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햇빛 한 바구니, 고양이 두 스푼-66화 (66/91)

-66-

모든 생물이 잠든 밤.

어둠에 갇힌 숲은 너무도 고요해서 생명이 존재하지 않은 것 같다.

채민은 어둠 속으로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걸어나갔다.

처음에는 잘 보이지 않아 몇 번이나 돌에 걸려 넘어졌지만 이제 눈은 어둠에 익숙해졌다.

익숙해졌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아무 것도 없는 곳에서 뭔가에 걸려 넘어지고, 아무 문제도 없던 나뭇가지가 갑자기 뚝 떨어져

채민의 머리 위로 떨어지기도 했다.

어둠 속에서 그런 일이 생기면 소스라치게 놀랄 법도 한데, 채민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그저 걸었을 뿐이다.

앞으로 걸어가면 해결책이 나오기라도 한다는 듯이…

아직 아물지 않은 복부의 상처가 욱씬욱씬 쑤셔왔다.

채민은 한 손으로 잠깐 배를 문질렀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숲은 그리 어둡지 않았다.

달빛도 있었고, 채민이 들고 있는 인어의 검에서 나오는 빛도 있었다.

단지 채민에게만 어둡게 느껴졌을 뿐이다.

한숨을 돌렸더니 주위의 사물이 좀 더 또렷하게 채민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채민은 쓴웃음을 짓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이 길이 맞는 건지도 알 수 없지만 우준 일행에게서 멀리 떨어져야 한다는 생각뿐이다.

책임감 강한 우준도, 동료애 강한 다른 일행도 절대 채민을 그냥 놔두고 갈 리가 없다.

아마도 채민을 찾아내려고 할 것이다.

채민은 또 다시 그들에게 피해를 주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차희의 얼굴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시간의 흐름조차 잊고 땅만 보며 걷던 채민은 긴 그림자 하나가 채민의 앞을 막아서자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그림자의 주인공을 확인했다.

그의 뒤에서 떠오르는 새벽의 태양 때문에 그의 모습은 검은 실루엣으로만 보였지만,

채민은 그가 누군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채민은 다시 한 번 쓴웃음을 지었다.

그가 천천히 채민을 향해 걸어왔다.

채민 역시 천천히 그를 향해 걸어갔다.

1m가량의 거리를 두고 두 사람은 걸음을 멈췄다.

채민은 고요한 눈동자로 자신과 똑같이 생긴 상대를 응시했다.

어떻게 알았는지, 도플갱어는 채민의 옷과 헤어스타일도 똑같이 따라하고 있었다.

공격성이 강하게 담긴 도플갱어의 눈빛 때문인지,

채민의 손이 무심코 인어의 검으로 향했다.

도플갱어의 눈동자가 잠시 인어의 검으로 향했지만 별 거 아니라는 듯 다시 채민을 노려봤다.

채민은 인어의 검을 빼들었다.

인어의 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빛은 서늘한 냉기를 품고 있었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주위의 사물이 전부 얼어버릴 것 같은, 날카롭고도 위세가 좋은 냉기였다.

예전에는 인어의 검을 잡으면 손가락 끝에서부터 냉기에 얼어붙어 가는 느낌이 들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았다.

인어의 검은 더 이상 채민을 얼리지 못했다.

채민은 인어의 검을 부릴 수 있게 되었고, 때문에 앞에 있는 도플갱어가 두렵지 않았다.

"왜…"

채민이 입을 열었다.

"왜 넌 날 죽이고 싶어하는 거야?"

"……"

"왜 날 가만히 놔두지 않는 거지? 내가 대체 무슨 잘못을 했기에…"

"……"

"내가 그렇게 죽이고 싶니?"

"……"

"혹시 너… 날 죽여야만 네 목숨을 구할 수 있는 거야? 내가 죽어야만 네가 살아?

우리 둘은 함께 공존할 수 없는 거야?"

"……"

채민은 도플갱어를 향해 겨누었던 검을 아래로 내렸다.

검의 끝이 허공에 둥근 곡선을 그리며 내려가 땅에 닿았다.

