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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에 땀이 고일 정도로 주먹을 꽉 쥐고, 차희가 들어간 불구덩이를 응시했다.
그들은 자기들도 모르는 새에 머리카락과 몸에 난 털끝이 바싹바싹 타들어 갈 정도로
병원 가까이 접근해 있었다.
리현은 조금 전 차희의 얼굴에 떠올랐던 표정과 같은 표정으로 병원을 응시하고 있었다.
결국 리현은 참지 못하고 병원을 향해 뛰어 들어가려 했다.
리현의 팔을 잡은 것은 해윤이었다.
리현만큼이나 몸놀림이 좋은 해윤이 리현의 움직임을 눈치채지 못했더라면
리현은 이미 불구덩이 안으로 들어간 후였을 것이다.
"안 돼, 리현아."
해윤의 눈에서 장난기가 사라졌다.
목소리 역시 평소보다 낮았다.
"안 돼."
해윤이 고개를 저었다.
"구해야 돼! 차희를 구해야 한다구! 내가 오해한 거잖아! 차희가 불을 붙인 거라고 몰아붙여서
차희가 저 안으로 뛰어들어간 거잖아!"
"네가 그런 게 아니야. 나도 그랬어."
"구해야 돼! 저 애, 내가 너무 몰아붙여서 그런 거야. 박차희가 죽으면… 죽으면 안 돼."
리현은 생각하는 것도 끔찍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채민을 죽이려던 차희가 미워서 두고 갈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하지도 않은 일로 차희를 몰아붙이고 죽음으로 밀어낸 자신의 행동은
차희와 다를 바가 없었다.
리현을 쳐다보던, 공포에 질린 차희의 눈동자가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사, 사람이 나와요!"
불길 안에서 검은 그림자가 걸어나오고 있었다.
한 명? 아니, 두 명이었다.
차희는 구해낸 아이를 품에 꽉 끌어안고 힘겹게 걸어나오고 있었다.
우준 일행이 차희를 향해 달려갔다.
하지만 차희에게 섣불리 손을 댈 수 없었던 것은, 차희의 옷에 붙은 불이 활활 타고 있었기 때문이다.
머리카락도, 몸도, 옷도 새까맣게 탄 차희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아이를 내밀다가
팔에 힘이 풀려 떨어뜨리고 말았다.
아이가 땅에 떨어지기 전에, 해윤이 얼른 아이를 받았다.
아이는 기절한 상태였다.
비틀-
아이가 해윤의 손에 건네어지자 차희를 지탱하고 있던 힘이 모두 사라졌다.
차희가 바닥에 쓰러지기 전에 비인이 차희를 부축했다.
아직도 타고 있는 옷에 손이 데었지만 비인은 아픔을 느낄 수 없었다.
"불, 불을 꺼야 돼!"
리현이 사람들을 향해 버럭 외쳤다.
이 고귀한 행동에 어쩔 줄을 모르고 멍청히 서 있던 사람들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물을 길으러 흩어졌다.
"손… 화상… 입어…"
차희의 입에서 가느다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물을 뿌린 것도 아닌데, 불이 서서히 잦아드는 이유는 이미 태울 만한 것을 다 태웠기 때문일 것이다.
"차희야…"
비인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비인은 차희가 살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정도의 화상을 입은 차희가 살아날 리 없었다.
"난… 안 탈 줄… 알아… 윽…"
"말 하지 마! 아무 말도 하지 마!"
비인이 절규했다.
강전의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차희야, 아아, 차희야! 미안, 미안해!"
리현이 차희의 팔을 부여잡고 외쳤다.
비인은 병원에서 멀리 떨어진 곳까지 차희를 부축해 와, 조심스레 땅에 눕혔다.
물을 길러온 사람들은 차희의 몸을 태우던 불이 이미 사라진 것을 보았고,
차희의 생명이 서서히 꺼져 가는 것을 보았다.
그들 역시 숙연한 기분이 되어, 눈물을 머금고 우준 일행을 둘러쌌다.
"나, 내려줘, 우준아."
채민의 말에 우준은 잠자코 채민을 차희의 옆에 내려주었다.
힘이 없었지만, 채민은 겨우 몸을 움직여 차희의 옆에 앉았다.
차희의 눈동자가 조심스레 채민을 담았다.
"왜… 울…어…?"
차희가 희미한 목소리로 물었다.
손을 들어 채민의 눈물을 닦아주려고 하는 듯 했지만,
손끝이 움찔거렸을 뿐, 팔은 올라가지 않았다.
