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한동안 그들은 말이 없었다.
해가 져서 어둠이 마을 위에 스러질 때까지 그들은 말없이 우준의 결정을 기다렸다.
우준은 두 손을 모아쥐고 앞으로 허리를 굽힌 채 생각에 잠겨 있었고,
모두 그런 우준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브리엔까지도 일행의 진지함이 전염되었는지 심각한 표정이었다.
그들은 우준이 고민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차희가 노린 것이 우준의 목숨이었다면, 우준은 고민하지 않고 함께 가자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차희가 노린 것은 채민이었다.
책임감이 강한 우준으로서는 차희가 자신이 아닌 일행 중의 누군가를 죽이려고 했다는 이유 때문에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없었던 것이다.
만약 차희와 함께 가는 것을 선택했다가 또 다시 채민이 위험에 처하기라도 한다면,
우준은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는…"
우준이 입을 열었다.
"전문가가 아니라서 잘은 모르겠지만… 차희는 마음이 약하고 남에게 기대기를 좋아하는 성격인 것 같아.
그런데 저주에 걸린 것 때문에 자꾸만 사람들이 자신을 피하고 두려워하니까
상처를 받아서 성격이 조금 변한 게 아닐까 싶어."
"……"
"이것도 결국은 저주로 인해 생긴 일이고, 우리 앞에 있을 시련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고 싶다.
너희들이 나에게 기대를 하는 건 아마도 너희들을 무사히 신에게 데려가 주고,
오랫동안 이어져온 저주를 풀어버리는 것이겠지.
약속할게. 반드시 너희를 신에게 데려갈게. 그러니까 이번 한 번만 더 나를 믿어 줘.
부탁할게. 차희를 데려가자. 난 도저히… 그 애를 놔두고 갈 수가 없어."
"강우준 너는 책임감이 너무 강해서 탈이야.
이럴 때는 그런 책임감, 조금쯤은 버려도 돼.
남의 잘못까지 네가 끌어안고 갈 필요는 없다구!"
리현이 반박했다.
우준의 미간에 생긴 짙은 주름을 보니 우준이 안쓰러워졌지만 이대로 굽힐 수는 없었다.
리현도 우준과 마찬가지의 심정이었다.
만약 차희가 죽이려고 했던 게 리현이었다면, 우준이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끝까지 반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차희는 채민을 죽이려고 했고, 채민은 리현이 처음으로 마음을 연 친구였다.
그런 친구를 죽이려고 했던 차희를 곱게 데려갈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았고, 포용할 생각도 들지 않았다.
차희의 행동을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 베베 꼬이고 뒤틀린 성격이 언제 또 일을 저지를지 몰랐다.
"난 박차희를 못 믿어. 믿고 싶지도 않고. 걔는 처음부터 우리 일행과 겉돌던 애였어.
처음부터 채민이를 눈엣가시처럼 여겼고. 그래도 채민이는 계속 차희랑 친해지려고 노력했고,
차희를 이해하려고 노력했어. 차라리 차희가 나 같은 애한테 배알이 꼴린 거면 이해해.
하지만 채민이한테 배알이 꼴리는 건, 정말 납득할 수 없는 일이잖아."
"맞아…"
가인과 강전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해윤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우준의 입술만 쳐다보고 있었고,
브리엔과 비인은 우준의 생각을 따르려는 듯 했다.
"우준이, 네 생각이 정 그렇다면 난 채민이와 함께 떠날게."
"리현아. 한 번만 내 부탁을 들어주라."
우준이 간절하게 애원했다.
"어릴 적의 상처 때문에 성격이 뒤틀린 거라구? 그건 말도 안 되는 변명이야.
살인자들도 보면 다 과거에 말도 못할 상처를 받으면서 자랐어.
그렇다고 그들의 죄가 전부 용서되는 건 아니잖아.
과거는 자기가 딛고 일어서야 되는 거야. 결국 자기 의지와 자기 선택의 문제라구!"
"난 후회할 것 같아."
