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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지 않은 병실에 모두 모이니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좁았지만
아무도 그곳에서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채민은 동료들이 이토록 열심히 자신을 찾아준다는 사실이 뛸 듯이 기뻤지만
아직 뛸 수 있는 상태는 아니었기에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쳐다봤다.
"몸은 좀 괜찮은 거야?"
"배는 안 아프고?"
"좀 더 쉬어야 하는 거 아냐?"
이제 막 깨어난 채민이 머리 아플 것을 염려해, 다들 작은 목소리로 채민에게 물었다.
"난 이제 괜찮아."
"배는 좀 아프지만 견딜만 해."
"얼른 기운차리고 일어나서 여행 같이 하고 싶다."
사실은 견디기 힘들 정도로 복부의 상처가 채민의 육체에 고통을 주었지만
채민은 될 수 있도록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문득 브리엔의 얼굴이 보였다.
브리엔은 무표정한 얼굴로 채민의 머리맡에 서 있었지만, 채민은 이제 브리엔의 눈동자에 담긴 외로움과
슬픔과 절망과 고독을 읽어낼 수 있었다.
아마도 우준은 처음부터 그것을 알았기에 브리엔에게 더 따뜻했던 것이리라.
"브리엔."
"왜 불러?"
툭 쏘듯이 말하는 것이 웃겨서 잠깐 미소를 지었다.
브리엔은 부루퉁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그것은 채민이 무사히 깨어난 것에 대해서 기뻐하는
자신의 마음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등한 인간들 따위, 몇이 죽던 상관없는데 어째서 채민이 쓰러졌을 때
하늘이 쿠웅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는지는 아무리 고민하고 고민해도 알 수 없었다.
"나… 꿈에서 널 봤어."
"날? 왜? 너도 나한테 반한 거냐?"
우준의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지는 것을 본 사람은 차희밖에 없었다.
그 표정을 본 차희는 머뭇거리고만 있었던 자신의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로 결심했다.
다들 채민에게 집중해 있는 틈을 타서 차희는 잠깐 밖으로 나갔는데,
그걸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침 병실 앞에는 의사가 채민을 위해 준비해두고 간 묽은 미음이 놓여 있었다.
차희는 숨겨뒀던 마녀의 독을 꺼내 묽은 미음에 부었다.
처음에는 검은색 독약이 미음에 섞여 이상한 색이 되면 어쩌나 걱정이 됐는데,
미음에 섞인 독약은 흔적도 없이 자신의 색을 지웠다.
아주 잠깐 미묘한 냄새가 나는 것도 같았지만 그 냄새도 곧 사라졌다.
차희는 피식 웃으며 다시 안으로 들어왔고, 그 때에도 다들 차희의 움직임을 눈치채지 못했다.
차희가 들어오려는 순간, 채민이 브리엔에게
"나, 네가 태어났을 때의 일을 봤어."
라고 말했기 때문에 모두 그곳으로 주의가 쏠려 있었던 것이다.
차희로서는 참으로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내가 태어났을 때의 일?"
브리엔이 인상을 찡그렸다.
잘생긴 얼굴에 옅은 주름이 생겼지만 그것마저도 브리엔의 얼굴을 더 빛나게 만들어주는
하나의 장식품처럼 보일 뿐이었다.
"꿈인 것 같았지만 단순한 꿈은 아니었던 것 같아."
"유체이탈…"
비인이 중얼거리는 소리에 이번에는 비인에게 시선이 옮겨졌다.
모두의 주목을 받았지만 비인은 당황하지 않고 차분하게 말했다.
"내가 유체이탈을 하잖아."
비인의 손가락이 단정한 미간을 살짝 눌러주고는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잠이 든 상태에서 유체이탈을 하면 시공간의 개념이 없이 어디든 갈 수 있게 되거든.
무의식 상태이기 때문에 가고 싶은 곳을 내가 정할 수는 없고,
자기 멋대로 어딘가로 가게 돼.
때로는 과거로, 때로는 미래로, 때로는 현재의 다른 공간으로…
시간의 개념이 통하지 않기 때문에 태초의 과거로 돌아갈 수도 있고,
종말 후의 미래로 갈 수도 있어.
그리고 그 기억은 여전히 머릿속에 남아있고… 꿈처럼 희미하게 남는 게 아니라 생생하게…
아마도 채민이는 유체이탈을 경험한 걸 거야. 처음에 경험했을 때는 꿈인 것 같은데,
꿈이랑은 조금 다르다고 생각하게 되거든. 생생하지?"
"응. 그런데 이상한 건…"
"말하지 마."
브리엔이 차가운 눈으로 채민을 노려봤다.
"내 과거는 별로 알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말하지 마.
