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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은 일행을 오두막 안으로 맞아들였다.
오두막 안에는 어린 아이가 살았던 흔적이 많이 있었다.
자그마한 방구석에 놓인 어린아이용 작은 침대는 허름한 내부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고급이었고,
인형이라던가 작은 목마 같은 것들 역시 동떨어진 고급품이었다.
깨끗하게 손질된 아이의 물건들만 보아도 노인이 손녀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 수 있었다.
집이 좁았기에 이미 다 자란 그들이 전부 들어가 앉으려니 무척 버거웠다.
하지만 불평을 한 분위기가 아닌지라, 다들 입을 꾹 다물고는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노인이 이야기한 바에 따르면, 이 지역에는 흉폭한 소인(小人)이 살고 있는데,
때때로 마을에 와서 어린 여자아이를 잡아가곤 한단다.
소문에 따르면 데려간 아이를 18살까지 키웠다가 제물로 바치는데,
소인이 사는 곳을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아이를 구해낼 방법이 없었다.
게다가 소인들에 대한 정보도 굉장히 적었다.
언젠가 숲에 들어갔던 사람이 20cm정도의 작은 소인을 발견했다는 말도 있고,
무시무시한 마법을 사용하는 소인에게 처참하게 당한 용병들이 있다는 말도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소문일 뿐, 진위 여부는 판단하기 어려웠다.
"그렇다면 소인이 어디에 사는지도 전혀 모른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렇다네. 전혀 알지 못하니 찾을 길이 없지."
"아무튼 알겠습니다. 할아버지의 손녀를 구해오도록 하겠습니다.
이름이… 레미얼이라고 하셨지요?"
"그래, 레미얼."
"생김새는?"
"그 아이가 6살 때 잡혀갔으니 지금은 8살이네. 아마도 많이 컸겠지만 원래 생김새는 바뀌지 않았겠지.
짙은 갈색의 머리카락이 어깨까지 내려오고, 하얀 피부와 짙은 녹색 눈동자라네."
"알겠습니다."
우준이 몸을 일으켰다.
한 시가 급하다.
얼른 강을 건너서 채민을 데리고 여행을 끝내야만 한다.
모르긴 몰라도 이 세계로 들어온지 벌써 6개월 가량이 흘렀다.
앞으로 얼마나 더 오랜 여행을 해야할지 확실하지 않기에 우준은 마음이 급해졌다.
1년 안에 끝내야만 한다는 부담감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구해오겠습니다. 약속하지요."
노인이 기쁨과 걱정이 뒤섞인 표정으로 우준의 손을 꼭 잡았다.
쭈글쭈글하게 주름이 생긴 노인의 손은 무척 따뜻했기에,
우준은 문득 자신의 할아버지가 떠올랐다.
그리고 이 세계에 와서 처음으로 얼른 집에 돌아가 가족들과 함께 하고 싶다는 간절함이 생겼다.
"조심하게, 부디…"
"네, 할아버지. 다녀오겠습니다."
"이 동네 사는 사람들도 모른다는 소인의 소굴을 어떻게 찾게?"
가인이 물었다.
"브리엔이 알고 있어."
우준이 답했다.
모두 브리엔을 쳐다봤다.
브리엔이 어깨를 으쓱하며 물었다.
"내가 알고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지?"
"소인의 이야기가 나올 때부터 넌 계속 알만 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거든."
"알만 하다는 표정이라…"
브리엔은 우준이 자신의 표정을 읽을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원래 표정 변화도 별로 없을뿐더러, 설령 변화가 있다고 해도 인간은 눈치채지 못했다.
"흥. 그래서 내가 그놈들의 소굴을 니들에게 가르쳐주기라도 할 거라 믿는 건가?"
"응. 채민이 구해야지."
우준이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대답하는 바람에 브리엔은 할 말을 잃었다.
그래서 인상을 찌푸렸다가 우준을 제치고 앞으로 나갔다.