"울지…마… 난… 널… 죽이려고… 했잖아…"
"차희야. 그냥… 그냥 있어. 응? 말하지 않아도 되니까… 그냥… 제발… 그냥… 차희야…"
채민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렸다.
목이 매여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차희야… 아아, 차희야…"
"넌… 너무… 착…해…"
차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마도 미소를 지으려고 한 거겠지만, 심하게 화상을 입었기 때문에 찡그리는 모습으로 보였다.
하지만 우준 일행은 차희의 얼굴에서 옅은 미소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들이 처음으로 본, 차희의 순수한 미소였다.
모두의 눈에 고인 눈물이 괴로운 빛이 되어 뚝뚝 흘러내렸다.
"죽으면 안 돼, 차희야! 우리, 해야할 일이 있잖아! 행복해져야지!"
"행…복…"
차희가 눈을 감았다.
"행복…했…어… 너희들을 만나서… 행복… 그래, 그게… 행복…
그런데 난… 그걸 모르고… 바보… 같이…"
"차희야, 제발! 제발 마음을 약하게 먹지 마!"
강전은 참을 수 없어져서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입술이 찢겨 피가 흘렀지만 고통조차 느끼지 못하고, 입술이 전부 헤져버릴 때까지 계속 입술을 깨물다가
근처에 서 있는 의사를 발견하고는 의사에게 달려갔다.
"살려주세요! 차희를 살려주세요, 선생님!"
의사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살려주세요, 제발! 쟤… 쟤, 우리랑 같이 가야 하는 애예요! 지금까지 한 번도 행복한 적 없던 애예요!
이제 행복을 찾아서 행복해져야 할 애예요! 그러니까… 제발 저 애를 살려주세요! 제발!
으아아아! 제발요, 선생님!"
강전이 발을 동동 구르며 외쳤다.
의사는 어떻게든 해주고 싶었지만, 방법이 없었다.
지금 차희가 숨이 붙어 있는 게 신기할 정도로, 차희의 화상은 심했다.
보통 사람이었더라면 저 불길 안에서 죽었을 것이다.
"차희야…"
우준이 차희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이마를 땅에 대며 속삭였다.
"제발… 죽지 마라, 제발… 부탁이다. 제발… 죽지 마라."
가슴이 저밀 정도로 간절한 어조였다.
차희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미 수분이 없을 정도로 타버렸는데, 눈물은 남아있었는가 보다.
"나도… 채민이랑… 리현이랑… 같이… 쇼핑을 하고… 수다를 떨고… 그렇게… 지내고 싶었어…"
"그러면 되잖아, 차희야! 앞으로 우리 그럴 수 있어! 그러니까 포기하면 안 돼!"
"……"
"차희야? 차희야!"
"난…"
너무나 희미한 목소리.
숨이 막혀서, 다들 숨조차 쉬지 못하고 차희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외모지상주의잖아… 화상을 잔뜩 입어서… 흉해…진 얼굴로… 살 수는 없어…"
"야, 그건 성형수술로 고치면 되잖아, 이 자식아!"
강전이 버럭 외쳤다.
"그냥… 너희들 목소리… 다시는 들을… 수 없…다는 게… 너무… 슬프고… 아쉬워서…"
"들려줄게! 빌어먹을! 귀찮을 때까지 들려줄게! 밤새도록 들려줄 테니까! 야, 죽는 소리 좀 하지 마아! 제발!"
강전이 떼를 쓰듯 외쳤다.
"난… 정말… 너네 만나…서… 아주… 행복해…어… 결국… 행복은…………"
끊어질 듯 불안하게 이어지는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너희들도… 여행… 꼭… 성공…… 바래… 고…마…………"
"……"
"차…희야?"
"……"
"차희야?"
"……"
"으아아아아아! 차희야!"
하늘을 뒤덮은 어둠 속을 가르는 괴로운 그들의 절규.
동료를 잃은 그들의 절망이 달도, 별도 가리우고,
동료를 잃은 그들의 슬픔이 땅으로 뚝뚝 떨어져 흘렀다.
일이 어떻게 되어가나 보려고 가까이 왔던 브리엔은
숯처럼 타버려 누워 있는 차희의 모습에 가슴이 답답해옴을 느꼈다.
사람으로 변해 조용히 그들의 옆에 선 브리엔은
아직도 타오르는 병원의 불길을 응시하다가 중얼거렸다.
"신, 역시… 네놈의 짓이었군…"
차희를 잃은 충격이 너무 커서, 그들은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마치 넋이라도 나간 것 같은 모습으로 멍하니 앉아 있었다.