도플갱어의 얼굴이 의아하다는 듯 변했다.

"지쳐…"

채민은 차희의 죽음으로 인해 극도로 약해진 상태였다.

복부의 상처도 회복이 되지 않은 데다가 정신적인 충격까지 받아서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 없었다.

채민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웃는 건지, 우는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이다.

"나 정말 너무 지쳐… 만약 날 죽여야만 네가 살 수 있는 거라면… 그럼 날 죽여."

채민이 눈을 감았다.

"그냥 날 죽여…"

도플갱어의 얼굴에 자비는 없었다.

아니, 어쩌면 한순간 도플갱어의 표정이 어두워졌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미 눈을 감고 있는 채민은 그것을 볼 수 없었다.

도플갱어가 자신의 가까이 걸어오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채민은 전혀 두렵지 않았다.

정말로 죽일 거라는 거, 자비 따위 없다는 거 모르는 게 아닌데,

죽음에 대한 공포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만큼 채민은 지쳐 있었던 것이다.

도플갱어는 망설이지 않고 들고 있던 날카로운 칼을 채민을 향해 휙 내리그었다.

싹뚝-

바람이 갈리는 시원한 느낌과 함께, 채민은 자신의 목도 잘렸다고 생각했다.

이제 곧 목이 떨어져 데굴데굴 굴러갈 거라고, 그리고 약간의 고통, 혹은 상상도 못할 고통의 끝에

평안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목이 떨어지지도, 고통이 느껴지지도 않았다.

이상하게 여긴 채민이 슬며시 눈을 떴을 때, 채민의 바로 앞을 막아선 사람의 등이 보였다.

풀빛과 같은 짙은 녹색 옷을 입은 그의 치렁치렁한 금발l 허리까지 늘어져 있었다.

채민은 자신의 눈앞에서 살랑이는 것이 차가운 은빛 칼날이 아닌, 부드러운 금빛 머리카락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잠시 얼떨떨하게 서 있었다.

언뜻언뜻 보이는 그의 새하얀 피부를 본 채민은 녹색 옷의 그가 여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짙은 갈색의 나무 지팡이로 도플갱어의 칼을 막고 있었는데,

그의 팔목이 얼마나 가녀리던지 채민은 지팡이보다 그의 팔이 먼저 부러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것은 기우였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주문을 외우는 순간, 지팡이에서 눈부시게 밝은 빛이 퍼져 나왔고,

눈을 질끈 감았던 채민이 다시 눈을 떴을 땐, 도플갱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팔을 아래로 내렸다.

아주 길게 보였던 지팡이는 고작해야 30cm 남짓 되는 짤막한 회초리일 뿐이었다.

그게 이상해서 미간을 좁힌 채민은 곧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커다랗고 맑은 눈동자, 곧은 코, 붉고 탐스러운 입술을 가진 그가 돌아서자 채민은 꾸벅 인사를 했다.

"언니.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대답이 없다.

채민은 살짝 눈을 들어 그를 쳐다봤는데, 그의 표정이 묘하게 변해 있었다.

"에… 저…"

"남자입니다."

"헉!"

"전 남자입니다."

불쾌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까 주문을 외우는 목소리가 무척 낮다는 생각은 했지만, 여자 중에도 간혹 남자만큼이나

목소리가 낮은 사람이 있으니, 그런 부류일 거라고 생각했던 채민은

크게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으아아아! 죄송해요,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안절부절못하며 미안해하는 채민의 모습이 우스웠는지, 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괜찮습니다. 그런 오해는 많이 받으니까요. 단지…"

그가 지팡이를 내밀어 그 끝으로 채민의 턱을 살짝 들어올렸다.

"난 살 수 있는데도 죽고 싶어하는 사람은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

"살고 싶어도 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어째서 자신의 주어진 삶을 그토록 하찮게 여기는 건지…"

"하지만… 때로는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 법이잖아요."

"그럼… 왜 그렇게 죽고 싶은 건지, 그 이유를 한 번 들어볼까요?