숲에 생긴 길로 10분쯤 걸어가자 두 방향의 갈림길이 나왔는데, 브리엔은 그 어느쪽으로도 가지 않고
계속해서 직진했다.
아무도 그런 브리엔에게 토를 달지 않았다.
그렇게 직진하자 길은 점점 불편해지고 나무와 덤불이 무성해서 앞으로 나아가기 힘들 정도가 되었다.
길이 없는 숲으로 10분쯤 더 갔을 때, 브리엔이 걸음을 멈췄다.
"여기다."
브리엔의 앞에는 어마어마하게 큰 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다.
척 보기에도 수 백 년은 살았을 듯한 그 나무는 양쪽으로 자신의 수많은 두꺼운 팔을 넓게 뻗어
그 아래에 태양이 비치지 않도록 빛을 가리웠다.
약간 오른쪽으로 기울어진 상태로 자란 나무의 둘레는
우준 일행이 전부 둘러서서 팔을 뻗어도 손을 잡을 수 없을 정도로 두꺼웠고,
밑둥에는 짙은 색의 이끼와 황토색의 버섯이 잔뜩 있었다.
"여기? 여기 어디? 이 나무 위에 살아?"
강전이 조급하게 고개를 들어 나뭇가지를 확인하려 했지만
워낙에 높은 데다가 빛이 들어오지 않아서 어둑한 가지 사이로 뭔가 보일 리 없었다.
인상을 찌푸리고 열심히 확인하는 강전을 내버려둔 브리엔이
나무 가까이로 다가가 밑부분을 발로 퍽퍽 찼다.
"내 기억이 맞다면 이 아래에 구멍이 있을 거야."
과연 그랬다.
이끼와 버섯이 벗겨지면서 자그마한 어린 아이가 들어갈 수 있을 크기의 구멍이 생겨난 것이다.
구멍은 검은 아가리를 벌리고 일행을 집어삼키고 싶다는 듯 진한 악의를 내뿜었다.
하지만 우준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가까이로 다가가 쭈그려 앉았다.
그리고 구멍에 얼굴을 불쑥 들이밀었다.
"어이! 거기 누구 있냐?"
구멍 안으로 우준의 목소리가 쑤욱 빨려들어갔다.
이제는 우준의 생뚱 맞은 행동에 반응하기도 지친 일행은 그저 멀거니 서서
위로 불쑥 올라온 우준의 엉덩이만 지켜보고 있었다.
우준이 몸을 일으켰다.
"확실히 뚫려있군. 그리 깊은 것 같지는 않아."
"응? 그걸 어떻게 알아?"
"메아리가 없었거든. 소리가 흡수되는 걸로 봐서도 저쪽도 이쪽처럼 덤불 같은 걸로 대충 막아놓은 거겠지."
"아! 그렇구나."
"그런에 우리가 들어가기엔 구멍이 좀 작지 않냐?"
몸이 가느다란 리현조차도 빠져나갈 수 없을 정도로 작은 크기의 구멍이었다.
딱 대여섯 살의 어린 아이들 정도만 들어갈 수 있는 정도의 크기였다.
갑자기 우준이 스웨인을 휙 빼들었다.
"뭐야? 이젠 우릴 죽일 셈이냐? 우리가 귀찮아진 거야?"
강전이 장난스레 말했다.
"칼로 구멍을 넓히자."
"칼로? 야, 야. 네 칼이 슬퍼하겠다."
"아니, 괜찮아. 이건 결국 사람을 구하는 일이니까."
우준은 망설이지 않고 흙에 칼을 꽂았다.
스웨인은 과연 명검이었던지라 주위에 산재해있는 커다란 돌들도 어렵지 않게 베어서
땅을 파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우준이 수차례 팔을 움직이자 구멍이 아까보다 넓어졌다.