너무 많이 울어서 눈물조차 나오지 않고
목은 형편없이 쉬어서 통곡조차 할 수 없었다.
새까맣게 타버린 차희의 시체가 부는 바람에 재처럼 날려 사라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차희의 시체를 둘러싸고 바람으로부터 차희를 지키려는 듯 앉아있을 뿐이었다.
그들의 주위로 스러진 슬픔이 너무 커서, 마을 사람들은 감히 그들에게 말도 걸지 못하고
안타까운 시선만 던질 뿐이었다.
그 날 밤이 다 지나도록, 그리고 다음 날 해가 지고 또 다른 밤이 찾아오도록,
그들은 같은 자세로 앉아서 차희의 죽음을 기렸다.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해윤이었다.
"차희… 묻어줘야지. 언제까지고 이렇게 있을 수는 없잖아."
"그래, 맞아. 묻어줘야지."
가인의 목소리에서 슬픔이 뚝뚝 흘러내렸다.
"하지만… 이곳에 묻고 싶지 않아."
채민이 고개를 저었다.
"여기에 묻으면… 나중에 우리가 차희의 무덤에 찾아올 수 없잖아. 여긴 우리 세계가 아니잖아."
"맞아, 그렇구나. 맞아, 여긴… 우리 세계가 아니구나."
"차희 부모님께는 뭐라고… 말해야 할까?"
"죽음이… 이렇게 무거운 것이라는 걸 잊고 있었어, 우린…"
그들의 눈가가 다시 슬픔에 젖어갔다.
우준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모두를 무사히 데리고 돌아가고 싶었는데, 한 사람을 잃어버린 것이다.
해야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괴로움이 우준의 몸을 짓눌렀다.
숨을 쉬기 괴로울 정도였다.
"우준아…"
가인이 조심스레 우준의 팔을 잡았다.
우준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가인을 쳐다봤다.
"괜찮아, 너?"
"그래…"
'아니, 사실은 죽을 것만 같아.'
우준은 하지 못한 말을 속으로나마 내뱉었다.
"차희는… 이 마을 방식으로 매장하자."
"하지만…!"
우준이 말했다.
"어차피 육체는 껍데기일 뿐, 큰 의미는 없어. 중요한 건 차희의 영혼과 우리의 기억이야.
기억하면 돼. 우리가 차희를 기억하고 있으면 그걸로 된 거야.
너희들은… 차희의 무덤을 보지 못하면 차희를 잊을 거냐?"
우준의 검은 눈동자가 그들을 향했다.
"아니… 그렇지 않아."
"그래, 그러니까… 이곳 방식대로 매장하자."
차희가 죽은 다음 날 늦은 밤.
그들은 마을의 방식대로 차희를 숲에 매장하고 한참동안 그 앞에 서서
묵념을 한 후 여관으로 돌아갔다.
심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너무나 피곤했던 그들은 침대에 눕자마자 잠이 들었지만
채민은 잠들지 못했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볼 때마다 차희의 모습이 떠올라서 견딜 수가 없었다.
동이 나 버린 줄 알았던 눈물이 계속해서 흘러 베갯잇을 적시고 적셔
머리까지 축축해질 정도로 울었다.
흐느낌이 새어나가지 않게,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어깨만 들썩이며 눈물을 흘렸다.
'나… 때문이야… 나 때문에 병원에 불이 난 거야… 내가 있어서… 그래서 불이 나고…
그래서 차희가 죽은 거야… 나 때문에… 나 때문에… 미안해, 차희야. 미안해.'
마을은 아직 어둠에 싸여 있었다.
슬픔만큼이나 짙은 어둠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듯이 보였다.
채민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미안해, 얘들아. 난 더 이상 너희들과 함께 할 수 없을 것 같아.
죄책감이 너무 커서… 더 이상 너희들과 함께 할 수 없을 것 같아. 정말 미안해.
난 그냥 혼자 갈게. 그래서 혹시라도… 저주가 풀리면… 그래서 나랑 있어도 너희들이 위험하지 않으면…
그 때… 다시 만났으면 좋겠어."
채민은 인어의 검만 하나 달랑 지닌 채로 숲을 향해 걸어갔다.
어둠이 채민을 집어삼킬 듯 다가왔다.
하지만 채민은 공포 따위는 전혀 느끼지 못했다.
슬픔이 가득 차서 공포나 절망을 느낄 틈이 조금도 남아있지 않았다.
채민이 지나간 자리에는 새까만 어둠만이 자리잡고 있었다.
일행이 채민이 남겨둔 쪽지를 발견한 것은 다음 날, 늦은 오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