끊길 듯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채민은 정신을 번쩍 차렸다.

여자의 눈동자에서는 점점 빛이 사라지고 있었지만,

여자는 아이에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고 있었다.

"저들은… 나쁜 게 아니야… 모르는 거야…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그른지…

네가 탓해야 할 것은 사람의 무지함이지, 사람 자체가 아니란다."

채민은 가슴이 터질 듯이 아파 왔다.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들을 미워하지 않을 수 있는 여자가 이해되지 않았다.

자기 같았으면 저들을 미워했을 것이다.

저주하면서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여자는 마지막까지 그들을 미워하지 않았다.

"내 사랑하는 아가야… 혹시라도… 네가 여기서 살아남는다면… 네가 살게 된다면…

저들을 미워하지 말거라… 저들을 용서하거라… 인간은… 남을 탓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연약한 존재이니까… 그래서 그런 거니까… 저들을 용서하거라… 브리엔… 내 아기…"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채민은 눈을 크게 뜨고 여자의 품에 안겨 있는 아이를 쳐다봤다.

아이는 제 어미의 말을 알아듣는다는 듯, 아름답고 총명한 눈을 반짝이며 여자를 쳐다보고 있었다.

"브리…엔…?"

브리엔이 인간의 아이일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당연히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일 거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브리엔은 사실 저토록 선량하고 아름다운 한 여자에게서 태어난 "인간"이었던 것이다.

여자는 브리엔에게 인간을 용서하라고 했다.

하지만 브리엔은 인간의 피를 빨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흡혈귀가 되었다.

"어째서… 어째서 그런…"

채민은 믿을 수 없는 표정으로 아이를 쳐다봤다.

아이의 입술에는 제 어미의 피가 잔뜩 묻어 있었다.

"만약… 살아난다면… 널 세상에서 가장… 사랑해주었을 텐데…"

여자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가장… 사랑 받는 아이로… 키우고 싶었는데…"

퍼억-

가장 커다란 돌 하나가 여자의 머리를 강타하는 순간, 여자의 눈에 남아있던 생명의 빛이 완전히 꺼져버리고,

그것과 동시에 하늘도 빛을 잃었다.

그곳은 채민이 원래 있던 곳만큼이나 어두운, 빛 한 조각 찾을 수 없는 암흑에 휩싸이고 말았다.

갑작스러운 흑암이 닥치자 사람들은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지르고 우왕좌왕하며 빛을 찾아 헤맸다.

하지만 채민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어린 브리엔을 쳐다보고 있었다.

채민의 눈은 이상할 정도로 밝아서 브리엔의 모습을 뚜렷이 확인할 수 있었다.

태어난지 얼마 안 된 아기가 혼자의 힘으로 기어다닐 수 없을 것이 분명한데도,

제 어미가 죽자마자 브리엔은 혼자 기어서 여자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눈의 착각인지는 모르겠으나 브리엔의 몸이 아까보다 커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눈의 착각이 아니다.

브리엔은 믿을 수 없는 속도로 자라나고 있었다.

여자의 품에서 완전히 빠져나왔을 때, 브리엔은 이미 10살 정도 되는 소년의 모습이 되어 있었고,

몸을 쭉 폈을 때, 브리엔은 채민과 만났을 때의, 18살의 소년의 모습이 되어 있었다.

무서울 정도로 아름다운 브리엔은 어둠 속에서도 빛이 났다.

아니, 브리엔 자신이 어둠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이 흘러 어깨를 덮었고, 검은 눈동자는 자신의 어미를 죽인 사람들에게 향했다.

"인간을 용서하라구요?"

브리엔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목소리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냉랭해서, 채민은 그것이 브리엔의 목소리라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채민이 만났을 때의 브리엔도 차가운 목소리이기는 했지만 이정도는 아니었다.

지금 브리엔의 음성에는 악의와 증오와 분노가 가득 담겨 있다.

"지금 내게, 내 어머니를 돌로 쳐서 죽인 저 버러지 같은 인간들을 용서하라고 하는 말입니까?"

브리엔의 몸이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등에서 검은 날개가 돋아난 브리엔의 모습은 마치 그림 속의 악마가 세상으로 빠져나온 것 같아 보이기까지 했다.