가만히 사태를 지켜보던 비인이 말문을 열자, 모두 비인을 쳐다봤다.
"너희들은 안 그럴 것 같니?"
"후회…라니?"
리현이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물었다.
"우리가 이 세계에 와서 어떤 모습이 되었지? 이 세계 사람들은 우리와 다른 세계 사람들이기도 하고,
또 우리의 앞길을 막기 때문에 가차없이 죽였어. 그리고 곧 그것을 잊어버렸지.
결국은 그들도 그들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한 목숨인데 말이야.
아마 난 저주를 풀고 내 세계에 돌아가게 되어도 이곳에서 사람들을 죽인 일을 마음에 품고 살게 될 거야.
차희는 어떨까?"
모두 입을 꾹 다물었다.
"우리가 이곳에서 차희를 두고 간다면, 우리는 아마 좀 더 편하게 여행할 수 있겠지.
차희가 일행에 들어온 후로 조금 불편했던 것은 사실이니까.
하지만 우리가 저주를 풀고 우리 세계로 돌아가서 살게 된다면, 차희 생각이 나지 않을까?
그 때, 차희를 버려 두지 말고 조금 불편하더라도 끝까지 함께 갈 걸 그랬다는 후회를 하지 않을까?"
"……"
"난 후회할 거야. 아마 평생 차희를 두고 온 것에 대한, 차희라는 아이를 죽도록 내버려둔 것에 대한
죄책감을 가지고 살게 되겠지. 도울 수 있는데 편의를 위해 돕지 않은 거니까…
죄책감과 후회를 안고 살아간다면 그건 결코 행복한 삶이 아닐 거라고 생각해.
오히려 저주를 받고 살아왔던 지금까지보다 더욱 더 불행할 거라고 생각해.
우리가 미워해야 할 것은 차희 본인이 아니라 차희의 죄야. 그렇지 않니?"
"……"
"차희도 결국은 우리와 똑같은 저주의 피해자일 뿐이야.
우리가 좀 더 채민이를 지키고, 차희의 행동에 주의한다면 우리는 여행을 무사히 끝마칠 수 있을 거야.
그리고 저주를 풀게 된다면, 우린 말끔한 기분으로 우리의 세계로 돌아가게 될 거야.
너희들은 어떨 것 같아? 후회하지 않을 것 같아? 차희를 이대로 두고 가더라도…"
비인은 질책이나 강요가 담기지 않은, 평소와 같은 잔잔한 눈빛으로 일행을 한 명, 한 명 돌아봤다.
비인의 말이 상당히 충격으로 다가왔다.
사실이었다.
그들은 이곳에 와서 사람의 목숨에 대해 너무도 쉽게 생각하고 있었다.
원래의 세계에서는 사람 한 명을 죽이는 것도 상상하지 않았는데,
이곳에서는 몇 십 명이라도 죽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곳에 온 후로 정신이 이상해져서 사람의 생명을 가볍게 여기는 것만 같았다.
"그러네."
강전이 깍지 낀 손을 뒤통수에 대며 중얼거렸다.
"그걸 잊고 있었네. 내가 잠깐 어떻게 됐었나 보다."
"맞아. 우리, 잠깐 어떻게 됐었나 봐."
"차희를 이대로 놔두고 가면, 나중에 정말 후회하게 되겠지?"
다른 아이들이 차희를 데리고 가는 것으로 방향을 틀자, 리현은 잠깐 인상을 찌푸렸지만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대며 반박하는 경솔한 행동은 하지 않았다.
리현은 옳고 그른 것은 분명히 할 줄 아는 솔직한 성격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간과하고 있던 부분을 깨우쳐줘서 고마워.
박차희는 정말 마음에 안 들지만, 역시 비인이 네 말이 맞는 것 같아."
차희가 채민을 죽이려고 했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았지만
그들은 앞으로의 일을 결정한 것만으로도 크게 안도를 했다.
하마터면 뿔뿔이 헤어질 뻔한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보며 조금은 어색하게 씩 웃었는데,
해윤은 입술을 삐죽 내밀고 연신 킁킁대고 있었다.
