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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준은 멍하니 탁자 앞에 서 있었다.
우준의 손에 들려진 흰 종이를 낚아챈 것은 리현이었다.
고르게 쓰여진 채민의 글씨.
리현은 인상을 찌푸렸다.
"이게…"
리현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이게 어떻게 된 거얏!"
뒤늦게 채민의 방으로 들어온 가인과 해윤이 리현의 어깨 너머로 채민이 남긴 쪽지를 읽었다.
강전은 손끝에서 일어나는 전기 때문에 종이가 타버릴까 걱정이 돼,
손도 뻗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굴렀다.
"아, 왜? 뭐라고 써져 있는데?"
"음… 요약하자면… 채민이가 자기 먼저 떠난다고, 나중에 보자는데?
자기에게 쓰인 불행의 저주가 다 풀린 후에 만났으면 좋겠대."
"아, 빌어먹을! 설마 불이 나서 차희가 죽은 걸 자기 탓이라고 생각한 거 아냐?"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지. 채민이는 무슨 일만 생기면 다 자기 탓이라고 생각하잖아."
"도대체 왜 그러는 거냐구! 뭐가 채민이 탓인데!"
"그걸 나한테 묻는다고 별 수 있냐?"
해윤이 어깨를 으쓱했다.
"빨리 따라가 봐야 하는 거 아냐?"
"어디로 갔을 줄 알고?"
"우준아!"
일행이 말하는 동안, 우준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아직 몸이 전부 회복된 것도 아닌데 혼자서 위험한 곳으로 갔을 채민을 생각하니
속에서 끓어오르는 자신을 향한 분노를 잠재우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불행이 남에게 끼치는 영향에 민감한 채민이
이번 사건도 자신의 탓으로 돌리리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인데,
그것에 신경을 쓰지 못한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이다.
채민이 죽는다면…
그런 건 상상하고 싶지도 않은, 끔찍한 일이었다.
"우준아. 우리 더 늦기 전에 채민이를 따라가 봐야 돼."
가인이 우준의 어깨를 살짝 건드렸다가, 우준의 표정을 보고 놀라서 손을 떼었다.
형언할 수 없는 분노로 불타는 우준의 검은 눈동자는
닿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휘어잡아 없앨 듯이 뜨거웠기 때문이다.
지금껏 우준이 이토록 분노에 차오른 모습을 본 적은 없었기에 가인은 무척이나 당황했다.
우준이 맞나 싶어 살짝 눈을 감았다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우준은 평소와 다름 없는 멍한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하지만 조금 전 보았던,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힘든 그 강한 분노의 눈빛은
뇌리에 콱 박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나가자. 채민이를 찾아야 돼."
일행은 사람들에게 서둘러 인사를 했다.
마을 사람들은 우준 일행이 떠나는 것을 기뻐하는 듯 했다.
평화롭던 마을이었는데 우준 일행이 들어오면서부터 소란스러워졌기 때문이다.
모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우준 일행이 어떻게 돌변할지 몰라 겉으로 내색하지 않으며
일행을 전송했다.
우준들이 떠나는 것을 진심으로 아쉬워하는 것은 의사뿐이었다.
의사는 채민이 아픈 몸을 이끌고 먼저 출발했다는 것을 걱정하며 어쩔 줄을 몰라했지만
리현은 그런 의사에게 미소를 지으며 잘 있으라고 전한 후에 우준의 뒤를 따랐다.
"일단 채민이는 불행의 저주가 사라진 다음에 만나자고 했으니까
아마도 신을 향해서 가고 있을 거야."
"그렇다면… 내가 한 번 찾아볼까?"
비인이 제안했다.
"그래, 그게 좋겠다. 채민이가 어디쯤 갔는지 알아보고 나서 출발하자. 그러려면…"
일행의 시선이 전부 브리엔을 향하자, 브리엔은 어깨를 으쓱했다.
"좋아, 멀리 떨어져 있어주지. 찾게 되면 먼저 출발해. 난 알아서 니들을 따라갈 테니."
"응, 미안해, 브리엔."
비인의 말에 브리엔이 고개를 갸웃했다.
"미안? 뭐가?"
"널… 떨어져 있게 해서…"
"하?"
브리엔이 조소를 흘렸다.
"뭐야? 니들은 나한테 짐덩어리인 거 몰라? 니들 따위, 내가 가는 길에 전혀 도움도 안 된다구."
날을 세워 말하는 브리엔을 향해, 비인은 그냥 빙그레 미소만 지었고
그런 비인이 마음에 안 드는 브리엔은
인상을 팍 찌푸리고 신경질적으로 돌아서서 일행으로부터 먼곳으로 걸어갔다.
일행이 보이지 않게 되자, 브리엔은 박쥐로 변해 멀리 날아올랐고,
비인은 유체이탈을 할 수 있었다.