"난 절대로… 저들을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저들을 향한 이 분노와 멸시와 증오를

가슴 속 깊이 담고 살아갈 겁니다. 내게 어머니의 피를 마시게 했던 저들의 피를 나의 양식으로 삼아,

영원히 저들을 공포 속에 가두어 놓을 것입니다.

결코… 저들을 용서하지 않겠습니다."

인간들을 노려보고 있던 브리엔이 채민을 향했다.

검은 눈동자가 오랫동안 채민을 응시했다.

채민은 눈물을 흘리며 그대로 서 있었다.

"안아주고 싶어, 브리엔. 너무 가슴이 아파서… 안아주고 싶어."

"고맙다."

브리엔이 말했다.

"하지만 너 하나의 마음으로 내 생각이 바뀌지는 않아.

혹시라도 너 같은 인간을 하나 더 만나게 된다면, 나는 조금 생각을 바꿀지도 모르지."

"브리엔… 아직도 내가 보이는구나? 다들… 날 보지 못하던데…

저 사람들이 날 볼 수 있다면… 이런 일이 생기는 걸 막아볼 수도 있었을 텐데…"

"저들에게 보이더라도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았을 거다. 아마 저들은 너까지도 죽였을 거야.

네가 저들에게 보이지 않는 건, 널 봐줄 사람이 따로 있기 때문이겠지.

이런 곳에 오래 있지 말고 네가 가야할 곳으로 돌아가라.

난 이제부터 저들을 전부 없애버릴 생각이니까…"

"브리엔…"

채민은 차마 브리엔을 말릴 수 없었다.

브리엔이 사람들을 죽이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불과 몇 분 전만 해도 자신 역시 저들을 전부 죽이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던가.

그런 생각을 한 주제에, 착한 척 하며 브리엔을 말릴 수는 없었다.

브리엔의 검은 날개가 움직여 브리엔의 육체를 공중으로 띄웠다.

빛이 없는 하늘에 큰 원을 그리며 한 바퀴 돈 브리엔은 빠르게 지상으로 낙하해,

사람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은 무언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죽음에서 벗어날 방도를 찾지 못하고 비명을 질러댈 뿐이었다.

채민은 브리엔이 사람을 죽이는 모습을 더 이상 보고 있을 수 없어 눈을 질끈 감았고,

그 순간 보이지 않는 힘이 자신을 공중에 붕 띄우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다시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

브리엔은 보이지 않았고, 사람들의 비명도 들리지 않았다.

처음에 있었던, 아무 것도 없는 그곳이었다.

크나큰 상실감이 침범했다.

깊숙한 곳으로부터 올라오는, 모든 것을 잃은 듯한 깊은 상실감에 오한이 일었다.

채민은 양팔로 몸을 감싸며 눈을 감았다.

눈을 뜨나, 감으나 보이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눈을 뜨고 있을 때에도 아무 것도

보이는 것이 없는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내가 가야할 곳…"

채민이 괴롭게 중얼거렸다.

"그게… 대체 어디야…"

"여기…"

귀에 익은 낮은 목소리에 채민은 눈을 번쩍 떴다.

여전히 보이는 것이 없어서 귀의 착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목소리는 들려왔다.

"여기잖아, 채민아. 여기가 네가 있을 곳이야."

아마도 눈이 보는 것을 거부했던 모양이다.

어둠이 걷히고 희미하게 형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 형체들이 서서히 분간이 가능할 정도로 모습을 갖춰나갔다.

들려오는 목소리는 한 사람의 것이었지만 형체는 하나가 아니었다.

한 명, 한 명…

그리운 얼굴이 한 가득 미소를 담고 채민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들의 기다림이 간절하게 느껴져 채민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들에게 돌아가고 싶었다.

그들의 미소를 좀 더 가까이에서 보고 싶었고 그들의 미소에 답해주고 싶었다.

"응, 맞아."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않고 채민은 미소를 지었다.

그들을 향한 애정이 담긴 웃음이 함빡 담겼다.

"나… 거기에 있어야 하는구나."

채민이 눈을 떴을 땐, 우준이 그곳에 있었고,

우준의 따뜻한 손이 채민의 손을 꽉 잡으며

"네가 이대로 깨어나지 못했으면… 아마 나도 죽었을 거다."

