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햇빛 한 바구니, 고양이 두 스푼-60화 (60/91)

-60-

"이게… 이게 어떻게 된 거얏!"

처음에 병실로 들어온 일행은 다들 우준과 같은 반응을 보였다.

제 눈을 믿을 수 없다는 듯 꿈뻑꿈뻑하기도 하고, 손등으로 비벼보기도 했다.

그래도 계속 검게 변한 채민의 시체가 눈앞에 있자, 덜덜 떨리는 손으로 채민을 만져보기도 했다.

그제서야 그들은 침대 위에 누워있는, 생명의 온기라고는 전혀 없어 보이는 그것이

채민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아냐, 아냐! 이건 채민이가 아닐 거야!"

리현은 절규하듯이 외치면서도 사실은 그게 채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얼굴의 형태와 몸의 윤곽은 부정할 수 없을 만큼 채민과 똑같았다.

어제 저녁 채민이 잠들었을 때와 같은 평온한 표정으로 채민은 눈을 감고 있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채민의 온몸이 새까맣게 변해버렸고, 숨을 쉬지 않고,

체온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어째서… 갑자기 이렇게 된 거야? 어제까지만 해도… 어제까지만 해도… 웃었잖아.

우리들이랑 이야기도 했잖아. 그런데… 그런데 어째서… 으… 으흑…"

가인이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왜… 왜 채민이가 이런…"

다들 믿을 수가 없었다.

믿을 수 없는 것은 차희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차희는 어젯밤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

차희의 마음을 교묘하게 움직이던 신이 더 이상 차희의 마음을 건드리지 않고 손을 떼버린 것이다.

이상할 정도로 마음 속에 가득 차 있던 증오와 질투와 미움이 사라지자,

차희는 저녁에 자신이 한 행동이 얼마나 괘씸한 행동이었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고작 한 남자 때문에 채민을 그토록 미워한 자신을 이해할 수도 없었고,

자신이 언제나 까칠하게 굴고 괴롭혔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다정하게 대해준 채민이

얼마나 좋은 아이였는지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차희는 침대에 누워 한숨도 자지 못하고 밤을 새워 생각했다.

'내가 정말 미쳤었나 봐. 이 세계로 떨어지면서 머리를 부딪힌 게 분명해.

채민이처럼 괜찮은 애를 죽이고 싶다는 생각까지 하다니… 진짜 왜 그랬지?

어쨌든 마녀의 독이 듣지 않아서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채민이가 죽었더라면 난 죄책감 때문에 살 수 없었을 거야.

내일은 병원에 가서 채민이한테 미안하다고 해야지. 그리고 채민이랑 리현이랑 실컷 수다나

떨었으면 좋겠다. 남자애들 욕도 좀 하고… 후후.

그 애들이랑 친해지면 정말 재미있을 거야. 난 여자친구들을 사귀어본 적이 없으니까…'

아침에 비인이 차희의 방문을 두드리며

"차희야! 채민이에게 큰일이 생긴 모양이야!"

라고 외쳤을 때만 해도, 자신이 사용한 독 때문에 채민이 잘못된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못하고 있었다.

밤을 새서 채민과 리현과 친하게 지낼 생각을 하느라

독에 대한 것은 잠시 잊었던 것이다.

큰일이라면 상처가 덧나서 기절했거나 갑자기 혼수상태에 빠진 정도로만 생각했기에

병실에 들어서서 검은 시체가 되어버린 채민을 보자마자

차희는 죄책감과 충격을 견디지 못해 털썩 쓰러지고 말았다.

다리에 힘이 풀려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나… 나 때문이야? 어제 그 독 때문에…?'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손발이 차게 식어 가는 느낌이 들었다.

온몸에 퍼져 있어야 할 피가 어딘가로 빠르게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에

차희는 주먹을 꽉 쥐고 눈을 부릅 떴다.

잘못 본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은데 그렇지 않다는 것은 차희 본인이 더 잘 알고 있었다.

다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며 우왕좌왕하지만 차희는 그게 어떻게 된 일인지도 알고 있었다.

'나야… 내가 채민이를 죽였어… 내가… 내가… 무슨 짓을… 내가…'

차희는 자신이 살인을 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어제 아무런 거리낌없이 채민의 음식에 독을 섞어 넣던 손을 내려다봤다.

손이 피에 젖어 붉게 변해 있었다.

차희는 다른 아이들이 볼까 두려워 얼른 손을 뒤로 감췄지만 다른 아이들의 눈에 차희의 손은

평범하고 정상적인 상아색의 손으로 보일 뿐이었다.

'내가…'

차희의 눈에서 굵은 눈물 방울이 뚝뚝 흘러내렸지만

다들 채민의 죽음을 슬퍼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기에,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내가 죽인 거야. 난… 살인자야. 채민이처럼 착한 애를… 저렇게 착한 애를… 내가…'

채민이 웃던 얼굴이 떠올라서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자신이 악담을 퍼부을 때마다 당황하며 고민하던 채민의 얼굴도,

유괴범을 죽이기 위해 자신의 몸을 희생하던 채민의 모습도,

자기가 말을 건넬 때마다 기뻐하며 미소를 짓던 모습도 전부 떠올라서

차희는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아직까지도 제 손으로 독을 섞어 채민을 죽였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난 미쳤어. 어떻게…'

차희는 우준을 쳐다봤다.