입단속 잘 해. 이중의 다른 누구에게도 말하지 마."
채민이 미소를 지었다.
"응, 네가 원하지 않는다면 말하지 않을게. 하지만 나중에라도 알고 싶어진다면 말해.
그 때 내가 말해줄 테니까."
"그럴 일은 없을 거다."
브리엔은 투덜대듯 대꾸하며 뭉쳐 있는 일행을 밀치고 병실에서 나갔다.
하지만 문을 닫기 전 채민의 식사를 발견한 브리엔이 병실 안에 대고 말했다.
"야, 너 먹을 밥이 와있다. 기운 없을 테니까 밥이나 처먹어."
멀건 미음이 채민의 무릎에 놓였다.
채민이 수푼을 들자 차희는 바짝 긴장했지만 다른 아이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얼른 표정을 바꾸었다.
스푼으로 미음을 몇 번 휘젓던 채민이 스푼을 내려놓자 차희가 인상을 찡그렸다.
"못 먹겠어."
"그래도… 조금 먹어봐. 너 며칠 동안 못 먹었는데, 계속 안 먹으면 다친 곳 안 나을걸.
얼른 나아서 우리랑 같이 여행해야지."
차희가 걱정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채민은 언제나 자기를 싫어하던 차희가 걱정해주자 기쁜 듯 차희를 쳐다봤다.
채민의 눈동자가 너무나 맑고 순수해서 차희는 아주 잠깐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해 후회를 했지만,
그 마음은 우준이 채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래, 채민아. 조금이라도 먹어 봐."
라고 말하는 것과 동시에 깨끗이 사라졌다.
"억지로라도 먹어. 먹어도 되니까 가져다 준 걸 거야."
리현이 말했다.
"응, 그럼 그래볼게."
채민이 생긋 웃으며 스푼으로 뜬 미음을 입으로 가져갔다.
꿀꺽-
채민이 미음을 삼킴과 동시에 차희도 침을 삼켰다.
마녀의 독이 채민에게 어떤 효과를 발휘할지는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검고 오묘했던 색으로 봐서는 금방 효과를 발휘할지 알았는데
접시에 담긴 미음을 거의 다 먹을 때까지도 채민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오히려 핏기 없던 얼굴이 발그레해져서 생기를 띄었다.
'뭐야. 독이 아니라 약이었나?'
차희는 실망스러우면서도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이 자리에서 채민이 피를 토하며 죽었더라면 걷잡을 수 없는 괴로움에 빠졌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마음 한편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본바탕이 아무렇지도 않게 남을 죽일 수 있을 만큼 모진 차희가 아니었기에
마녀의 독이 채민에게 아무런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 차희로서는 다행한 일이기도 했다.
조금 지나자, 아직 체력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채민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고
일행은 채민에게 푹 쉬라는 인사를 한 후에 병실을 빠져나왔다.
채민은 아주 편안한 표정으로 침대에 누워 잠이 들었기 때문에,
다음 날 채민이 눈을 뜨지 못하게 되리라는 것을 차희조차도 예상하지 못했다.
잠시 우준은 움직일 수 없었는데, 그 시간이 아주 짧은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우준에게는 영원처럼 느껴졌다.
입을 꾹 다문 채로 침대 위에 누워있는 채민이 자신이 알고 있는 채민이 맞는지
뚫어져라 응시했다.
꿈이라고 생각하고 싶었고, 만약 꿈이 아니라면 환상을 보는 거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채민을 간호하느라고 며칠 못 잔 것이 너무 피곤해서
눈이 착각을 일으킨 거라고 믿고 싶었기 때문에,
축 늘어져 있는 오른팔을 겨우겨우 올려 손등으로 슥슥 눈을 비볐다.
눈이 제 기능을 하기를 바라며 다시 침대를 봤지만 채민은 여전히 그 상태였기 때문에
이번에 우준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눈을 뜨면 채민이 자신이 잠들기 전의 모습처럼 평온한 표정으로 잠들어 있기를 바라면서.
하지만 마찬가지였다.
우준은 그제야 자신의 눈에 보이는 것이 환각이나 꿈이 아닌 현실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안 돼…"
목소리가 갈라졌다.
"안 돼, 채민아."
믿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손을 뻗었다.
만져지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손끝의 감각은 평소보다 예민한 탓에 채민을 건드리기도 전에 그 형태가 그곳에 존재한다는 것을
확실하게 전해주었다.
시체처럼 차가운 감각을 느끼며 우준은 다리에 힘이 풀려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눈으로 보고, 손으로 느꼈음에도, 침대 위에 누워있는 새까맣게 변한 시체가 채민이라는 것을,
우준은 결코 믿고 싶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