그 이유가 합당하게 여겨지면, 그 땐 내가 내 힘으로 당신을 죽여주겠습니다."

채민은 말없이 그를 응시했다.

그는 지팡이를 아래로 내리고 몸을 돌렸다.

"우리 집으로 가시지요. 최고급 요젠차를 대접해드리겠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나무로 만든 낡은 오두막처럼 보였다.

대충 자른 나무를 대충 모아 묶어서 만든 오두막은 잘못 건드렸다가는 와르르 무너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고

너무 작아서 두 사람이나 들어갈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하지만 오두막에 들어간 채민은 크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밖에서 봤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넓은 데다가,

무척 견고한 성의 내부와 흡사했기 때문이다.

나무로 지어진 오두막의 내부가 단단한 벽돌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도,

방이 수 십 개는 있을 듯이 넓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었다.

채민이 입을 쩍 벌리고 서 있자, 녹색 옷의 남자가 말했다.

"난 마법사입니다. 이 정도의 마법은 아무 것도 아니죠."

"아… 마법사…"

무엇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세계에 마법사가 있다는 것은 그리 놀랄만한 일이 아니었지만,

채민은 만화나 소설에서만 보던 마법사를 실제로 보게 되었다는 것이 신기했다.

외모는 평범한 사람과 다를 것이 없었다.

여자로 착각할 만큼 예쁘장한 외모이긴 하지만, 가인 역시 남자임에도 불구하고 여자처럼

고운 얼굴을 가지고 있으니 그리 이상할 일은 아니다.

"마법사를 처음 보는 모양이군요."

마법사가 말했다.

"네, 처음 봐요."

"이 세계 사람이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네, 맞아요. 난 이 세계 사람이 아니에요."

"흐음…"

마법사는 미간을 살짝 좁히고 채민을 살펴보더니 안으로 걸어들어 가며 말했다.

"이리 오시지요. 몸이 안 좋아 보이니, 마법으로 약간의 치료를 해드리겠습니다."

마법사는 안쪽에 있는 방들 중의 하나로 채민을 인도했다.

방은 10평 남짓한 크기로, 푹신해 보이는 분홍색 침대가 덩그마니 놓여 있었다.

"편히 누우세요."

"아, 하지만…"

생전 처음 보는 남자 앞에서 침대에 눕는 게 편치 않아서 채민이 당황하자

마법사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치료를 하려고 합니다. 난 백마법을 사용하기 때문에 치료에는 정통하지요."

"백…마법이요?"

"네. 마법은 백마법과 흑마법의 두 가지 종류가 있지요.

무엇을 섬기냐에 따라서 마법의 종류가 달라져요.

백마법은 내 몸이나 일행의 몸을 지키고 상처를 치유하는 마법이 많은 반면,

흑마법은 상대를 저주하거나 공격하는 마법이 주를 이루지요."

친절하게 대해주는 사람의 호의를 계속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침대에 누운 채민은 마법사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걱정… 있으세요?"

"네?"

마법사가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떴다.

"좀… 걱정이 있는 것 같아 보여서요."

"아니, 괜찮습니다. 나보다는 당신이 더 걱정이 많아 보이는군요.

치료를 하면서 이야기를 듣도록 할까요?"

마법사가 손가락을 살짝 퉁기자 아무 것도 없던 침대 옆에 원형의 유리 탁자가 생겼다.

그리고 또 한 번 손가락을 퉁기자 탁자 위에 흰색 자기로 만들어진 예쁜 주전자와 찻잔이 생겼는데,

주전자에서는 예전에 한 번 맡아본 기억이 있는 좋은 향이 흘러나왔다.

"이건… 요젠차?"

"마셔본 적이 있나 보군요. 이 산에서 자라는 요젠차는 특히 좋은 향을 내지요.

치료와 회복에도 많이 도움을 준답니다.

치료가 끝날 때쯤이면 적당한 온도가 될 테니, 그 때 한 잔 들도록 하세요.

그럼 내일쯤 말끔한 기분이 될 겁니다. 죽고 싶다는 생각도 사라질지도 모르지요."