흙을 파는 것뿐만 아니라 파낸 흙을 옆으로 치워야했으므로 구멍을 넓히는 시간이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모두 돕겠다고 무기를 빼들고 달려들었지만 상황은 비슷했다.
흙더미를 옆으로 빼내야 했기 때문에 진행이 늦춰졌던 것이다.
가만히 서서 그들을 지켜보던 브리엔이 우준의 어깨를 잡았다.
"비켜봐."
우준이 물러섰다.
일행은 브리엔이 뭘 하려나 싶어서 움직이던 손을 멈추고 브리엔을 쳐다봤다.
"니들도 물러서."
브리엔의 어조가 강경했기에 그들은 자기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잠시 구멍을 내려다보던 브리엔은 손바닥을 쫙 펼치고 구멍을 향해 손을 내밀었고,
브리엔의 손으로부터 환한 빛이 번쩍하고 일어났다가 사라졌다.
그들은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진지 몰라 브리엔을 멀뚱히 쳐다보고 있었다.
브리엔은 양미간을 모으며 말했다.
"됐다. 이제 들어가자."
무슨 말인가 하고 구멍을 쳐다본 그들은 자신들이 한 시간 이상 낑낑대도 제대로 파내지 못했던 구멍이
충분한 크기로 넓어진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뭐야, 뭐야? 브리엔. 이거 네가 한 거야?"
"이야! 너 엄청 대단한 놈이었구나?"
"야, 이런 실력이 있었으면 진작 좀 도와주지 그랬냐."
일행이 기뻐하며 한 마디씩 했다.
브리엔은 인상을 찌푸린 채로 자신이 먼저 구멍으로 들어갔다.
사실 도와줄 생각은 없었다.
원래 브리엔이 맡은 역할은 그들은 신이 사는 곳까지 데려다주는 것일 뿐,
그들의 안전을 보장해야할 책임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상한 것은, 그들을 도와줄 때마다 그들이 신나서 떠들어대며 브리엔을 추켜세우는 것을 보는 게
기분 나쁘지 않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기분이 좋아서 같이 웃고 떠들고 싶은 감정을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평소보다 더 인상을 찌푸리곤 했다.
약간 경사가 진 구멍 안을 미끄러지듯 걸어 들어가며 우준이 말했다.
"고맙다, 브리엔."
그래, 그리고 이거다.
우준이 낮은 목소리로 고맙다고 하는 말을 듣는 게 기분 좋았다.
마치 세상을 얻은 듯한 기분이 들어서 그 말을 한 번 더 듣기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안 돼.'
브리엔은 생각했다.
'난 원하는 게 있잖아. 잠깐의 감정에 휘둘려서 이들에게 섞이면, 난 또 다시 영원한 외로움에 빠지게 될 거야.
이들의 인생은 한없이 짧고 나의 인생은 끝이 보이지 않으니까…
그러니까 이 짧은 행복에 기대어 안일한 마음을 가지면 안 돼.'
우준의 말대로 구멍은 그리 깊지 않았고 입구 부분은 덩굴과 흙으로 막혀 있었다.
덩굴을 치우고 밖으로 나온 그들은 그곳의 모습에 탄성을 지르고 말았다.
그들이 사는 세계를 축소해놓은 듯한, 아기자기한 동화의 나라가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고작해야 그들의 무릎을 간신히 넘는 크기의 나무들로 이루어진 숲의 가운데 부분에
나무가 자라지 않은 텅 빈 공간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저쪽이 마을인가 보다."
소인들에게는 울창하고 넓은 숲이겠지만 그들에게는 조금 많은 잡초가 나있는 앞마당 정도의 길이었다.
그들이 조금 걸었을 때, 소인의 마을이 펼쳐졌다.
인형의 집 같은 작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마을은 우준들이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작아서
그들은 차마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우와. 진짜 귀엽다."
가인의 말에 해윤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네가 더 귀여워."
"그런 말 좀 하지 말랬지!"