잠이라도 든 듯이 나무에 기대어 앉아있던 비인이 눈을 떴다.
"찾았어?"
"응,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있어."
서둘러 일어나던 비인이 비틀거리며 넘어질 뻔하자, 강전이 얼른 비인을 부축했다.
"그런데… 좀 위험한 것 같아. 쓰러져 있더라. 얼른 출발하자!"
"응, 네가 길 안내를 해."
그래서 드물게도 비인이 앞장을 서게 되었다.
우준은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일행의 맨 뒤를 따라 걸었다.
채민이 있는 곳에 도착하기 전, 어디선가 나타난 브리엔이 일행과 합류했다.
그들은 대화도 나누지 않고 달렸다.
복부에 큰 상처를 입은 데다가 독에 중독이 되어서 죽을 뻔한 채민이 쓰러져 있다는 말이
가볍게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채민이 있는 곳에 당도한 것은 1시간쯤 지나서였다.
비인의 말대로 채민은 숲에 있는 작은 오솔길에 쓰러져 있었다.
천천히 움직이는 가슴은 채민이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그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채민의 옆으로 다가가 채민을 불렀다.
"채민아! 괜찮은 거야?"
우준이 무릎을 꿇고 채민의 팔에 손을 대다가 흠칫하며 손을 뗐다.
그것을 본 사람은 브리엔과 리현뿐이었다.
둘 다 이상하게 생각하기도 전에 우준은 처음과 같은 표정으로 돌아가 채민의 팔에 살며시 손을 얹었다.
그리고 다정한 목소리로 채민에게 말을 걸었다.
"괜찮은 거냐?"
감겨 있던 채민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며 서서히 올라갔다.
검은 눈동자에 빛이 담기고, 그 안에 우준이 생겨났다.
채민이 미소를 지었다.
"우준아…"
"괜찮은 거야?"
"으응…"
"왜 여기에 쓰러져 있어?"
"잘… 모르겠어… 아까 도플갱어를 만났는데… 녹색 옷을 입은 마법사가 날 구해줬어.
그리고는… 갑자기 주위가 환해지는가 싶더니… 나, 정신을 잃었나 봐."
"아아…"
우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걸을 수 있겠어?"
"으응… 괜찮을 것 같아."
"그래, 그럼 조심해서 일어나."
우준이 채민을 부축해 일으켰다.
"야, 현채민! 너 자꾸 이런 식으로 나올래? 앙? 왜 자꾸 도망치는 건데?
나의 뭐가 마음에 안 들어? 솔직히 나, 잘생겼잖아!"
해윤이 버럭 외치자 가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대체 뭐라고 지껄이는 건지…"
"뭐야, 차가인. 또 질투냐? 걱정마라. 아무리 채민이가 날 좋아한다고 해도,
내 마음에는 너뿐이니까."
"그래, 그래. 그거 참 징그러운 일이구나."
가인은 다가오는 해윤의 얼굴을 멀찌감치 밀어내며 채민을 쳐다봤다.
"채민아. 앞으로는 이러지 마. 네가 우리를 믿지 않는 것 같아서, 정말 속상해."
채민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가인아. 미안해. 내가 너무 경솔하게 생각했나 봐."
"그래도 빨리 찾을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못 만나는 건가 싶어서 걱정했는데…
너 다친 데는 괜찮아? 걸을 수 있겠어?"
강전의 질문에 채민이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웃었다.
"응, 괜찮아. 거의 다 회복됐는걸. 그리고 우리, 갈 길이 멀잖아. 서두르자."
모두 채민이 밝아 보여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차희의 죽음이 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좌절하고 있을 줄 알았기 때문이다.
채민이 재촉했기 때문에 그들은 재회의 기쁨을 누릴 새도 없이 부랴부랴 서둘러 길을 떠났다.
채민이 이토록 적극적으로 여행에 참여한다는 사실에 그들은 기분이 좋았다.
갈림길에 도착했을 때, 채민은 오른쪽을 가리켰다.
"이 길. 이쪽 길로 가야하는 것 같아."
"그래? 내가 알기로는 이 길인데?"
브리엔이 왼쪽 길을 가리키자 채민이 방긋 웃었다.
싱그러운 미소였다.
"녹색 옷을 입은 마법사가 사라지기 전에 길을 가르쳐줬어. 오른쪽 길이 지름길이라고…"
"아아, 그래. 이곳에 살면서 지름길이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군."
모두 브리엔이 묘하게 예민해져 있다고 생각하며 브리엔의 눈치를 살폈지만,
우준은 멍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오른쪽 길로 가자."
"흐음…"
브리엔은 불만인 듯 인상을 찌푸렸지만 별 말 없이 우준과 채민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그 때, 녹색 마법사의 오두막 나무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