"야, 너 왜 그렇게 킁킁대? 정신 사납게스리…"
"있잖아. 아까부터 이상하게… 타는 냄새가 나지 않아?"
"응? 타는 냄새? 쌩뚱 맞게 무슨 소리야, 갑자기?"
해윤의 코가 개코라는 사실이 밝혀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5분도 채 지나지 않아서 병원 밖이 소란스러워지는가 싶더니,
"불이야!"하는 외침이 들려왔던 것이다.
그 때쯤에는 일행도 타는 냄새를 확실히 맡을 수 있었다.
검회색의 연기가 덩어리처럼 뭉쳐져 복도로 스멀스멀 기어 들어오고 있었다.
일행은 벌떡 일어났다.
"채민이 데리고 나와야 돼!"
강전이 외치기도 전에 우준은 채민의 병실로 뛰어 들어갔다.
일행의 이야기를 들으며 눈물을 흘리던 채민이 눈물을 닦을 새도 없었다.
병실에 들어온 우준은 눈물로 흠뻑 젖은 채민의 얼굴을 보고 멈칫했다.
무표정한 우준의 얼굴이 괴롭게 일그러졌다.
"너…"
채민은 웃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특별히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차희가 미운 것도 아닌데, 어째서 이렇게 가슴이 답답하고
얼굴 근육이 마음대로 찌푸려지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일단 나가자. 병원에 불이 난 것 같아."
"으응…"
채민이 침대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우준이 다가왔다.
"가만히 있어."
우준은 팔을 채민의 목과 다리 아래로 밀어 넣고 채민을 단단히 고정시켰는지 확인하더니
힘을 주어 번쩍 안아들었다.
채민의 무게가 처음 안았을 때보다 훨씬 가벼워진 것을 느낀 우준은
채민이 느끼지 못하도록 낮은 한숨을 쉬었다.
위험한 여행이라는 건 짐작하고 있었지만 채민은 다른 일행보다 몇 배는 더 위험했기 때문에
몸 고생, 마음 고생으로 살이 많이 빠졌던 것이다.
"다 나으면… 고기를 먹자."
매캐한 연기가 빠른 속도로 확산되고 뜨거운 열기가 올라오는 상황에서
우준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몰라, 채민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우준을 올려다봤다.
그 순간 미끈한 턱선이 눈에 확 들어차,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아…"
"소고기로…"
병실 밖에서는 일행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우준이 나오자마자 계단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길 안내는 어둠 속에서도 앞을 볼 수 있는 브리엔이 맡았다.
우준과 채민이 병실 밖으로 나오는 것과 동시에 병원 안의 불이 전부 꺼졌기 때문이다.
어둠과 연기로 뒤덮여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브리엔은 한 번도 헤매지 않고 병원 밖까지 그들을 인도했다.
"사람들은… 콜… 콜록… 다 빠져나왔을까?"
가인이 기침을 하며 물었다.
처음에는 조금 타는 정도로 난 불인 줄 알았는데, 병원 밖에서 보니 장관이었다.
병원 전체가 화염에 휩싸여 형체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마치 용이 불을 내뿜는 듯, 창문들마다 무시무시한 기세로 불을 내뿜었다.
그들이 병원을 빠져나오며 불길에 휩싸이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브리엔과 함께이기 때문이라는 걸,
일행은 미처 알지 못했다.
브리엔의 주위를 감싸고 있는 오묘한 힘이 불길을 막아주었던 것이다.
"갑자기 왜 이런…"
의사의 당혹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던 리현은 사람들 틈에 섞여있는 차희를 발견했다.
"박차희!"
차희가 움찔했다.
"너, 거기 서!"
차희는 처음부터 도망갈 생각이 없었는지 그 자리에 멀거니 서서 공포에 질린 눈으로 우준 일행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
차희의 눈동자가 잠깐 채민에게 향했지만 채민과 눈이 마주치자 얼른 피해버렸다.