가인이 얼굴을 붉히며 해윤을 밀어냈다.
우준들은 그리 큰 목소리로 떠든 것이 아니었지만 소인들에게는 상당히 큰 목소리였기 때문에
집 안에 있던 소인들이 무슨 소란인가 싶어서 창문으로 머리를 내밀었다가
각자 뭐라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그들은 소인들이 뭐라고 떠드는지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우준 일행은 일단 무기를 꺼내들기는 했지만, 자신들의 무릎에도 오지 않는 자그마한 소인들을
공격해도 될지 몰라 머뭇거렸다.
군복을 갖춰 입은 소인들이 제각각 무기를 들고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우준들에게는 몇 걸음 되지도 않는 거리를, 그들은 말을 타고 열심히 달려오고 있었다.
"저걸 어째야 하냐?"
해윤이 머리를 긁적였다.
"인형 같아."
리현이 중얼거렸다.
"차마 공격할 수가 없는데? 너무 작잖아."
강전이 칼을 땅바닥에 푹 꽂으며 말했다.
"그래도 어쨌든 레미얼이라는 애는 찾아야하지 않겠어?"
"그 애라면… 저쪽에 있을 것 같은데?"
비인이 손으로 가리킨 곳은 소인의 마을을 지나서 있는 커다란 산이었다.
자연적으로 생긴 산이라기보다는 인공적으로 만들어낸 느낌이 물씬 풍겼는데,
사람 한 명이 들어가서 살기에 딱 좋은 크기인 데다가
한 사람이 들어갈 크기의 동굴 입구도 마련되어 있었다.
"응, 그럴 것 같네. 그럼 얘들은 그냥 냅두고 우선 저기로 가는 게 좋겠다. 어때, 우준아?"
강전이 물었다.
우준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먼저 걸음을 옮겼다.
소인의 마을은 집들이 워낙 옹기종기 모여있었기 때문에 마을을 가로질러 가다가는
집을 전부 부수게 될 것 같아서, 마을의 둘레로 빙 돌아서 걸어갔다.
그래봐야 얼마 안 되는 거리였지만…
우준 일행이 산으로 향한다는 것을 눈치챈 소인들은 아까보다 더 큰소리로 외치며
우준 일행을 따라왔지만 그들의 속도를 따라올 수는 없었다.
소인들이 날린 작은 화살 몇 개만 일행의 신발과 바짓단에 박혔을 뿐이다.
안쓰러울 정도로 고통이 없어서 그들은 조금 씁쓸한 기분이 되었다.
"쟤들이 납치한 게 맞긴 맞아? 너무 약하잖아."
"굉장한 마법이라도 사용할 줄 알았는데…"
"아니면 엄청 흉폭한 함정을 만들어놨거나…"
"정말 전의 상실이다, 전의 상실…"
다들 한 마디씩 중얼거리며 산으로 향했다.
동굴 주위를 지키는 소인들이 몇 명 있을 줄 알았는데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전부 동굴 안으로 들어갈까 하다가 그러기에는 동굴이 비좁아 보여서
여자인 리현과 몸이 호리호리한 가인, 두 사람만 들어가기로 했다.
"위험하면 소리라도 질러."
해윤은 가인을 떨어뜨려야 하는 것이 못내 안심이 안 되는 듯, 가인의 양어깨를 잡고 당부했다.
"아, 내가 들어가야 하는 건데…"
"걱정하지 마. 너보다 내가 더 강하니까."
리현이 당당하게 말하고 먼저 동굴 안으로 들어갔고, 가인이 해윤을 얼른 떨쳐버리고 그 뒤를 따랐다.
사실 밖에 남은 일행은 약간 걱정을 하고 있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그럴 듯해 보이는 함정이라면 어떻게 해야할까.
어쩌면 소인들이 굉장히 약아서 자기들이 굉장히 약한 것처럼 보이려고 한 것이고,
이 산에 레미얼을 감추어둔 것처럼 보이려고만 한 것이라면?