세상을 잃은 듯 상심한 표정으로 채민을 응시하고 있는 우준의 얼굴은

평소와 다름없이 잘 생기고 단정했지만,

어제까지 느꼈던 미칠 듯한 사랑과 집착은 생겨나지 않았다.

또래에 드물게 잘 생기고 책임감 있는 남자애구나 라는 생각이 들뿐이다.

공허한 검은 눈동자가 차희를 다시 한 번 괴롭게 만들었다.

동료들의 절규가 차희의 고막을 찢어놓는 것 같았다.

차희는 그 자리에 주저앉은 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날카로운 칼날에 심장을, 귀를, 눈을 찔려대고 있었다.

브리엔이 근처에 있는 게 다행한 일이었다.

아무도 모르고 있었고, 차희 본인조차도 몰랐지만,

브리엔이 없었더라면, 차희는 이 순간 걷잡을 수 없는 열기를 내뿜은 후

자신의 몸까지 태우고 사라져 버렸을 것이다.

브리엔이 있었기에, 차희가 느끼는 충격과 괴로움에도 불구하고 차희는 불타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문이 벌컥 열리며 브리엔이 들어왔다.

채민에게 들었던 자신의 탄생에 대한 일에 대해 생각을 하느라 조금 멀리 나가 있던 브리엔은

병실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지 몰랐기 때문에,

여느 때처럼 "또 다들 모여있는 거냐? 징그러운 놈들…"이라고 중얼거렸다.

평소 같으면 리현이

"너만 하겠어?"

라고 맞받아 쳤을 텐데, 아무 대꾸도 들려오지 않자 브리엔은 인상을 찡그렸다.

그러고 보니 일행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왜들 그래?"

브리엔은 앞에 있는 비인과 강전을 옆으로 밀치고 채민의 옆까지 왔다.

침대 위에 누워있는 채민의 시체를 본 브리엔은 한숨을 푹 내쉬더니 채민을 향해 손을 뻗었다.

덥썩-

우준이 거칠게 브리엔의 손목을 잡고 브리엔을 노려봤다.

"예민하게 굴지 마, 멍청한 놈아.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울기부터 하는 거냐?"

"안 울었어."

"그러시겠지."

브리엔은 우준을 손을 뿌리친 후, 채민의 이마에 손을 얹었고 이번에는 우준도 브리엔을 말리지 않았다.

채민의 이마에 놓여있던 브리엔의 손이 좀 더 아래로 내려가 볼과 목을 스쳤다.

"니들은 가까이 오지 마라."

브리엔이 다른 한 팔을 들어, 가장 가까이에 붙어있던 리현과 우준을 뒤로 밀어냈다.

"잘못하면 니들도 중독돼."

"중독이라니?"

리현이 물었다.

"아, 몰랐냐? 이거 독에 중독된 거야."

"뭐? 독? 대체 무슨 독? 어디서? 채민이가 어디서 독을 먹은 건데?"

"그것보다… 살아있기는 한 거냐?"

우준이 물었다.

브리엔이 어깨를 으쓱했다.

"확실히 죽은 것처럼 보이기는 하지. 그게 바로 이 독의 무서운 점이니까.

대부분 이 독에 중독이 되면 심장도 뛰지 않는 것처럼 보이고, 숨도 쉬지 않는 것처럼 보이고,

온몸이 새까맣게 변하기 때문에 당연히 죽은 줄 알고 그냥 매장을 시켜버려.

독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무시무시한 전염병에라도 걸린 것처럼 보이니까

빨리 매장을 시키거나 화장을 시키는 게 옳은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거겠지."

"하아…"

우준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살아있다는 말은 우준에게 구원과도 같았다.

다른 일행도 우준과 마찬가지의 심정이었기에 한결 희망이 담긴 표정으로 브리엔을 쳐다봤다.

"해… 해독제는? 해독제는 어디서 구해야돼?"

차희가 벌떡 일어나서 브리엔에게 덤빌 듯한 기세로 물었다.

다들 의아했던 것은, 평소 차희가 채민을 무척 싫어했다는 것을 아는데

갑자기 변한 차희의 태도 때문이었다.

차희는 마치 채민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였던 것처럼 굴고 있었다.

어찌보면 우준보다 차희가 더 채민을 아끼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리현 역시 이상하게 생각하고 고개를 갸웃했지만 차희의 마음을 읽을 방도가 없었다.

"해독약이야 있기는 하지만 이 근처에서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지 잘 모르겠군.

아마 구하기 힘들 거야. 이 독을 만드는데 사용한 독초가 흔하지 않은 만큼,

해독초 역시 흔하지 않거든. 찾을 수 있으려나 모르겠네."