"너지?"
리현이 거칠게 차희의 팔을 잡았다.
"네가 불을 붙인 거지?"
"아, 아, 아니야."
차희가 불안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목소리뿐만 아니라 차희의 몸 전체가 안쓰러울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차희가 서 있는 것이 기적이라고 생각될 정도였다.
"너잖아! 넌 채민이를 따돌리려고 상관 없는 가인이한테까지 불을 붙인 애잖아.
네 뜻대로 안 되니까, 이번에는 우리 전부를 죽일 생각이었던 거야? 응?"
"아니야, 리현아. 오해야."
"오해는 무슨… 우리는 그래도 널 데리고 가려고 했는데… 실망이다, 박차희."
강전이 중얼거렸다.
"아니야, 정말 내가 아니야. 난… 난 정말 아니야."
"웃기지 마! 넌 병원 안에 있지 않았어. 안전한 곳에 서서 병원에 불을 붙이고 우리가 죽어버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거 아냐?"
리현이 차희를 몰아붙였다.
차희의 커다란 눈에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우준아. 나 아니야. 응? 너도 나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차희가 간절하게 우준을 쳐다봤지만 우준은 차희를 보고 있지 않았다.
이제 우준도 혼란스러웠기 때문이다.
무엇을 믿고, 무엇을 버려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 때였다.
"우리 아이, 우리 아이가 아직 병원 안에 있어욧!"
한 여자의 날카로운 외침이 들려왔다.
다들 놀라 고개를 돌려 그 여자를 쳐다봤다.
"아아, 이럴수가! 우리 아이가 아까 병원에 간다고 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어요! 병원 안에 있어요!"
아이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여자는 미친 듯이 몸을 흔들어댔다.
당장이라도 병원 안으로 뛰어 들어가려는 여자를 주위의 사람들이 붙잡았지만
여자는 큰소리로 절규하며 아들을 찾아 헤맸다.
우준 일행은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브리엔은 불길 안에 들어가서 한 두 사람을 구해올 정도의 능력은 충분히 있었지만
아까 채민을 죽이려고 했던 사람들을 굳이 나서서 살려주고 싶지 않았기에
뚱한 표정으로 멀찌감치 물러났다.
혹시라도 일행이 자신에게 부탁을 하지 않을까 싶어
박쥐의 모습으로 변해 마을 밖에 있는 숲으로 가버렸던 것이다.
"어떻게… 하지…?"
일행은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다.
불붙은 병원 안에 들어가서 아이를 찾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겠거니와,
괜히 들어갔다가 아이도 구하지 못하고 죽는 경우가 생길지도 몰랐다.
그 때, 일행을 밀치고 차희가 병원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차희야!"
채민의 목소리는 차희에게 닿지 않았다.
육체의 상처와 마음의 상처를 치료하느라 모든 힘을 다 써버린 채민의 목소리는
차희에게 닿기에는 너무 작았다.
일행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눈을 휘둥그레 뜨고 불길 안으로 사라져 버린 차희를 쳐다봤다.
"뭐, 뭐야?"
강전이 입을 열었다.
"왜 차희가… 차희가 불을 붙인 거 아냐? 그런데 왜 쟤가…?"
"어차피 불의 저주를 받았으니, 불에 타지도 않는 거 아냐?
이렇게 해서 자기가 붙인 게 아니라는 믿음을 우리에게 심…… 이런…"
가시 돋친 목소리로 말하던 리현이 입을 쩍 벌렸다.
리현의 얼굴을 순식간에 경악와 괴로움, 후회가 뒤덮었다.
그 변화에 놀란 아이들이 리현에게 무슨 일이냐고 묻기도 전에 리현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며 중얼거렸다.
"차희…의 마음이 읽혔어…"
"설마…"
금방이라도 울 듯이, 리현의 표정이 엉망으로 일그러졌다.
리현은 두 손을 올려 얼굴을 감싸고, 죽어 가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차희가 아니야… 불을 붙인 건, 차희가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