이 안에 있는 것이 레미얼이 아니라 온갖 괴물이나 마법으로 무장한 함정이라면?
하지만 가인과 리현은 맥이 빠질 정도로 금세 잠든 레미얼을 품에 안고 나타났다.
싸움의 흔적은 전혀 없었다.
"뭐야, 이게? 너무 쉬운 거 아냐?"
강전이 중얼거리며 칼을 허리에 꽂았을 때, 소인의 군대가 도착했다.
소인들은 우준 일행을 향해 뭐라고 외치며 화살을 쏘아댔지만 그것들은 할아버지의 오두막에 설치된
화살보다 더 위력이 약해서, 일행의 옷도 뚫지 못하고 바닥에 픽픽 떨어졌다.
보다 못한 비인이 허리를 굽혀 맨 앞에 나와있는, 가장 화려한 복장의 소인 하나를 집어들었다.
소인은 버둥대며 뭐라고 악을 써댔다.
"뭐라고요?"
"제발! 제발 그 분을 데려가지 마십시오!"
소인이 외쳤다.
"데려가면 안 됩니다!"
"그분이라는 건… 혹시 이 애를 말하는 거예요?"
어쨌든 겉모습은 우준 일행보다 나이가 많았기에 비인은 정중하게 존댓말을 사용했다.
"네. 그 분은 우리 소인들의 목숨을 구하실 분. 그 분이 없으면 우리는 멸망합니다!"
소인이 외쳤다.
모두 소인의 말을 잘 알아듣기 위해 비인의 주위로 모였다.
군인들은 자신의 대장이 잡히자 당황하여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멸망하다니… 그게 무슨 말이죠?"
"그건…"
소인이 말하기 곤란한 듯 잠시 머뭇거리더니 자신의 군대와 마을을 한 번 둘러본 후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고대 문서에 따르면 거대한 괴물이 이 땅의 깊숙한 곳에 잠들어 있는데 10년에 한 번씩 깨어나
이 땅에 재난을 가지고 온다고 합니다. 괴물의 난동에 몇 번이나 죽임을 당할 뻔한 우리의 선조들은
괴물의 난동을 잠재울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을 생각해 냈습니다. 그게 바로…"
"인간의 아이를 바치는 것…이란 말이지?"
옆에 있던 강전이 인상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우, 우리들은… 우리들은 정말 괴로웠지만… 그래도 우리를 위해 희생될 고귀한 분을 위하여
10년 간 그 분을 편하게 모시고 가장 귀하게 대우하여 드립니다."
"어쨌든 10년 후엔 죽인다는 거네?"
"그, 그게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니? 죽이는 거 맞잖아? 니들의 손으로 죽이지 않는다 뿐이지.
니들이 데리고 오지 않았으면 자기 할아버지랑 잘 살았을 이 애가,
니들이 데려왔기 때문에 여기서 괴물의 손에 죽는 거잖아. 안 그래?"
"하, 하, 하지만…"
강전의 목소리가 눈에 띄게 험악해진 탓에 소인은 벌벌 떨며 말을 이었다.
"10년에 인간 한 명입니다. 하지만 인간을 바치지 않으면 우리 일족은 멸망합니다.
문서에 따르면 수 백 년 전, 인간의 아이를 불쌍히 여긴 마음 여린 족장이 아이를 풀어주었고,
그 결과 괴물의 분노를 사서 마을과 땅이 짓밟혀 모두가 죽임을 당했다고 합니다.
운 좋게 살아남은 몇 명의 후손이 온힘을 다해 땅을 일궈 겨우 다시 이 정도까지 일으켜 세운 겁니다."
"니들에게는 고작해야 인간 한 명일 수 있어도, 한 노인에게는 삶의 전부이고,
한 아이에게는 그 아이의 인생이 걸린 문제야. 그걸 그렇게 쉽게 말해?"