브리엔은 무심한 듯 말하고 있었지만 마음 속은 걷잡을 수 없이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

어떻게든 채민을 살려내고 싶었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는 것을 간신히 버티고 서서 채민을 응시했다.

'죽으면 안 돼.'

브리엔의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절대로 죽으면 안 돼. 내 앞에서 죽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아.'

간절했다.

이토록 간절하게 무언가를 원한 것은 실로 오랜만의 일이었다.

아니, 있기는 했던가.

뇌를 쉬지 않고 움직여서 해독초를 구할 수 있는 곳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이 세계의 구석구석 안 가본 곳이 없으니, 어딘가 한 곳은 떠오르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너무나 흥분한 상태였기 때문에 이성적으로 되짚어보는 일이 쉽지 않았다.

생각이 목적지에 닿으려고 하다가도 순식간에 방향을 틀어 채민의 죽음으로 향하곤 했다.

이대로 생명의 불이 꺼진다면?

그건 상상하고 싶지도 않은 일이었다.

"현채민이 이렇게 된 건 언제지?"

가까스로 생각을 정리한 브리엔이 물었다.

"해가 뜨는 걸 보면서 잠이 들었다. 그리고 6시쯤에 눈을 떴더니… 채민이가 이렇게 되어있었어."

"1시간 정도 사이에 변화한 거라면 독을 먹은 시간은 아마도 10시간쯤 전.

채민이가 독에 중독된 시간을 5시 30분쯤이라고 한다면, 독을 먹은 건 어제 저녁 7시에서 8시 사이겠군.

그렇다면…"

브리엔이 인상을 찡그렸다.

어제 자신이 병실에서 나갈 때의 시간과 딱 들어맞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때 자신이 병실 앞에 있던 미음을 보고 채민에게 먹으라고 하지 않았던가.

'설마… 아니겠지. 내가 독이 든 미음 따위를 먹으라고 권한 건 아니겠지.'

"그 때쯤 채민이가 미음을 먹었어."

가인이 확인 사살을 했다.

브리엔은 절망적인 기분에 휩싸였다.

눈앞에 독이 있었고 그것을 알아볼 기회가 충분히 있었는데 막지 못하다니…

다시 한 번 자신의 무능력함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괴로워서 입술을 깨물었다.

검은 눈동자가 자신을 향한 분노와 조소로 가득 차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걸 본 우준이 브리엔의 팔을 잡았다.

그리고 깊은 눈동자로 브리엔을 응시하며 말했다.

"이건 누구의 탓도 아니고, 누구의 무능력함 때문도 아니야."

"닥쳐, 강우준."

브리엔이 으르렁거리듯 대꾸했다.

"지금 다툴 때가 아니야! 브리엔, 너도 자괴감에 빠지고 싶다면 이따가 빠져.

지금 네가 해야할 건, 해독초를 어디서 구할 수 있느냐야.

왜 미음에 독이 들어있었는지, 그 독을 누가 넣은 건지 밝히는 건 채민이를 살린 후에 해도 충분해."

리현이 버럭 소리를 쳤다.

"채민이한테는 얼마나 더 시간이 있는 거야?"

비인의 질문에 브리엔은 붉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가 답했다.

"앞으로 5시간 정도 지나면 해독초를 먹인다고 해도 평생을 전신마비 상태로 살아야 하게 될 거다.

그리고 7시간 후면 사망."

"뭐야? 시간이 별로 없잖아!"

해윤이 다급하게 외쳤다.

"어디야? 해독초를 어디서 구해야 돼?"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을 깨달은 그들은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우준은 주먹을 꽉 쥐고 채민을 응시하며 브리엔에게 물었다.

"어디냐? 해독초를 구할 수 있는 곳이… 너만 알고 있으니까, 알려줘, 브리엔."

브리엔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초조해서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뒤늦게 달려온 의사도 이런 독은 본 적이 없는지 어쩔 줄을 몰라하며 왔다갔다할 뿐이었다.

"고양이의 눈물."

이윽고 브리엔의 입술에서 하나의 단서가 흘러나왔다.

"뭐?"

"필요한 약초는 고양이의 눈물이라는 약초야. 분명… 이 근방에서 본 기억이 있어."

"그, 그게 어디야?"

강전이 브리엔의 어깨를 잡았다.

브리엔은 불쾌한 기색 없이 창 밖을 한 번 쳐다보고는 대답했다.

"아마도…"

브리엔의 손이 천천히 올라가 마을 밖에 있는 높은 산을 가리켰다.

"저 산 중턱에 있는 커다란 동굴의 깊은 곳에…"

브리엔이 약초의 위치를 알려주자, 일순간 밝아졌던 그들의 표정은 곧 절망으로 바뀌었다.

가인이 털썩 주저앉으며 중얼거렸다.

"너무 멀잖아. 도저히… 다섯 시간 안에 다녀올 수가 없어."

하나님을 빽으로 세상과 맞짱 뜬다...by백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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