라고 말했을 땐,

계속해서 쑤셔대던 복부의 통증조차 깨끗이 잊을 수 있었다.

채민은 미소를 지으며 눈을 감았다.

눈을 감았음에도 우준의 검은 눈동자와 잘 생긴 얼굴은 여전히 잔상으로 남아

지워지지 않고 그곳에 있었고,

손에 느껴지는 따뜻함 역시 사라지지 않았다.

"고마워, 우준아."

채민이 깨어났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차희는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깊은 상처였기 때문에 그대로 죽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왕이면 그대로 죽기를 바랐다.

착한 척을 하면서 일행의 사랑을 받는 채민이 몹시 거치적거렸다.

채민 때문에 모든 일이 틀어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채민이 없었더라면 여행이 이렇게 늦춰지는 일도 없었을 거고,

채민이 없었더라면 다른 누군가가 다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채민이 없었더라면 일행의 시선이 분산되는 일 없이 전부 자신에게 쏠렸을 것이다.

"짜증나…"

사실 차희 자신도 자기가 왜 이렇게 채민을 싫어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누군가를 이렇게까지 싫어해 본 적이 없는데,

이상한 세계로 떨어진 후부터 뇌에 이상한 물질이 들어가기라도 한 것처럼

채민을 향한 폭발적인 증오와 미움이 견디기 힘들 정도로 육체를 지배했다.

만약 원래의 세계에 있었더라면 채민을 죽이기 위해 마녀의 마을에서 다른 사람 몰래

독을 감춰서 나오는 일은 절대로 없었을 것이다.

차희는 자신의 짐에 감춰두었던 손가락 크기의 병을 하나 꺼냈다.

손가락 정도 되는 크기의 투명한 유리병 안에 담긴 독은 회색과 검은색이 뒤섞인 오묘한 색을 띄고 있었다.

마녀의 마을에서 나오기 전, 일행과 함께 가지고 갈 것이 없는지 돌아보는 중에

마녀들이 약품을 모아둔 곳을 발견했다.

맹독을 표시한 상자 안에 들어있던 이 병에 매혹이 되었다.

손이 저절로 움직여 많은 병들 중에 이 병을 집어들었다.

그 때만 해도 이 안에 들어있는 독을 사용해야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혹시 모르니까 가지고 다녀야겠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다.

'어떤 독일까?'

차희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맺혔다.

'한 번 사용해보고 싶다.'

신은 커다랗고 푹신한 의자에 느긋하게 앉아, 차희를 지켜보고 있었다.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는 것을 좋아하고, 모든 사람이 자신을 지켜봐 주기를 바라는 차희는

처음부터 다루기 쉬웠다.

일행 중의 누구를 희생자로 삼을지 고민할 것도 없었다.

냉철하고 인간을 싫어하는 브리엔이 잘 해주리라 믿었건만,

브리엔은 생각보다 더 인간적이어서 신에게 큰 실망감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신은 브리엔의 마음을 움직일 수는 없었다.

그의 운명에 자신이 손을 댈 수 없는 것처럼.

때문에 운명을 건드릴 수 있는 차희를 택한 것이다.

아주 조금 질투심과 증오와 미움을 키웠을 뿐인데, 차희는 그것에 완전히 마음을 빼앗겨버렸다.

병적일 정도로 우준에게 집착하게 된 것도 신이 차희의 마음을 건드렸기 때문이었다.

어느 누구도, 브리엔조차도 신이 차희를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할 것이다.

채민에 대한 우준의 마음이 커질수록, 채민에 대한 차희의 미움도 커져만 갔다.

그것은 차희가 이성으로 자제할 수 있을 만한 크기가 아니었다.

미움은 형태를 이뤄, 차희의 육체보다 더 크게 자라나 차희를 삼켜버렸다.

마녀의 마을에서 독한 독이 들어있는 병을 눈에 띄게 해준 것도 신이었다.

차희가 그것을 집어들어 옷 속에 감추고, 채민의 병원으로 향하는 것을 지켜보며

신은 즐거운 미소를 지었다.

"슬슬 재미있어지겠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