강전이 버럭 소리를 쳤다.
사실 그렇게 큰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소인들의 귀에는 쩌렁쩌렁 울리는 굉음이었다.
소인은 견디기 힘들었는지 두 손으로 귀를 꽉 틀어막았다.
"진정해. 얘 죽겠다."
리현이 강전의 어깨를 툭툭 쳤다.
강전의 몸에서는 전기가 빠직빠직 일어나고 있었다.
가인의 품에 안겨서 세상 모르고 자고 있는 레미얼의 모습이 너무도 안쓰러웠기 때문이다.
어린 나이에 자신의 할아버지와 떨어져서 지내다가 10년 후에 죽임을 당할 운명이라니…
지금껏 소인들에게 잡혀온 아이들이 전부 그런 운명을 맞이했을 것이지 않은가.
"마을을… 마을을 위한 선택이었습니다. 어찌… 우리라고 마음이 편했겠습니까?"
소인 대장의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거짓 눈물은 아닌 듯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소인은 원래 인정이 많고 마음이 여린 종족으로 자연을 사랑하며 평화를 지키고 살아왔다.
아무리 자신들과 다른 종족이라지만 순수한 어린 아이를 데리고 와서 그 애와 어울리다 보면
어린 아이에게 정이 들게 마련.
그들은 10년에 한 번씩 어린 자식을 괴물에게 보내는 부모의 심정을 경험해 왔던 것이다.
리현은 브리엔이 옆에 있어서 소인의 마음을 읽을 수는 없었지만
소인이 느끼고 있는 안타까움과 슬픔, 걱정과 공포의 감정을 조금은 느낄 수 있었다.
"10년에 한 번씩 제물을 보내는 곳은 어디지?"
가만히 있던 우준이 물었다.
소인은 훌쩍거리며 동굴 입구를 가리켰다.
"그 날 밤이 되면, 우리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집에 틀어박혀 있습니다.
늦은 밤 달이 뜨면 땅 아래가 울리고 무언가가 동굴로 향하는 것이 느껴집니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지만 우리의 귀에는 비명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아서
귀를 꽉 틀어막고 숨을 죽입니다.
그리고 아침이 밝아오면 우리들은 모두 일어나 다함께 동굴로 향합니다."
"그러면?"
"그러면 그곳엔… 더 이상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를 반가이 맞아주던 예쁜 그분은… 더 이상 없습니다."
"그래. 대충 알겠군."
우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일행을 둘러봤다.
"어쨌든 우리가 기분 좋게 돌아가려면 한 가지 일을 더 해야할 것 같다. 괜찮겠어?"
우준의 질문에 강전이 피식 웃었다.
"지금까지 어린 아이를 몇 명이나 납치해서 죽인 이런 놈들, 가만히 놔두고 싶지 않지만
이대로 돌아간다면 또 다시 같은 일이 반복되겠지. 하자."
"응, 별의 별 일을 다 겪었는데, 이쯤이야."
비인은 손바닥에 올려놓았던 소인을 조심스레 땅에 내려주었다.
소인은 죽지 않았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 듯, 발로 땅을 몇 번 차보더니 얼른 자신들의 무리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들은 더 이상 우준 일행을 공격하지 않았다.
공격해봐야 별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리현이 살짝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우리가 그 괴물을 처치해줄게. 그러니까 다시는 인간의 아이를 납치하지 마. 알겠지?"
소인들은 무척 황망해하며 굽신굽신 인사를 했다.
자신들은 어쩌지 못한 괴물이지만 인간들 몇 명이 힘을 합친다면 어떻게든 되리라는 희망이 생겼던 것이다.
게다가 우준 일행은 소인들이 지금까지 봐온 사람들이랑은 달랐다.
우준 일행은 소인들에게 레미얼을 잘 부탁한다는 당부를 하고는 동굴 안으로 향했다.