"정말… 감사합니다. 처음 보는 사람인데 이렇게까지 친절하게…"

마법사의 손이 채민의 복부 위에 얹어졌다.

마법 때문인지, 아니면 마법사의 손이 너무 따뜻하기 때문인지, 아니면 마법사의 눈동자가 너무도 다정하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채민은 혼란스럽던 마음이 조금씩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자, 그럼… 이야기 해보세요. 당신이 죽고 싶어하는 이유에 대해서…"

마법사의 태도가 정중하고도 사려가 깊어서, 채민은 자신의 이야기를 편하게 할 수 있었다.

태어났을 때부터 받았던 저주와 그로 인해 자신을 피했던 사람들, 외로움,

그러다가 만나게 된 동료들, 그리고 시작된 여행, 여행하는 동안 겪은 수많은 난관들,

자신의 저주 때문에 생긴 불행들, 감싸주는 일행들, 미안함, 차희의 죽음…

그 모든 것들을 털어놓는 동안, 마법사는 한 번도 끼어들지 않았다.

단지 그 입가에 서글프고도 오묘한 미소가 떠올랐을 뿐이다.

"그래서 그냥… 살고 싶지 않았어요."

채민이 말을 마치자 마법사가 말했다.

"당신의 동료들은 정말 좋은 사람들이군요. 좋은 친구들을 만났네요."

"네, 너무 좋은 친구들이에요. 정말… 감당하기 힘들만큼 좋아요. 그 애들에게 너무 고마워요."

"그렇죠. 고맙겠지요."

"네, 그리고 미안해요."

"그렇다면 하나 물어볼게요."

"……"

"지금 당신이 죽으면, 당신의 일행들은 기뻐할까요?"

뒤통수를 맞은 것 같은 큰 충격에 채민은 숨을 훅 들이마셨다.

치료가 끝난 듯, 마법사는 천천히 손을 떼고 채민을 똑바로 응시했다.

옅은 갈색의 눈동자가 부드럽게 채민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 나는…"

"지금도 죽고 싶나요?"

채민이 인상을 찌푸렸다.

미처 생각 못 했다.

채민이 죽게 되면 다른 일행들이 얼마나 괴로워하고 힘들어할 지에 대해서…

차희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으로도 벅찬 그들에게 또 다른 슬픔을 안겨줄뻔한 것이다.

입술을 잘근 깨물고 생각에 잠긴 채민의 곁에, 마법사는 말없이 앉아 있었다.

"난…"

이윽고 채민이 입을 열었다.

"난 잘 모르겠어요."

"……"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은 거군요."

"네…"

"당신에게 걸린 주술은 너무도 강해서 내가 깨뜨릴 수는 없답니다.

하지만 주술이 닿지 않는 곳에 잠시 보내줄 수는 있어요.

그곳에서 편안히 생각해 보시겠습니까?"

"주술이 닿지 않는 곳…"

"그곳이라면 아무런 걱정 없이 당신의 생각을 정리할 수 있을 겁니다.

마음을 정리하세요. 그리고 선택하세요. 당신이 앞으로 어떻게 해나갈지…"

채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라도 주술의 힘이 없는 곳에 가고 싶었다.

마법사가 손가락을 퉁기자 인형이 하나 생겨났다.

작은 고양이처럼 생긴 동물 인형이었는데, 꼬리가 네 개인 걸로 보아서 고양이는 아닌 것 같다.

마법사는 새까만 인형을 채민의 눈 앞에 내밀었고,

나직한 목소리로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마법사의 주위에 물감을 풀어놓은 듯 녹색의 빛이 번졌고,

그 빛이 채민을 살며시 감싸자 채민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채민이 사라지자 마법사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인형을 응시했다.

인형은 처음과 다를 게 없었다.

단 하나 다른 게 있다면, 그 안에 채민이 들어가 있다는 점이었다.

마법사는 서글픈 미소를 지으며 인형을 품에 넣고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생각하세요. 그리고 결정하세요. 그가 오기 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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